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테 콜비츠 역사 인물 찾기 2
카테리네 크라머 지음, 이순례.최영진 옮김 / 실천문학사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2012.10.14

※ 미술사 공부하던 당시 썼던 옛 리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미술에 대한 사변으로 시작해야겠다. 나는 책 리뷰에 ‘책 리뷰’만 쓰는 간편한 기술은 갖추지 못한 듯하다. (시험이 코앞인데 리뷰를 차마 미루지 못한다. ‘꼴찌’하더라도 책을 읽으라는 처칠의 말을 방패로 삼아본다.)

 

  케테 콜비츠를 만난 건 3년 전이었다.
  그 무렵, 나는 동생의 4B연필을 빌려 김충원氏의 드로잉 책에 나오는 몇몇 그림들을 따라 그리거나 아크릴 물감으로 반 고흐의 <삼나무가 있는 밀밭(Korenveld met cipressen, 1889)>을 모사하려고 했었다. 미술사 공부를 하려는 사람이 그림을 못 그려서 되겠냐는 걱정 때문이었다.


  조바심이 났던 나에게 다행이도 한 중견화가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차라리 데생을 몰랐으면 하는 것이 화가들의 바람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어린 마음은 차분하게 달래졌다.


  얕은 목표를 추구하려는 사람은 기술을 쫓는다. 하지만 심후한 경지는 마음으로 이를 수 있다. 생각해보니, 내가 최근 대학 강의로 듣고 있는 『장자(莊子)』 중 ‘양생(養生)’과 관련된 깨달음과도 닿는 바가 있다. 말은 쉽다. 마음으로 세계를 들여다본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그러나 화가의 조언 덕분에 나는 새삼 그림 속에 화가의 마음이 들어 있다는, 일종의 다른 차원의 이해를 갖게 되었다.
  ‘화가는 어떤 마음으로 저 그림을 그렸을까?’


  많은 사람들이 미술작품을 ‘이해’하는데 애를 먹는다. 아무래도 미술작품은 우리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풍경보다 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중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고, 집중의 ‘방법’에 관한 문제일 수도 있다. 여러 번 작품을 봤는데도 도무지 그 작품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내지 못했다면 -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그건 알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와 닿지 않은 것이겠는데 - 후자의 문제를 생각해봐야 한다.


  미술을 ‘현상’으로 보지 않는 또 다른 이해법이 있다는 것을 의외로 사람들은 모른다. 소위 ‘아카데믹’한 글들이 미술이해의 척도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각을 바꿔 미술을 ‘삶’으로 보는 방법은 어떨까. 작품에 대한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도 이 새로운 시각은 권장될 수 있다. 어떤 작품은 몇 년도에 만들어졌고, 무슨 기법이고, 사이즈는 몇 호 쯤 되고, 어디에 소장되어 있고, 누구의 영향을 받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작가의 삶을 통째로 한편의 영화처럼 “들여다보는 것”이다. 평전은 어떤가.


  그렇게 한 여인의, 아내의, 독일 화가의, 어머니의 삶을 보는 것이다. 『케테 콜비츠』를 읽는다는 것은.

 

 

 

*     *     *

 

 

 

  케테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새삼 나는 배우자를 잘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완벽한 현실주의자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나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극단적으로 끌어가고픈 욕망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예술적으로 잘 승화되면 ‘장인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고집’에 그칠 것이고. 내가 왜 케테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유를 들자면, 케테도 극단적으로 예술 그 자체에 머물고자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현실로 돌아오게 한 사람은 그녀의 남편인 카를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진료해주는 의사였던 카를의 삶은 케테를 노동자와 가깝게 만들어줬다.


  이전의 그녀가 소시민의 삶보다는 노동자의 삶이 더 아름답다고 여겼다면 카를은 그녀에게 프롤레타리아의 삶이 얼마나 비극적인가를 알려줬다. 문득 생각해보건대, 나도 케테와 유사하게 노동자의 삶을 ‘낭만’에 가져다대는 부류의 사람이리라. 그런 까닭일까. 케테의 작품 속에 비극적으로 표현된 프롤레타리아의 모습을 본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는커녕 일종의 죄책감 같은 무거운 마음만 계속 키워가는 것이었다.


  케테도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겉치레와 과장된 태도를 버리고 표백하지 않은 무색옷을 걸치고 다녔다. 그렇게 카를을 통해 차분해진 그녀의 삶이 한 번의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하우프트만이 초연한 희곡 <직조공들(Die Weber)>을 본 것이었다.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말은 당시 “나를 죽이시오.”라는 말과 동의어였다고 한다. 황제는 분노했지만 예술은 그칠 줄 몰랐다. 케테의 정신은 번뜩 살아났고, 그녀를 대표하는 연작으로 평가받는 <직조공 봉기(Ein Weberaufstand)>가 4년의 인고를 겪고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아쉽게도 아버지는 딸의 작품을 보지 못한 채 바로 그 해에 작고했다. 나는 그 작품을, 누구보다도 그녀의 아버지가 꼭 봐야했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어두운 화면들. 출구 없는 절망감. 생활과 노동이 비참하게 엉켜져 있는 삶. 허기. 발육부진. 감히 단순한 바니타스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해골. 칠흑과 같은 낮. 잡다한 용구. 빈곤과 곤궁, 죽음과 삶에 대한 짙은 회의를 함께 끌어안고 쇠약해져만 가는 노동자들의 모습. 이 작품은 그들의 삶을 낮은 시선으로 보여주고, 행진과 돌격, 비극적 결말까지 함께 그려낸다. 하지만 마지막 삽화에서는 끝내 그러한 삶과 비극이 결코 병약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어두운 화면에 문과 창문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들어오고 있다. 우리가 그토록 찾던 ‘희망’이라는 것.


  굵은 선과 그 선 사이의 세밀한 선들이 백지 위에 드러낸 비극. 나는 아름다움을 느낄 새도 없이 감정의 저 낮은 층위로 굴러 떨어진다.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처럼 나도 그렇게 되고, 작품 속 아이를 뒤에서 껴안아 보호하고 있는 어른들의 굳건한 손과 팔이 나의 뒤에서 뻗어 나온다.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삶의 앙상함과 흑백의 담담함이 이윽고 사위(四圍)를 감싼다. 그렇게 나는 책과 모니터 앞에 내던져져 있다. 복잡한 생각도, 철학도 뒤로 물러난다.


  나는 멋도 모르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은 인간이다.”
  하지만 나는 이 생각을 철회하고 싶지 않다.

 

  1914년 케테는 페터를 잃었다. 플랑드르에서 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한 '어머니' 케테. 전쟁터에 아들을 보낼 무렵에 그녀는 이렇게 일기에 적었다. “다시 한 번 이 어린것을 탯줄에서 잘라내는 기분이었다. 첫 번째는 태어나기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죽음을 향해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10월 22일 전사했다. 하지만 케테는 24일에 그의 편지를 받았고, 페터는 “포성을 들으셨겠지요?”라고 적었다. 그 포성 사이에서 죽은 케테의 전사 통보는 30일에 왔다.


