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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통령들은 거짓말을 하는가? - 시민 권력을 위한 불온한 정치사史 ㅣ 울도 담도 없는 세상 1
하워드 진 지음, 김민웅 옮김 / 일상이상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히친스에 이어 하워드 진도 이 세상에 없다. 안 계신다. 아이쿠. 하지만 이 글들을 모아볼 수 있을 유일한 근거는 하나 뿐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의 사망. 그런데 원서도 2012년 출간이다. 번역출간은 늦지 않았다. 마지막 글에서도 2년 이상 지난 셈인데 괜찮을까. 이런 책들은 왜 항상 아주 옛날 것까지 모아서 한꺼번에 출간되나. 30년 전 글이 여전히 힘을 가질 수 있나. 의문이 없던 건 아니나, 나올만 하니 나왔겠지 싶기도 하고, 지나간 일을 되짚어볼 근거도 충분해서 읽는다. 근 30년(1980-2010)에 걸쳐 한 잡지에 기고한 글을 이 분 살아생전 단 한 편도 읽지 않다가 작고 후 읽게 되는 무심함이라니, 이보다 더 아쉬울 수도, 이보다 더 수지타산 안나오는 일도 없을 것 같다. 가난한 조선소 노동자 출신이라는 프로필 속 한 줄이 다른 어떤 것보다 눈에 박힌다. 그도 주로 진보 지식인 입장에 있었기에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시민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촘스키와 함께 이름이 오르내리지만 정작 타계소식이나 접하고서 아, 그 사람, 하는 나는 역시 깨어있지 못한, 시사에 관심 제로인 젊은이였다. 스스로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아는 게 있어야 하는데, 실천은커녕 이론적으로 제대로 알지 못하는 팩트의 정책들도 수없이 많다. 일단 1980년부터.
아, 이 정도면 이 책의 정체성을 잘 설명한 듯한데 덧붙이면, 왜 대통령들이 거짓말을 하는지 알려주는 책은 아니란 것이다. 나는 모르는 잡지 [The Progressive]
1980년대. 보스턴 대학의 학생들은 베트남 파병을 위한 모병에 반대하는 집회를 연다. 총장은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모병에는 눈을 감으면서 등록금이나 정규직 시위에는 학생과 교직원을 압박하는 이중성을 드러낸다. 아무도 굴하지 않았고 탄압이 어마어마한 상황에도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수없이 시도한 끝에 겨우 총장을 몰아낼 수 있었다. 모두 '평등'을 주장하고 '자유'를 주장하는 이가 한 사람 뿐이라도 그가 가진 권력의 파이가 더 크면 이미 굳어져버린 제도의 물살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옳고그름을 몰라서 바뀌지 않는 건 아니다. 한편 베트남 전쟁 때의 '공산주의자'라는 단어는 정부의 입맛에 맞게 변용되어 쓰였다. '소련이나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행해지고 있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해 합리적으로 비판하는 것과, 공산주의를 박멸해야 할 것으로 설정해 놓고 그걸 이유로 다른 나라에 폭탄을 투하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것'(p.40)에는 차이가 있음을 주장하며, 베트남 전쟁 때와는 달리 니카라과 좌파 정부 때에는 여론몰이가 어렵게 된 국가의 입장을 예로 든다. 깨어있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시민 앞에 되먹지 않은 여론몰이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명제를 보여줬다.
