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심각하게 대하지 말라. 심각하면 삶을 놓친다. 진지하되 심각하지는 말아라. 심각함과 진지함은 전혀 다른 것이다. 심각할 때 그대는 목적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한다................심각함은 머리에 속한다. 그러므로 심각한 사람, 생각이 많은 사람은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웃지 못한다. 그는 놀이를 즐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이 놀이를 통해 무엇을 얻을 것인가?'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삶을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그러나 삶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진지한 사람은 전혀 다르다. 진지함은 가슴에 속한다. 그는 진실하지만 심각하지 않다. 그는 추구하지만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의 추구는 어린아이의 놀이와 같다. 발견해도 그만, 발견하지 못해도 그만이다. 어린아이를 보라. 그는 강아지를 쫓아 달리다가 중간에 나비를 발견한다. 그러면 즉시 방향을 바꾸어 나비를 쫓기 시작한다. 그 다음에 옆에 있는 꽃을 발견한다. 이제 그는 나비를 잊고 꽃에 전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심각하지 않다. 그러나 매우 진지하다. 그는 강아지와 나비를 잊었다. 이제는 꽃이 전부다. 어떤 것에 전적인 관심을 쏟을 때, 그것이 진지함이다. 어떤 것을 수단으로 보고 관심을 기울일 때 그대는 교활하다. 그대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대가 관심을 갖는 것은 수단에 불과하다. 그대는 착취한다.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길을 이용한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게는 길이 곧 목적지다. 종교적인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디에 있건 그곳이 목적지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건 이 사람이 목적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나의 삶 전체가 내게 집중되어 있다. 달리 갈 곳이 없다. 이 순간을 전체적으로 즐기고 누려야 한다.

이런 사람이 종교적인 사람이다. 그는 어디로 갈지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아침 산책을 즐길 뿐이다. 이것은 전혀 다른 현상이다..................종교적인 사람은 아침산책을 하듯이 살아간다. 그리고 비종교적인 사람은 직장에 나가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는 목적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 세속적인 사람은 목적을 지향한다. 그 목적이 무엇이건 상관없다. 세속적인 것이든 신이든 그는 목적을 지향한다.

                                                                       -오쇼,  [서양의 붓다], pp.174-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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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2-16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이 부니 나뭇가지가 흔들리는군요..

돌바람 2006-02-16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물의 역사>에서 저를 잔인하게 때리고 가는 말이 있어 "삶은 생각하는 자들에겐 우습고 느끼는 자들에겐 비극"이라 하였지요.

...나뭇가지가 바람을 흔드는군요...

비로그인 2006-02-17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햐.. 정말 좋은 말씀이네요. 흐흐. 예전엔 왜 그리 심각하게 살았는지, 제가 생각해도 가잖아 죽겠어요. 오늘 죽을 사람처럼 얼굴에 잔뜩 비구름을 달고 다녔으니깐요. 요즘엔 그냥 흐르는대로 몸을 맡기고 싶당께요. 제 삶에 찌꺼기처럼 말라붙어 있던 갖가지 휘황한 의미와 수식어가 싫어라우..
 

                                            나무         

                                                                        -천상병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 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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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2-16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는 일..관계를 통해 희망을 갖는 일..끊임없이 지지하고 격려해주는 일..그리고 사랑하는 일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되네요. 흐흐. 저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뿌리까지 썩어도 위로가 되겠습니다, 크하하하!!!