  어느 날, 케테의 일기. “나의 페터야, 제발 내 곁에 머물러다오. 나를 도와다오. 나에게 모습을 보여다오. 나는 네가 거기에 있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언제나 두꺼운 안개가 앞을 가린다. 내 옆으로 오렴.” 이듬해 4월 11일의 일기. “나의 아가야, 봄이 왔다.” 그리고 그녀는 훗날 작업을 할 때면 언제나 일기장에 “나는 너와 함께 작품을 만들고 있다.”라고 적었다. 케테는 페터의 두상을 만들 때면 어김없이 울었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자원해서 전쟁에 나가겠다고 했을 때, 울음으로라도 끝까지 잡아놓을 것을……

 

  1918년 전쟁은 끝났다. 신문 기사에서 “전쟁의 마지막 총성이 사라졌다.”라고 선언했고, 케테는 이렇게 생각했다.
  “마지막 총탄으로 희생된 사람은 누구인가?”
  그녀는 페터의 기념비를 만들기로 계획한다. 그리고 그 작업을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오늘날 케테를 아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녀를 프롤레타리아와 혁명의 예술가로 기억한다. 그녀가 페터의 죽음을 목격하고 죽음, 임종, 추모 등의 소재로 판화를 제작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사람이기를 꺼려했다. 그 이유는 케테 자신이 말한 것처럼 “비겁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주 유명했을 때는 1920년대였다. 그 전에도 유명했지만 사람들은 이제 케테의 이름에 프롤레타리아를 입혔다. 그런 상황을 케테는 당황스러워했다. 그녀는 스스로도 혁명론자가 아닌 발전론자이기를 원했다. 나이도 50대였다. 자신의 아들 페터, 그리고 비슷한 나이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에서 고통을 받다 죽어가는 것도 보았고, 이 지구상에 벌어지고 있는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등 ‘악마적인 것’도 보았다. 그녀는 지쳤다고 고백했다.


  “제발 사람들이 나를 좀 조용히 내버려두었으면 한다.”
  상황은 너무나도 복잡했고, 여성으로서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다만 예술가로서 이러한 상황 모두를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뿐이라고 생각했다. 정치노선은 추종하지 않지만. 노동자들을 애도하는 것은 그녀의 권리였다. 이것이 케테의 의미이기도 하다.

 

  당시 러시아혁명의 결과를 기다리던 독일은 1920년 벽두부터 침울했다. 시대가 나아질 기미는 점차 사라졌다. 때마침 혁명의 기치를 부러뜨리기라도 하듯이 러시아에는 극심한 기근이 찾아왔다.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였다. 대공황도 왔다.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때의 독일로 돌아가 빵 한 조각을 사먹으려고 했다면 우리나라 돈으로 1조 14억 원을 내야만 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낼 것이다.


  1933년 히틀러가 총통이 되자, 콜비츠 부부는 아인슈타인, 토마스 만의 형인 하인리히,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와 함께 독일의 모든 자유가 억압될 것을 우려하여 좌파 인사들의 서명을 단행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하인리히는 프랑스로, 슈테판은 영국으로 망명을 갔고, 콜비츠 부부는 국내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생활은 힘들었다. 그녀는 교조적인 목표를 따라가는 것을 싫어했다. 오직 ‘살과 피’를 가진 살아있는 노동자들의 운동과 그들의 정의에 대한 타는 열정을 따라가고자 했다. 하지만 자유를 억압하는 시대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명성은 결코 억압될 수 없었다. 러시아에서의 케테는 가히 신적인 존재였다고 한다. 의도와는 달리 그녀는 ‘탁월한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대명사였다. 미국에서는 그녀의 71주년을 기념해서 전시회를 개최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그녀가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오기를 원한다고도 했다. 루쉰은 당시 침묵을 선고(케테는 1936년 나치스로부터 ‘개인적 전시회 금지’ 통보를 받았다.)받은 케테에 대해서 “예술의 언어가 이해되지 않는 곳은 없다.”라는 말로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고마움을 표시했다.


  케테는 당시 나치스로부터 ‘퇴폐미술가’라는 낙인이 찍힌 여러 미술가들처럼 어두운 그늘 밑에서 조각을 해야만 했다. 작품을 주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그녀의 주된 장르인 인쇄예술은 사회대변혁 시기에 유행한다. 회화보다 격동적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조각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의 초기 조각 작품들은 대부분 그녀 스스로가 파괴했고, 남아있는 작품은 7점에 불구하다. 지금은 대표작이라 평가받는 <쌍둥이와 어머니(Mutter mit Zwillingen>는 제작기간만 13년이 걸렸다. 그 기간의 일기가 케테의 심정을 말해준다. “아무리 일을 해도 아무것도 되는 게 없는 절망적인 나의 상태”. 그것은 곧 자살의 심정이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괴로움. 그러다 그녀는 묘비를 꾸미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던 그녀는 1942년 겨울의 일기에 “죽는다는 것, 오, 그것은 나쁘지 않다.”고 썼다. 그리고 아들 한스와 그의 며느리에게는 “내 시대는 이제 다 지났다.”며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1945년 4월 22일. 그녀는 떠났다. 그녀의 죽음은 나치스의 붕괴 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브라크는 이런 말을 했다.
  “예술가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인간을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 있다.”
  케테는 말했다. “인간은 거기 있어야 한다.” 바로 그림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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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7

 

  김경수 교수님의 '현대소설론' 과제로 쓴 독후감을 옮겨놓는다. 본래 각주들이 있었으나 생략한다. 형식이 없는 독후감이라 흐름 없이 자유롭게 썼다. 문단의 문장들 속에 독립적으로 큰 따옴표 처리 되어 있는 표현들은 모두 이상(李箱)의 것이다.

 

 

 


  독서는 분명 자기체험이리라―

 

  나는 제대(除隊)하고 2년간 휴학하여 미술사를 공부하였다. 대학생활의 2년차까지 나에게는 진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일찍 이곳에 합격하여 주변의 부러움을 샀고, 나는 그 부러움을 자부심으로 삼았으나, 재능을 키워볼 생각보다는 날마다 커져가는 지루함과 불안을 못 견뎌했다.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인데, 나에게도 군대는 각성의 장소였다. 나만이 앓고 있던 고통으로부터 나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을 정도로, 그곳은 잊고 싶을 만큼의 강한 고통들을 나에게 쏟아 부었다. 더 이상 내 안의 고통은 통각을 자극하지 못했다. 지난 날 동안 내가 겪어왔던 고통의 크기가 군대에서는 왜소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길에 들어서보겠다는 결심으로 나는 미술사 공부를 시작했고, 그 땅에 난삽하게나마 여러 발자국들을 찍어놓았다. 그 무렵의 경험들은 복학한 뒤 얻게 된 모든 종류의 지식과 이해들을 미술과 연결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렬했고, 하나의 유기체가 되었다.


  부족하게나마 그것을 묘사해보자면, 그건 내게 ‘사유의 전초기지’이다.

 

  이상(李箱)의 「권태」를 읽으며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나는 단어와 문장들의 틈새에서 자주 멈춰 섰다. 수시로 떠오르던 여러 잡된 생각들이 미술을 공부하던 때로 하나 둘 소급된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무엇이 동인일까? 주관적인 고통과 희열들로 도배된 나의 옛 기억으로 이상의 사유가 모아졌다. 데칼코마니처럼. 그렇게 「권태」를 읽고, - 대부분의 시간을 눈살 찌푸린 채로 - 또 고쳐 읽으면서 나는 답을 찾고자 했다. 아니면 새벽의 촉촉한 감수성을 팬으로 삼아 답을 써내려가고자 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며칠이고 나는 텅 빈 이면지 위에 아무 것도 적지 못했다.


  선인(先人)들이 당부하는 것처럼 성급한 사람에게는 답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하던가. 추석 내내 나는 「권태」를 생각하고자 했다. 성묘를 할 때, 친척들과 추석씨름장사대회를 볼 때, 작은아버지 댁의 마당에서 잘 익은 포도를 딸 때, ‘쌀나무’를 보여주시겠다는 어르신의 농에 속아 넘어갔다가 그 ‘나무’란 게 다름 아닌 벼라는 것을 알고 사촌동생과 자지러지게 웃었을 때…… 나의 마음이 이렇게 바쁠 때가 아니라면 나는 언제라도 이상을 생각할 마음준비가 되어 있었다. 도로에 체증이라도 있었으면 더 좋았을 뻔 했으나, 예외라고 할 만큼 차는 막히지 않았다. 결국 추석의 「권태」는 없었다.