1990년대 민주화를 위한 연대는 신좌파 운동이란 이름으로 일어난다. 노조,농민,세입자,여성,인권 운동이란 이름으로 국제인권 문제에서 인종평등 문제까지 되짚는다. 올바른 말만 직설적으로 하는 편이어서 재밌다. 보스턴대 총장이었던 존 실버는 하워드 진이나 촘스키 같은 지식인을 두고 "학계의 우물에 독을 풀어넣는 자들"이라고도 했다. 우파들이 미국의 교육을 향해 내뱉는 비난 중에는 '토머스 하디의 문학작품과 함께 흑인 민권 운동가 말콤 엑스의 자서전을 읽기 전, 톨스토이와 루소의 글과 과테말라 원주민 리고베르타 멘추의 글을 읽기 전에 미국의 교육은 별 문제가 없었다'(p.61)라는 얘기가 있다. 하워드 진은 남부에서 일어난 흑인폭동의 과정에서 배우는 연대와 끈기의 결과에 빗대어 국제연대와 평등을 촉구한다. 이는 미국의 독립선언서에 있는 내용이자 1948년 선포된 세계인권선언에도 포함된 내용이다. 클린턴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을 묻어버리기 위해 토니 블레어와 함께 이라크를 폭격하고 있을 때 하워드 진에게 도착한 메일 한 통은 눈물겨웠다. 후세인 정권의 폭정으로 아버지와 동생을 잃고 영국으로 피신했지만 바로 그 후세인을 저지하기 위해 가족들이 살고있는 땅에 폭격을 시작한 미국과 영국의 정치지도자는 후세인과 다른 게 무엇이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대량살상무기에는 수많은 돈을 쓰면서 에이즈나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극을 아무렇지 않게 치부하는 것의 기만성은 하늘을 찌른지 오래되었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는 분노하며 희생자들을 애도하면서 정작 군사비에 들어가는 돈을 쓰지 않기 위한 무기와 지뢰 금지, 제3세계 군사 정권 지도자 훈련에서 손을 떼는 일에는 무관심한 서방세계 지도자들을 비난한다. 코소보 분리 독립 운동을 탄압하는 세르비아인들의 비인도적 처사를 묵인하는 미국의 입장을 체첸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을 때 벌인 러시아의 잔혹함을 묵인한 것과, 링컨 대통령이 남부 분리주의자들의 요구를 용납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으로 치부한 클린턴의 입장은 허용될 수 없는 수위였다. 현 코소보는 타국의 승인으로 독립한 상태이며, 여전히 세르비아와 러시아 등 몇몇 국가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코소보에 대한 무기 공급을 승인하며 제나라 이익만을 추구하는 미국의 행태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드디어 2000년대. '진퇴양난'을 의미하는 작전조항 <캐치-22>를 쓴 조지프 헬러의 작품 주인공 요사리안 대위는 폭격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보게들, 우리가 지금 폭격하려는 도시에는 그 어떤 군사목표물이나 철도, 산업도 없고 단지 사람들만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는 한가?"(p.108) 예술가들은 시,소설,노래,그림,연극으로 말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아버지들의 깃발], [진주만] 등 제2차 세계대전을 미화하는 전쟁영화와 책이 쏟아져 나온 시기는 대규모의 군사예산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의 전쟁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명분을 갖추어야 할 시점이었다. '전쟁의 대가들'이라는 밥 딜런의 노래가사, 마크 트웨인의 <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 조지 버나드 쇼의 <바바라 소령>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애국주의가 만들어놓은 안개를 뚫고 진실을 볼 줄 아는 예술인이라는 것을 안다. 게다가 디킨스, 톨스토이, 발자크, 스타인벡 등은 작품 속에서 가난한 자의 편을 든다. <컬러 퍼플>의 엘리스 워커, 마지 피어시, <작은 것들의 신>을 쓴 아룬다티 로이는 예술가로서 사회 운동가로 투쟁에 동참한 이들이다. 예술과 문화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떠들 필요가 없다. 이들의 목소리는 차라리 사회적 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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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는 이란, 이라크, 북한이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하고 있다고 지목했다. 미국은 안 그런가? 아프가니스탄 폭격에만 집중하고 무한정한 전쟁에 대한 이야기에 파묻혀 지구적인 시장 체제의 희생자가 되어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의 문제와 노동자들의 안전을 무시하는 주체가 바로 미국이다. 자국에 쏟아지는 비난-이윤을 앞세우는 기업 지배 시스템에 대한 주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기 때문에, 명목상 안전을 핑계로 군사비를 합리화하는 것도 미국이다. 베트남전과 걸프전, 대테러, 칠면조 사냥하듯 죽였던 이라크의 무고한 병사들과 민간인들, 착한 편이 나쁜 편에게 했던 더 나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가한 원폭 투하. 전쟁은 언제나 무고한 이들을 죽인다. 여자와 아이들, 가난한 징집병들을. 