늙은 창녀의 노래 - 참을 수 없는 구토증에 대하여

 

 

  90년대 중반쯤, 그러니까 내가 대학에 입학해서 얼마 안 된 그 때, 대학가에선 한 연극 한편이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양희경이 혼자 나와서 독백으로 연극을 하는 모노드라마인데, 엄청나게 감동적이고 짠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원래 연극 관람 같은 것은 팔자에 없던 탓에, 나는 원작 소설로 된 '늙은 창녀의 노래'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원작자인 송기원에 대해 그 자신의 표현대로 참을 수 없는 욕지기를 느끼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은 도리어, 송기원이란 사람에 대한 끌림의 다른 표현이었는지, 나는 그 후로도 내 마음 속에서 '늙은 창녀의 노래'를 쉬 지우지 못했고, 그 소설과 함께 거의 동시에 출간된 송기원의 '마음속 붉은 꽃잎'이란 시집을 연방 입안으로 되뇌게까지 되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그것이 나의 정직성에 대한 문제와 함께 흐드러지는 꽃잎처럼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기에, 이쯤에서 늙은 창녀로 대변되는 그의 고백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한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10년이란 세월동안 창녀촌을 떠돌며 방황하던 한 남자가 어느 날 우연히, 목포 뒷골목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새울 늙은 창녀를 찾게 된다. 그리고 늙은 창녀와 마주하게 되면서, 소설은 늙은 창녀의 이제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애착과 회한에 대해, 그녀의 목소리만을 통해 일방적으로 독백을 시작한다.

 

 

 '나이 마흔이 넘응께 이런 징헌 디도 정이 들어라우. 열여덟살짜리 처녀가 남자가 뭔지도 모르고 들어와 오메, 이십년이 넘었구만이라우. 꼭 돈 뗌시 그란달 것도 없이 손님들이 모다 남 같지 않아서 안즉까장 여그를 못 떠나라우. 썩은 몸뚱어리도 좋다고 탐허는 손님들이 인자는 참마로 살붙이 같어라우.'

 

 

  이십 년 동안 창녀 생활을 했으면, 흔히 생각하기를, 닳고 닳은 회한뿐이거나, 삶에 찌든 독기뿐일 것이라고 쉬 단정하기 쉽겠지만, 어이된 게 이 순박한 아짐씨 전혀, 그런 것에 물들지 않은 채, 자신의 모진 삶 가운데서도 무언가 의미를 발견해 낸 모양이다. 그러하기에 비록 많이 배웠지만 10년 동안의 방황에, 허기로 가득 찬 손님인 남자를 다독이며, 위로해 주기위해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들을 천천히 풀어내기 시작한다.

 

 

  '열여덟 꿈꾸는 나이로, 보리밭 이랑에 앉아 나물을 캤어라우. 보리밭이나 나물만 어디 푸르렀간디요. 가난하지만 때묻지 않은 제 웃음도 푸르게 눈부셨지라. 아직 누군한테도 뵌 적 없는 젖가슴은 이랑, 이랑을 메울 듯이 부픈 것이 터질것만 같았서라우. 그래서 손님모양 맘이 허해서 떠도는 사람을 보먼 한잔 술에 스무 해 전 내 열여덟을 담아주고 싶어라우. 차갑게 식어뿐 젖가심 저 깊이 그때의 보리밭 이랑에서, 처음 가심을 열어 손님모냥 허한 맘을 채와주고 싶어라우.'

 

 

  그렇다고 그녀에게 회한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열아홉의 나이로 멋도 모르고 서울로 상경하려다, 중간에 한 남자에게 사기를 당해 목포로 끌려가, 강제로 창녀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천성이 워낙 순박했던 그녀는 나중에 자기에게 사기를 쳐, 자신을 창녀로 만든 그 남자마저 측은히 여기고 사랑하게 된다. 심지어 그 이유로 잠시 창녀 생활을 접고서, 그 남자와 함께 살게까지 된다. 그렇지만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다시 그 남자에게서 버림받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아이만 낳으면 된다고 생각한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고서, 아이 하나에 자신의 모든 존재가치를 건다. 그렇지만 무슨 놈의 팔자인지, 그만 안타깝게도 아이는 죽은 채로 태어난다. 이에 그녀는 크게 절망하여 한 동안은 실성기까지 나타내보이게 되지만, 결국은 그것마저 체념하게 된다. 그리고 이젠 누구도 잘 찾지 않는 늙은 창녀로써의 삶을 순응하면서, 살아오고 있던 것이다.