  다른 공부들에 대한 생각과 겹치거나 그것들로부터 밀릴 것을 대비하고자 나는 「권태」 출력물을 책상 위에 꺼내뒀다. 이상의 단편 네 작품을 읽으면서 나의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저 태도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여러 충격들에 히스테리적으로 반응하는 저 유약함! 그것은 분명 「권태」를 쓴 이상 본인의 것이었다. 나는 대체 왜 그것이 나에게, 아니 나의 경험에게 들어맞는 것 같은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나의 방에는 여러 새벽 기차들이 보이지 않는 선로를 따라, 들리지도 않을 굉음을 내며 지나갔을 것이다. 도무지 감이 없는 날의 나는 그 육중한 움직임에 무참히 짓밟혔을 것이다. 나는 그 기차들을 매번 놓치다가 문득 바라본 책장에 어떤 역(驛)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진기한 현상을 목도”했다.


  역의 이름은 『뒤러』였다. 두 권의 책이다. 도상해석학자인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끝에 내놓은 역작. 나는 미술사 공부를 할 적에 작품을 세밀하게 뜯어보는 재미에 빠져 파노프스키와 뒤러에게 많은 애정을 줬었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나는 그의 두 작품을 오래토록 들여다본 일이 있다. 하나는 유화(油畵)인데, 《자화상(Selbstporträt)》이라는 제목의, 미술사학자들이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작품이다. 스물아홉의 그가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와 유사하게 그린 유화. 이 자화상은 그의 여러 자화상들 중 단연 압도적인 위용을 갖췄다.

 

 

 

 

 

 


  다른 하나는 이상의 「권태」와 떼어낼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도상해석학의 대표 사례로 자주 등장하는 《멜랑콜리아 Ⅰ(Melencolia I)》이다. 이 작품은 저 자화상을 그린 지 14년 후에 그린 판화이다. 여러 상징적 이미지들의 조합으로 오래토록 학자들의 상상력을 통해 조명되어 온 작품이다. 세밀한 분석은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이 제목의 뜻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울과 비애. 이 사전적 의미들로 인해 나는 지루한 나날들에 파묻혀, 거울에 갇혔던 나 스스로를 일종의 미이라 보듯 했던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뒤러의 이 작품을 서랍 속에서 꺼내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문자 그대로의 제목을 가진 이상의 「권태」에서도 마찬가지로 무미건조한 고통이 연상되기 시작했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뒤돌아 생각해본 ‘권태’란 지금은 미약한 메피스토펠레스 따위로 전락했다. 그의 속삭임은 더 이상 나를 도발하지 못한다. 도발된 내가 있었다면 그건 과거의 일이다.


  나는 “하류(下流)로 향하여 가고 있는” 송사리들, 그 군중들의 한 일원이 되어 과거보다는 권태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는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러니 「권태」는 나를 뒤로 밀고 밀어서 나에게 한꺼번에 두 개의 시공간을 체험하게 했다.

 

 

*    *    *

 

 

  이상의 시선은 사위의 단조로운 녹색 벌판으로부터 서서히 그 자신에게로 집약된다. 그리고 “할 일이 없다.”는 그의 시선은 ‘최 서방’을 시작으로 세밀하게 분산되기 시작한다. 이욕(利慾)이 밉다며 최 서방에게서 떠난 이상의 눈길은 개울가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사위를 질리도록 녹색으로 만들어버린 조물주의 몰취미를 한탄하며 앞선 ‘큰 시선’을 저 개울가로 뭉쳐버린다. 권태는 그 뭉쳐진 시선을 터뜨려 “지구의 여백”이라는 장자(莊子)적 스케일로 커진다. 그 여백을 모르니 이상에게 농민은 천치이다.


  나의 우울과 비애를 감히 이상의 「권태」 속 권태에 비견하고자 노력하면서 내가 우선 흥미롭게 여긴 건 그의 시선이었다. 그것은 단 하나의 끊어짐도 없어 흡사 권태의 고저(高低) 없는 라인과 같은 의식이었다.


  돌발적인 사유는 고작 한 번에 그친다. 군중 송사리 떼의 역투. 하지만 그건 ‘소낙비’였다. 그가 느낀 권태로움의 총량은 한 차례의 각성을 무참히 내리누르고도 남을 만큼 무게가 나갔기 때문이다. 전신주가 무슨 소용이겠냐며 농민들의 본능적 삶을 불행하다 평가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닭보다도 못난 벙어리 개들, 관례대로 세수를 마친 이상을 따라하는 ‘원숭이’ 촌동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권태의 망을 통과한다. 애꿎게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의 눈은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니, 이상은 「권태」의 전편을 아우르는 권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송사리 군중의 위대한 탈출은 아주 잠시 나를 설레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상의 ‘실패’로부터 일말의 희망을 건져낼 수 있다면 강태공들은 저 호수에서 ‘반복’이라는 대어를 낚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최 서방에 이어 이상의 시선은 개울가로 갔었다. 그곳에서 그는 ‘초록’을 경멸했다. 그리고 조물주의 몰취미도 경멸했다. 그렇게 이어지던 이상의 의식은 “촌동들을 원숭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선언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던지고, 그를 개울가로 향하게 한다. 그의 진득한 관찰은 A에서 ~A(not A)를 발견하는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


  미천한 경험이지만 나는 동전의 양면을 강조하는 선인들의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나이 들어갊에 따라 서서히 깨닫고 있다. 30대가 되면 그 깨달음은 더욱 간절해지지 않을까. 만물에는 앞과 뒤가 있다는 어느 교수의 역설을, 나는 이번 학기에 한 철학 과목을 수강하며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찡하게 울리던 코끝을 잊을 수가 없다. 어쩌면 그건 사소한 발견이다. 하지만 생(生)을 감지하는 시세포들의 상처가 많아질수록 나는 사소함의 탈을 쓴 위대한 사물의 형상들을 분명히 알아가는 듯하다. 개울가에 쪼그려 앉은 이상의 모습은 훗날 나에게 또 어떤 깨달음을 줄지, 이 작품은 나에게 사뭇 기대를 선물했다.

 

  사방을 관찰하던 이상의 시선이 순간 대상에게 이입된 때가 이 단편에 한 번 있었다. 그가 어떻게 심리했는지, 자리를 빌려 옮겨본다.


  “이 사람의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하냐 아마 병인인가 보다 내 생명에 위해를 가하려는 거나 아닌지 나는 조심해야 되지.”


  《멜랑콜리아 Ⅰ》의 건장한 여인보다 이상은 훨씬 왜소했을 것이다. 유정(裕貞)과 함께 정사(情死)를 논의할 정도였으니 나는 그의 앙상한 체격을 떠올리며 살짝 눈을 찌푸려본다. 소도, 아니 이상도 스스로를 ‘병인(病人)’이라 불렀다. 이상은 소에게 위해를 가할 의식도, 동기도, 도구도, 방법도 없다. 소의 반추와 함께 이상의 권태 역시 이어진다. 그러나 강화되어 오던 권태가 한 차례 꺾이는데, 그건 순전히 소가 큰 만큼 소의 권태도 클 것이라는 불확실한 위안 때문이었다. 관찰과 이입의 경계가 무너졌다.


