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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걸음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0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평점 :
그것은 피가 흐르는 날개를 끌며 일어섰다. 참새의 피가 너의 눈에 홍채를 한 겹 덧씌웠다. 햇빛은 핏빛으로 붉고, 참새는 황금 같았다. 피를 흘리고 금빛으로 반짝이고, 비둘기만큼이나 커다란 참새 한 마리가 너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오기 시작했다. 걸음마를 배우는 갓난아기처럼 걸음걸이가 휘청휘청 흔들렸다.
그것은 너를 향해 오고 있었다.
우리를 향해, 그리고 너희를 향해 오고 있었다.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한 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이름이 귀에 도달했을 때 그가 모옌이고 중국작가라는 점에서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대항자가 하루키라서가 아니라 중국문학에 대해 뼛속 깊이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이 책을 몇 장 넘기지 않은 상태에서 간파할 수 있었다. 그동안 중국문학의 대가로 꼽히는 작가(루쉰, 위화, 쑤퉁 등)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다. 단 한 편의 작품을 읽었을 뿐이므로 모옌과 중국문학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섣부르고 어쭙잖은 오만에 불과한 허세라는 사실이 머지않아 들통날 게 뻔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모옌의 문장은 몽롱하고 아름다우며, 삶의 오욕을 곱디 고운 문장으로 바꾸어 토사물처럼 처절하게 내뱉을 줄 안다. 이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가 그런 것처럼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낯설고 새로운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체험을 한다. 석류꽃 향기와 알록달록한 색과 다양한 모양을 띤 분필들과 핏빛 성욕 그리고 망치로 정수리를 얻어 맞은 채 기절해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진 수많은 토끼들 아니, 구질구질한 악취를 풍기며 길바닥에 나뒹구는 피와 살점이 덜렁거리는 우리들. 깎아 도려내고 싶은 얼굴로 비열한 미소를 흘리며 간사한 언어로 바닥을 기는 세상의 모든 의욕들. 모옌이 그리는 <열세 걸음>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반죽음의 상태이다.
생(生)은 현실에 발을 딛고 옳다고 믿거나 여기는 가치를 고수하며 존재하되, 시간과 공간을 하염없이 옮겨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도 가능한 의지라는 특권을 갖고 났지만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정작 얼마없다. 대부분의 것이 사회 혹은 국가라는 틀 안에 갇히고 더 좁게는 가정이나 가족 안에 다시 한 번 갇힌다. 새장 안에 갇힌 존재. 동물원 우리 안에 갇혀 쇠창살 사이로 건네받는 분필(먹이)에 그저 감사해하며 살아가야 한다.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으로 치열한 사회주의 계급투쟁 아래 인민의 이득이 최고 목표이고, 국가의 이득이 곧 개인의 이득이라는 이념 아래 살아온 중국인민들의 삶도 다르지 않다. 체제와 이념이 어떻든 비단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반박할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당대(초고는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수정은 2000년) 중국의 지식인은 제도적으로 국가체제에 의존하고 복종해야 했다. 교권이 완전히 무너진 사회에서 교사의 역할은 그저 국가대변인 아니면 새장에 갇힌 앵무새에 불과했다. 적은 봉급과 열악한 환경에 교육의 자유는 빼앗겼고 학생은 물론 교사 역시 대입의 압박에 시달렸다. 국가가 모든 것을 장악한 체제에서 개인의 혁명은 설 자리가 없었다. 스트레스와 과로로 교단에서 쓰러진 팡푸구이는 그간의 평판이나 그가 가졌던 생각과 생활에 전혀 구애받지 않은 채로 살아남은 이들의 입맛에 어울리도록 손질당한다. 