이누아 2006-02-16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때부터 제가 좋아하는 시에요. 잡다한 걸 넣어두는 비공개 페이퍼 이름도 "썩은 나무가 아니다"입니다. 음, 마지막 웃음소리는 저런 사람이 옆에 있다는 기쁨이 터지는 소리인가요?!^^

비로그인 2006-02-17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쓱으쓱)옙!! 그 분은 바로..두구두구두구~



이누아님이시잖아요. ^^v
 
간화선 - 조계종 수행의 길
대한불교조계종교육원 엮음 / 대한불교조계종교육원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조계종은 선종을 표방한다. 선종은 참선을 주로 하는 종파이고, 그 참선 중에서 조계종은 화두참선을 주로 하고 있다. 그런데 경허 선사로부터 지금에 이르는 선풍은 자세히 말로 가르쳐주고, 자상하게 일러주는 전통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러한 자상함은 알음알이를 키우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늘 알 수 없는 선문답이 오고가는 것이야말로 이 가문의 특징이었다. 지금도 법문을 들으면 우선 주장자 한번 내리치고 숱한 선종의 일화들로 내용을 가득 채우는 스님들이 계신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끈질기게 앉아 듣기가 쉬운 일이 아닌 듯, 어르신들 말씀대로 젊은이들이 위빠사나나 다른 현대 명상을 찾아 떠난다. 그 때문일까, 요즘 참선에 대한 학술적인 모임이나 간화선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법문들이 종종 눈에 띈다. 아마도 이 책도 그런 일환으로 지어진 것일 것이다.

화두 하나 줄테니 그냥 한 마음으로 자나깨나 그것만 생각하고, 의심하거라 하고 던져둘 수 있었던 것은 스승이 곁에 있고, 인가를 해줄 선지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까이 스승을 모실 수 있는 환경이 수행자 집단에서조차 쉽지 않은 터라 자신이 바르게 수행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생겼는지 모른다. 책은 간화선의 역사적 배경부터 실제로 화두를 어떻게 참구해야 하는지, 삼매나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할 때 어떻게 점검해야 하는가 등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두었다. 조금이라도 간화선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궁금해할 만한 내용에 대해 잘 정리되어 있다.  

특별히 기억나는 이야기는 참선수행을 할 때의 열 가지 병통에 대한 부분이다. 그 가운데 마지막 열 번째의 병통은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리지 말라"는 부분. 수행을 할 때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한다. 수행하는 중에 깨달음을 헤아리면서 그것을 기다린다면 무수 겁 동안 수행하더라도 결코 깨달을 수 없다. 대해 선사는 이에 대해 전도된 생각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알음알이의 장애를 받았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과 스스로 깨치지 못했다고 말하여 달게 미혹한 사람이 되는 것과 미혹한 가운데서 의도된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p.258)이라고.

의도하는 마음 없이 무엇에 간절해지고, 간절한 무엇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 간절함에는 어떤 심각성이 있어야 한다고 여겼던가...하고 싶지 않은 일이 생기면 수행이라 여기자 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수행은 하기 싫은 일을 불평없이 하는 것인가. 무의식중에 수행은 불편하지만 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지는 않았는가. 무상하고 닥치는 삶의 고단함에서 헐떡이고 싶지 않아서 겨우 열어제치는 창문...왜? 내 수행에는 즐거움이 빠져 있는가. 물론 어떨 땐 환희에 차기도 하지만 대체로 꾸역꾸역 먹는 약 같지는 않았는지...간혹 어두운 심각함 속에 놓여 있는 것은 깨닫고자 하는 그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뭔가를 기대하거나 뭔가에 기대려하지 않는 수행. 수행이라 할 것도 없는 즐거움. 그런데도 자신을 던질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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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2-24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나 아무때나 화두를 들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같이 곤이지지한 사람들은 옆에 훌륭한 스승이 있어서 이끌어줄 때에라야 화두가 들리는 법이죠.
한 때 화두를 들고 있다가 머리로 기가 쏠려 토할 것 같은 나날들을 몇 일 보냈던 적이 있습니다.
이미 그 때에는 공부한다는 욕심이 앞섰던 것이지요.
스즈끼 순류 선사의 '선심초심'이란 책을 보면서
공부는 한다는 생각도 없이 하는 것이라는 말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부는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스스로 되어지게 해야지 억지로 욕심이 앞서면 대체로 머리로 기가 몰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부가 잘 될때에는 한다는 생각 한 점없이 그저 되어지니까요.
참스승의 바른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공부과정에 조그만 이상현상에 현혹되지 않고 공부하기 위해선 끝없이 모르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책이 나오게 된 것도 저같이 사회생활에 몸을 둔 일반인으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놓아버려라는 선승들의 말씀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게 받아들여집니다.
세세생생 선지식만나 마음 더욱 밝아져 부처님 전에 복많이 짓기를 발원합니다.