  흥미로웠다. 우주적 시각으로까지 퍼져나갔던 이상의 권태가 왜 소를 보고 나서 잠시 주춤해진 것일까? 문맥으로만 보더라도 그는 일말의 평온을 느꼈을 것이다. “고독을 겸손”한다는 말은 이전의 태도와는 분명 다른 것이다. 나는 까닭을 추정하다가 문득 강원도 횡성에서 보았던 두 마리의 소를 떠올렸다. 지금은 가지 않지만 외조부의 산소가 있는, 어머니에게는 큰집 되는 시골집에 그 소들이 있었다. 외양간의 고약한 냄새를 기억하는 만큼 나는 소들의 순하고 깊은 눈망울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시속(時速)으로는 측정이 될까 궁금해질 정도로 느렸던 그들의 반추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것 때문은 아닐까? 지루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별 이욕도 없고, 흉내도 안 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 이상의 생각대로라면 - 본능도 무의미로 만들어버리는 소의 행동을 목격한 것 때문은 아닐까? 권태 위의 권태를 이상은 목격한 것이리라. 하지만 바깥의 눈으로 보자면 소의 행동은 지극히 평온하다. 권태와 평온의 역설적인 상황은 이상의 눈에도 비춰졌을 것이다. 권태를 애무하는 또 다른 권태.


  이상의 마음은 조금이나마 움직였을 것이다. 적발동부(赤髮銅斧) 반라군(半裸群)들의 의미 없는 놀이, 정말 재미도 없는 놀이를 보며 그는 눈물을 흘린 것이다. 권태로부터 비집고 나온 연민의 정이 지구 상 태초의 인간처럼 자각을 시작한다. 가난! 그것은 놀이조차 권태롭게 만든다. 이 점에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틀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놀이에는 어떤 중요한 의미가 놀고 있는데(작용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생활의 즉각적인 필요를 초월하는 것으로서 그 행동 자체에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나 「권태」의 이상은 “최후의 창작 유희”에서마저 ‘나오지 않는 대변’ 탓에, 그 지독한 가난 탓에 낙오자가 되어버린 한 실패한 아이를 굽어보다가 조물주에게 기도한다. 기도는 오히려 항변에 가깝다. 풍경과 완구를 달라는 외침에서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구호물자를 기다리는 아프리카 빈민들과 “Give me chocolate!”을 외쳤다던 전후(戰後) 우리나라의 촌동들을 연상하며 가슴이 적적해짐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겪지 못한 가난이었다. 겪지 못한 것들을 대하는 죄송스러움도 겹쳐 나는 어떤 교시(敎示)의 회초리를 맞은 듯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아파트에는 ‘가난’이라는 글귀가 전혀 새겨져 있지 않다.

 

 

*    *    *

 

 

  하루가 저문다. 이 글을 주로 새벽에 읽었기에 해저(海底)와 같은 밤이 쏟아진 이 단편의 마지막 언저리에서 나는 더욱 심취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새벽은 배고픔의 고비를 만끽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때가 아닌가. 이상은 “관성의 법칙처럼 놓여 있”는 반찬으로 저녁을 마쳤으나, 나는 주로 굶은 채로 그의 생각을 읽었다.


  쏟아지는 별이 있다기에 80년은 더 지났을 이 세상의 별은 그 때와 같을까 하는 생각으로 창문을 열어 보기도 했으나, 15도 안팎으로 뚝 떨어진 새벽의 찬 공기 위로 하늘은 조금 깎인 보름달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인공위성 몇 개가 금성인 양 위선적으로 반짝일 뿐이었다.


  갑작스레 방충망으로 큰 나방 한 마리가 달려들다 몇 번 몸을 부대끼더니 힘겹게 착지하였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권태로부터 탈출하였다가 다시 「권태」속으로 들어갔다. 나방은 내가 얼마 전에 테이프로 막아놓은 방충망 구멍 근처를 살금살금 기어 나의 얼굴 부근까지 왔다.


  저 어두운 아파트 공원보다야 새벽을 밝히고 있는 나의 방이 훨씬 빛났으니, 나방의 정열은 초조히 이리로 날아오도록 그의 본능을 부추겼을 것이다. 내가 이 방충망 구멍의 테이프를 살짝 들어낸다면 운 좋게도 방 안에 들어와 저 강한 스탠드 불빛이나 형광등에 수 차례 뛰어들었다가 책상 위나 전등 받침대 어디서든 죽은 채 발견되리라. 이상은 그 무모한 정열이라도 탐하였다. 권태가 암흑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열은 내일을 죽게 하고, 권태는 내일을 살게 한다. 혹시 이런 의미는 아닐까. 죽도록 살아보자는 이 시대의 ‘EPIGRAM’이 청춘의 귀감으로 널리 설파된 때이기에 나는 저 역설을 수첩이든 스마트폰의 바탕화면이든, 어디든 적어놓고 수시로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생명을 보존해준다던 저 권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우리는 죽음을 꿈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권태는 욕망하는 이 시대의 삶보다 뒤쳐진 병증인 양 취급된다.


  호주의 신화학자 피터 투이(Peter Toohey)는 권태의 의미를 격상시키기 위해 그것을 예술적 창조와 연결시켰으나, 나는 많은 이들이 권태보다는 열정을 선택하리라고 짐작한다. 그것이 차라리 쉽다. 이 시대의 사고도 이상의 표현처럼 “내일 그것이 또 창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인 날들을 그리도 두려워하지 않던가.

 

  권태 앞에 성숙한 인간은 없다.


  프레스코(Fresco)화는 우선 벽에 회반죽을 바르고 그 위에 안료로 그리는 오래된 회화(繪畵)기법이다. 우리의 삶도 ‘권태’라는 회반죽 위에 그 모습을 가리기 위해 그려진 그림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이가 들어 말라비틀어진 작품들 사이로 그 반죽 본연의 추한 자태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쩍쩍 갈라진 《최후의 만찬(Ultima Cena)》에 남은 것은 생동하는 색으로부터 멀어진, 보이지 않는 아우라 밖에 없다. 나는 그 색을 ‘만성적 권태’라는 친숙하지 않은 전문용어로 불러본다.


  성숙하다는 자부심도 권태를 마주하는 순간 사라질 것이다. 그리하여 이상의 비관은 솔직하다. 그 솔직함이 ‘권태’라는 문자, 《멜랑콜리아 Ⅰ》이라는 작품 사이를 후비고 들어와 나의 고통을 게워 “그 시금털털한 반소화물의 미각을 역설적으로 향락”하게 했던 것이리라, 생각한다.

 

  많은 체험들이 있었으나, 살아남은 것은 권태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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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샘 2013-04-11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정말 잘쓰시네요..와..부럽습니다
 

2012.09.22

 

 

  책과 씨름하던 토요일 오후이다.

  나는 오늘 새삼 ‘책’을 다시 보게 됐다.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   *   *

 

 

  나는 요즘 세미나 수업의 과제로 훈민정음을 공부하고 있다. 재미있다. 내가 발표할 주제는 훈민정음이 무엇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연구이기 때문에 사실 훈민정음을 하나씩 읽어가며 ㄱ은 무슨 소리이고, ㄷ은 무슨 소리이고 하는 간단한 수준은 아니다. 아무래도 학부 졸업논문 수준이라, 학자들의 면밀한 논문들에 특히 집중해야 한다. 그래도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세종의 뜻을 되새김질할 때마다는 늘 소름이 돋는다. 나는 요즘 들어 새로운 한글을 배우는 듯하다.


  여하튼 훈민정음을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외솔 최현배(崔鉉培) 선생의 『한글갈』을 참조해야 했다. 훈민정음을 풀어쓴 근래의 책들이야 얼마든지 있지만 교수들이 항상 학부생들에게 강조하는 건 고문서(古文書)들을 먼저 참고하라는 것이지 않은가. 한문투성이인 옛 책들을 읽는 것이 쉽진 않지만 조사나 어미가 없는 그 글들을 한글 문장과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아마 해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이번 주말에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을 분석하려고 최근 발행된 몇 권의 책들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는데, 아무래도 “다음 주에 가서 『한글갈』을 빌려와야지.”라고 벼르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부모님께서 학생 시절에 공부하셨던 여러 책들 중 십 수 권 정도가 지금도 서재에 있기에 한 번 찾아볼까 생각했다. 그다지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놀랍게도 나는 최현배의 『한글갈』, 그것도 1942년에 정음사(正音社)에서 발행한 초본을 발견했다.


