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바람 2006-03-15
'여백이란 탄생이구나'라고 내뱉기까지 외경읽기-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위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여백이란 탄생이구나'라고 내뱉기까지 시인은 얼마나 쓸쓸하였을까요. 비어서 쓸쓸하고, 쓸쓸하여서 비어 있는 여백은 그러나, 시냇물에 시냇물은 없듯이, 없는 것에 시냇물이 쉼없이 있듯이 그저 흐르네요. 우리가 자꾸 넘어지는 것은 어쩌면 일어서 걷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가 믿지 못하는 것은 믿으려 했기 때문이겠지요.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아침, 안녕 이누아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