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머리맡에는 그리스 기행서가, 거실에는 보스니아 배경의 문학이, 책상 위에는 비엔나를 비롯한 오스만 제국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이어지는 발칸반도의 역사를 픽션으로 재구성한 인문서, 종일 검색하며 찾아헤매는 책은 터키사나 터키여행서, 궁극적으로 알고 싶은 건 보스니아 내전을 구성하게 된 오래된 역사와 발칸반도에 속하는 국가 그러니까 그리스,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터키-이스탄불의 유럽 부분, 마케도니아 공화국 그리고 루마니아와 슬로베니아의 19세기-20세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상황, 결국은 동유럽 전반에 걸친 교양지식이다. 쿠르드족의 수난 같은 건 덤으로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려면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그걸 문학이 해줄 리가 없다. 문학은 언제나 작가의 눈으로 걸러진 세상을 담기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안된다고 배웠다. 쉽게 흥미를 주지만 문학에서 멈추면 아무 것도 내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바로 그 상반된 매력이 문학을 놓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멋모르고 읽어내린 <석양 녘의 왈츠>를 먼지 탈탈 털어 다시 들춘다. 지난 번에 헷갈리는 이름들만 확인하며 간신히 덮으며 내 머릿속 세계사의 부재를 실감하게 한 책이다.

 

 

 

 

 

 

 

 

 

 

 

 

 

 

프레더릭 모턴은 소설의 형식을 빌어 역사를 말하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작가다.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방식을 선호하지만 이질적인 난해함 대신 이해가 쉽도록 풀어쓴다. <황태자의 마지막 키스>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구스타프 말러, 구스타프 클림트, 테오도어 헤르츨 등의 천재를 낳은, 1888~188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비엔나의 화려함과 황태자 루돌프의 사랑에 관한 비극을 그린다. 그가 특출나게 그리는 배경 역시, 출생답게 오스트리아 역사, 동유럽 역사, 나아가 유럽의 역사로, <석양 녘의 왈츠> 역시 제1차 세계대전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데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힌다. 사실 전쟁은 겉으로 밝혀진 가장 큰 불이었을 뿐, 그 전쟁의 밑바닥에 도사린 음모와 어긋난 거래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라데츠키 행진곡>은 할아버지가 전장에서 황제의 목숨을 구하여 귀족이 된 트로타 가문 3대의 융성과 몰락에 초점을 맞춰 1차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의 모순과 문제를 파헤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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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구공산권의 붕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경제성장과도 맞물려 있다. 아르네 달의 <미스테리오소>에서는 비셰그라드라는 지명이 반복적 등장할 정도로, 스웨덴 대기업 성장과 구공산권 스탈린체제 붕괴가 맞닿아 사건이 진행된다. 소련과 독일, 구공산권 동유럽 국가들의 얽히고 설킨 관계를 배경으로 삼은 <밀레니엄> 시리즈는 한층 더 복잡하다. 이 페이퍼를 쓰기 시작하면서 책을 하나하나 사고 읽기 시작할 땐 스티그 라르손을 읽기 전이었고, 이제 완독한 상태다. 북유럽 추리소설에서 동유럽의 지명을 익히고,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 발칸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주렁주렁 매달린 삶을 본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도시 비셰그라드는 드리나 강과 세르비아와 접한다. 보스니아 내전 때 보스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마을이 파괴되고 많은 보스니아인들이 세르비아인 군대에 의해 학살당한 사실을 초점에 놓고 그린, '발칸의 호메로스' 이보 안드리치의 소설은 빽빽하고 막막하다.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차 다리 (위키백과 펌)

 

11개의 석공 아치, 길이 180미터, 1577년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보스니아에서 태어나 오스만 제국으로 끌려가 출세한 정치가 메흐메드 파샤 소콜리의 지시로 완성한 다리.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다리. 인종과 종교 간 유혈충돌이 끊이지 않던 보스니아의 상처가 고스란히 담긴 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의 배경이 되는 다리이기도 하다. 베를린의 유고슬라비아 대사였던 안드리치가 베오그라드를 점령한 독일군에게 감금되었을 때 쓴 '보스니아 3부작(드리나 강의 다리, 트라브니크의 연대기, 아가씨)'은 4년 후 한꺼번에 발표되었다. 보고 들은 것, 경험하고 느낀 것을 전설과 경험 속에 녹였다. 하지만 다리를 놓는다고 무조건 화해가 가능한 것은 아니라서 이들의 상처는 여지껏 단단히 봉인된 채 호전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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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 나라 없는 최대 민족 쿠르드족의 수난 역사와 억압 받는 현실에 대해 그려온 쿠르드족 출신의 바흐만 고바디 감독은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거북이도 난다]를 거쳐 2012년 BIFF에서 [코뿔소의 계절]이란 영화를 공개했다. 쿠르드족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 더이상 불가능해진 이란을 떠나 터키로 망명해 만든 첫 영화라고 한다. 모니카 벨루치의 출연으로 올해 BIFF 제3세계 영화목록 가운데서도 가장 독특해 보이는 영화였다. 한편 [디야르바키르의 아이들]은 역시 쿠르드족 출신인 미라즈 베자르 감독이 쿠르드족 아이들의 암울한 현실을 알리기 위해 최초로 쿠르드어로 만든 영화다. 디야르바키르는 터키의 지명이다. 터키에서는 쿠르드어 사용 자체가 금지되어 있지만 이 영화는 터키에서 만들어졌으며, 감독의 결단어린 용기로 가능했다. 역시 BIFF의 쿠르드 특별전에 어렵게 허가받아 출품되었다. 중동 지역 곳곳에 흩어져 살기에 제 언어를 사용할 수 없는 어린 남매의 현실수난을 그린다. 그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감독은 역시 쿠르드족 출신으로, 터키에서 부유하게 태어났지만 이런저런 일들로 터키 군사정권의 억압을 받는 통에 수감되어 쓴 시나리오 [욜]로 1982년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한, 쿠르드 영화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일마즈 귀니 감독이다.

 

 

 

 

 

 

 

 

 

 

 

필요하다면 영화는 보면 되고 책은 읽으면 되는데(이보다 쉬운 일이 또 있을까) 이 페이퍼의 영역을 어디까지 확장시키고 또 어디까지 좁혀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대략 2500-4000만명으로 추정되는 쿠르드족의 역사는 웬만한 국가사를 쓰고도 남을 만한 양이다. 이라크, 터키, 이란, 시리아까지 공간적 배경을 넓혀야 하고 무엇보다, 어렵다. 1970년대 이라크 정도가 쿠르드 자치구를 인정했고, 대부분의 국가가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거나 부정했다. 가장 많은 수의 쿠르드인이 사는 터키가 중점이 되겠지만, 쿠르드족의 존재를 부정해온 터키와의 공존관계 역시 현재진행형으로 뭐라 결론내기 어렵다. 유럽연합 가입을 손꼽아 고대하는 터키에게 유럽연합이 쿠르드 인권문제에 대해 난색을 표하면서 터키에서도 조금씩 쿠르드족에 대한 입장이 호전되는 분위기라고 한다. 이라크에서는 사담 후세인에 의해 탄압받던 쿠르드족이 후세인 사망과 이라크내 미군부대 주둔을 환영하는 건 역평등에 기인한 일이다.

 

1차 대전에서는 영국, 2차 대전에서는 미국에 협력(이용)당하고, 현재도 국가,영토,지도자 없이 터키,이라크,이란을 오가며 외로운 전쟁을 벌이는 쿠르드족은 현재 미국이 이란을 압박하는 협상카드로 이용되고 있다. 2004년에서 2008년까지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가 주둔했던 아르빌 지역이 쿠르드자치정부가 통치하는 지역으로 그들은 명백히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거라던 어느 의원의 말이 이렇게 한참 세월이 흘러서야 떠오른다. 당시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훗날 이렇게 알게 되는 뜻도 있기 마련이다. 아주 사소하지만 쨍하게 만드는 울림. 여기서 서방 세계의 우상 살라딘과 십자군까지 운운하면 미친 페이퍼가 될 것이므로 까먹지 않도록 살짝 언급만. 잘 알지도 못하는 걸 말하는 건 여기까지. 그리고 네이버 포털에서 한눈에 쏙 들어오는 쿠르드인 분포도를 표시한 지도를 찾았다.

 

 

빨간색 부분이 쿠르드인 분포 거주지다. 터키에 천대 받고 미국에 이용당하는 쿠르드인들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이 구석진 곳에 단일민족이라 자랑하는 내 민족이 제 터전을 잡고 제 땅이라 부르며 제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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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사는 아브라함의 순례까지 거슬러 올라가 4대 문명의 발상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를 찍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휘감고 내려와 사도 바울과 헤로도토스의 국가 아나톨리아였다가 동로마 제국의 비잔티움이었다가 이웃나라 그리스와 앙숙인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아시아 땅 97%와 유럽 땅 3%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EU에 속하길 꿈꾸는, 그리스와의 로잔조약에서 에게해의 모든 섬을 내어주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이스탄불을 가진,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 기독교와 이슬람이 융합된 복잡한 국가. 무스타파 케말이 아타튀르크의 칭호를 가진 나라. 성 소피아 성당과 블루모스크가 유명한 나라. 푸르고 고즈넉한 곳. 내가 아는 모든 것이 그곳의 모든 것일 리는 없지만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다.

 

많은 국가들이 포진해 있는 동유럽의 사정을 쓰자면 연재로도 모자랄 것이다. 더한 비극은 다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쓰고 있는 것 외엔 더 이상 파헤칠 여력이 없다는 것. 그래봐야 지금도 허우적대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아마 이 두 사람을 알면 윤곽이 잡힐 지도 모르겠다. 모든 국가는 독재자로부터 시작되고, 민주주의를 획득했다고 믿는 순간 진정한 민주주의는 막을 내린다는 사실을 동유럽 역사가 증명해줄까. 나치스와 볼셰비키 없이 발칸을 얘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 또한 그 주범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헤르타 뮐러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겼고, 케말 파샤(무스타파 케말)는 터키의 영웅이자 독재자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롤모델로 여겨질 만큼 비슷하다. 그들은 오늘날의 근대화를 이뤄낸 걸로 각자의 나라에서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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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와 헤르타 뮐러 외에 내가 아는 루마니아 출신이 있었나. 도나우 강을 여행다큐에서 봤거나 한창 피바다에 빠져 분노할 때 차우셰스쿠를 안 것 이상은 그야말로 백지에 가까워서 지인이 여행을 간다고 해도, 여행기를 들려줘도 아무런 실체적 관념이 생기지 않던 곳. 루마니아 음식은 신맛과 짠맛으로 양분되는데 맛있지만 우리 입맛과는 맞지 않는다고 한다. 드라큘라의 브란성과 요구르트로 구별하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유명하지만 생소한 루마니아 출신의 게오르규가 쓴 <25시>는 제목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내용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구상 존재하는 누구에게도 25시는 주어지지 않는다. 루마니아의 시골농부가 유대인 오명을 쓰고 붙잡혀 13년간이나 수용소를 전전하며 희생양이 되어가는 과정을 순차적 구성으로 그린다. 쿤데라의 <농담>과 닮은 스토리. 문명 아래 자행되는 이데올로기 다툼과 강대국의 전쟁에 휩쓸린 약소국의 힘없는 자들을 묘사한다. 희생양과 구원의 매커니즘. 혐오와 공포, 인간성 소멸을 파란만장하게 그리는 작품이다.  