  등산을 다녀오신 아버지께 나는 『한글갈』에 대한 이야기, 아버지께서 그 책을 빌리셨던 당신의 모교인 옛 가평가이사중학원(現 가평고등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초판이라 경매에 올리면 고가를 받을 것이 분명하다며 나는 아버지와 농담도 따먹었다. 대학 도서관에서도 일반서고에는 이런 고서를 보관하지 않는다.


  속지들이 거의 갈색이라 할 정도로 훼손됐고, 하드커버들도 전부 너덜너덜해져 낱장들과 분리될 정도의 상태이다. 무려 70년의 세월을 간직한 책이다. 험악한 일제치하에 한글 가르침만이 민족의 얼을 지키는 것이라 그렇게도 강조하셨던 최현배 선생의 글 - 1942년에 발행했으나, 초고는 1940년에 완성하셨다 - 로 訓民正音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님께서 20년도 더 전에 이미 읽으셨던 그 길 위에서 말이다.

 

 

 

 

 

부모님께서 공부하셨던,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온 책들을 내 서재에 보관하다.

 

 

 

  잠시 쉴 겸, 나는 서재의 책들 중에 내가 태어나기 전에 발행된 옛 책들을 하나둘 모아봤다. 예전에 부모님께서 서재정리를 한다고 오래 된 책들 중 상당수를 처분하셨는데, 그것들이 지금도 있었다면 아마 수 십 권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 책들 중에 아홉 권을 뽑아다가 내 책장에 꽂았다. 모두 70년대에 나온 책들이다. 책값은 1,500원에서 5,000원까지 천차만별이다. 아버지께 “이 책은 5,000원이에요!”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때 그 책값이면 자장면이 몇 그릇이니!”라고 새삼 놀라셨다. 가진 것 없는 집안에서 교사가 되겠다고 힘들게 공부하셨다던 그 옛 이야기가, 나는 다시금 떠올랐다.


  나는 다른 책에서는 어머니께서 아마 당신의 대학생 시절에 껴놨었을 꽃잎들을 찾았다. 장미꽃잎인 것 같다. 또 다른 책의 맨 뒷장에는 당시 아버지의 두 선배가 신입생 축하파티에 힘쓴다며 아버지께 선물한다는 내용의 글귀 두 줄이 보였다. 책들 구석구석에서는 부모님의 오래된 밑줄과 낙서들이 색을 바래가고 있다.

 

 

*   *   *

 

 

  책. 그건 저자의 말이 여러 문자로 적혀 있는 단순한 공간은 분명 아니다. 그곳에는 읽는 이의 지문도 있고, 서명도 있고, 이따금 어머니의 장미꽃잎 같은 추억의 흔적도 있다. 나는 그 추억 위에 나의 지문을 남겨본다. 교사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수 십 번도 넘겨 읽으셨을 그 책을, 아들인 나는 - 그런 일념은 없으나 나도 무늬만은 국문학도인데 - 이런저런 까닭으로 다 읽어보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서재에 꽂아둔, 부모님께서 추억하실 그 책들은 지금 내가 읽는 책이 세월이 지나면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 새삼 깨닫게 해준다. 나는 부모님의 사인 밑에 나의 사인을 적어본다.


  어쩌면 책이란 것은 흔적을 따라가는 이정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저자의 이정표이든, 부모님의 이정표이든, 아니면 타인의 이정표이든. 그렇지 않은가?

 

 

*   *   *

 

 

  세미나 과목을 들으려고 강의실에 갔는데, 앞선 수업이 막 끝났는지 한 남학생과 교수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귀 너머로 듣고 있으니 재밌는 대화가 오고 가서 지금도 기억한다.

 

  교수가 말하기를, 자신이 책을 한 권 빌렸는데 대출지에 낯익은 이름 하나, 그러니까 바로 그 남학생과 동명인 이름이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그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니?”고 남학생에게 물었는데, 남학생은 “네, 그 책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교수는 얼굴에 인자한 어머니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어머! 이런 신기한 일도 있니!”라며 웃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함께 웃고 있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정말.

 

 

*   *   *

 

 

  그런 것이다. 오래 읽다보면, 책과 오래 만나다보면, 우리는 책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필시 만나게 된다. 한자 ‘冊’자를 다시 본다. 저 한자의 가운데를 관통하는 긴 횡선이 책에 대한 우리들의 추억을 의미하는 것만 같다.


  헤진 책들을 다시 보자. 세월의 상처로부터 그들을 지켜주면 한 중국의 고사처럼 그들은 우리에게 천 년의 세월을 열어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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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6 13: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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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반양장)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 예경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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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6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심이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선언을 좋아한다. 우리가 비근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우대되는지 모르는 그런 개념어들이 실은 플라톤의 어깨 너머에 있을 뿐이라는 식의 선언 말이다. 미술이론을 조금이나마 공부했고, 그것을 동경했던 나 같은 사람들에게 곰브리치의 저 선언은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미술을 공부할 때, 실은 나 자신이 그림을 전혀 그리지 못한다는, 조각 역시 하지 못한다는, 벽돌 한 번 쌓아본 적이 없다는 한계에 자주 시달렸었다. 이는 예술 분야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미술가들에게는 없을 수 있는 ‘작품과의 어떤 객관적 거리’를 내가 가질 수 있다손 치더라도 나는 미술 속에 들어가 있는 그들이 정말 부러웠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탓에 “미술의 바다 위를 방황했다.”는 식의 회상들을 나는 곧바로 지워야만 했다. ‘미술의 바다 위’는 사실 사막의 신기루였던 것이다.


  미술에게 보낸 지난 2년 반의 집중과 헌신은 나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몇 가지 견고한 시각들을 줬다. 세세한 것에게 애정을 기울이고, 큰 틀을 다시 바라보는 예술의 태도, 바로 그것이었다. 때문에 이 모든 공부의 시작인 곰브리치의 이 책은 나에게 특별한 책이다. 말하고 싶지 않은 일기의 일부분이다. 미술사를 나처럼 막연하게나마 동경했었다면, 이런 유치한 수준의 자기고백에 십분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글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    *    *

 

 

  대부분의 책이 그렇듯 곰브리치의 서문은 이 책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단, 미술을 처음 접한 사람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술’이라는 것을 ‘기호(嗜好)’나 ‘시각(視覺)’ 등의 단어로 바꿔 이해할 수 있다면 그들이라고 해서 저자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새삼 말하자면, 지금까지 내가 미술을 공부하며 깨달은 바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실제의 시각이 우리가 지닌 ‘여러 시각’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것들은 취향과 편견의 틀을 거쳐 인식된다는 것이다. 장담 한 번 해보자. 만약 현대인들에게 숙고할 시간을 전혀 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들이 모두 거짓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상당수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멤링의 그림보다 좋아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좋아함’의 판단은 거의 직관적이어서 별다른 장애 없이 우리의 ‘감상’이라는 영역을 확실히 점령한다. 곰브리치는 그런 우리에게 시간을 스스로 마련하라고 부탁해본다. 그렇다면 멤링의 그림 역시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곰브리치의 부탁은 앞서 말한 나의 첫 번째 깨달음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의 부탁을 수행할 넉넉한 시간을 우리가 간단히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나의 두 번째 깨달음의 영향력이 더욱 크다. 기호대로 산다는 것을 - 사실 미술작품 관람에 있어 기호를 따르는 것이 우리의 건강이나 도덕에 잘못된 영향을 주는 아니므로 - 만류할 수는 없다. 작품 감상은 옳고 그름[是非]의 문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감상에는 퍽 아쉬운 면이 있다는 것이 곰브리치에게서 뽑아낸 나의 지론이다. 우리는 대체로 쉬운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어려운 것들을 생각해보지 않는 우리의 삶을 원색적으로 비난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들에게 여건만 주어진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는 각자의 삶을 더 깊게 숙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나는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고(再考)라는 것은 몸 바깥으로 튀어나간 어떤 생각을 다시 자신의 몸으로 들여보내서 ‘필터링’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우리에게 넓은 시야를 갖게 해준다는 이점이 있다는 깨달음이 우리의 삶에 있어 자주 권장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을 것이다. 취향에 의지한 작품 감상은 좁은 소견을 벗어나기 힘들다. 미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더 넓을 수밖에 없다. 이곳을 제대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말마따나 “반감을 극복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갈림길을 만나면 익숙한, 혹은 잘 닦인 곳으로만 가지 말라고,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늘 가르치지 않던가. 하물며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들 앞에서는 어떠할까.