이누아 2006-02-26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중3때 공부한다는 생각도 없이 공부했습니다. 그게 공부인 줄 몰랐으니까요. 내내 왜 나는 내 주인이 아닌가 하는 것으로 온몸을 채우고 다녔습니다. 스승이 없었던 탓에 신경성 두통이라는 병명으로 1년을 아파 지냈습니다. 바른 가르침이 절실합니다. 지금도 때로 머리에서 피고름이 터집니다. 열심히도 하지 않고 욕심만 가득차서 머리가 터져 나오나 봅니다. 괜히 머리통에게 분풀이하지 않고, 목마르지 않아도 샘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 어린왕자처럼 가만히, 천천히 걸어보렵니다. 님의 발원에 합장하고, 함께 합니다.
 
그대 자신을 알라 깨달음으로 가는 길 5
바가반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 지음, 김병채 옮김 / 슈리크리슈나다스아쉬람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처음 읽은 마하리쉬의 가르침은 "나는 누구인가"였다. 다시 그는 내게 "그대 자신을 알라"고 말한다. 다른 일체의 것들은 허망한 것이다. 그대 자신을 향해라.

어떻게? 마음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라. 언제 말인가? 생각이 일어날 때. 생각은 어디로부터 일어나는가? 나.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식으로. 화두참선처럼 의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가장 가슴에 닿은 구절,

슬픔도 하나의 생각일 뿐인가요?/ 모든 생각들은 슬픈 것이다./ 기분좋은 생각들 조차 슬픈 것이겠군요./ 그렇다. 왜냐하면 생각들은 참나로부터 관심을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p.152).

화두참선을 하거나, 자아탐구를 하거나 심지어 염불이나 독경을 하는 중에도 깜짝 놀라게 된다. 생각들. 뿌리도 없이 흔들거리며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구름들처럼 해를 가리는 그것들. 그것들의 힘에 놀란다. 거의 모든 생각은 과거와 미래에 가 있다. 그것들이 집착을 끌어당겨 힘을 갖는다. 자체 힘을 가지게 된 생각들을 우리는 자아라 믿게 된다. 그러니 생각은 슬프다. 진리의 해를 가리니.

혼자서 어둔 밤길을 가는 것은 두렵다. 길을 아는 자가 안내해 주거나 등불이 필요하다. 수행에는 신이나 스승의 은총이 필요하지 않은가. 마하리쉬는 길 위에 선 순간, 이미 은총을 받았다고 대답하신다.

나를 찾겠다는 갈망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바로 신의 은총 덕분이다. 일단 이 갈망이 그대를 붙잡으면 그대는 은총의 손아귀에 붙잡힌 것이다(p.168).

그러나 갈망이라기엔 너무 약하고, 갈망이 아니라기엔 꽤나 오래된 "나"에 대한 탐구는 도대체 무슨 진전이 있는가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이 누군가의 은총이라 할지라도 나는 예전과 같이 우울과 권태와 게으름, 생각과 감정에 붙들려 있다.  누군가 나와 같았던 모양이다. 마하리쉬께 비슷한 질문을 하고 있다.

바가반이시여, 저는 지난 몇 해 동안 꾸준히 이곳을 찾아왔지만 아직도 아무런 진전이 없습니다. 저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나쁜 죄인일 뿐입니다. / 이 길에는 이정표가 없다. 그대는 자신이 얼마나 멀리 나아갔는지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왜 그대는 기차의 일등석 승객처럼 행동하지 않는가? 그는 차장에게 자신의 목적지를 알려준 뒤, 문을 닫고서 잠을 잔다. 그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 정확히 그 역에 도착하면 차장이 그를 깨울 것이다(p.189).