 

 

 

 

 

 

 

 

 

 

 

 

 

 

 

체코를 쿤데라와 카프카로 알고 평생 사는 건 자만의 오류다. 모두 아는 것 이상을 알아야 하는 게 현대인이 정보를 대하는 자세이다 보니까 그 정도로는 명함도 못 내미는 세상이 왔다. 터키를 파묵, 루마니아를 뮐러로 배운 문학애호가들에게 우리도 동유럽 출신이라고 자신있게 외칠 작가에 이 정도 더 보태도 좋을 것이다. <대머리 여가수>와 <외로운 남자>로 유명한 루마니아 출신의 프랑스 극작가 이오네스코, 알바니아의 이스마일 카다레, 오스트리아의 헤르만 브로흐, 헝가리의 임레 케르테스와 몰나르 페렌츠, 폴란드의 여류시인 쉼보르스카, 체코의 이반 클리마와 보흐밀 흐라발은 내가 아는 동유럽 작가들이다. 더 있겠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내년에 읽을 문학을 획득하는 관계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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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강타한 두 번의 세계전쟁과 그로인해 오랜 공산화를 겪어야 했던 파란만장한 동유럽의 암울하고 막막한 분위기는 문학 속에 살아숨쉰다. 때로 프라하의 카를교를 보며 다리가 눈물을 뚝뚝 흘린다고 표현하던 누군가의 심정이 수긍된다. 그럼 비잔틴 제국에서부터 시작해볼까. 세상에, 이제서야 말인데 세상에는 왜 이렇게 읽을 책이 많고 나는 왜 이렇게 책을 안 읽는 걸까. 대체 가루로 흩어진 시간들은 뿔뿔이 해체되어 어디로 가서 쌓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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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30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31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2-12-31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야에 대해 관심있는 이들에게 유용한 내용입니다.저도 관심이 많거든요.
나치 점령 하의 발칸반도도 관심을 가질 만합니다.특히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는 대학살로 악명을 떨쳤죠.옛 유고연방 지역에서 나치에 대항하는 우익과 좌익의 제휴와 갈등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에도 많은 시사를 해줍니다.티토 전기를 참조하세요.
터키에서 오르한 파묵과 함께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야샤르 케말이 쿠르드 출신 소설가입니다.대표작<메메드>는 절판이지만 아직도 그 외 몇 몇 작품의 번역본이 있습니다.

아이리시스 2012-12-31 17:31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님이 세계사 분류별 강의 하시면 저는 손 들고 신청할텐데요 :) 뭔가 수준에 맞는 강의가 필요해요. >.<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라는 악마도 있군요. 역시! 티토 전기도 꼭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치에 대항하는 우익과 좌익의 제휴와 갈등은 한국독립운동사의 김구,이승만,박헌영,여운형,김규식 같은 분들 얘기가 맞나요?(제가 제대로 알아듣는 건지..) 야샤르 케말은 처음 들어봐요. 쿠르드 출신 문학가 찾기도 재밌겠어요. 그런데 문학이 영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터라 제대로 읽어낼 자신이 없다는 게 문제예요. 뮐러와 파묵도 사실 먼 이야기..

노이에자이트님께도 한 해 동안 감사했어요. 새해에는 정체를 좀 드러내주시길..그리고 재밌고 유익한 글도 많이 부탁드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또 뵈요^^

노이에자이트 2013-01-01 11:58   좋아요 0 | URL
예.제대로 알아들으시네요.역시...유고연방에서 티토는 좌익 게릴라였는데 우익에도 게릴라들이 있었어요.처칠과 루스벨트 스탈린은 이들 중 누구를 더 지원할까 고심하죠.물론 티토로 결정났지만요.
우리나라에선...임정 쪽에서 루스벨트에게 면담을 여러번 신청하지만 성사되지 못했어요.무장세력의 규모가 너무 적고 분열되어있다고...


2차대전 당시 폴란드 유고 조선의 좌우익 저항세력들의 제휴와 갈등을 비교연구해 보시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연구에도 도움이 많이 될 거에요.아이리시스 님 정도면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제 정체는...음...그냥 평범한 대한민국 남자? 흐흐흐...저를 여자로 착각하진 않았죠?

댈러웨이 2013-01-01 21:15   좋아요 0 | URL
저 이거 별찜한 페이퍼인데 안그래도 노이에자이트님께서 인정해주셨네요. 일전에 노이에자이트님께서 페터 한트케를 언급해주셔서 관심을 좀 두려고 하고 있는 부분이에요. 저는 이렇게까지 광범위하게 정보 커버는 할 수도 없겠지만, 아이님 정리 고마워요. 그리고 저도 노이에자이트님이 어떤 분이실지 정말 궁금한 사람중의 일인입니다. ^^

아이리시스 2013-01-03 20:10   좋아요 0 | URL
사실은 근현대사 특히 독립운동사 정말 헷갈리고 또 거의 몰라요. 노이에자이트님이 환기시켜주신 거예요. 빨리 더 읽고 공부해서 이 댓글의 정보를 몸소 흡수하겠어요ㅎㅎㅎ 그 당시 루스벨트가 대통령이었군요. 저는 이제 연대 조금 외웠는데..

하긴, 무슨 정체를 더 알겠습니까? 이런 정보라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여자로 착각은 안했지만 친구로 착각할 수는 있을 것 같... 그런데 어떤 책을 보면 될까요, 가능하면 추천도서 부탁드립니다^^

아이리시스 2013-01-03 20:16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 페터 한트케는 독일사람인 줄 알았어요. 비엔나 커피의 나라ㅎㅎㅎ 작가였구나. 당연히 독일작가라고 생각해서 저기 넣지도 않았어요. 그럼 혹시 페터 한트케의 작품에도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나오나요?(궁금궁금..)

노이에자이트 2013-01-01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말 소설 재밌어요.<메메드>가 제일 재밌는데 다른 것도 괜찮아요.쿠르드의 민담이나 풍속에 대한 지식도 덤으로 얻을 수 있고요.

아이리시스 2013-01-03 20:20   좋아요 0 | URL
우와 책 두 권 나와요. 메메드는 간만에 원서로 독파해야 하는 건가요?ㅎㅎ 줄거리만 봐도 세상에, 재밌어 보여요.

댈러웨이 2013-01-01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뭐했는 줄 알아요? 전작하겠다던 오르한 파묵, 드디어 번역본 다 구입했어요. 올해 가열차게 읽으려면 배경지식도 좀 필요하겠죠. 이럴 땐 정말 머리 밀고 싶어요. --; 눈 많이 왔어요?

아이리시스 2013-01-03 20:27   좋아요 0 | URL
네, 잘했어요. 짝짝짝 도장 쾅. 다 합해서 몇 권이예요? 거짓말 아니란 걸 증명하기 위해 새해부터 인증사진 한 장ㅎㅎ 부탁드려요. 그런데 파묵이 하고 싶어하는 얘기는 궁극적으로 뭘까요? 이것도 알려주세요. 저는 도대체 뭔가요ㅠ.ㅠ 읽은 게 하나도 없어요. 창피해, 꺅=.=3

춥기만 진짜 춥고요, 눈은 안왔어요. 여긴 다른 곳 눈올 때 비가 내리거든요. 눈이 뭐 좋다거나 낭만적이라든가 하는 로망이 있는 건 아닌데도, 겨울에 한 번 정도는 발이 푹푹 빠지도록 쌓이는 걸 보고 싶어요.(이런 소심한 소원이라니!)

노이에자이트 2013-01-05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시정부 연구로 주제를 좁히자면...백범일지가 필독서라 하지만 배경지식 없으면 무슨 말인지 몰라요.이 당시 연합국과의 외교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면 이승만과 김구로 독서범위를 좁히세요.임시정부는 상해시절보다는 중경시절이 외교사에서는 더 중요해요.
자세한 것으로 이승만 전기 두 편---정병준 것은 이승만에 비판적이고, 이한우 것은 이승만에 우호적입니다.중경임시정부 시절 외교에 대해 자세해요.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이정식의 여운형 전기도 보세요.

아이리시스 2013-01-05 19:10   좋아요 0 | URL
아..이 댓글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쉽지는 않겠지만 백범일지, 중경시절, 이승만 전기, 여운형 전기 다 기억할게요, 노이에자이트님. 여운형 전기나 평전은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궁금증으로 작년에 계속 읽을까말까 하던 거라서 눈에 확 들어오네요^^

자, 이제부터 폭풍책검색과 장바구니 결제ㅎㅎㅎ

노이에자이트 2013-01-05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터 한트케는 자신을 슬로베니아계 오스트리아인이라고 말합니다.그런데 밀로세비치 장례식에 참석해 찬반논란을 일으키죠.세르비아인들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자고 하는 게 한트케의 주장인데, 밀로세비치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주장이냐 하면서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었죠.
우리나라에서 연극 좋아하는 사람은 한트케를 '관객모독'의 작가로 기억합니니다.

아이리시스 2013-01-05 19:14   좋아요 0 | URL
페터 한트케를 댈러웨이님도 지난해 내내 추천해주셨는데 한 권도 안 읽어봐서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이 페이퍼 쓰고 제가 얻는 게 많네요. 슬로베니아계 오스트리아인 그리고 밀로세비치까지요. 아 이번에 민음사 출간된 '관객모독' 말이군요^^

노이에자이트 2013-01-05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트케 소설 중 유고내전에 대한 것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다만 2차대전과 그 직전에 일어난 나치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다룬 것은 <소망없는 불행>이 있어요.

아이리시스 2013-01-05 19:16   좋아요 0 | URL
하나씩 댓글 다 달아주신 고마움에 각각 댓글 다는 이런 성실함ㅎㅎㅎ 암요, 새해에는 성실해져야 합니다! <소망없는 불행>이 그런 내용이군요. 저 이 책은 추천도 여러 번 받아서, 더블린에 있는 제 친구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입니다ㅋㅋ 제목만 완전 잘 알고 있어요. 하긴 제가 제목만 알고있는 작품들이 참 많죠. 거의 다예요, 다.
 