  미술의 효용을 주장하는 건 나의 사고에는 잘 맞지도 않고, 익숙하지도 않는 것이지만 그것에 대해 한 마디 하자면, 미술은 거의 모든 교육의 합치(혹은 매개체)와도 같다. 영국의 한 학교에서 한 장의 그림만을 가지고 여러 과목을 하나로 가르치는 교과과정을 실험한 적이 있었다. 예컨대, 터너의 <노예선>을 가지고 화가 개인의 삶, 미술사, 기법 등 우리가 보통 미술을 공부하며 일반적으로 알게 되는 그런 지식들뿐만 아니라, 당대 사회상과 역사의 변천, 인권 등의 문제를 다 같이 가르친다는 것이다. 새삼스러울 것이다. 하나의 작품으로부터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뽑아내고, 교훈을 얻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런 교육법은 지금껏 통용된 적이 없다. 일종의 교양에 머물었다는 뜻이다. 대학에 가면 이런 종류의 복합적인 교육은 수준 낮은 것으로 치부된다. 내가 겪은 바로는 아직도 전공수업의 질적 우위를 주장하는 교수들이 많다. 그것이 사실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나누는 사고’와 더불어 ‘종합하는 사고’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 말만 그렇게 할 뿐, 실상 주장하는 바들을 보면 - 굳이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린네의 종(種)분류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지난 역사는 칼같이 정리되었고,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바람직한’ 인식인 것으로 비춰져왔다. 균형과 경계가 근대사회에 얼마나 큰 안정감을 줬는지를 이 자리를 빌려 굳이 회고해보진 않겠다. 문제는 그것이 우리에게 심지어 “좋고 나쁜 작품”이라는 획일적인 사고방식마저 학습하도록,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올바른 감상인양 권유했다는 것이다. 로제 드 필처럼 화가들에게 점수를 매길 수 있을까? 아니, 화가들이 교수나 선생에게 작품을 제출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미술사상 가장 강력했던 사관(史觀) 중 하나인 빙켈만의 신고전주의 이론이 오늘날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주지해보자.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저와 같은, 흡사 우생학을 떠올리게 하는 가치화 작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수많은 블로거들이 그저 자신이 좋아한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화가들의 작품들을 객관화시킨 흔적을 볼 수 있다. 유감스럽지만 이건 중견 평론가들에게도 해당된다. 그들의 객관화된 근거를 5~60년 후의 우리 다음 세대들이 본다면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릴까. 설령 그들의 주장이 너무나도 강력하고 튼튼해서 또 하나의 ‘빙켈만적 사관’으로 구축된다고 하더라도 미술은 언제나 객관과 절대의 기준을 깨고 인간이 어디까지 창조적일 수 있는지를 과시하기라도 하듯 무한의 영역을 유영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미술을 좋아하는 결정적인 까닭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미술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비록 평론가 수준의 지식이나 사관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그들이 취향, 편견, 시각 등의 문제를 인식하게 된다면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이 봐온 작품들을 재고하는 힘겹고도 보람된 작업을 기꺼이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저 깨달음의 순간에 정말 필요한 것은 각양각색의 이론들이 아니라, 용기와 양심이다. 곰브리치는 서문에서 그것을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이 책은 곰브리치가 밝혔듯이 그가 알고 있는 미술에 대해서만 다뤘기 때문에 엄연히 말해 그 ‘Art’라는 것은 그 자체의 하위개념일 수밖에 없다. (나는 이를 소문자 ‘art’와 대문자 ‘ART’로 나눠 기술하곤 했는데, 사실 둘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정작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미술을 관통하는 곰브리치의 기본적인 사고이다. 그것을 알게 된다면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거 좋아해서 뭐해?”라는 주변의 비아냥거림을 기분 좋게 받아칠 수 있다. 곰브리치의 이 말이 주는 울림은 크다.


  “우리는 꽃이나 옷이나 음식에 관해서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까다롭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그처럼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성격으로 보이기 때문에 억제되거나 감추어진 것이 미술의 세계에서는 그 자체의 가치를 발휘할 때가 많다.(pg.33)


  독자들 중 일부는 이미 그 가치를 직접 작품 감상을 통해 느껴봤을 것이다. 이 책은 미술공부를 막 시작한 초년생을 위한 책임과 동시에 그 공부의 양이 상당한 ‘고급반 학생’들에게도 여전히 유용하다. 그 이유는 앞선 인용문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어떨까?


  “미술에 관해서 재치 있게 말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평가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은 이미 너무나 많은 상이한 문맥 속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정확한 의미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pg.37)


  “단어로 표현된 미술은 죽은 것이다.”라고 생각한 적이, 나는 있었다. 저 생각의 일부는 아직도 남아 있다. 여러 미술서적을 읽어본 이라면 접해봤겠는데, 마테오 마랑고니의 <보기 배우기>라는 책을 읽어보면 곰브리치가 ‘설익은 문장’들이라고 비판한 그런 종류의 비평들에 대해 거침없는 비난을 쏟아 붓는 한 늙은 학자의 응어리진 불만을 확인할 수 있다. 미술사 공부에 매진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권장되는 경고인데, 미술에게 우리가 화려한 언어를 가져다댈수록 - 물론 그것은 오래지 않아 화려함을 잃고 말 것, 즉 식상해질 것이다 - 미술을 관람하는 우리의 직관적 본질은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왜곡되고 만다. 그 언어들이 미술을 공식화하는 것은 곰브리치의 말마따나 “언제나 실패”했다.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다.

 

 

 

 

*    *    *

 

 

 

  길게 적어 내려왔으나, 결국 곰브리치가 말하고자 한 것은 미술의 불가사의이다. 알 수 없는 것 앞에서 우리는 “알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무리한 시도는 어려운 이론조차 속화(俗化)시키곤 했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올바른 태도란 늘 참신하고 진심 어린 마음가짐뿐이다. 또한 그런 마음가짐은 우리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내 안에서 솟아나오는 감수성을 따라 작품 주변에 놓인 사실들을 조화하여 저만의 해석을 내리는 과정을 진정으로 경험해본 이라면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겸손인지를 잘 알게 된다.


  “미술에 관해서 속물근성을 조성하는 설익은 지식을 갖는 것보다는 미술에 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훨씬 좋다.(pg.36)


  첫 번째 겸손은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 - 사실 이 점이 굉장히 어렵다. 일반인들은 이런 것들을 습득할 시간적 여유가 없고, 마랑고니와 같은 보수적인 미술사학자들은 제대로 된 미술요소들을 이해하지 않고 비평을 하는 ‘젊은 비평가’들을 맹비난한다 - 이고, 두 번째 겸손은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는 ‘열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들 두 겸손은 지식과 새로운 해석이 나만의 영역으로 들어왔을 때 발생하는 일종의 ‘재채기’를 방지해줄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해야만 곰브리치가 말한 “새로운 발견의 항해”가 계속된다.


