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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평점 :
<페스트>의 페스트에는 목적이 없다. 과정만 있다. 페스트는 뻥하고 터지는 폭발이 아니고 폭죽처럼 파티의 시작을 알리지도 못하며 지리한 페스트가 언제쯤 사라지나를 기다리다가는 평생토록 카뮈를 읽어낼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 없이 카뮈를 말할 수 있을 리도 만무하니, 역시 고꾸라지거나 완주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몇 번을 읽어도 쓰레기더미로 떨어져 함께 구르는 듯한 기분이라니, 게다가 쥐, 이 쥐는 또 어쩔 셈인가. 구역질이 참아지지 않는다. 쥐를 박멸한다 해서 페스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될 뿐이다.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고 해야만 하는 것이 도처에 널렸다. 진퇴양난과 좌불안석을 체험하는 이런 독서. 나는 카뮈를 적잖게 읽었고 한때 하고 싶은 얘기를 제법 많이 구했지만 지금은 모든 게 어렵기만 하다. 카뮈를 평생에 걸쳐 보잘 것 없는 리뷰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려 다짐한 적도 있지만 구태함을 벗어날 길 없는 이 글을 시작으로 그 또한 깨질 것 같다. 당최 일관성 없는 결심과 계획이란 것은 언제쯤 완전히 털어낼 수 있을까. 이 순간에도 머리는 계획표를 짠다. 이런 내가 내게는 페스트 같다. 페스트는 질병이자 전염병이고 재앙이지만 카뮈가 쓴 <페스트>가 단지 전염성 질병에 그쳤다면, 그렇게만 읽힌다면 그의 작품이 이토록 유명할 까닭이 없다. <페스트>가 부조리와 실존문학의 타당성을 높게 획득하는 이유는 그것이 반복되는 인간사 속에서 갑작스레 닥친 불안이나 불행이 아니라 늘 존재하고 있다가 특정 계기로 인해 일촉즉발하여, 무통에서 고통까지 경계없이 넘나드는 비극의 소용돌이를 몰고오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한 번 휩싸이면 웬만해선 제 힘으로 벗어날 자구(自救)가 없는 소용돌이.
지구 최후의 날을 그리는 '인류 대재앙과 종말(화산폭발과 지진 등의 자연재해나 핵폭발이나 전쟁으로 인한 징조)'을 소재로 하는 여러 영화가 떠오른다. [나는 전설이다]를 본 후 비슷한 종류의 영화들에 영 흥미를 잃었지만 지구상 누구도 종말을 체험해본 적 없다는 점에서 보자면 그들이 빚어내는 상상력은 가히 칭송할 만한 것이다. 사실 그런 소재의 영화들과 <페스트>에는 그리 큰 공통점이 없다. 모든 것이 사라져 폐허로 변한 세상의 길을 따라 아버지와 아들이 걸으며 나누는 대화와 주변 상황의 묘사로 이루어진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의 끝. 그 끝은 가봐야만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끝까지 걸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멈춰서 기다리는 이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겪어야 알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페스트>의 페스트에는 아무 것도 명징한 것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온 구석진 구멍에서 쥐가 들끓고, 쥐가 죽어 나자빠져서 세상으로 기어나오고, 학습효과로 인해 페스트가 의심되고, 쥐의 것인 줄 알던 것이 인간의 것이 되고, 증상이 나타나 누군가 쓰러지고 죽어가는데 산 자들이 그 이유를 밝혀내지 못한다. 인간이 넘나들 수 없는 재앙 앞에 짐작으로 내려야 하는 결단은 덧없다. 누군가 죽어나가야 그를 통해 사태를 짐작할 뿐인 일의 증거를 잡는 일은 범죄가 발생해 신고전화를 받아야만 출동하는 지구대와 다를 게 없어보인다. 여기는 카뮈가 만들어낸 가상의 도시이면서 실제 알제리 오랑주의 주도,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오랑이다.
재앙에 맞서는 인간의 모습은 위대하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가난, 절망, 전쟁과 질병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려는 인간의 처절한 사투를 맛보는 것과는 별개로, 인간이 위험에 대처하는 의연한 자세가 눈물겹도록 생생하게 그려진다. 놀랍다. 늘 놀랍지만 인간의 질긴 생명력과 가지각색의 반응, 집단 안에서 행해지는 위안에는 어쩔 수 없이 감탄하게 된다. 의사인 리유는 아픈 아내를 다른 도시의 요양원으로 보내놓고 노모와 함께 지내며 갑작스런 위험군에 대처하려 한다. 의사로서의 임무와 인간으로서의 온정, 책임 등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리유의 친구 타루는 앞장서서 페스트를 퇴치하려는 인물로 페스트 실태조사와 민간 봉사대를 결성하는 행동파, 옛 연인의 그림자 속에서 글을 쓰며 시청에서 근무하는 그랑과 가난과 고립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랑과 리유의 도움으로 살아난 코타르, 취재차 들어왔다가 페스트로 인해 시(마을)가 고립되자 나가려고 안간힘 쓰는 도피주의자 랑베르, 신이 모든 것을 돌봐줄 거란 기도로 이 상황을 타계하려는 회피주의자 파놀루 신부 등 다양한 인물군상을 주목해볼 수 있다. 행동대장인 타루의 제안으로 설립된 보건대는 위기 대처방안이었지 극복방안일 수 없었다. 세상에 온 순서, 가진 재산, 직업과 지위 등에 굴하지 않고 찾아오는 페스트가 소멸될 즈음 타루를 찾아온 것만 봐도 이 재앙은 공평한 동시에 공평하지 않다.