심야식당 10 심야식당 1
아베 야로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만화가 인생의 거의 모든 것이던 여중생이 여고로 진학할 무렵 예정된 듯 하나둘씩 대여점이 사라진 후에 데이트코스로나 친구들과의 수다나 약속시간 사이 기다림 중간중간 만화방을 잠깐씩 들락거린 스무살 초반 언저리를 빼면 만화책을 거의 보지 못했다. 선천적으로 호흡계통의 기관이 약하고 일 년 열두 달 환절기마다 비염과 축농증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체력 탓에 폐쇄된 공간이나 담배연기는 웬만하면 피하고 싶기도 했지만 적어도 그게 만화책과 멀어진 결정적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자연스런 이별의 이유를 굳이 들으려는 언론을 향해 '성격차이'라는 뻔한 말을 늘어놓는 유명인마냥 지어낼 필요는 없겠지. 나는 과정이나 이유 따위 불문한 채 그저 그림과 대사의 혼합으로 이뤄진, 사춘기를 함께 통과해 온 단지 그것뿐일 상징적 의식을 놓아버렸다. 만화책 읽기가 그런 거라면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흰 종이에 검은 글씨를 죄악으로 여길 만큼 책을 싫어하는 아이들이나 로맨스나 판타지에 한 시절 바쳤던 조숙하고 되바라진 아이들에게나 허락될 법한 만화가 점점 그 수준에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사정을 띠게 되었다. <심야식당>이 그런 만화 축에 든다면 이건 분명 '로미오와 줄리엣'을 능가하는 비극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라는 장르는 종이와 영상 가릴 것 없이 하루하루 멀어져만 갔으니, 이럴 수가. 책을 공수할 빠릿빠릿한 능력이나 부지런함이 내게는 없다. 만화는 붙잡으면 몇 권이든 동이 나야 잠이 들 게 뻔하고, 추리소설은 숨 놓는 날까지 끝없이 쏟아질테니 시작은 있으되 끝은 없을 그것에 목매지 않은 건 내 마지막 자존심 아니, 다양한 장르와 분야에 대한 호기심이 너무나 왕성했고 시간은 부족했다 정도로 요약하고 넘어가자.

 

사실 드라마로 먼저 본 <심야식당> 역시 만화책은 오랫동안 뒷전이었다. 드라마를 만화책 보다 더 좋아하기도 했으니 굳이 찾아읽을 이유가 없었는데, 이 소박하고 쓸쓸한 사람들이 어느 순간 문득, 미친 듯이 그리워질 때가 온다. 이 세상에 나만 홀로 깨어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더없이 아득하고 막연한 순간이 살다보면 생기기 마련이다. 추운 겨울 밤, 마침 나와있던 만화책을 앉은 자리에서 후다닥 해치운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어느덧 10권인가 보다. 굉장히 반갑다고 하기에도 아쉽고 섭섭하다고 하기에도 언제나 이프로 부족하지만, 표현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딱 그만큼 기다려온 이야기와 사람들. 심야식당이 여전히 그 자리에서 활짝 팔을 벌려 나를 맞는다. 그동안의 나는 꽤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이 사람들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채로 그렇게 여전히 여기로 몰려든다. 자기 것을 모두 내어줄 것처럼 그렇게. 금세 뭉클하고 배가 따뜻해진다.

 

올빼미 기질로 밤에 늘 뭔가를 주워먹는 나로선 근처에 하나 생기면 좋겠다 생각하는 곳이다. 철저히 혼자가 되고 싶을 때와 누군가와 친밀하고 싶을 때 모두를 커버할 수 있는 편안하고 따뜻한 가게, 꼽아보면 별로 없다. 돈과 자본이 잠식한 밥집이란 것의 대표적인 형태인 푸드코트, 셀프서비스, 패스트푸드와 테이크아웃. 일상 속 깊이 들어와 있는 간단과 편리의 식생활을 즐기게 된지 오래다. 대학가 앞 골목길을 파헤치고 들어가 두루치기와 된장찌개, 계란말이와 김을 배가 터질 때까지 먹던 시절. 세월을 거슬러보면 아직 한 자릿 수일 뿐인데도 이토록 아득하고 아련한 까닭은 뭘까. 우린 무얼 얻었고 또 무얼 잃어버렸을까. 어디에나 그득그득 차 있는 식당과 화려한 간판의 카페가 반기지만 때로 현대인은 다 가졌으면서 아무 것도 갖지 못한 무주지 주민들처럼 갈 곳을 헤맨다. 정이 넘쳐 간섭과 충고가 난무하는 곳도, 정 없이 먹을 것과 돈이 바꾸어지는 곳도 잔인하고 서글프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심야식당의 한결같은 영업방침은 캄캄한 어둠을 밝히는 유일한 빛처럼 정겹고 포근하다. 바로 그 흐뭇하고 나른한 분위기 속에 더없이 소박하면서도 추억이 생생한 음식을 몇 그릇이고 배부르게 먹고 나면 비록 간접이지만 흡족한 포만감이 들곤 한다. 누가 묻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나를 드러내고 싶은 가게'인 것도 감동이지만 아픈 사연과 즐거운 사생활, 어려운 고민을 두런두런 나누는 일이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뒤섞인다는 건 거의 기적적이다. 모두들 사전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 토닥이고 울어주고 기뻐한다. 음식과 사람, 이 황홀한 조합이 웃고 울린다. 매번 미묘하게 달라지는 감동이다.

 

일본남성, 모두 그런 질문 합니다. 서니는 마음이 아주 깨끗한 사람. 그래서 눈도 깨끗하죠. 그렇게 깨끗한 눈을 한 사람, 나는 본 적 없습니다.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절망해서 울기만 하던 나를 서니는 조용히 지켜보고 손을 뻗어 주었습니다. 그 눈은 더 깊은 슬픔을 경험한 눈이예요. 나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第140夜 버터감자' 편에서)

 

간간이 웃음과 눈물을 흩뿌려 촉촉하게 적셔주는 와중에도 한 권 다 넘기는 동안 절대 가시지 않는 허기에 덮는 즉시 시장이나 마트 아니면 부엌으로 달려가야 한다. 외국에서 공부하는 누군가는 룸메이트가 실연과 외로움에 아플 때마다 냉장고를 탈탈 털어 재료를 꺼내 오코노미야끼를 해먹였다고 했고, 나는 오래도록 외국에서 먹은 간단한 두부김치와 소주팩을 잊지 못한다. 음식은 그런 것이다. 거의 모든 것. 잊혀진 시간과 추억을 폭풍처럼 몰고왔다가 단 1초만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승화해버리는 황홀경. 같은 음식을 먹는 것 또한 그러한데,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그것도 모두가 잠든 한밤 중에 함께 먹는다는 것은 현란하고 찬란한 일이다. 순간의 고독과 절망 혹은 기쁨의 시간, 희망과 열의를 다함께 나누는 축복의 파티이기도 하기에. 나는 또 잊겠지만 심야식당은 여전히 밤을 환히 밝힌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올해가 내년으로 넘어가는 날 해넘이 국수를 대접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마스터를 떠올리면 나이 먹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피식 웃음이 난다. 가야지, 어디로든. 먹어야지, 살기 위해. 멋지게 쓰고 싶었던 에세이는 이렇게 진부한 글로 마무리하며 날려먹고 만다. 뭐 이렇게 난감하고 의욕 떨어지는 시점에 힘을 내려면 먹는 수밖에. 으쌰으쌰. 도대체 겨울이 왜 이렇게 긴 거야. 밤은 또 왜 이렇게 길고. 싫증나게. 밤은 언제까지나 환희와 증오의 대상이다. 그래서 아름답기도 처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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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2-29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아이님이다~
저는 요새 밤에... 배가 고파서 도저히...
나중에 대학다닐 때나 사회생활할 때 그래, 딱 심야식당처럼 혼자 가서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곳 있었으면 좋겠어요.
술은 안 마실테니까, 음 포도쥬스? ㅋㅋㅋㅋㅋ

아이리시스 2012-12-29 19:09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은 먹고 싶은 걸 많이많이 먹어야 키 크죠! 참지 말고..( '') 소이진님은 술은 안 마실 것 같아요? 완전 좋아할 것 같은데.. 소이진님은 지금 맛난 거 많이 드시고, 열공도 하시고, 친구들하고 추억도.. 여기까지만 할까. 포도주스 한 잔 시원한 걸로 마시고 싶어요. 감기 들면 엄마가 더 못 견뎌하셔서 저는 겨울이면 급 몸 사리는 사람이 됐어요. 아프면 진짜 괴로우니까. 제가 이번 겨울에도 감기 몇 번 떨쳐냈는데, 아플 것 같으면 드러누우니까 올라다가 다시 가더라고요ㅋㅋㅋ

마녀고양이 2012-12-29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 아이리님.
나보고 이름도 까먹겠다 하더니, 나만 뜸한 것은 아니었네요. ^^

나 며칠 전에, 만화책 질렀어요. 판도라 하츠 18권, 실버 다이아몬드 25권, 클램프의 X 18권...
이게 총 몇권일까요? 아하하. 물론, 중고로 질렀죠... 저걸 어찌 다 새것으로 사겠누?

심야식당은 다섯권 사놨는데, 코알라만 읽었네요. 나는 음식 만화 안 좋아해요, 배고파.
오코노미야키 해먹고 싶은 날이예요. 밖이 하얘요, 눈발이 엄청나거든요.

이젠, 나이 먹는 것도 좀 무심해진 나... 아직 아이리님은 생각이 많이 날 때이지요? ^^
(함께살기님께 배운 문구로) 고운 일 담뿍 누리는 새해 맞이하셔요.

아이리시스 2012-12-29 19:05   좋아요 0 | URL
헛, 18 더하기 25 더하기 18 = 61

맞다맞다, 달여우님이 만화책 좋아하신 거 기억나요. 여전히 중고로라도 구입하시는군요. 어릴 때 돈만 벌면 만화책으로 집을 채워야지 했는데 막상 커서는 만화책을 산 적이..[풀 하우스] 몇 권 있어요ㅋㅋ

오늘도 계속 눈이 오는군요. 1월1일에 봉하마을 가려고 하는데 인적 뜸한 시골마을은 눈이 다 녹지도 않았다는데 또 밤부터 눈소식 있어요. 저번에도 눈 왔는데 제가 있는 곳에서는 못 봤거든요. 아..그냥 펄펄 내리는 건 한 번 봤어요. 저는 쌓인 걸 보고 싶어요. 하얗게 소복히 쌓여서 인적이 없는 곳.. 미리 시골 가서 기다리는 건데 억울해하고 있는 중이에요. 눈은 싫지만 눈이 소복한 시골의 고즈넉한 밤에 군고구마 먹으면서 추리소설 읽는 건 해보고 싶어서요.