  미술사의 전반적인 흐름이나 작품정보, 작가비교 등 우리가 별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기초지식들은 굳이 이 책으로 배우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이 책이 그런 지식들을 얻을 수 있는 종류의 책 중에서 단연 최고 중 하나로 꼽힌다는 것은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미술지식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사관(史觀)의 차이는 있겠지만 최근 서점가에는 다양한 미술사책들이 독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곰브리치의 책에서는 마니에리스모, 현대미술 등에 대한 질 좋은 정보는 얻지 못했다. 그에 관해서는 오히려 다른 책들을 추천한다. 다시 말하자면, 저 시대의 미술을 곰브리치는 - 다른 시대들보다는 - 잘 모른다. 사실 이런 종류의 허점이야말로 역사책의 기본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행이란 갈림길 앞에서 하나의 길을 선택하는 과정의 연속이 아니던가. 곰브리치를 만난 후에 독자들은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할 것이니, 이 책을 그 초두로 삼는 것은 다른 책들로 여행을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다만 미술공부의 초입에 곰브리치를 만나 그를 반추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나만의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는 까닭은 언제든지 복기할 수 있는 곰브리치의 서문 때문이다.


  나는 단편적이거나 종합적인 여러 미술사책들을 읽어봤다. 그러나 그들 중 그 어떤 책도 곰브리치의 서문에 비견될 만한 ‘아름다운 글’을 그들의 머리맡에 두지 못했다. 뛰어난 독자라면 여러 책들의 내용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조합하여 큰 틀의 미술사를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당신이 현명한 독자가 되고자 한다면 부디 곰브리치의 서문을 여러 번 음미해보길 권한다.


  나는 미술이 아름답다고 늘 믿는다. 그것이 실제 아름답게 보이든, 아니면 추한 것조차 우리가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전환의 힘이 진정 요구되기 때문이든 간에 미술은 수많은 카메라 세례를 받아도 그 어떤 각도에서든 아름답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 까닭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도 아름답게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비싼 전시회에서 작품들을 힐끗힐끗 보고 지나가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다고 할 수 있다. 곰브리치의 이 책을 읽은 이만이 그 앞에 머물며 제임스 엘킨스의 <그림과 눈물>에 나온 예화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곰브리치는 미술에 대해 실로 많은 중요한 것들을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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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진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9
김선욱 지음 / 책세상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2012.09.07

 

 

  오늘 윤리학 수업이었다. 교수가 한 정당의 여성의원이 최근 불거지고 있는 성범죄문제에 대해 처벌의 수위를 높여야 한다고 했던 발언을 학생들에게 들려줬다. ‘화학적 거세’보다는 ‘물리적 거세’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고 했다. 교수는 우리에게 의견을 물어봤다. 나는 ‘물리적 거세’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손을 들었다.


  교수가 이유를 물었다. 나는 ‘주홍글씨’를 예로 들면서 두 가지 조건을 말했다. 하나는 ‘화학적 거세’로 성충동이 완벽하게 완화된다는 것, 다른 하나는 범인이 교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조건은 법의 기능인 예방과 교화를 고려한 것이었다.


  “이런 조건이 있다면, 물론 최악의 범죄였음에는 변함이 없겠지만, 그가 만약 교화되어 사회에 나간다고 했을 때, 그는 자신의 신체에 일종의 징표가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법이 그로부터 앗아가지 못했던 기본권을 박탈당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만났을 때, 물리적 거세의 흔적이 그에게 남아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미 교화된 그를 교화되기 이전 상태의 인격으로 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물리적 거세’, 바로 옛날에 사마천이 당했던 그 구형(舊刑)이 근대법이 보장하는 인권의 견고함을 깨고 표면 위로 드러나는 것은 인류의 윤리관이 역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바로 떠오른 직관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강의실에는 70여 명의 학생이 있었다. 그 중 나의 생각에 동의하거나 자신도 거의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여기는 이는 절반이 안 됐을 수도 있다. ‘물리적 거세’를 찬성한다는 입장의 사람들에게 교수가 왜 그런지 물었을 때는 의견이 나오지 않아서 그 이유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논리적으로든 직관적으로든 한 의견에 대해 여러 갈래의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저마다의 개성이 된다.


  문제가 하나 있다. 이렇게 학업을 이유로 여러 의견을 개진하거나 사유실험을 해보는 것은 건강하지만 막상 사회정책에 있어서는 불가피하게 누군가의 개성은 선택될 수 없는 의견으로 남게 된다. 마침 서재에 꽂혀 있는 책 중 나는 이를 잘 표현해줄 제목을 하나 찾았다. 바로 <소수의견(손아람 作)>이다. 참 비근하고 새삼스럽다.


  그런데 이걸 그냥 넘기는 사람들이 하나 잊고 있는 것이 있다. 정치가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김선욱氏의 <정치와 진리>는 정치의 진면(眞面)을 파고들어 우리에게 시민적 참여를 유도하는 책이다. 얇고도 깊다.

 

 

 

*   *   *

 


  책의 초반에는 소위 ‘아는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인간은 ‘복수성(複數性)’을 갖는다. 이것이 정치의 첫 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언어’이다. 이를 하나로 뭉쳐보면, “여러 인간이 말을 하기 때문”에 정치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 말로 우리가 표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개성’이다. 그것은 고유의 것 - 저자는 이를 daimon을 예로 들어 설명하기도 했는데 - 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what’보다는 ‘who’를 강조하도록 한다. 우리의 의견은 곧 내가 ‘누구됨’을 타인들에게 알리는 것과 같다. 위에서 내가 ‘물리적 거세’에 반대한다고 주장한 것은 곧 나의 ‘누구됨’ 중의 일부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말이 곧 정치가 되는 까닭으로는 아렌트의 ‘인간행위분류’를 들 수 있다. 그녀도 우리나라에서는 꽤 유명한 학자인데, 한나는 인간이 labor, work, 그리고 action을 한다고 봤다. 그런데 이 action이 문제다. action에는 ‘말 없는 것’이 있고, 언어행위가 있다. 전자는 반드시 후자로 해명되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어떤 정치적 혹은 사상적 뉘앙스가 강한 것으로 비춰져서 언론의 도마에 올랐다면, 그 행위자는 반드시 해명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언어가 인간의 망(網)을 거쳐 정치가 되고, 다시 그 정치가 언어로 행해지는 순환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말이 많다.”는 건, 혹은 “말이 끊이지 않는다.”는 건 정치적으로는 좋은 일이다. 정치가 정지되지 않고 계속 새로운 문제를 우리에게 고민토록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걸 정치에게 요구하는 심리는 오랜 정치적 염증의 누적으로 ‘앓이’를 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지상정이겠으나 - 그걸 누가 모를까! -, 사실 정치에는 진리가 없다. 이것이 이 책의 골자이다.


  진리는 종결형이다. 그것은 마치 군주와도 같다. 그러나 말은 종결형이 아니다. 쉼표 뒤에는 또 다른 문장이 등장한다. 그것이 곧 일상이며, 정치이다. 진리 앞에서는 우리의 개성을 표출할 기회가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복잡다단한 본질, 앞서 말한 ‘인간의 복수성’은 철학보다는 정치에 훨씬 잘 어울린다.