또한 거듭하여 노력하면 깊이 뿌리박힌 경향성들 역시 제거할 수 있다고 하셨다(p.189). 그는 세상을 등질 필요도 없다고. 세상 속에서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고 하신다. 낡은 엽서에서 보았던 작자가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의 말처럼 "얼만큼 왔는지 돌아보지 말고 사랑을 다해 걸으"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마하리쉬의 가르침은 붓다의 가르침과는 다르다. 그분은 우파니샤드에 기초해서 말씀을 하신다. 즉 우리의 진아, 아트만이 온전한 신, 브라흐만임을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이다. 알다시피 붓다는 우파니샤드적 철학체계를 비판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폈다. 진아란 것은 없다. 여기에서 무아사상이 생겨난다. 한때 그러면 불성은 무엇인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불성은 부처될 씨앗이다. 그러니 가능성이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지 진아와는 다른 것이다. 또 한가지 마하리쉬는 이웃에 대한 자비심 역시 방해되는 생각 따위에 불과한 것처럼 말씀하신다. 다른 철학과 실천체계이지만 붓다의 집에 편안히 앉아서 바라보는 마하리쉬의 가르침은 수행상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쨌든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이는 것을 아셨는지 이렇게 말씀하신다.

질문들은 좋지만, 이런 문제들을 지나치게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저 명상을 하고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마음으로 하여금 영적 심장의 동굴 속에 있는 참나 위에 고요히 쉬게 하라. 곧 이것은 자연스러워질 것이며, 그 뒤에는 질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을 비활동적이라는 뜻으로 상상하지 말라. 침묵이야말로 유일한 진정한 활동이다(p.263).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절로 화두가 잡힌다. 에너지가 굉장하다고 느낀다. 마하리쉬의 미소는 아직도 살아 있다. 영성이 느껴진다.  편안한 마음으로, 오직 한 수행만을 의심없이 행한다면 스승이 없다고 불안해 하거나, 진전이 없다고 포기할 필요가 없으며, 세상의 삶을 핑계댈 수도 없다고 하신다. 그저 있는 자리에서, 쉬지 말고 탐구하고 수행하라고 하신다. 그분의 이 간단명료한 가르침 앞에서 구구한 질문들이 오고 가고, 그 오고 가는 질문들이 나의 입에서 나오는 것만 같아 민망하다. 왜 이토록 말이 많은가. 마하리쉬의 미소를 따라 가만히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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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6-02-16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하리쉬의 눈빛을 좋아합니다. 그분의 눈빛에선 편안함이 느껴집니다. 편안함이라고 하니 너무 세속적이네요. 글쎄 말 할 수 없는 평안과 사랑의 에너지를 느낍니다. 생각만 슬픈 게 아니고 저는 요즘 사람 몸 받아 사는 것 자체가 슬픔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 극장을 보면서, 소소하게 얽히는 주변 사람들과 저는 보면서, 이 생에 내가 몸 받아 온 이유를 , 잘 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행복할 때 조차도 슬픈 것, 삶이 그런 것 같아요. _()_

이누아 2006-02-16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쓰는 작은 상 위에 접어 세워두는 액자가 있습니다. 한쪽엔 달라이라마와 링린포체가 함께 찍으신 사진이 있고, 다른 한쪽엔 마하리쉬가 있습니다. 아침에 그분들 얼굴을 보면 저절로 미소가 어립니다. 눈빛이란 게 참 신기해요.
 
물도 없고 달도 없다
오쇼 라즈니쉬 지음 / 선영사 / 1992년 8월
평점 :
품절


친구와 서점에 갔다. 친구가 오쇼의 강의록들을 펼쳐 보며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지 물었다. 나는 아무 거나 읽으라고 했다. 모든 책이 거의 비슷하다고. 그런데 오늘, 그의 이야기가 항상 같은 말이었던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똑같은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의 책은 나를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있다. 호흡을 멈출 듯이 가슴에 멎는 구절들이 있다. 그런데 사실, 금방 잊어버린다. 이 책도 그렇게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어슴프레 느끼던 어떤 것을 분명하고, 환하게 가리킨다. 그것들 중의 하나만...요약하면...그의 말을 요약한다면 그는 비웃을 것이다. 어떤 진리도 요약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것만 같다만...