코알라는 잘 지내나요? 내년에 중학교 가는 게..맞죠? 안부 전해주세요. 저는 잘 지나가고 있어요. 제가 또 한 살 먹어서 조바심난 건 부모님.. 무엇보다도 일을 많이 안 만들려고 노력해요. 남과 나를 비교하는 일도 금기예요. 여전히 지금처럼 계셔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Shining 2012-12-29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도 이 책 + 드라마를 한 번도 안 봤어요.... 나는야 아웃사이더 외계인... 꼬맹이는 이제 사람이 됐는데
알고보니 외계인은 나였어ㅠㅠ 읽어야지, 생각만하고 왜 매번 못 만날까요? 며칠 전 오꼬노미야끼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덕분에 집에 와서 야끼우동 해먹었다는...(꼭 관련은 없구나;)

겨울밤이 길면 대신 따뜻한데 누워 오래오래 책을 읽을 수 있잖아요^^그리고 눈을 핑계삼아 술도 한 잔 더..(어머)
네, 밀크티도 있으니까요 :]

아이리시스 2012-12-29 18:54   좋아요 0 | URL
음..야끼우동..오! 아까 어제 해온 떡이랑 오뎅으로 칼칼한 오뎅탕 끓였는데 정말로 소주사러 갈까 하는 맘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그래요, 귀찮고 춥고 또 술은 나를 아프게 하는 관계로.. 이상하게 추울 때는 찬 걸 못 먹어요. 배탈과 감기가 한 번에 나를 찾아와요. 나는 약골은 아닌데 겨울은 맥을 못 추게 해요. 오꼬노미야끼에는 정확하게는 뭐가 들어가나요? 샤이닝님이 해드신 오꼬노미야끼에는 뭐가 들어갔는지 궁금해요.

겨울밤은 지나치게 길어서 따뜻한데 누워 책 한 권 독파하는 게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더라구요. 신기하게^^ 어제는 존 르 카레와 함께했어요ㅋㅋㅋ

2012-12-29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 만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는데, 아이님 관점으로 보니 왠지 더 좋아지는군요.
+ 이런 심야식당이 근처에 있고, 거기 그냥 갔는데, '우연히' 거기서 아이님 만나면 좋겠어요~~~. (부산이어도 갈 수 있는데~!ㅎ) ^^

아이리시스 2012-12-29 18:50   좋아요 0 | URL
우앗 섬님, 인사도 못하고 지나간 크리스마스는 잘 보내셨어요? 실생활에서 저는 이벤트의 날에 아주 무심한 편이고 저는 필요할 때 외에는 전화도 거의 안 받는 편이고 그런데 알라딘 식구들만큼은 사소한 댓글로 인사를 해온 것 같은데 이번에는 못해서 자책하고 있었어요.(인사 안해도 잘 계실 거야..)

이 만화 사실은 아주 싱겁잖아요. 에피소드가 반복되면서 더 그래요. 한 가닥 놓기 싫은 저마다의 감성 덕분에 이 만화가 읽히는 것 같아요. 긴 기간을 두고 한 번씩 나와주면 그래도 그들은 거기, 저는 여기있는 느낌이 아득해서 좋아요.

제게는 친구나 애인의 친구가 하는 호프집이나 카페가 굳이 말하자면 그런 곳일 듯도 한데, 그런 곳에서 혼자가 될 수는 없으니까, 개인일 수가 없으니까, 정말 이런 가게가 있고 거기 갔는데 섬님 계시면 섬님이 맛난 거 사주세요.(응?)ㅎㅎㅎ

댈러웨이 2012-12-29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나 스시나 알탕 놓고 소주 한 잔 하고 싶게 만들어요. 수면 밑에서 잠시 숨 쉬러. 뽀글뽀글.

아이리시스 2012-12-29 19:45   좋아요 0 | URL
이런 고품격 안주를 떠올리는 건 수면 밑에 너무 오래 계셔서 그래요. 뽀글뽀글 이만 끝내고 오셔서 여름 이야기 쓰실 차례입니다, 댈러웨이님. 보고싶어 죽는 줄 알았잖아요-_-V

프레이야 2012-12-31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위에 댈님이닷ㅎㅎ 아이리시스님, 전 만화는 잘 안보고 이 책도 안 봤지만 아이님의 글은 맛나요. 해넘이국수요? 말만 들어도 근사해요. 꼴딱 넘어가는 해보며 후루룩^^ 2012 마지막날 차분히 보내고 내일 봉하마을 잘 다녀오세요. 전 얼마전 올겨울에 한번 더 가봤어요. 단장을 새로 해놨더군요. 봉하쌀이랑 고춧가루 사서 왔지요. ㅎㅎ 새해에도 행복가득한 날 되세요~~♥

아이리시스 2012-12-31 17:00   좋아요 0 | URL
매일매일 갈 적마다 새단장을 하고 있어요. 내일 인파가 벌써부터 걱정되는데 오늘 만큼만 날이 포근했으면 좋겠어요. 프레이야님께도 한 해 동안 감사했어요. 내년에도 잘 부탁드려요. 웬만하면 제 첫 새해소원도 좀 이뤄주시구요ㅋㅋ 오늘 점심때 고기도 굽고 떡도 구워 먹었어요. 배는 부르지만 뭐랄까 허무가 찾아오네요. 프레이야님 댁에도 좋은 기운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안녕안녕. 해피 뉴 이얼~^^

blanca 2012-12-31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것 읽어보고 싶었는데, 읽으셨군요! 이런 식당이 집근처에 있으면 밤마다 달려갈 터인데 말이에요. 저도 밤이면 특히 겨울 밤이면 허기가 지더라고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이리시스 2012-12-31 18:38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한 해 동안 블랑카님 글 멀리서나마 꼬박꼬박 읽을 수 있는 곳에 있어서 행복했어요. 저희 동네는 그야말로 정말로 편한 밥집이란 게 없어서 서운하기도 해요. 이 가게 좋지만 만화책은 클리셰가 반복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십대 내내 거의 밤에 먹는 게 아침과 낮의 두세배는 된 것 같아요. 블랑카님 떠올리면 늘 소녀같이 참한 언니가 연상됐는데, 그럼 새해소원은 블랑카님 얼굴 사진으로 뵙는 걸로 하고 싶어요. 분홍공주도 잘 있죠? 한 살 더 크면 더 예뻐지겠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시구요^^

맥거핀 2013-01-01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거 드라마로 봤습니다. 일부러 심야시간에 아주 배고플 때 보니까 재미가 극대화되더군요. 읽다보니 저도 외국에서 먹었던 짜파게티+소주 조합이 떠오르는군요. 오늘 저녁에도 그거 먹어볼까...

아이리시스 2013-01-03 20:07   좋아요 0 | URL
짧고 임팩트가 강해서 훈훈한 맛이 있었죠. 짜파게티+소주=??? 그건 드셨습니까? 아..한 살 더 먹을 수록 밤에 먹는 음식이 고스란히 살로 가는 것 같아요. 겨울이라 움직이는 것도 싫은데 곰이 되어가고 있어요. 북극에 가서 북극곰으로 살면 엉엉엉 북극곰이 동동 띄워진 얼음 위에서 얼마나 무서울까요ㅠ.ㅠ 댓글이 왜 이렇게 되는 걸까요...
 
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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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의 페스트에는 목적이 없다. 과정만 있다. 페스트는 뻥하고 터지는 폭발이 아니고 폭죽처럼 파티의 시작을 알리지도 못하며 지리한 페스트가 언제쯤 사라지나를 기다리다가는 평생토록 카뮈를 읽어낼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 없이 카뮈를 말할 수 있을 리도 만무하니, 역시 고꾸라지거나 완주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몇 번을 읽어도 쓰레기더미로 떨어져 함께 구르는 듯한 기분이라니, 게다가 쥐, 이 쥐는 또 어쩔 셈인가. 구역질이 참아지지 않는다. 쥐를 박멸한다 해서 페스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될 뿐이다.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고 해야만 하는 것이 도처에 널렸다. 진퇴양난과 좌불안석을 체험하는 이런 독서. 나는 카뮈를 적잖게 읽었고 한때 하고 싶은 얘기를 제법 많이 구했지만 지금은 모든 게 어렵기만 하다. 카뮈를 평생에 걸쳐 보잘 것 없는 리뷰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려 다짐한 적도 있지만 구태함을 벗어날 길 없는 이 글을 시작으로 그 또한 깨질 것 같다. 당최 일관성 없는 결심과 계획이란 것은 언제쯤 완전히 털어낼 수 있을까. 이 순간에도 머리는 계획표를 짠다. 이런 내가 내게는 페스트 같다. 페스트는 질병이자 전염병이고 재앙이지만 카뮈가 쓴 <페스트>가 단지 전염성 질병에 그쳤다면, 그렇게만 읽힌다면 그의 작품이 이토록 유명할 까닭이 없다. <페스트>가 부조리와 실존문학의 타당성을 높게 획득하는 이유는 그것이 반복되는 인간사 속에서 갑작스레 닥친 불안이나 불행이 아니라 늘 존재하고 있다가 특정 계기로 인해 일촉즉발하여, 무통에서 고통까지 경계없이 넘나드는 비극의 소용돌이를 몰고오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한 번 휩싸이면 웬만해선 제 힘으로 벗어날 자구(自救)가 없는 소용돌이.

 

지구 최후의 날을 그리는 '인류 대재앙과 종말(화산폭발과 지진 등의 자연재해나 핵폭발이나 전쟁으로 인한 징조)'을 소재로 하는 여러 영화가 떠오른다. [나는 전설이다]를 본 후 비슷한 종류의 영화들에 영 흥미를 잃었지만 지구상 누구도 종말을 체험해본 적 없다는 점에서 보자면 그들이 빚어내는 상상력은 가히 칭송할 만한 것이다. 사실 그런 소재의 영화들과 <페스트>에는 그리 큰 공통점이 없다. 모든 것이 사라져 폐허로 변한 세상의 길을 따라 아버지와 아들이 걸으며 나누는 대화와 주변 상황의 묘사로 이루어진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의 끝. 그 끝은 가봐야만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끝까지 걸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멈춰서 기다리는 이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겪어야 알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페스트>의 페스트에는 아무 것도 명징한 것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온 구석진 구멍에서 쥐가 들끓고, 쥐가 죽어 나자빠져서 세상으로 기어나오고, 학습효과로 인해 페스트가 의심되고, 쥐의 것인 줄 알던 것이 인간의 것이 되고, 증상이 나타나 누군가 쓰러지고 죽어가는데 산 자들이 그 이유를 밝혀내지 못한다. 인간이 넘나들 수 없는 재앙 앞에 짐작으로 내려야 하는 결단은 덧없다. 누군가 죽어나가야 그를 통해 사태를 짐작할 뿐인 일의 증거를 잡는 일은 범죄가 발생해 신고전화를 받아야만 출동하는 지구대와 다를 게 없어보인다. 여기는 카뮈가 만들어낸 가상의 도시이면서 실제 알제리 오랑주의 주도,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오랑이다.

