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22
책과 씨름하던 토요일 오후이다.
나는 오늘 새삼 ‘책’을 다시 보게 됐다.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 * *
나는 요즘 세미나 수업의 과제로 훈민정음을 공부하고 있다. 재미있다. 내가 발표할 주제는 훈민정음이 무엇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연구이기 때문에 사실 훈민정음을 하나씩 읽어가며 ㄱ은 무슨 소리이고, ㄷ은 무슨 소리이고 하는 간단한 수준은 아니다. 아무래도 학부 졸업논문 수준이라, 학자들의 면밀한 논문들에 특히 집중해야 한다. 그래도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세종의 뜻을 되새김질할 때마다는 늘 소름이 돋는다. 나는 요즘 들어 새로운 한글을 배우는 듯하다.
여하튼 훈민정음을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외솔 최현배(崔鉉培) 선생의 『한글갈』을 참조해야 했다. 훈민정음을 풀어쓴 근래의 책들이야 얼마든지 있지만 교수들이 항상 학부생들에게 강조하는 건 고문서(古文書)들을 먼저 참고하라는 것이지 않은가. 한문투성이인 옛 책들을 읽는 것이 쉽진 않지만 조사나 어미가 없는 그 글들을 한글 문장과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아마 해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이번 주말에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을 분석하려고 최근 발행된 몇 권의 책들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는데, 아무래도 “다음 주에 가서 『한글갈』을 빌려와야지.”라고 벼르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부모님께서 학생 시절에 공부하셨던 여러 책들 중 십 수 권 정도가 지금도 서재에 있기에 한 번 찾아볼까 생각했다. 그다지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놀랍게도 나는 최현배의 『한글갈』, 그것도 1942년에 정음사(正音社)에서 발행한 초본을 발견했다.
등산을 다녀오신 아버지께 나는 『한글갈』에 대한 이야기, 아버지께서 그 책을 빌리셨던 당신의 모교인 옛 가평가이사중학원(現 가평고등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초판이라 경매에 올리면 고가를 받을 것이 분명하다며 나는 아버지와 농담도 따먹었다. 대학 도서관에서도 일반서고에는 이런 고서를 보관하지 않는다.
속지들이 거의 갈색이라 할 정도로 훼손됐고, 하드커버들도 전부 너덜너덜해져 낱장들과 분리될 정도의 상태이다. 무려 70년의 세월을 간직한 책이다. 험악한 일제치하에 한글 가르침만이 민족의 얼을 지키는 것이라 그렇게도 강조하셨던 최현배 선생의 글 - 1942년에 발행했으나, 초고는 1940년에 완성하셨다 - 로 訓民正音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님께서 20년도 더 전에 이미 읽으셨던 그 길 위에서 말이다.

부모님께서 공부하셨던,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온 책들을 내 서재에 보관하다.
잠시 쉴 겸, 나는 서재의 책들 중에 내가 태어나기 전에 발행된 옛 책들을 하나둘 모아봤다. 예전에 부모님께서 서재정리를 한다고 오래 된 책들 중 상당수를 처분하셨는데, 그것들이 지금도 있었다면 아마 수 십 권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 책들 중에 아홉 권을 뽑아다가 내 책장에 꽂았다. 모두 70년대에 나온 책들이다. 책값은 1,500원에서 5,000원까지 천차만별이다. 아버지께 “이 책은 5,000원이에요!”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때 그 책값이면 자장면이 몇 그릇이니!”라고 새삼 놀라셨다. 가진 것 없는 집안에서 교사가 되겠다고 힘들게 공부하셨다던 그 옛 이야기가, 나는 다시금 떠올랐다.
나는 다른 책에서는 어머니께서 아마 당신의 대학생 시절에 껴놨었을 꽃잎들을 찾았다. 장미꽃잎인 것 같다. 또 다른 책의 맨 뒷장에는 당시 아버지의 두 선배가 신입생 축하파티에 힘쓴다며 아버지께 선물한다는 내용의 글귀 두 줄이 보였다. 책들 구석구석에서는 부모님의 오래된 밑줄과 낙서들이 색을 바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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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그건 저자의 말이 여러 문자로 적혀 있는 단순한 공간은 분명 아니다. 그곳에는 읽는 이의 지문도 있고, 서명도 있고, 이따금 어머니의 장미꽃잎 같은 추억의 흔적도 있다. 나는 그 추억 위에 나의 지문을 남겨본다. 교사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수 십 번도 넘겨 읽으셨을 그 책을, 아들인 나는 - 그런 일념은 없으나 나도 무늬만은 국문학도인데 - 이런저런 까닭으로 다 읽어보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서재에 꽂아둔, 부모님께서 추억하실 그 책들은 지금 내가 읽는 책이 세월이 지나면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 새삼 깨닫게 해준다. 나는 부모님의 사인 밑에 나의 사인을 적어본다.
어쩌면 책이란 것은 흔적을 따라가는 이정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저자의 이정표이든, 부모님의 이정표이든, 아니면 타인의 이정표이든.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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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과목을 들으려고 강의실에 갔는데, 앞선 수업이 막 끝났는지 한 남학생과 교수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귀 너머로 듣고 있으니 재밌는 대화가 오고 가서 지금도 기억한다.
교수가 말하기를, 자신이 책을 한 권 빌렸는데 대출지에 낯익은 이름 하나, 그러니까 바로 그 남학생과 동명인 이름이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그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니?”고 남학생에게 물었는데, 남학생은 “네, 그 책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교수는 얼굴에 인자한 어머니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어머! 이런 신기한 일도 있니!”라며 웃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함께 웃고 있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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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이다. 오래 읽다보면, 책과 오래 만나다보면, 우리는 책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필시 만나게 된다. 한자 ‘冊’자를 다시 본다. 저 한자의 가운데를 관통하는 긴 횡선이 책에 대한 우리들의 추억을 의미하는 것만 같다.
헤진 책들을 다시 보자. 세월의 상처로부터 그들을 지켜주면 한 중국의 고사처럼 그들은 우리에게 천 년의 세월을 열어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