세계화를 향해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인류의 생명이 평등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인권의 세계화가 먼저다. 적의 죽음은 그저 숫자나 추상적인 표현으로 둔갑시키고 자기 쪽 피해만 이야기화 하는 것. 미라이 학살의 진상은 잔혹한 학살에 직접 가담한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입을 열었기에 세상에 알려졌다. 이라크는 3류군사국에 중동에서도 높은 군사력을 가졌다고 말하기 어려운 나라이다. 반복된 전쟁과 긴 경제봉쇄로 이미 전락해버린 국가를 향해 아비규환격의 포탄을 퍼붓는 미국에서도 반전 운동과 정치적 반대자로서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정부의 권력은 결국 시민, 공무원, 군인, 언론인, 교사들이 복종해야만 유지된다. 터져나오는 각성과 반대의 목소리는 이미 권력이 붕괴되고 있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미국 시민들은 미국의 부를 채워주는 핵잠수함이나 항공모함 보다는 의료혜택, 일자리, 교육, 육아, 쾌적한 주택, 깨끗한 환경 등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환경에 자신들이 내는 세금이 쓰이기를 원한다. 전쟁이 자기들을 안전하게 해줄 거라는 맹목적 믿음이 미국 시민들에게서 사라져버린지 오래다. 우리나라 사설/칼럼/주간지마저 거의 못 챙겨보는 나도 하워드 진이 기고하는 글을 제때 읽었다면 그에게 열광했을 것이다. 어렵지 않고 에두르지 않고 직접적이고 정확한 언어를 사용해 할 말을 전달하는 그의 칼럼이 흥미롭다.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해서 좋고, 특히 미국이 관여한 1980-2010년의 국제적 활약상들-전쟁과 테러에 대처하는 자세, 빈곤이나 인권문제를 대하는 방법 등-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 좋다.
커트 보니거트는 사람들에게 왜 힘들게 계속해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도 당신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당신이 관심 갖고 있는 것에 나도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을 너무도 듣고 싶어 한다. 왜 그렇겠는가? 그런 생각과 느낌, 관심을 혼자서만 고독하게 가지고 있지 않다는 확증을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사실, 바로 이런 말을 전하기 위해 나는 글을 쓴다." 그러니까 커트 보니거트의 글을 읽는 전 세계의 무수한 이들은 '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나만은 아니로구나.' 생각하게 된다. 작가로서 이 이상 중요한 성취가 어디 있겠는가? (p.256)
시민들의 저항과 요구가 없다면 정부는 진보적 조처를 할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보다 평화로운 세상, 공평한 세상을 만들어주리라 기대한 오바마 대통령이 임기 1년도 채 되기 전 한 일이, 이전 대통령보다 더 많은 액수의 국방비를 허용하는 싸인을 한 것인 이상, 파키스탄을 미사일로 공격하는 일인 이상, 확인절차도 없이 9.11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무조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으로만 봐도 세계 도처에 널린 수많은 미국 군사기지를 철수할 생각이 없음이 명백해보인다. 군사주의 강경파로 돌아선 힐러리 클린턴이나 금융자본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로렌스 섬머스를 골라 쓰는 이상, 오바마의 색다른 자유와 평화, 인권에 대해 기대하기란 어렵다. 비록 미국역사 속 수많은 희생과 시위 속에서 진보가 이루어짐으로서 노예 제도를 부인하는 수정 헌법 14조와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이들이 미국 시민임을 밝히는 14조,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15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해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제5도살장>의 커트 보니거트가 항상 인용하곤 했던 미국 사회주의자이자 유진 뎁스의 말을 쓰고 싶다.
"누군가가 착취당하는 하층계급이 있는 한, 나 자신도 그런 현실에 무관할 수 없다. 이 사회에 범죄가 있는 한, 나 자신 역시 그 범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양심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다면 나는 아무리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다 해도 사실은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p.109)
미국은 최초 흑인 대통령 재임을 선택하며 새로운 시대를 쓰고 있고, 우리도 곧 있을 대선을 위해 달려가고 있지만, 시대의 미래가 보여줄 희망적인 상징들이 상실되고 있는 것 같다. 라다크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오래된 미래라도 기대해야 할 판. 하워드 진의 유작이 된 이 책은 그야말로 진보적 입장-다 함께 잘 살자-에서 보는 미국 역사 자체였다. 주로 평화, 평등을 얘기하는, 아주 오래됐지만 여전히 답보중인 지구상의 오래된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