 

재앙에 맞서는 인간의 모습은 위대하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가난, 절망, 전쟁과 질병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려는 인간의 처절한 사투를 맛보는 것과는 별개로, 인간이 위험에 대처하는 의연한 자세가 눈물겹도록 생생하게 그려진다. 놀랍다. 늘 놀랍지만 인간의 질긴 생명력과 가지각색의 반응, 집단 안에서 행해지는 위안에는 어쩔 수 없이 감탄하게 된다. 의사인 리유는 아픈 아내를 다른 도시의 요양원으로 보내놓고 노모와 함께 지내며 갑작스런 위험군에 대처하려 한다. 의사로서의 임무와 인간으로서의 온정, 책임 등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리유의 친구 타루는 앞장서서 페스트를 퇴치하려는 인물로 페스트 실태조사와 민간 봉사대를 결성하는 행동파, 옛 연인의 그림자 속에서 글을 쓰며 시청에서 근무하는 그랑과 가난과 고립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랑과 리유의 도움으로 살아난 코타르, 취재차 들어왔다가 페스트로 인해 시(마을)가 고립되자 나가려고 안간힘 쓰는 도피주의자 랑베르, 신이 모든 것을 돌봐줄 거란 기도로 이 상황을 타계하려는 회피주의자 파놀루 신부 등 다양한 인물군상을 주목해볼 수 있다. 행동대장인 타루의 제안으로 설립된 보건대는 위기 대처방안이었지 극복방안일 수 없었다. 세상에 온 순서, 가진 재산, 직업과 지위 등에 굴하지 않고 찾아오는 페스트가 소멸될 즈음 타루를 찾아온 것만 봐도 이 재앙은 공평한 동시에 공평하지 않다.

 

위험에 대처하는 다양한 자세를 통해 인간군상의 다사다난을 엿볼 수 있다. 역상황까지 생겨난다. 가난으로 고립되어 고통받던 코타르에게 페스트의 상황은 싫지 않다. 모두가 겁먹고 허둥대는 세상에서는 자신의 가난과 무능력이 창피하지 않게 느껴진 것이다. 죄가 있어도 없어도 누군가는 죽고 또 누군가는 다시 살아난다.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던 이들에게는 페스트를 타개하려는 의지를 갖는 일보다 페스트를 없애줄 힘이 강한 자를 기다리는 일이 더 쉽다. 타루와 리유를 비롯한 이들이 힘을 합쳐 혈청개발에 성공하고서야 겨우 몰아내지만 정작 페스트가 자취를 감추려할 즈음 타루에게 찾아온 병마가 그를 데려가 버린다. 행동주의자, 도피주의자, 회피주의자의 최후는 각각 달랐지만 처음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던 이들의 대처가 시간이 흐르며 한결같이 대항주의로 변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페스트가 인간의 원죄 혹은 신의 섭리라 믿고 기도만 하던 파놀루 신부나 도시를 나갈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린 랑베르에게서 인간이 고통을 초월해 재앙에 대항하려는 자의 자세를 본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박제되지 않는 능동주의적 성향을 갖는다. 설령 타루처럼 죽을 지라도 죽기 직전까지는 대항한다. 왜 살아있는가를 묻지 않으며 왜 대항해야 하는가 또한 설교하지 않는다. 부질없는 희망을 재촉하지도 않는다.

 

도시의 그토록 평화스럽고 무심한 고요를 보고 있노라면 그 무서운 전염병의 해묵은 이미지들은 손쉽게 지워져 버리는 것이었다. 페스트에 휩쓸려 새 한 마리 볼 수 없게 된 아테네, 말없이 죽음의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들만 가득한 중국의 도시들, 썩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시체들을 구덩이에 처넣고 있는 마르세유의 도형수들, 페스트의 광란하는 바람을 막기 위해 프로방스에 건설한 거대한 성벽, 자파와 그 도시의 끔찍스러운 거지들, 콘스탄티노플 병원의 진흙 바닥에 납작하게 깔린 채 썩어 가는 축축한 침상들, 흑사병이 창궐하는 동안 갈고리에 찍혀서 끌려 나가는 환자들, 마스크를 쓴 의사들의 카니발, 밀라노의 공동묘지에서 벌어진 산 사람들의 성교, 공포에 질린 런던 시의 시체 운반 수레들, 그리고 도처에서 항시 끊이지 않는 인간들의 비명으로 넘쳐 나는 밤과 낮.

 

페스트는 많은 것으로 대체 가능하다. 카뮈가 작품을 쓸 때 페스트의 상징은 프랑스를 전쟁의 광기로 몰아넣은 나치스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다른 국가와는 달리 홀로 독립하지 못한 알제리는 '페스트로 인해 오랑시에 고립된 이들'의 신세와 같았다. 페스트는 13세기 말 유럽과 아시아 일부지역을 죽음의 소굴로 몰아넣은 전력을 가진 인류 종말의 상징이다. 그래서 전쟁과 가난과 광기와 병마 등 온갖 재해로 해석가능하며 '현상 자체'로 대치가능하다. 부딪치고 짓밟히면서도 피어나는 꽃처럼 역동적이되 달콤한 향기로 형상화하는 일종의 미화된 묘사는 단 한 군데도 없다. 다소 지루하게 반복되는 과정의 과정을 함께 겪어내야 한다. 오늘날처럼 발달한 시대에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전염병은 없다. 에이즈를 비롯한 유명한 전염병 몇을 막지 않는 건 못해서가 아니라 하지 않아서이다. 그렇다면 가난과 반란, 폭동과 폭력, 전쟁은? 허무에 허우적대는 사람들과 절망에 빠져 희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페스트는 카뮈의 시대에도 저만큼이나 많은 끔찍함으로 세상을 농락했었다. 카뮈의 시대가 아닌 지금 현재, 페스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더 많은 종류의 페스트가 세상 이곳저곳에 골을 파고 들어앉았다. 쥐를 박멸하고 성벽을 쌓아올려 바람을 차단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시대가 되었고, 과학기술의 미흡으로 치부하려 했던 페스트의 존재는 더 강력하고 더 고약해졌다. 잔인함과 고통이 존재하는 한 카뮈 그리고 <페스트>는 또 읽힐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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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내게 모든 것이 낯설다는 것을 고백할 것
    from 너의 의미 2013-08-14 16:17 
    열 개의 거울 뒤에 숨은 카뮈. 눈으로 읽고 이해함으로서 만나는 카뮈, 카뮈, 카뮈에 대한 모든 것들. 세계, 고통, 대지, 어머니, 사람들, 사막, 명예, 비참, 여름, 바다. 좋아하는 누군가를 알기 위한 방법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마흔 여섯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카뮈가 남긴 소설, 산문, 희곡, 철학적 에세이, 시평, 사적인 글 등 다양한 장르적 탐색은 김화영 선생님의 오랜 노고로 번역되어 있는 전집을 읽음으로서 가능할 수 있다. 그의
 
 
이진 2012-12-15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카톡에 이름도 없고 글도 안 쓰고 댓글도 그 어디에든 안 달고해서 걱정했잖아욧! 일단 너무 반갑다는 말부터~^^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죠?

아이리시스 2012-12-15 18:36   좋아요 0 | URL
절대 아무 일도 없어요. 지금 도토리묵에 새로 담근 김치 먹어요. 그냥 감기와 비염을 좀 달고 겨울잠을 잔 것 밖에는. "시간이 이렇게 지난 줄 몰랐어요(겨울곰이 하는 인터뷰)."

소이진님 저 카톡에는 원래 이름도 없고 글도 안 썼고 댓글도 안 달잖아요. 쳇쳇쳇. 관심이 없어진거예욧? 소이진님 누나한테 한 번 말 걸라고 했잖아요. 바보짓 해서 계정을 새로 등록하고부터 소이진님 없어서 심심해 죽겠어요. 얼른얼른 아이디 알려줘요^________________^

p.s. 사실은 카스토리도 없어져서 시루스님도 사라짐.(이런 누나라서 미안해요ㅠㅠ)

2012-12-15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7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6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7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hining 2012-12-16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은 카뮈의 팬이었죠? 전집을 읽고 싶었던 유일한 작가, 라고 언젠가 말했잖아요. 저는 이방인과 작가노트, 밖에 읽지 않았지만ㅠ 아이님이 언젠가 까뮈에 대해 써주시면 제가 열심히 읽을 마음은 충분히 있어요....라고 은근히 부담주고 싶어요ㅎㅎ

아이리시스 2012-12-17 23:36   좋아요 0 | URL
예를 들면, 하고 싶은 이야기, 추구하고 싶은 주제 같은 것들을 학생 때는 굉장히 많이 구한 것 같아요. 그때는 철학적 통찰 같은 것을 얻고 싶었거든요. 창작을 해야 하니까 빈곤한 독서력과 세계를 보는 눈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퇴폐와 소외, 불안의 이미지를 동경하기도 했던 것 같고요. 그걸 하려고 했던 작가나 사상가에게 끌렸던 것 같아요. 근데 샤이닝님은 그런 걸 기억하는 구나, 짱이야ㅋㄷㅋㄷ 저는 문학에 대한 탐구정신이 별로 없어서 아마 죽을 때까지 누구의 모든 것을 읽으려고 시도하는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읽기'가 목표라면 저보다 샤이닝님이 더 잘할 것 같고, 저는 그냥 <페스트> 읽었다고 자랑을ㅋㅋㅋ <열세 걸음>도 읽었는데 샤이닝님 페이퍼에 그 책 있었으니까 그 책 돼서 샤이닝님 꼭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추워서 다시 감기올 것 같아요, 흑흑.

맥거핀 2012-12-16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카뮈의 페스트'라고 작가와 제목을 외우기만 하고 정작 작품을 읽지는 못했군요. 페스트라는 게 예전에는 정말 인류의 종말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 위용이 거의 사라져버렸잖아요? 그런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많은 것들도 언젠가는 별 것이 아닌 것이 되고, 인류도 또 그렇게 다음의 삶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뜬금없이 긍정적인 희망을 가져봅니다. 물론 또 동시에 부정적인 것은 그것을 극복하는 와중에서 전대의 역사가 되풀이한 어떤 끔찍한 일들 - 예를 들어 흑사병을 마녀들과 연관짓는 것과 같은 것들 - 을 우리가 또 우리 시대의 무엇인가를 극복하면서 분명히 되풀이할 것이라는 점이겠습니다만...