 

 

 '정을 주는 일이 인자는 무섭들 않어라우. 지아비도 자석도 없이 몸 폴아 살어온지 벌써 스무 해! 한번도 맘속 옷고름 푼 적 없이 숱한 밤과 숱한 사나들만 먼 강물모냥 흘러왔다 흘러가고 몰라붙는 개울창의 모랫바닥으로 혼자 누워 있제만 정을 주는 일이 인자는 무섭들 않어라우. 사는 일이 추와서 떠는 손님을 만나면 썩은 몸뚱어리 쩌 깊숙이 살어오는 온기... 끝끝내 맘속 옷고름 풀게 함시롱 몰라붙는 모랫바닥을 적시는 흥건한 온기...'

 

 

  아니, 심지어 그녀는 늙은 창녀로써의 삶의 순응을 넘어서,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창녀생활을 통해 몸으로 드리는 기도와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몸뚱어리도 인자는 어떤 의미가 되고잡어라우. 영혼이 아니고 바로 썩은 몸뚱어리 말이여라우. 누구를 사랑한다등가 사랑을 받는다등가 그런 의미가 아니고만이라우. 스스로 한번도 아께본 적이 없는 몸뚱어리제만은, 시방 왜 이리도 소중해진다요? 숨가쁜 어떤 골목에서는 썩은 몸뚱어리마자 없어서, 갈증 땀시 죽어가는 사나가 있을 것만 같어라우.'

 

 

  이제 10년 동안을 방황을 한 그녀의 손님인 남자는 그녀의 이 의미를 향한 몸짓을 통해 하나의 사랑을 깨치게 된다.

 

 

 '맘속 맺힌 매듭 풀지를 못해서, 밤마둥 헤매제만 돌아갈 디가 없어서, 헤어진 사람들은 별빛보담도 아득해서, 싸구려 막쇠주에도 취할 수가 없어서, 거리에 불빛들이 웬수보담도 짚어서, 내딪는 걸음마둥 끝끝내 허방을 짚거든, 짓뭉게덱기, 짓뭉게덱기, 나라도 기억해라우. 역전 뒤 힛빠리 골목에 누워, 스무 해 동안 아직까장 지달리고 있는 나라도 기억해라우.'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남자는 한 남자가 아닌 그녀를 스치고 간 모든 남자로써, 사랑의 폭과 넓이가 온 세상으로 확장된다.

 

 

 '내 몸뚱어리를 스치고 지나간 그 많은 남자들이 단 한 남자로만 밝아오는 저 환장한 보름달!'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려 간 후, 내가 느낀 감정은 글의 서두에 밝힌 욕지기였다. 원작가인 송기원 역시 '마음속 붉은 꽃잎' 이란 시집을 통해서, 자신이 늙은 창녀를 처음 보았을 때 심한 욕지기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내게도, 그리고 송기원에게도, 나아가 늙은 창녀를 읽고 본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이 토할 것 같은 메슥메슥한 느낌은 단순히 역겹다는 차원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구토라는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눈물 그리고 회한, 나아가 자기 모든 존재의 '토함'이라는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이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 나의 감정은 사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다단함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역시, 처음 느꼈던 소설 속에 손님인 남자로 대변되는 '송기원'에 대한 역겨움은 쉬 지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이유가 어찌됐든 10년 동안이나 창녀촌을 일부러 돌아다니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 내려 했던 그에 대해 도저히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송기원은 1980년에 광주민주화운동을 주도한 배후세력으로 신군부에 의해 고 김대중 대통령, 고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소위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된다. 그로 인해 그의 어머니가 월문리에서 자진함으로써, 자신 안에 심각한 어머니의 부재를 창녀들을 통해 찾고 싶었을는지도, 그리고 그 극심한 자괴감에 자신을 밑바닥 진창에 뒹굴도록 놓아버리고 싶었을는지도,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창녀를 통해 그러한 어머니의 부재와 자신의 존재를 찾고자 했던, 그 행위 자체는 역겹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그가 물랭 루주를 그린 19C 유명한 인상파 화가 로트레크처럼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인 불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원래부터 그런 밑바닥 생활에 길들여진 사람도 아닌데, 일부러 거기로 가서 자신의 존재의 기반을 찾는다는 발상 그 자체가 얼마나 치기 어린지....... 게다가 감히 그 치기 어린 어릿광대짓을 통해 늙은 창녀로 대변되는 밑바닥 인생의 짠한 고백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도용하다니....... 어떻게 그 모든 작태들을 역겹지 않다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차마 그를 욕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역겨움이 아닌, 다른 무언가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으로 그를 대면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바로 송기원이 늙은 창녀를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보았듯이, 송기원이란 사람을 통해 나는 내 자신의 진실과 욕망을 본 까닭이었다.

