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진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9
김선욱 지음 / 책세상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2012.09.07

 

 

  오늘 윤리학 수업이었다. 교수가 한 정당의 여성의원이 최근 불거지고 있는 성범죄문제에 대해 처벌의 수위를 높여야 한다고 했던 발언을 학생들에게 들려줬다. ‘화학적 거세’보다는 ‘물리적 거세’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고 했다. 교수는 우리에게 의견을 물어봤다. 나는 ‘물리적 거세’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손을 들었다.


  교수가 이유를 물었다. 나는 ‘주홍글씨’를 예로 들면서 두 가지 조건을 말했다. 하나는 ‘화학적 거세’로 성충동이 완벽하게 완화된다는 것, 다른 하나는 범인이 교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조건은 법의 기능인 예방과 교화를 고려한 것이었다.


  “이런 조건이 있다면, 물론 최악의 범죄였음에는 변함이 없겠지만, 그가 만약 교화되어 사회에 나간다고 했을 때, 그는 자신의 신체에 일종의 징표가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법이 그로부터 앗아가지 못했던 기본권을 박탈당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만났을 때, 물리적 거세의 흔적이 그에게 남아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미 교화된 그를 교화되기 이전 상태의 인격으로 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는 ‘물리적 거세’, 바로 옛날에 사마천이 당했던 그 구형(舊刑)이 근대법이 보장하는 인권의 견고함을 깨고 표면 위로 드러나는 것은 인류의 윤리관이 역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바로 떠오른 직관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강의실에는 70여 명의 학생이 있었다. 그 중 나의 생각에 동의하거나 자신도 거의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여기는 이는 절반이 안 됐을 수도 있다. ‘물리적 거세’를 찬성한다는 입장의 사람들에게 교수가 왜 그런지 물었을 때는 의견이 나오지 않아서 그 이유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논리적으로든 직관적으로든 한 의견에 대해 여러 갈래의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저마다의 개성이 된다.


  문제가 하나 있다. 이렇게 학업을 이유로 여러 의견을 개진하거나 사유실험을 해보는 것은 건강하지만 막상 사회정책에 있어서는 불가피하게 누군가의 개성은 선택될 수 없는 의견으로 남게 된다. 마침 서재에 꽂혀 있는 책 중 나는 이를 잘 표현해줄 제목을 하나 찾았다. 바로 <소수의견(손아람 作)>이다. 참 비근하고 새삼스럽다.


  그런데 이걸 그냥 넘기는 사람들이 하나 잊고 있는 것이 있다. 정치가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김선욱氏의 <정치와 진리>는 정치의 진면(眞面)을 파고들어 우리에게 시민적 참여를 유도하는 책이다. 얇고도 깊다.

 

 

 

*   *   *

 


  책의 초반에는 소위 ‘아는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인간은 ‘복수성(複數性)’을 갖는다. 이것이 정치의 첫 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언어’이다. 이를 하나로 뭉쳐보면, “여러 인간이 말을 하기 때문”에 정치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 말로 우리가 표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개성’이다. 그것은 고유의 것 - 저자는 이를 daimon을 예로 들어 설명하기도 했는데 - 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what’보다는 ‘who’를 강조하도록 한다. 우리의 의견은 곧 내가 ‘누구됨’을 타인들에게 알리는 것과 같다. 위에서 내가 ‘물리적 거세’에 반대한다고 주장한 것은 곧 나의 ‘누구됨’ 중의 일부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말이 곧 정치가 되는 까닭으로는 아렌트의 ‘인간행위분류’를 들 수 있다. 그녀도 우리나라에서는 꽤 유명한 학자인데, 한나는 인간이 labor, work, 그리고 action을 한다고 봤다. 그런데 이 action이 문제다. action에는 ‘말 없는 것’이 있고, 언어행위가 있다. 전자는 반드시 후자로 해명되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어떤 정치적 혹은 사상적 뉘앙스가 강한 것으로 비춰져서 언론의 도마에 올랐다면, 그 행위자는 반드시 해명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언어가 인간의 망(網)을 거쳐 정치가 되고, 다시 그 정치가 언어로 행해지는 순환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말이 많다.”는 건, 혹은 “말이 끊이지 않는다.”는 건 정치적으로는 좋은 일이다. 정치가 정지되지 않고 계속 새로운 문제를 우리에게 고민토록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걸 정치에게 요구하는 심리는 오랜 정치적 염증의 누적으로 ‘앓이’를 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지상정이겠으나 - 그걸 누가 모를까! -, 사실 정치에는 진리가 없다. 이것이 이 책의 골자이다.