요즘같이 하 수상한 시대에 '쥐를 박멸'이라는 위험한 제목을 달면 안돼요..^^

아이리시스 2012-12-17 23:46   좋아요 0 | URL
저는 쥐를 박멸한다고 쓸 때에 한 번도 그분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방금 이게 뭐지 이런 기분이었다는. 마음에서 대통령님 갈아치운지 이미 오래ㅋㅋ 시국이 좋지 않았다면 제가 글을 엄청 잘 쓰면 쥐를 검색하면 카뮈가 튀어나올 수도 있는데 그러니까 음 제가 글을 그다지 잘 쓰지 못한 건 행운이랄까요. 의외로 되게되게 재밌고, 굉장히 지루한 설정에다 상황인데 절대 그렇지가 않거든요. 카뮈의 힘이죠. 그나저나 샤이닝님은 약속과 계획도 굉장히 잘 지키신다면서요? 저는 벌써 루소랑 프루스트였나, 묻지도 않으셨는데 혼자 말해놓고 뭐하는 짓. 맥거핀님 뵐 때마다 혼자 찌릿찌릿.

행여 내일 다시 끔찍해지더라도 지금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많은 것들이 언젠가는 별 것이 아니게 된다고 믿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요즘 희망을 말하면 뭔가 멍청하고 바보같고 얼간이 같은데도..
 
열세 걸음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0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그것은 피가 흐르는 날개를 끌며 일어섰다. 참새의 피가 너의 눈에 홍채를 한 겹 덧씌웠다. 햇빛은 핏빛으로 붉고, 참새는 황금 같았다. 피를 흘리고 금빛으로 반짝이고, 비둘기만큼이나 커다란 참새 한 마리가 너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오기 시작했다. 걸음마를 배우는 갓난아기처럼 걸음걸이가 휘청휘청 흔들렸다.

 

그것은 너를 향해 오고 있었다.
우리를 향해, 그리고 너희를 향해 오고 있었다.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한 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이름이 귀에 도달했을 때 그가 모옌이고 중국작가라는 점에서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대항자가 하루키라서가 아니라 중국문학에 대해 뼛속 깊이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이 책을 몇 장 넘기지 않은 상태에서 간파할 수 있었다. 그동안 중국문학의 대가로 꼽히는 작가(루쉰, 위화, 쑤퉁 등)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다. 단 한 편의 작품을 읽었을 뿐이므로 모옌과 중국문학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섣부르고 어쭙잖은 오만에 불과한 허세라는 사실이 머지않아 들통날 게 뻔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모옌의 문장은 몽롱하고 아름다우며, 삶의 오욕을 곱디 고운 문장으로 바꾸어 토사물처럼 처절하게 내뱉을 줄 안다. 이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가 그런 것처럼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낯설고 새로운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체험을 한다. 석류꽃 향기와 알록달록한 색과 다양한 모양을 띤 분필들과 핏빛 성욕 그리고 망치로 정수리를 얻어 맞은 채 기절해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진 수많은 토끼들 아니, 구질구질한 악취를 풍기며 길바닥에 나뒹구는 피와 살점이 덜렁거리는 우리들. 깎아 도려내고 싶은 얼굴로 비열한 미소를 흘리며 간사한 언어로 바닥을 기는 세상의 모든 의욕들. 모옌이 그리는 <열세 걸음>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반죽음의 상태이다.

 

생(生)은 현실에 발을 딛고 옳다고 믿거나 여기는 가치를 고수하며 존재하되, 시간과 공간을 하염없이 옮겨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도 가능한 의지라는 특권을 갖고 났지만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정작 얼마없다. 대부분의 것이 사회 혹은 국가라는 틀 안에 갇히고 더 좁게는 가정이나 가족 안에 다시 한 번 갇힌다. 새장 안에 갇힌 존재. 동물원 우리 안에 갇혀 쇠창살 사이로 건네받는 분필(먹이)에 그저 감사해하며 살아가야 한다.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으로 치열한 사회주의 계급투쟁 아래 인민의 이득이 최고 목표이고, 국가의 이득이 곧 개인의 이득이라는 이념 아래 살아온 중국인민들의 삶도 다르지 않다. 체제와 이념이 어떻든 비단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반박할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당대(초고는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수정은 2000년) 중국의 지식인은 제도적으로 국가체제에 의존하고 복종해야 했다. 교권이 완전히 무너진 사회에서 교사의 역할은 그저 국가대변인 아니면 새장에 갇힌 앵무새에 불과했다. 적은 봉급과 열악한 환경에 교육의 자유는 빼앗겼고 학생은 물론 교사 역시 대입의 압박에 시달렸다. 국가가 모든 것을 장악한 체제에서 개인의 혁명은 설 자리가 없었다. 스트레스와 과로로 교단에서 쓰러진 팡푸구이는 그간의 평판이나 그가 가졌던 생각과 생활에 전혀 구애받지 않은 채로 살아남은 이들의 입맛에 어울리도록 손질당한다. 그가 당국의 압박에 의한 과로와 스트레스로 죽었다고 발표함으로서 언론의 관심을 이끌어내 변화를 촉구하려는 관련자들의 이기심 때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누구에게도 진실을 캐낼 의무나 진심 따위는 없어도 된다. 얼마나 편리한 방식인가. 문제는 쓰러진 것이었을 뿐, 그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팡푸구이는 물리교사 장츠추가 되고, 장츠추는 교사를 그만두고 상인으로 내몰린다. 눈앞에서 빼앗긴 것을 복기할 여유조차 없는 이들의 화려한 몸부림은 그야말로 지옥에서의 발버둥과 다름없다. 양쪽 결과가 같단 걸 알면서 둘 중 하나를 강요하는 것을 선택권을 주는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죽은 줄 알았던 팡푸구이가 살아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되는 현실과 환상의 전복은 <열세 걸음>의 정수라고 해도 좋다. 중국문학과 모옌에 대한 모든 선입견을 판이하게 뒤집는다. 이야기 안에 또다른 이야기가 여러 번 끼여들고, 화자와 청자가 뒤바뀌고, 시점이 들쭉날쭉한 느낌이 예사롭지 않다. 죽은 자의 입으로 내는 소리는 흔적이 없어야 한다. 팡푸구이의 죽음 후 매일 밤 벽을 타고 들려오는 남편 잃은 투샤오잉의 절규는 죽은 자와 산 자 모두가 당하는 억압을 대변하는 속죄 드라마 한 편을 재연하는 것 같다. 사범대 러시아과의 예쁜 여대생이던 투샤오잉과 물리교사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이며 토끼고기통조림공장에서 토끼가죽을 벗기는 투샤오잉이 맞물리는 지점에서 팡푸구이가 죽어살 수밖에 없는 이유 아니 죽어살아야 하는 목적이 나온다. 인간은 고뇌를 통해 삶을 바로잡아가는 동물이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우리에 갇혀 던져주는 분필을 먹다가 내장과 뇌수가 흘러터져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지는 짐승과 다름없이 그려진다. 아내와 아이들을 지척에 두고도 찾지 못하는 팡푸구이와 제 직업을 두고 장사를 해야 하는 장츠추 모두 불행하고, 투샤오잉과 리위찬 역시 그렇다. 순결한 욕망은 더러운 관음이 되어 흘러넘칠 때까지 질주한다. 비극은 반복되고 심해지며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망각의 강을 건넌다.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던 이들, 살 자유는 물론 죽을 자유도 없던 이들의 슬픈 모노드라마가 시작된다.

 

성적환희의 몽상은 비루한 상상의 나래가 되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더러운 것에 다가가고 싶고 만지고 싶게 하는 충동, 금지된 욕망 앞에서 자가당착적 모순에 시달리는 인물들의 고통 역시 모옌이 구사하는 특이한 서술형식과 민담과 전설을 적절하게 배치한 환상적 구성과 만나 또렷한 마력을 드러낸다. 만지기 싫은 현실을 눈으로 보고 싶은 이는 없다. 그건 참새의 열세 걸음 째를 굳이 보겠다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어리석음과 무엇이 다른가. 바로 그것이 문학의 힘이다. 가혹하고 가차없는 현실의 비루함에 마술을 걸어 튀어나온 모습들로 궁극의 현재를 보여주는 모옌의 문체는 절망을 빛으로 바꾸고, 비극을 향해 역공을 퍼붓는다. 낯설고 신기한 기법이다. 이 마법은 속아넘기는 그런 같잖은 억지가 아니라 제자리에 놓인 것으로 재배열하여 재탄생시키는 또다른 황홀경의 재발견이다. 우린 굳이 마술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손뻗지 않고도 모든 환희와 쾌락, 고통을 체험함으로서 모옌의 문학적 세계로 깊숙이 들어간다. 걸어나오는 것은 자유이다. 살기 위해 했던 일이 곧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버린 과정을 읽는 일은 혹독하다. 파괴로서만 쾌락을 느끼고, 쾌락이 곧 살아있는 것이라 여겼던 두 부부. 팡푸구이와 투샤오잉, 장츠추와 리위찬의 엇갈리는 시선 속에서 탐하는 육체는 정신 속에서 더 탐스럽고 요물스러워진다. 약한 것은 밟고 강한 것에 따른다는 원칙 하에 진짜가 아닌 가짜로서의 삶을 강요당하는 이들의 끈적하고 질척한 과거의 성적유희는 주로 여자들의 것이다. 나란히 공산당 간부 왕 부시장에게 농락당했던 리위찬 모녀와 중국과 러시아 혼혈2세의 아맛빛 머리결을 가진 투샤오잉의 슬픈 미래는 연쇄적으로 부서져간다. 이들의 철로 끝에는 인민과 신성함의 대표 공장장의 향락에 바쳐진 재물이 되어 투신하는 투샤오잉이 있다.

 

혁명의 시대에는 눈물이 필요 없었다고 모옌은 서술하고 있다. 어차피 삶에서 죽음으로 걸어가는 인생이다. 사는 게 그럴 리 없듯 죽는 것 또한 뭐 그리 그토록 억울할 게 있을까. 그래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너무 오랫동안 서있는 일은 위험하다. 지옥문이 활짝 열려 두 팔을 벌린 채 빛과 그림자가 차례로 얼렁거리며 인도하는 몸짓은 인간다운 숨결로 싱그러운 꽃처럼 살고자 했던 이들에게 재앙이다. 누구도 들개들이 목을 물어뜯고 까마귀들이 오장육부를 끌어내고 개미떼가 백골로 만들어주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날짐승과 길짐승 사이 어디에도 몸을 놓지 못한 채 중간즈음에서 제 존재를 던져버리는 맹수 사육사만 해도 그렇다. 왜 불가능하겠는가. 살아서 제 거대함을 과시하던 시베리아 호랑이는 죽어서 뼈가 발려진 채 동물표본실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있는 '위안위안'과 '팡팡'은 맹수 사육사의 허울좋은 기세로 인육을 먹는다. 죽은 사람이 동물의 먹이가 되는 세상에 대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돈 앞에서 불가능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는 현실이 살아있는 자들을 내모는 방식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세상과 이 세상에 없는 이들의 영혼까지 비춘다. 살기 위해 제 존재를 없앤 팡푸구이 때문에 연쇄충돌로 불행해지는 투샤오잉과 그의 아이들, 장츠추와 리위찬 그리고 그의 아이들. 그들은 불행해도 괜찮은가. 사라지거나 지워버려도 좋은가. 소비에트 체제가 그랬듯 개인을 감싸줘야 할 유일한 조직체인 국가가 존속을 위해 개인의 자유의지와 행복을 억압하는 것. 그렇게 억압된 개인의 인격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마구 깨부수며 인민평등과 인민이득을 부르짖는 사회주의 체제는 단연 이념적 갈등에서만 오거나 비단 중국의 현재인 것만은 아니다. 가장 건드리기 싫은 구정물 속 비루함을 환상적인 마법으로 승화시켜 밑바닥까지 투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다가 울분처럼 내뱉어버리는 것. 모옌의 방식은 현실을 상키시키기에 충분하다.