위험에 대처하는 다양한 자세를 통해 인간군상의 다사다난을 엿볼 수 있다. 역상황까지 생겨난다. 가난으로 고립되어 고통받던 코타르에게 페스트의 상황은 싫지 않다. 모두가 겁먹고 허둥대는 세상에서는 자신의 가난과 무능력이 창피하지 않게 느껴진 것이다. 죄가 있어도 없어도 누군가는 죽고 또 누군가는 다시 살아난다.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줄 알았던 이들에게는 페스트를 타개하려는 의지를 갖는 일보다 페스트를 없애줄 힘이 강한 자를 기다리는 일이 더 쉽다. 타루와 리유를 비롯한 이들이 힘을 합쳐 혈청개발에 성공하고서야 겨우 몰아내지만 정작 페스트가 자취를 감추려할 즈음 타루에게 찾아온 병마가 그를 데려가 버린다. 행동주의자, 도피주의자, 회피주의자의 최후는 각각 달랐지만 처음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던 이들의 대처가 시간이 흐르며 한결같이 대항주의로 변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페스트가 인간의 원죄 혹은 신의 섭리라 믿고 기도만 하던 파놀루 신부나 도시를 나갈 기회를 제 발로 차버린 랑베르에게서 인간이 고통을 초월해 재앙에 대항하려는 자의 자세를 본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박제되지 않는 능동주의적 성향을 갖는다. 설령 타루처럼 죽을 지라도 죽기 직전까지는 대항한다. 왜 살아있는가를 묻지 않으며 왜 대항해야 하는가 또한 설교하지 않는다. 부질없는 희망을 재촉하지도 않는다.
도시의 그토록 평화스럽고 무심한 고요를 보고 있노라면 그 무서운 전염병의 해묵은 이미지들은 손쉽게 지워져 버리는 것이었다. 페스트에 휩쓸려 새 한 마리 볼 수 없게 된 아테네, 말없이 죽음의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들만 가득한 중국의 도시들, 썩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시체들을 구덩이에 처넣고 있는 마르세유의 도형수들, 페스트의 광란하는 바람을 막기 위해 프로방스에 건설한 거대한 성벽, 자파와 그 도시의 끔찍스러운 거지들, 콘스탄티노플 병원의 진흙 바닥에 납작하게 깔린 채 썩어 가는 축축한 침상들, 흑사병이 창궐하는 동안 갈고리에 찍혀서 끌려 나가는 환자들, 마스크를 쓴 의사들의 카니발, 밀라노의 공동묘지에서 벌어진 산 사람들의 성교, 공포에 질린 런던 시의 시체 운반 수레들, 그리고 도처에서 항시 끊이지 않는 인간들의 비명으로 넘쳐 나는 밤과 낮.
페스트는 많은 것으로 대체 가능하다. 카뮈가 작품을 쓸 때 페스트의 상징은 프랑스를 전쟁의 광기로 몰아넣은 나치스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다른 국가와는 달리 홀로 독립하지 못한 알제리는 '페스트로 인해 오랑시에 고립된 이들'의 신세와 같았다. 페스트는 13세기 말 유럽과 아시아 일부지역을 죽음의 소굴로 몰아넣은 전력을 가진 인류 종말의 상징이다. 그래서 전쟁과 가난과 광기와 병마 등 온갖 재해로 해석가능하며 '현상 자체'로 대치가능하다. 부딪치고 짓밟히면서도 피어나는 꽃처럼 역동적이되 달콤한 향기로 형상화하는 일종의 미화된 묘사는 단 한 군데도 없다. 다소 지루하게 반복되는 과정의 과정을 함께 겪어내야 한다. 오늘날처럼 발달한 시대에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전염병은 없다. 에이즈를 비롯한 유명한 전염병 몇을 막지 않는 건 못해서가 아니라 하지 않아서이다. 그렇다면 가난과 반란, 폭동과 폭력, 전쟁은? 허무에 허우적대는 사람들과 절망에 빠져 희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페스트는 카뮈의 시대에도 저만큼이나 많은 끔찍함으로 세상을 농락했었다. 카뮈의 시대가 아닌 지금 현재, 페스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더 많은 종류의 페스트가 세상 이곳저곳에 골을 파고 들어앉았다. 쥐를 박멸하고 성벽을 쌓아올려 바람을 차단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시대가 되었고, 과학기술의 미흡으로 치부하려 했던 페스트의 존재는 더 강력하고 더 고약해졌다. 잔인함과 고통이 존재하는 한 카뮈 그리고 <페스트>는 또 읽힐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