깨달음은 그냥 갑작스레 오는 우연적인 손님이지, 구한다고 얻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깨달음을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 노력해라. 그러나 그 노력이 깨달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수행을 하면 깨달음에 다가갔다고 착각한다. 깨달음엔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장소가 아니니까. 10년 동안 매일 천배씩 했으니 깨달음은 이제 내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열심히 일해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길이 있고, 내 집은 그 길가에 있다. 나는 한번도 마차를 본 일이 없다. 마차가 지나간다. 친구가 마차가 지나간다고 말한다. 나는 보지 않는다. 그러면 마차 지나간다. 깨달음이 내게 그렇게 오더라도 내가 고개를 돌리지 않으면, 마차에 전혀 관심이 없다면 다시 마차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와도 또 놓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이라고는 마차에 대해 듣거나 읽고, 마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평편하게 해 두는 것이리라. 그랬다고 마차가 꼭 우리 집 앞을 지나가란 법은 없다. 왜 기독교인들이 구원을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표현하는지 이해가 될 듯하다. 선물이나 손님처럼 갑작스레 마차가 집 앞을 지나가고 나는 그것을 보고, 더이상 마차에 대해 궁금해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런데도 올지 오지 않을지 모르는 마차를 위해 길을 닦는 건 정말 어리석어 보인다. 그런데도 저 말이 아주 좋다. 

그렇다고 마차를 기다리듯이 깨달음을 기다린다면 더욱 어리석은 일이다. 옛 선사들은 빨리 깨닫고 싶어하는 것과 깨달음을 기다리는 것은 영영 깨닫지 못하게 하는 길이라고 하셨다. 깨달음이 욕구나 집착과 만나면 이미 깨달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예전에 충청도 절에 있었던 적이 있다. 나와 비슷한 연배인 스님이 "이누아, 여기에 학교를 졸업'하려는' 마음과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이 있어요. 그 뭔가 '하려는' 것의 차이를 말해 보세요". 무언가 하려는 것은 욕구나 집착을 요한다. 그것이 욕구나 집착이라는 점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물으신 것이다. 다른 스님이 이 말씀을 들으시고 "그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하셨다. 이 대화가 간혹 흔들거렸다. 깨달음이 구하는 것이라면 무슨 차이가 있는가...이제 이 흔들림에 미소가 어린다. 어린왕자가 목마르지 않는데도, 갈증과 갈망이 없는데도 샘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 까닭을 이제야 이해하겠다.

이 책은 하나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또같은 그 이야기로 끝난다. 사실, 이 이야기를 유심히 보기만 해도 이 책 전부를 읽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애쓴다. 어리석어 보이는 노력. 그런데 이 말을 하면 자꾸 웃게 된다. 

 ==============

비구니 지용은

수년 동안 마음 공부에 몰두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깨달음에 대한 아무런 소식도 오지 않았다.

 

어느날 밤,

그녀는 물이 가득 담긴

낡은 대나무 물통을 지고 가고 있었다.

 

그녀는 지고 가던 물통에서

둥근 보름달이 비치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며 걸었다.

 

순간,

엮어 놓은 대나무 물통의 틈새가 갑자기 벌어지더니

물통 밑바닥이 저절로 빠져 버렸다.

 

물은 모두 쏟아져 버렸고

거기에는 더 이상 달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그때 지용은 문득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노래를 지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하면서

나는 물통이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지고 갔지만

갑자기 밑바닥이 빠져 버렸네.

 

이제 물도 없고

물 속에 비친 달도 없다네.

내 손 안에는 허공만 남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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