 

추운 겨울 맨발로 내쫓긴 아이가 갈 곳은 어디일까. 동화라면 옷을 입히거나 돌아올 시간과 장소를 지정해주고 쫓는 게 미덕이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몰락하는 자에게 내미는 따스한 손은 없는 법이다. 한 번 추락한 순간 그들은 더 추운 곳, 더 더러운 곳, 더 비천한 곳, 더 질척이는 곳으로 내쫓기기만 한다. 마침내 혼란함과 황홀함이 교차하는 심경으로 책을 덮으며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망각의 강의 건넌 이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들이 선택한 순간 이미 끝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생생하게 확인하게 되어서이다. 희미한 기대나마 안고 있지 못하게 철저히 짓밟고 뭉개 더 멀리 보내버리는 게 미덕일까. 안일한 동정은 미덕보다 악덕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절뚝거리며 가버리는 절망을 보고 있어야 한다는 무력감 때문에 내내 괴롭다. 괴로움은 내 것이다. 문학은 위대하며 아름답다. 살아있는 자의 산 삶, 죽어있는 자의 죽은 삶은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산 자에게 죽음을 강요하고, 죽은 자에게 산 자의 역할을 부담하게 하는 일은 비겁하다. 국가는 여전히 개인을 위해 존재하고, 개인과 가정의 행복을 위해 존재의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이념과 사상이 어떠하든, 개인 없는 국가란 무인도에서 왕 노릇하는 어리석은 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엇이 다가오든 겁먹지 말자.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것이며, 각 개인의 의지와 주체성은 여전히 자신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언젠가 쓰러질 걸 알면서도 기어코 달려가는 것이 인간. 모옌의 <열세 걸음>은 바로 그 지점에서 살아있음과 의지를 지닌 자존의 의미를 알려주는 동시에 멀리서 제 몸을 뽐내는 별처럼 걸어오는, 문학을 가장한 환호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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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2013-01-19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이걸 왜 오픈으로 해두지 않았어요? 이 훌륭한 리뷰를.

아이리시스 2013-01-21 18:15   좋아요 0 | URL
땡큐땡큐(__) 한번 더.(__) 모옌이 새해 선물을 좀 크게 가져다줬죠. 모옌 만세! :D
 
왜 대통령들은 거짓말을 하는가? - 시민 권력을 위한 불온한 정치사史 울도 담도 없는 세상 1
하워드 진 지음, 김민웅 옮김 / 일상이상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히친스에 이어 하워드 진도 이 세상에 없다. 안 계신다. 아이쿠. 하지만 이 글들을 모아볼 수 있을 유일한 근거는 하나 뿐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의 사망. 그런데 원서도 2012년 출간이다. 번역출간은 늦지 않았다. 마지막 글에서도 2년 이상 지난 셈인데 괜찮을까. 이런 책들은 왜 항상 아주 옛날 것까지 모아서 한꺼번에 출간되나. 30년 전 글이 여전히 힘을 가질 수 있나. 의문이 없던 건 아니나, 나올만 하니 나왔겠지 싶기도 하고, 지나간 일을 되짚어볼 근거도 충분해서 읽는다. 근 30년(1980-2010)에 걸쳐 한 잡지에 기고한 글을 이 분 살아생전 단 한 편도 읽지 않다가 작고 후 읽게 되는 무심함이라니, 이보다 더 아쉬울 수도, 이보다 더 수지타산 안나오는 일도 없을 것 같다. 가난한 조선소 노동자 출신이라는 프로필 속 한 줄이 다른 어떤 것보다 눈에 박힌다. 그도 주로 진보 지식인 입장에 있었기에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시민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촘스키와 함께 이름이 오르내리지만 정작 타계소식이나 접하고서 아, 그 사람, 하는 나는 역시 깨어있지 못한, 시사에 관심 제로인 젊은이였다. 스스로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아는 게 있어야 하는데, 실천은커녕 이론적으로 제대로 알지 못하는 팩트의 정책들도 수없이 많다. 일단 1980년부터.

 

아, 이 정도면 이 책의 정체성을 잘 설명한 듯한데 덧붙이면, 왜 대통령들이 거짓말을 하는지 알려주는 책은 아니란 것이다. 나는 모르는 잡지 [The Progressive]

 

1980년대. 보스턴 대학의 학생들은 베트남 파병을 위한 모병에 반대하는 집회를 연다. 총장은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모병에는 눈을 감으면서 등록금이나 정규직 시위에는 학생과 교직원을 압박하는 이중성을 드러낸다. 아무도 굴하지 않았고 탄압이 어마어마한 상황에도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수없이 시도한 끝에 겨우 총장을 몰아낼 수 있었다. 모두 '평등'을 주장하고 '자유'를 주장하는 이가 한 사람 뿐이라도 그가 가진 권력의 파이가 더 크면 이미 굳어져버린 제도의 물살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옳고그름을 몰라서 바뀌지 않는 건 아니다. 한편 베트남 전쟁 때의 '공산주의자'라는 단어는 정부의 입맛에 맞게 변용되어 쓰였다. '소련이나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행해지고 있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해 합리적으로 비판하는 것과, 공산주의를 박멸해야 할 것으로 설정해 놓고 그걸 이유로 다른 나라에 폭탄을 투하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것'(p.40)에는 차이가 있음을 주장하며, 베트남 전쟁 때와는 달리 니카라과 좌파 정부 때에는 여론몰이가 어렵게 된 국가의 입장을 예로 든다. 깨어있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시민 앞에 되먹지 않은 여론몰이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명제를 보여줬다.

 

1990년대 민주화를 위한 연대는 신좌파 운동이란 이름으로 일어난다. 노조,농민,세입자,여성,인권 운동이란 이름으로 국제인권 문제에서 인종평등 문제까지 되짚는다. 올바른 말만 직설적으로 하는 편이어서 재밌다. 보스턴대 총장이었던 존 실버는 하워드 진이나 촘스키 같은 지식인을 두고 "학계의 우물에 독을 풀어넣는 자들"이라고도 했다. 우파들이 미국의 교육을 향해 내뱉는 비난 중에는 '토머스 하디의 문학작품과 함께 흑인 민권 운동가 말콤 엑스의 자서전을 읽기 전, 톨스토이와 루소의 글과 과테말라 원주민 리고베르타 멘추의 글을 읽기 전에 미국의 교육은 별 문제가 없었다'(p.61)라는 얘기가 있다. 하워드 진은 남부에서 일어난 흑인폭동의 과정에서 배우는 연대와 끈기의 결과에 빗대어 국제연대와 평등을 촉구한다. 이는 미국의 독립선언서에 있는 내용이자 1948년 선포된 세계인권선언에도 포함된 내용이다. 클린턴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을 묻어버리기 위해 토니 블레어와 함께 이라크를 폭격하고 있을 때 하워드 진에게 도착한 메일 한 통은 눈물겨웠다. 후세인 정권의 폭정으로 아버지와 동생을 잃고 영국으로 피신했지만 바로 그 후세인을 저지하기 위해 가족들이 살고있는 땅에 폭격을 시작한 미국과 영국의 정치지도자는 후세인과 다른 게 무엇이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대량살상무기에는 수많은 돈을 쓰면서 에이즈나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극을 아무렇지 않게 치부하는 것의 기만성은 하늘을 찌른지 오래되었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는 분노하며 희생자들을 애도하면서 정작 군사비에 들어가는 돈을 쓰지 않기 위한 무기와 지뢰 금지, 제3세계 군사 정권 지도자 훈련에서 손을 떼는 일에는 무관심한 서방세계 지도자들을 비난한다. 코소보 분리 독립 운동을 탄압하는 세르비아인들의 비인도적 처사를 묵인하는 미국의 입장을 체첸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을 때 벌인 러시아의 잔혹함을 묵인한 것과, 링컨 대통령이 남부 분리주의자들의 요구를 용납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으로 치부한 클린턴의 입장은 허용될 수 없는 수위였다. 현 코소보는 타국의 승인으로 독립한 상태이며, 여전히 세르비아와 러시아 등 몇몇 국가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코소보에 대한 무기 공급을 승인하며 제나라 이익만을 추구하는 미국의 행태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드디어 2000년대. '진퇴양난'을 의미하는 작전조항 <캐치-22>를 쓴 조지프 헬러의 작품 주인공 요사리안 대위는 폭격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보게들, 우리가 지금 폭격하려는 도시에는 그 어떤 군사목표물이나 철도, 산업도 없고 단지 사람들만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는 한가?"(p.108) 예술가들은 시,소설,노래,그림,연극으로 말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아버지들의 깃발], [진주만] 등 제2차 세계대전을 미화하는 전쟁영화와 책이 쏟아져 나온 시기는 대규모의 군사예산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의 전쟁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명분을 갖추어야 할 시점이었다. '전쟁의 대가들'이라는 밥 딜런의 노래가사, 마크 트웨인의 <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 조지 버나드 쇼의 <바바라 소령>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애국주의가 만들어놓은 안개를 뚫고 진실을 볼 줄 아는 예술인이라는 것을 안다. 게다가 디킨스, 톨스토이, 발자크, 스타인벡 등은 작품 속에서 가난한 자의 편을 든다. <컬러 퍼플>의 엘리스 워커, 마지 피어시, <작은 것들의 신>을 쓴 아룬다티 로이는 예술가로서 사회 운동가로 투쟁에 동참한 이들이다. 예술과 문화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떠들 필요가 없다. 이들의 목소리는 차라리 사회적 양심이다.