 

 

  스무 살 적, 친구와 친구의 여자 사이에서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그 둘을 배신하고서, 친구의 여자와 관계를 가졌던 나는 결국, 그 친구의 여자와 헤어지게 되면서, 이상스런 체험을 하나 가지게 되었다. 아마 견딜 수 없는 극심한 죄책감과 상실감이 뒤섞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기이하기 짝이 없는 체험이었다.

 

 

  군대를 조기 제대한 나는 그녀를 만나서 그녀가 다시 나의 친구에게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늘 관계를 맺으면서도 그녀와 나는 서로 친구임을 다짐하던 사이였기에, 나는 그것을 당연한 귀결처럼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그간 그 친구를 마음속에 품고서도, 그녀가 나와 일종의 연민 때문에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은, 내 자신을 매우 비참한 기분으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그 때문에 조금 취하고 싶은 기분에, 그 날 나는 혼자서 술을 들이켰다. 소주 한 반병이나 마셨을까? 원래 주량이 소주 2~3병 가뜬했던 나이기에 전혀 취기도 돌지 않았고,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면서, 모든 것이 선명해 지는 것이 더욱 씁쓸한 기분만 가득하였다. 하지만 뭉실하게 헝클어지는 드가의 그림처럼 흐느적거리는 세상의 자태를 보고 싶어, 나는 취한 척 거리를 내달렸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깨어났는데, 갑자기 구토가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구토가 다소 평소와 그 성격이 달랐던 것은 한 번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번으로 이어졌고, 내 감정에 따라서 계속되어졌다는 점이다. 사실 술을 별로 마신 것도 없었기에 나올 것도 없어, 나는 연방 헛구역질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다시 조금만 슬픈 감정이라던가, 이상한 맘이 들면, 계속 구토가 치미는 것이었다. 나올 것이 없는데도 계속, 끊임없이,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 사람이 죽을 때 보인다는, 이제까지의 모든 삶들의 영상들이, 한 찰나에 수십 컷의 필름이 돌아가는 것처럼 환영으로 나타나지고, 다시 참을 수 없는 구토증이 치밀어 올라, 변기통에 헛구역질을 시작하는데, 뚝뚝 피가 떨어졌다. 그리고 변기통에 핏방울이 천천히 스며들면서 나는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그 지루했던 몇 시간의 구토를 멈추게 되었다. 훗날 그것이 나의 젊은 날의 나쁜 피가 빠져나간 것이라고 스스로 결론짓기는 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왜 나는 구토를 참을 수 없었을까? 그리고 왜 나는 내 자신의 피가 흐르기까지 그 구토를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일까?

 

 

  사르트르는 자신의 소설 '구토'를 통해서 세계에 대한 한 개인의 구토증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워낙 지루하고 어려운 소설이었기에, 사실 내가 그것을 감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분명한 것은 우리는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참을 수 없는 구토증 아래 놓여있다는 것이다. 프로이드를 통해선, 이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세계의 본질적 원리로써 제시되어지고 있다. 남자가 여자를 보며 느끼는 구토증, 그리고 남자든 여자든 배설하고 싶어 하는 구토증 등등. 그러하기에 우리는 글쓰기를 하나의 배설이며, 멈출 수 없는 구토증이라고도 한다. 아니, 비단 글쓰기 뿐 아니라, 요즘 시대에서 우리의 모든 것은 소비라는 구토증 혹은 성적 욕망의 구토증으로 대변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이 구토증이 한 번으로 끝나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구토증을 불러일으키는 중독현상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저히 멈춰지지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하기에 어떤 이들은 이런 멈출 수 없는 구토에 대한 염려와 기우로, 그것을 참아내고, 자신에게 하나의 응어리처럼 만들어, 의미가 되어 질 때 구토할 것을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그 누가 우리에게 광기를, 그 구토증을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준 적 있단 말인가? 아니, 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그 구토증을 참아내고, 하나의 의미되는 몸짓으로 토해내어야 한단 말인가?