그가 당국의 압박에 의한 과로와 스트레스로 죽었다고 발표함으로서 언론의 관심을 이끌어내 변화를 촉구하려는 관련자들의 이기심 때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누구에게도 진실을 캐낼 의무나 진심 따위는 없어도 된다. 얼마나 편리한 방식인가. 문제는 쓰러진 것이었을 뿐, 그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팡푸구이는 물리교사 장츠추가 되고, 장츠추는 교사를 그만두고 상인으로 내몰린다. 눈앞에서 빼앗긴 것을 복기할 여유조차 없는 이들의 화려한 몸부림은 그야말로 지옥에서의 발버둥과 다름없다. 양쪽 결과가 같단 걸 알면서 둘 중 하나를 강요하는 것을 선택권을 주는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죽은 줄 알았던 팡푸구이가 살아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되는 현실과 환상의 전복은 <열세 걸음>의 정수라고 해도 좋다. 중국문학과 모옌에 대한 모든 선입견을 판이하게 뒤집는다. 이야기 안에 또다른 이야기가 여러 번 끼여들고, 화자와 청자가 뒤바뀌고, 시점이 들쭉날쭉한 느낌이 예사롭지 않다. 죽은 자의 입으로 내는 소리는 흔적이 없어야 한다. 팡푸구이의 죽음 후 매일 밤 벽을 타고 들려오는 남편 잃은 투샤오잉의 절규는 죽은 자와 산 자 모두가 당하는 억압을 대변하는 속죄 드라마 한 편을 재연하는 것 같다. 사범대 러시아과의 예쁜 여대생이던 투샤오잉과 물리교사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이며 토끼고기통조림공장에서 토끼가죽을 벗기는 투샤오잉이 맞물리는 지점에서 팡푸구이가 죽어살 수밖에 없는 이유 아니 죽어살아야 하는 목적이 나온다. 인간은 고뇌를 통해 삶을 바로잡아가는 동물이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우리에 갇혀 던져주는 분필을 먹다가 내장과 뇌수가 흘러터져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지는 짐승과 다름없이 그려진다. 아내와 아이들을 지척에 두고도 찾지 못하는 팡푸구이와 제 직업을 두고 장사를 해야 하는 장츠추 모두 불행하고, 투샤오잉과 리위찬 역시 그렇다. 순결한 욕망은 더러운 관음이 되어 흘러넘칠 때까지 질주한다. 비극은 반복되고 심해지며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망각의 강을 건넌다.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던 이들, 살 자유는 물론 죽을 자유도 없던 이들의 슬픈 모노드라마가 시작된다.
성적환희의 몽상은 비루한 상상의 나래가 되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더러운 것에 다가가고 싶고 만지고 싶게 하는 충동, 금지된 욕망 앞에서 자가당착적 모순에 시달리는 인물들의 고통 역시 모옌이 구사하는 특이한 서술형식과 민담과 전설을 적절하게 배치한 환상적 구성과 만나 또렷한 마력을 드러낸다. 만지기 싫은 현실을 눈으로 보고 싶은 이는 없다. 그건 참새의 열세 걸음 째를 굳이 보겠다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어리석음과 무엇이 다른가. 바로 그것이 문학의 힘이다. 가혹하고 가차없는 현실의 비루함에 마술을 걸어 튀어나온 모습들로 궁극의 현재를 보여주는 모옌의 문체는 절망을 빛으로 바꾸고, 비극을 향해 역공을 퍼붓는다. 낯설고 신기한 기법이다. 이 마법은 속아넘기는 그런 같잖은 억지가 아니라 제자리에 놓인 것으로 재배열하여 재탄생시키는 또다른 황홀경의 재발견이다. 우린 굳이 마술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손뻗지 않고도 모든 환희와 쾌락, 고통을 체험함으로서 모옌의 문학적 세계로 깊숙이 들어간다. 걸어나오는 것은 자유이다. 살기 위해 했던 일이 곧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버린 과정을 읽는 일은 혹독하다. 파괴로서만 쾌락을 느끼고, 쾌락이 곧 살아있는 것이라 여겼던 두 부부. 팡푸구이와 투샤오잉, 장츠추와 리위찬의 엇갈리는 시선 속에서 탐하는 육체는 정신 속에서 더 탐스럽고 요물스러워진다. 약한 것은 밟고 강한 것에 따른다는 원칙 하에 진짜가 아닌 가짜로서의 삶을 강요당하는 이들의 끈적하고 질척한 과거의 성적유희는 주로 여자들의 것이다. 나란히 공산당 간부 왕 부시장에게 농락당했던 리위찬 모녀와 중국과 러시아 혼혈2세의 아맛빛 머리결을 가진 투샤오잉의 슬픈 미래는 연쇄적으로 부서져간다. 이들의 철로 끝에는 인민과 신성함의 대표 공장장의 향락에 바쳐진 재물이 되어 투신하는 투샤오잉이 있다.