 

*

부시는 이란, 이라크, 북한이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하고 있다고 지목했다. 미국은 안 그런가? 아프가니스탄 폭격에만 집중하고 무한정한 전쟁에 대한 이야기에 파묻혀 지구적인 시장 체제의 희생자가 되어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의 문제와 노동자들의 안전을 무시하는 주체가 바로 미국이다. 자국에 쏟아지는 비난-이윤을 앞세우는 기업 지배 시스템에 대한 주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기 때문에, 명목상 안전을 핑계로 군사비를 합리화하는 것도 미국이다. 베트남전과 걸프전, 대테러, 칠면조 사냥하듯 죽였던 이라크의 무고한 병사들과 민간인들, 착한 편이 나쁜 편에게 했던 더 나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가한 원폭 투하. 전쟁은 언제나 무고한 이들을 죽인다. 여자와 아이들, 가난한 징집병들을. 세계화를 향해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인류의 생명이 평등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인권의 세계화가 먼저다. 적의 죽음은 그저 숫자나 추상적인 표현으로 둔갑시키고 자기 쪽 피해만 이야기화 하는 것. 미라이 학살의 진상은 잔혹한 학살에 직접 가담한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입을 열었기에 세상에 알려졌다. 이라크는 3류군사국에 중동에서도 높은 군사력을 가졌다고 말하기 어려운 나라이다. 반복된 전쟁과 긴 경제봉쇄로 이미 전락해버린 국가를 향해 아비규환격의 포탄을 퍼붓는 미국에서도 반전 운동과 정치적 반대자로서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정부의 권력은 결국 시민, 공무원, 군인, 언론인, 교사들이 복종해야만 유지된다. 터져나오는 각성과 반대의 목소리는 이미 권력이 붕괴되고 있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미국 시민들은 미국의 부를 채워주는 핵잠수함이나 항공모함 보다는 의료혜택, 일자리, 교육, 육아, 쾌적한 주택, 깨끗한 환경 등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환경에 자신들이 내는 세금이 쓰이기를 원한다. 전쟁이 자기들을 안전하게 해줄 거라는 맹목적 믿음이 미국 시민들에게서 사라져버린지 오래다. 우리나라 사설/칼럼/주간지마저 거의 못 챙겨보는 나도 하워드 진이 기고하는 글을 제때 읽었다면 그에게 열광했을 것이다. 어렵지 않고 에두르지 않고 직접적이고 정확한 언어를 사용해 할 말을 전달하는 그의 칼럼이 흥미롭다.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해서 좋고, 특히 미국이 관여한 1980-2010년의 국제적 활약상들-전쟁과 테러에 대처하는 자세, 빈곤이나 인권문제를 대하는 방법 등-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 좋다.

 

커트 보니거트는 사람들에게 왜 힘들게 계속해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도 당신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당신이 관심 갖고 있는 것에 나도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을 너무도 듣고 싶어 한다. 왜 그렇겠는가? 그런 생각과 느낌, 관심을 혼자서만 고독하게 가지고 있지 않다는 확증을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사실, 바로 이런 말을 전하기 위해 나는 글을 쓴다." 그러니까 커트 보니거트의 글을 읽는 전 세계의 무수한 이들은 '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나만은 아니로구나.' 생각하게 된다. 작가로서 이 이상 중요한 성취가 어디 있겠는가? (p.256)

 

시민들의 저항과 요구가 없다면 정부는 진보적 조처를 할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보다 평화로운 세상, 공평한 세상을 만들어주리라 기대한 오바마 대통령이 임기 1년도 채 되기 전 한 일이, 이전 대통령보다 더 많은 액수의 국방비를 허용하는 싸인을 한 것인 이상, 파키스탄을 미사일로 공격하는 일인 이상, 확인절차도 없이 9.11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무조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으로만 봐도 세계 도처에 널린 수많은 미국 군사기지를 철수할 생각이 없음이 명백해보인다. 군사주의 강경파로 돌아선 힐러리 클린턴이나 금융자본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로렌스 섬머스를 골라 쓰는 이상, 오바마의 색다른 자유와 평화, 인권에 대해 기대하기란 어렵다. 비록 미국역사 속 수많은 희생과 시위 속에서 진보가 이루어짐으로서 노예 제도를 부인하는 수정 헌법 14조와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이 미국 시민임을 밝히는 14조,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15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해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제5도살장>의 커트 보니거트가 항상 인용하곤 했던 미국 사회주의자이자 유진 뎁스의 말을 쓰고 싶다.

 

"누군가가 착취당하는 하층계급이 있는 한, 나 자신도 그런 현실에 무관할 수 없다. 이 사회에 범죄가 있는 한, 나 자신 역시 그 범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양심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다면 나는 아무리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다 해도 사실은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p.109)

 

미국은 최초 흑인 대통령 재임을 선택하며 새로운 시대를 쓰고 있고, 우리도 곧 있을 대선을 위해 달려가고 있지만, 시대의 미래가 보여줄 희망적인 상징들이 상실되고 있는 것 같다. 라다크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오래된 미래라도 기대해야 할 판. 하워드 진의 유작이 된 이 책은 그야말로 진보적 입장-다 함께 잘 살자-에서 보는 미국 역사 자체였다. 주로 평화, 평등을 얘기하는, 아주 오래됐지만 여전히 답보중인 지구상의 오래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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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1-23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나 왔어요.
학예회를 고등학교 오니까 1박 2일로 하데요. 어제는 교내에서 먹거리 마당하고 강당에서 축제하고, 오늘은 전교생이 운동장에 우르르 모여서 놀이마당했어요. 둥글게 돌다가 부르는 수에 맞춰 짝 짓는 게임도 하고, OX 퀴즈도 했어요. 어제 쭈그려 앉아 카메라를 들고 동영상을 찍다가 망가지기 일보직전까지 가버린 팔과 다리가 욱신거려서 죽는 줄 알았지요. 허헛.
어쨌든, 가스펠 뭐가 궁금해요?... 나 모르는 거면 답 안해줄래요 ㅎㅎ

아이리시스 2012-11-23 19:42   좋아요 0 | URL
우왓, 학예회.. 우리때는 그런 거 안했는데요. 우린 그냥 학예전. 저는 사진부였어요. 그거 클럽활동으로 사진찍은 거 전시하는 거. 그런데 놀이마당은 진정한 축제잖아요. 뭐 세대는 흘러가고 학교도 변해가니까 소이진님은 좋겠다ㅋㅋㅋ

이렇게 공개적으로 묻지는 않을 거예요! 히히히

댈러웨이 2012-11-24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넋 놓고 읽어나가다가 토마스 하디에서 한번 깜짝 놀라서 넘어졌고, 커트 보니거트에서 한번 더 넘어졌어요. 일전에 소개해줬던 히친스에 대한 책도 매큐언때문에라도 읽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워드 진, 이 책도 흥미롭겠어요. 뭐 어떻게 댓글을 달 수가 있는 페이퍼가 아닌데, 저는 꿋꿋하게. 하하하. 정말 잘 읽었어요. '모든 것을 시도해보다가'라는 아이님의 의견을 100프로 지지하면서. ^^

아이리시스 2012-11-24 17:44   좋아요 0 | URL
댓글 못보셨겠지만 앞엣것 지우고 다시. 그저께 새로 배송온 새이불 통돌이 세탁기에 빨다가 찢어져서 솜이 튀어나왔어요. 으히히. 히친스는 매큐언이랑, 하워드 진은 커트 보니거트, 아이리시스는 댈러웨이님이랑 친구가 맞고 평화와 평등은 우주의 진리예요. 이분이 미국비판을 다 하고나니까 저는 할 일이 없어서 토욜인데 그저 뒹굴거리는데 하필 화장실 들어간 시점에 택배가 와서 문을 디따 크게 두드려서 소리도 못지르고 나가지도 못하고 그냥 없는 척했어요--;; 그책 제목이 말예요, <죽음이란 무엇인가>(그건 분명 책일테니까!)이거든요, 없는 척한 거 들켰을까요? 뮤직뱅크가 디따 큰 볼륨으로 티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거든요-_-;;

댈러웨이 2012-11-24 19:09   좋아요 0 | URL
어우 대체 몬 소리에요? --;

아이리시스 2012-11-24 19:21   좋아요 0 | URL
응? 새이불은 찢어지고 택배는 경비실로 갔고 저는 너무 졸려요ㅠ.ㅠ
댈러웨이님 뭐해요? 저는요, 장윤주 새앨범 듣고 있어요. 밥도 먹었어요. 토요일이 뭐 이래--;

2012-11-24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7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8 0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8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8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11-26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거 보면 사실 미국대통령 선거 같은 것은 '나쁜넘'과 '더나쁜넘' 사이에 누구를 선택하는 것인가, 같은 거라고 생각되기도 해요(무한도전에서 못생긴팀과 더못생긴팀으로 나누는 것처럼). 우리의 대통령 선거는 그렇지 않았으면 싶은데 돌아가는 양상을 보니 우리도 그닥 다를 건 없을 것 같고..아무튼 그래도 그로 인해 냉소에 빠지면 안되겠죠. 이분들이 죽기 직전까지 글을 쓰신 이유도 그렇게 되라고 쓰신 것도 아닐테고.

주말 내내 몸이 안좋았는데, 회복이 잘 안되네요. 건강 잘 챙기세요.^^

아이리시스 2012-11-27 01:04   좋아요 0 | URL
그렇잖아도 주말동안 제가 본 뉴스며 트윗멘션이며 때문에 삶이 피폐해졌어요. <터치>도 봤어요. 방금전 토론은 뭡니까. 자기편만 나와서 정해진대로 주고받는 것도 요즘은 토론이라 부릅니까. 무한도전은 백만년만에 지난주부터 다운로드를 해놨는데요. 어제는 티비 나른다고 하루종일 짐옮기고 청소한다고 시간이 없었어요ㅠ.ㅠ

아팠어요? 으아ㅠ.ㅠ 얼른 나으세요. 아프면 안돼요!!!

맥거핀 2012-11-27 23:45   좋아요 0 | URL
솔직히 말해서 이제 박도 문도 안도 왠지 지겨워요. 요즘 TV보면서 느끼는 건 정치평론가가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았나, 이 생각이 들어요.

걱정 감사, 몸은 상당히 좋아졌어요. (근데 TV는 잘 나오죠?)

아이리시스 2012-11-28 16:39   좋아요 0 | URL
어휴. 질렸어요, 아주! 4000만명이 정치평론가가 된 것 같던데. 그저 내 지지가 확고하니 반대편의 얘기도 귀담아들을 나이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해서 좀 알고 싶었어요. 근데 이건 뭐ㅠ.ㅠ

날이 추워서 정신줄 놓고 있으면 금방 병날 것 같아요. TV는 아직 소식을 못 들었는데요. 사실은 제가 든 것도 아니지만. 차에 실려갔으니 곧 운명이 결정될 것 같아요(TV의 운명이란!).

2012-12-04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9 2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1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4 1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