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자신을 알라 깨달음으로 가는 길 5
바가반 슈리 라마나 마하리쉬 지음, 김병채 옮김 / 슈리크리슈나다스아쉬람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처음 읽은 마하리쉬의 가르침은 "나는 누구인가"였다. 다시 그는 내게 "그대 자신을 알라"고 말한다. 다른 일체의 것들은 허망한 것이다. 그대 자신을 향해라.

어떻게? 마음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라. 언제 말인가? 생각이 일어날 때. 생각은 어디로부터 일어나는가? 나.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식으로. 화두참선처럼 의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가장 가슴에 닿은 구절,

슬픔도 하나의 생각일 뿐인가요?/ 모든 생각들은 슬픈 것이다./ 기분좋은 생각들 조차 슬픈 것이겠군요./ 그렇다. 왜냐하면 생각들은 참나로부터 관심을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p.152).

화두참선을 하거나, 자아탐구를 하거나 심지어 염불이나 독경을 하는 중에도 깜짝 놀라게 된다. 생각들. 뿌리도 없이 흔들거리며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구름들처럼 해를 가리는 그것들. 그것들의 힘에 놀란다. 거의 모든 생각은 과거와 미래에 가 있다. 그것들이 집착을 끌어당겨 힘을 갖는다. 자체 힘을 가지게 된 생각들을 우리는 자아라 믿게 된다. 그러니 생각은 슬프다. 진리의 해를 가리니.

혼자서 어둔 밤길을 가는 것은 두렵다. 길을 아는 자가 안내해 주거나 등불이 필요하다. 수행에는 신이나 스승의 은총이 필요하지 않은가. 마하리쉬는 길 위에 선 순간, 이미 은총을 받았다고 대답하신다.

나를 찾겠다는 갈망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바로 신의 은총 덕분이다. 일단 이 갈망이 그대를 붙잡으면 그대는 은총의 손아귀에 붙잡힌 것이다(p.168).

그러나 갈망이라기엔 너무 약하고, 갈망이 아니라기엔 꽤나 오래된 "나"에 대한 탐구는 도대체 무슨 진전이 있는가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이 누군가의 은총이라 할지라도 나는 예전과 같이 우울과 권태와 게으름, 생각과 감정에 붙들려 있다.  누군가 나와 같았던 모양이다. 마하리쉬께 비슷한 질문을 하고 있다.

바가반이시여, 저는 지난 몇 해 동안 꾸준히 이곳을 찾아왔지만 아직도 아무런 진전이 없습니다. 저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나쁜 죄인일 뿐입니다. / 이 길에는 이정표가 없다. 그대는 자신이 얼마나 멀리 나아갔는지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왜 그대는 기차의 일등석 승객처럼 행동하지 않는가? 그는 차장에게 자신의 목적지를 알려준 뒤, 문을 닫고서 잠을 잔다. 그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 정확히 그 역에 도착하면 차장이 그를 깨울 것이다(p.189).

또한 거듭하여 노력하면 깊이 뿌리박힌 경향성들 역시 제거할 수 있다고 하셨다(p.189). 그는 세상을 등질 필요도 없다고. 세상 속에서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고 하신다. 낡은 엽서에서 보았던 작자가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의 말처럼 "얼만큼 왔는지 돌아보지 말고 사랑을 다해 걸으"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마하리쉬의 가르침은 붓다의 가르침과는 다르다. 그분은 우파니샤드에 기초해서 말씀을 하신다. 즉 우리의 진아, 아트만이 온전한 신, 브라흐만임을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이다. 알다시피 붓다는 우파니샤드적 철학체계를 비판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폈다. 진아란 것은 없다. 여기에서 무아사상이 생겨난다. 한때 그러면 불성은 무엇인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불성은 부처될 씨앗이다. 그러니 가능성이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지 진아와는 다른 것이다. 또 한가지 마하리쉬는 이웃에 대한 자비심 역시 방해되는 생각 따위에 불과한 것처럼 말씀하신다. 다른 철학과 실천체계이지만 붓다의 집에 편안히 앉아서 바라보는 마하리쉬의 가르침은 수행상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쨌든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이는 것을 아셨는지 이렇게 말씀하신다.

질문들은 좋지만, 이런 문제들을 지나치게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저 명상을 하고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 마음으로 하여금 영적 심장의 동굴 속에 있는 참나 위에 고요히 쉬게 하라. 곧 이것은 자연스러워질 것이며, 그 뒤에는 질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을 비활동적이라는 뜻으로 상상하지 말라. 침묵이야말로 유일한 진정한 활동이다(p.263).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절로 화두가 잡힌다. 에너지가 굉장하다고 느낀다. 마하리쉬의 미소는 아직도 살아 있다. 영성이 느껴진다.  편안한 마음으로, 오직 한 수행만을 의심없이 행한다면 스승이 없다고 불안해 하거나, 진전이 없다고 포기할 필요가 없으며, 세상의 삶을 핑계댈 수도 없다고 하신다. 그저 있는 자리에서, 쉬지 말고 탐구하고 수행하라고 하신다. 그분의 이 간단명료한 가르침 앞에서 구구한 질문들이 오고 가고, 그 오고 가는 질문들이 나의 입에서 나오는 것만 같아 민망하다. 왜 이토록 말이 많은가. 마하리쉬의 미소를 따라 가만히 웃어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혜덕화 2006-02-16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하리쉬의 눈빛을 좋아합니다. 그분의 눈빛에선 편안함이 느껴집니다. 편안함이라고 하니 너무 세속적이네요. 글쎄 말 할 수 없는 평안과 사랑의 에너지를 느낍니다. 생각만 슬픈 게 아니고 저는 요즘 사람 몸 받아 사는 것 자체가 슬픔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 극장을 보면서, 소소하게 얽히는 주변 사람들과 저는 보면서, 이 생에 내가 몸 받아 온 이유를 , 잘 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행복할 때 조차도 슬픈 것, 삶이 그런 것 같아요. _()_

이누아 2006-02-16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쓰는 작은 상 위에 접어 세워두는 액자가 있습니다. 한쪽엔 달라이라마와 링린포체가 함께 찍으신 사진이 있고, 다른 한쪽엔 마하리쉬가 있습니다. 아침에 그분들 얼굴을 보면 저절로 미소가 어립니다. 눈빛이란 게 참 신기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