혁명의 시대에는 눈물이 필요 없었다고 모옌은 서술하고 있다. 어차피 삶에서 죽음으로 걸어가는 인생이다. 사는 게 그럴 리 없듯 죽는 것 또한 뭐 그리 그토록 억울할 게 있을까. 그래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너무 오랫동안 서있는 일은 위험하다. 지옥문이 활짝 열려 두 팔을 벌린 채 빛과 그림자가 차례로 얼렁거리며 인도하는 몸짓은 인간다운 숨결로 싱그러운 꽃처럼 살고자 했던 이들에게 재앙이다. 누구도 들개들이 목을 물어뜯고 까마귀들이 오장육부를 끌어내고 개미떼가 백골로 만들어주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날짐승과 길짐승 사이 어디에도 몸을 놓지 못한 채 중간즈음에서 제 존재를 던져버리는 맹수 사육사만 해도 그렇다. 왜 불가능하겠는가. 살아서 제 거대함을 과시하던 시베리아 호랑이는 죽어서 뼈가 발려진 채 동물표본실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있는 '위안위안'과 '팡팡'은 맹수 사육사의 허울좋은 기세로 인육을 먹는다. 죽은 사람이 동물의 먹이가 되는 세상에 대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돈 앞에서 불가능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는 현실이 살아있는 자들을 내모는 방식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세상과 이 세상에 없는 이들의 영혼까지 비춘다. 살기 위해 제 존재를 없앤 팡푸구이 때문에 연쇄충돌로 불행해지는 투샤오잉과 그의 아이들, 장츠추와 리위찬 그리고 그의 아이들. 그들은 불행해도 괜찮은가. 사라지거나 지워버려도 좋은가. 소비에트 체제가 그랬듯 개인을 감싸줘야 할 유일한 조직체인 국가가 존속을 위해 개인의 자유의지와 행복을 억압하는 것. 그렇게 억압된 개인의 인격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마구 깨부수며 인민평등과 인민이득을 부르짖는 사회주의 체제는 단연 이념적 갈등에서만 오거나 비단 중국의 현재인 것만은 아니다. 가장 건드리기 싫은 구정물 속 비루함을 환상적인 마법으로 승화시켜 밑바닥까지 투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다가 울분처럼 내뱉어버리는 것. 모옌의 방식은 현실을 상키시키기에 충분하다.
추운 겨울 맨발로 내쫓긴 아이가 갈 곳은 어디일까. 동화라면 옷을 입히거나 돌아올 시간과 장소를 지정해주고 쫓는 게 미덕이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몰락하는 자에게 내미는 따스한 손은 없는 법이다. 한 번 추락한 순간 그들은 더 추운 곳, 더 더러운 곳, 더 비천한 곳, 더 질척이는 곳으로 내쫓기기만 한다. 마침내 혼란함과 황홀함이 교차하는 심경으로 책을 덮으며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망각의 강의 건넌 이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들이 선택한 순간 이미 끝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생생하게 확인하게 되어서이다. 희미한 기대나마 안고 있지 못하게 철저히 짓밟고 뭉개 더 멀리 보내버리는 게 미덕일까. 안일한 동정은 미덕보다 악덕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절뚝거리며 가버리는 절망을 보고 있어야 한다는 무력감 때문에 내내 괴롭다. 괴로움은 내 것이다. 문학은 위대하며 아름답다. 살아있는 자의 산 삶, 죽어있는 자의 죽은 삶은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산 자에게 죽음을 강요하고, 죽은 자에게 산 자의 역할을 부담하게 하는 일은 비겁하다. 국가는 여전히 개인을 위해 존재하고, 개인과 가정의 행복을 위해 존재의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이념과 사상이 어떠하든, 개인 없는 국가란 무인도에서 왕 노릇하는 어리석은 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엇이 다가오든 겁먹지 말자.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것이며, 각 개인의 의지와 주체성은 여전히 자신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언젠가 쓰러질 걸 알면서도 기어코 달려가는 것이 인간. 모옌의 <열세 걸음>은 바로 그 지점에서 살아있음과 의지를 지닌 자존의 의미를 알려주는 동시에 멀리서 제 몸을 뽐내는 별처럼 걸어오는, 문학을 가장한 환호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