  2장은 사적인 영역이었던 경제가 자본주의 - 이 말 자체가 개인의 자산이 사회자본이 된다는 함의를 갖는데 - 시대에 이르러 어떻게 공적 영역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정치적’이라는 술어가 ‘사회적’이라는 의미로 이해되기 시작 - 토마스 아퀴나스의 ‘societas(동맹)’ 번역 구절 "homo est naturaliter politicus, id est, socialis." - 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한 장이다. 이는 뼈아픈 필연적인 역사를 반추하도록 한다. 개인자산이 사회자본으로 바뀌어 공적 영역에서 경제가 운운되었다는 것은 곧 돈이 기준이 되었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전문가들이 내리는 사회적 차원의 판단과 정치(정책)적 합의의 판단은 엄연히 다른 영역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척도가 있어 이를 기준으로 답을 끌어내는 부분이 사회적인 것이고, 이와는 달리 개성과 인간의 복수성이 드러나는 부분이 정치적인 것이다.(pg.55)


  3장은 플라톤을 훑고 지나가기 때문에 사뭇 재미도 있다. 저자는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 시민들을 본 플라톤이 ‘설득’이라는 것에 대해 어떤 혐오감을 느끼지 않았겠느냐고 묻는다. 소크라테스가 왜 죽었을까?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못했기 때문이다. 돌려 말하자면, 아테네 시민들은 결코 뛰어난 시민이 아니었다. 그래서 플라톤이 만든 것이 ‘철인왕’이라는 개념이다. 우리가 흔히 ‘동굴이야기’라 부르는 일화는 워낙 유명하다. 군주, 군인, 상인이 각각 이성, 의지, 욕망을 상징하는데, 그 군주가 백마(의지)와 흑마(욕망)를 잘 끌어야 나라가 잘 돌아간다는 말도 유명하다.


  중요한 것은 그 유명함이 아니라, 플라톤이 이끌어낸 ‘절대기준’이라는 것이 과연 성공했느냐 하는 판단이다. 이 점에서는 칸트도 충분히 표적이 될 수 있다. 일반적인 ‘이해’와는 무관하게 절대기준이 도입되었을 때, 그걸 수용할 수 있을까? 못 한다면 왜 못 할까?


  플라톤이 한 가지 잊은 것이 있다. 바로 정치의 진짜 모습이다. 철학은 조용하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는 ‘고요’를 ‘skholē’라고 했는데, 이것이 훗날 ‘scholar’가 된다. 철학이란 관조의 상태이다. 반면, 정치는 시끄럽다. 그리고 사실 철학보다는 정치가 우리의 삶에 더 제격이다. 그래서 김선욱氏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다양한 목소리가 시끄럽게 소리를 내며 경쟁하는 모습이 진리가 가져다주는 죽음의 적막보다 더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지 않겠는가?(pg.81)


  물론 반론도 가능하다. 그 옛날에 플라톤이 말한 ‘진리’라는 것이 정말 죽음의 적막을 가져다줬는가? 로크가 사회계약을 설명하며 ‘하느님’이라는 종교적 개념을 빌려다 썼지만 칸트는 그걸 없앤 채 사회계약을 설명했다. 그 칸트의 ‘정언명령’은 정말 고요한 상태인가? 논란이 꼬리를 물고 현대철학까지 이어져서 칸트식의 설명을 롤스가 ‘정의론’을 통해 발전시킨 것이 바로 정치철학사의 중요한 계보학적 사례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런 반론은 저자의 논점에서 벗어났다. 정치와 철학은 체질 상 맞지 않는다. 철학은 강요하면서 정치를 왜곡시킬 수 있다. 플라톤처럼! 그래서 저자는 <국가>가 현대인들에게 답답함을 주는 까닭은 ‘인간 복수성의 묵과’에서 찾는다.


  이어지는 논의는 ‘진리의 판별기준’이다. 철학은 진리를 어떻게 판별하기에 정치와 맞지 않는다는 뜻일까? 이런 질문은 이 책의 그 어떤 독자라도 바로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 기준은 이렇다. 대응, 정합, 합의. 대응은 말 그대로 A와 B 사이의 일치 여부를 가지고 진위를 판별하는 것이고, 정합은 논리성을 따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합의는 어떤가? 독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치와 철학의 교차점이라고. 그러나 과연 그럴까?


  철학에서의 합의는 이상적 대화의 결과이다. 화자인 A와 B가 내용을 교환한다. 당사자의 관계와 대화의 (상황)적합성이 분명 이 대화 자체에 개입되어 있다. 그러나 정치는 이런 이상적 대화가 아니다. 정치는 ‘의견 주장’이다. 다양성이 생명이다. 그건 설득하는 것이고, 동의를 유도하는 것이다. 기준이나 근거는 없다. 따라서 잠정적인 참도, 잠정적인 거짓도 없다. 정치적 ‘합의’는 오직 그것이 “타당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로 결정된다. 여기서 한 가지 특징을 도출할 수 있다. 이 대화 자체의 ‘대표성’이다. 정치인이 그것을 대표하게 된다.


  저자는 정치를 ‘예술작품관람’에 비유하며 그 준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훌륭한 비유를 하면서 독자들에게 - 그럼에도 철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 그 ‘준거’에 대해 설명한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 감각이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건 일반성을 갖는다. 물론 엄밀히 고려해본다면 이 개념조차 애매하긴 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그 세밀함은 다를지라도 우리는 이 일반성에 따라서 정당의 선호도를 판단하지 않는가? 어떤 준거가 있을까? 왜 우리는 ‘새누리당’이 아닌 ‘민주통합당’을 지지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입장을 가질까? 혼자 그렇게 생각해서? 돌이켜보건대 우리 개개인은 그 정도로 정치에 소위 ‘올인’해서 비판을 하거나 정치적이지 못하다. 대표성은 그래서 있는 것이다. ‘보수성’이든 ‘진보성’이든 그런 단어들은 오로지 ‘공동체 감각’ 내에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제 독자들은 저자가 뭘 말하려고 했는지 감이 잡힐 것이다. 그는 한나 아렌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으나, 그녀와 저자의 논지는 결국 정치는 진리가 아니므로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저 대표성이 자신의 생각을 잘 대변하고 있는지 감시해야 하고, 정권을 겨냥한 비판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연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나는 작년 수능 시즌에 한 칼럼을 읽었었다. 한 대학생이 쓴 것인데,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연대를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나는 속으로 지젝의 ‘지젝거림’ 중 일부로 파편적인 운동들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진리적 주장’을 꺼내놓고 그 칼럼을 비판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대를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말 우리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실현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한 철학교수는 내게 “우리 사회가 왜 정의롭지 않은지 아나? 그건 우리가 정의롭지 않고자 하기 때문이야.”라면서 인간이 평등보다는 자유 - 개성의 드러냄, 타인과의 차이 등 - 를 선호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연대는 생각보다 상당히 중요했다. 그것을 이 책을 읽은 직후 깨달아 나는 그 대학생에게 - 그는 나를 모르겠지만 - 보낸 비판을 당장 철회해야 한다고 여겼다.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으로 세계에 큰 충격을 줬다는 것은 식자층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비단 식자층뿐만이 아니라, 이건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충격이었다. 바로 ‘아이히만’ 해석 말이다.


  내용은 차치하겠으나, 그 요는 ‘평범한 악’이다. 우리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아마 지구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 우리에게 설명해준 것이었다. 사실 ‘수싸움’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우리는 “여럿이 함께 생각하는 삶”이 역사의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가스밸브를 잠갔는가?”를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 함께 확인하는 것이 우리에게 그 ‘확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높은 신뢰를 준다. 이건 자명한 사실이다. 권력을 감시하는 눈이 여러 개일수록, 쉽게 말해 연대의 권력이 강해질수록 정치 환경은 더욱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연대가 이익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생각해보건대, 우리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연대는 회사의 이익, 지역의 이익, 학교의 이익 등 일부 집단들의 제한적 이익을 부르짖는 연대일 수가 없다. 더 나아가 그것은 저자가 ‘세계연대’라고 말한 초국적 연대도 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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