 

 

  위의 물음들은 나의 오래된 화두들이다. 그렇지만 실상 나는 구토에 대한 그 괴로움과 역겨움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이제껏 피해왔고, 지금 이 순간도 분명 그 이유로, 구토가 아닌 하나의 의미되는 아름다움을 머릿속으로 계산해 놓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찌됐든 간에 구토를 하지 않고서는 그것이 난잡함인지 혹은 아름다움인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송기원의 구토에 대한 그 욕망은 사실 나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용감함이었다고 감히 고백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구토를 당하는 대상자에 대해선 묵인한 생각임에는 분명하다. 사실 당연히 우리는 송기원의 구토의 행위를 변태적이고, 편협한 것이라고 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가 그 스스로 수십 번 게워 내면서, 모두에게 감히 보여 준 늙은 창녀를 통한 구토는 결코 추잡하지 않았다. 이것이 비단 나의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그것은 아름다운 구토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연방 허방을 짚어내며 헛구역질을 하던 나의 구토와는 달리, 자기 자신의 모든 존재의 '토함'이었고, 그러하기에 늙은 창녀와 함께 어우러진, 멈출 수 있는 구토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늙은 창녀를 처음 보고서 느낀 그 욕지기대로 바로, 조급하게 그녀에게 구토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만 집착했다면, 그는 그녀의 모든 존재의 구토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수년간 계속 게워 낸 그 구토 끝에, 그는 늙은 창녀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게 되었고, 아울러 구토를 멈춰내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구토가 끝났다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젠 그 참을 수 없는 구토증에 대해 참고 견딜 길을, 그리고 그 난자하게 헝클어진 토사물 가운데에서도 무언가 아름다움이 있음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바로 그래서 그는 그 늙은 창녀를 통해, 자신이 감옥에 가 있을 동안 자진한 어머니를 보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자신의 씻을 수 없는 恨을 감히,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고 그 늙은 창녀를 통해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여기에 의문은 남는다. 무엇이냐 하면, 위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구토의 대상이었던 늙은 창녀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들에 대한 철저한 희생의 강요에 관한 문제이다.

 

 

  오랫동안 나는 자기 자신의 욕망에 대해 정직해 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스무 살 적 그녀에게 뱉어내고 싶었던 그 구토들을 나는 다하지 못하고, 혼자서 게워 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게도 된다. 그리고 아직도 연방 허방을 짚으며, 헛구역질만을 계속하는 내가 도저히 이 구토를 참아내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구토에 대한 나의 욕망들에 대해서 너무나 정직하지 못했다는 것,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구토라는 끔찍한 토사물들을 보기엔 나는 그 동안 너무나 아름다움에 집착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란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가 닿지 못하는 이상에 대해 동경한다는 것, 바로 거기서 오는 비극적 아름다움이었다.

 

 

  우리는 흔히 이상이라 할 때 이데아라는 세계를 떠올려 보곤 한다. 불완전한 이 세계에 완전한 형상이며, 실체, 그리고 완벽함 그 자체.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그것은 이 세계에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아름답고, 고결하다 말한다. 그리고 심지어 자신은 그 길을 못 가더라도, 당신들은 그 길로 가서 끝까지 목마르고 비극적이어 달라고 바라기까지 한다. 그러하기에 그 길을 가는 당신들은 늘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사랑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하고서, 그 길을 끝까지 가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그 길 위에서 목마름으로 사라져 버리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당신들이 바라던 것이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을까? 그 길에서 사라지기까지 당신들은 수십 번 아니 수만 번 구토를 하고 싶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추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았을까? 당신들의 본질이 정녕 그렇게 아름답고 고결한 것이라 당신들은 감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일까? 당신들은 정말 누군가의 희생과 상처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완벽함 가운데 있을 수 있었단 말인가?

 

 

  숱한 물음들과 의문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지금 나는 다시금 스무 살 때와 같은 구토증을 느껴 보게 된다. 비록 이젠 그녀라는 대상도 없고, 누군가처럼 늙은 창녀라는 대상도 없지만, 구토증은 참을 길이 없고, 그것은 아직까지 내 관념에선 추잡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아무 의미 없는 헛구역질이라도 나는 이제 구토를 시작해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일지라도 정직하게 다가서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래서 그 지저분하고 더러운 모든 토사물을 토해내고 게워내어, 거기서 참고 견딜 길을 배우고, 또 하나의 사랑을 배워서, 나도 누군가의 허기와 토사물들을 받아 낼 수 있는 썩은 몸뚱아리가 될 수 있기를, 그러한 몸짓이라도 될 수 있기를, 염치없게도 자꾸 바래보게 된다.

 

 

 

 

기도

 

 

제 몸뚱어리도 이제 어떤 의미가 되고 싶습니다.

영혼이 아니고 바로 썩은 몸뚱어리입니다.

누구를 사랑한다거나 사랑을 받는 그런 의미가 아닙

니다.

스스로 한번도 아껴본 적이 없는 몸뚱어리지만, 지

금 왜 이리 소중해지는지요.

숨가쁜 어느 골목에서는 썩은 몸뚱어리마저 없어,

갈증에 죽어가는 이가 있을 것만 같아요.

 

-------송기원의 '마음속 붉은 꽃잎'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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