  진리는 종결형이다. 그것은 마치 군주와도 같다. 그러나 말은 종결형이 아니다. 쉼표 뒤에는 또 다른 문장이 등장한다. 그것이 곧 일상이며, 정치이다. 진리 앞에서는 우리의 개성을 표출할 기회가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복잡다단한 본질, 앞서 말한 ‘인간의 복수성’은 철학보다는 정치에 훨씬 잘 어울린다.


  2장은 사적인 영역이었던 경제가 자본주의 - 이 말 자체가 개인의 자산이 사회자본이 된다는 함의를 갖는데 - 시대에 이르러 어떻게 공적 영역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정치적’이라는 술어가 ‘사회적’이라는 의미로 이해되기 시작 - 토마스 아퀴나스의 ‘societas(동맹)’ 번역 구절 "homo est naturaliter politicus, id est, socialis." - 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한 장이다. 이는 뼈아픈 필연적인 역사를 반추하도록 한다. 개인자산이 사회자본으로 바뀌어 공적 영역에서 경제가 운운되었다는 것은 곧 돈이 기준이 되었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전문가들이 내리는 사회적 차원의 판단과 정치(정책)적 합의의 판단은 엄연히 다른 영역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척도가 있어 이를 기준으로 답을 끌어내는 부분이 사회적인 것이고, 이와는 달리 개성과 인간의 복수성이 드러나는 부분이 정치적인 것이다.(pg.55)


  3장은 플라톤을 훑고 지나가기 때문에 사뭇 재미도 있다. 저자는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 시민들을 본 플라톤이 ‘설득’이라는 것에 대해 어떤 혐오감을 느끼지 않았겠느냐고 묻는다. 소크라테스가 왜 죽었을까?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못했기 때문이다. 돌려 말하자면, 아테네 시민들은 결코 뛰어난 시민이 아니었다. 그래서 플라톤이 만든 것이 ‘철인왕’이라는 개념이다. 우리가 흔히 ‘동굴이야기’라 부르는 일화는 워낙 유명하다. 군주, 군인, 상인이 각각 이성, 의지, 욕망을 상징하는데, 그 군주가 백마(의지)와 흑마(욕망)를 잘 끌어야 나라가 잘 돌아간다는 말도 유명하다.


  중요한 것은 그 유명함이 아니라, 플라톤이 이끌어낸 ‘절대기준’이라는 것이 과연 성공했느냐 하는 판단이다. 이 점에서는 칸트도 충분히 표적이 될 수 있다. 일반적인 ‘이해’와는 무관하게 절대기준이 도입되었을 때, 그걸 수용할 수 있을까? 못 한다면 왜 못 할까?


  플라톤이 한 가지 잊은 것이 있다. 바로 정치의 진짜 모습이다. 철학은 조용하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는 ‘고요’를 ‘skholē’라고 했는데, 이것이 훗날 ‘scholar’가 된다. 철학이란 관조의 상태이다. 반면, 정치는 시끄럽다. 그리고 사실 철학보다는 정치가 우리의 삶에 더 제격이다. 그래서 김선욱氏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다양한 목소리가 시끄럽게 소리를 내며 경쟁하는 모습이 진리가 가져다주는 죽음의 적막보다 더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지 않겠는가?(pg.81)


  물론 반론도 가능하다. 그 옛날에 플라톤이 말한 ‘진리’라는 것이 정말 죽음의 적막을 가져다줬는가? 로크가 사회계약을 설명하며 ‘하느님’이라는 종교적 개념을 빌려다 썼지만 칸트는 그걸 없앤 채 사회계약을 설명했다. 그 칸트의 ‘정언명령’은 정말 고요한 상태인가? 논란이 꼬리를 물고 현대철학까지 이어져서 칸트식의 설명을 롤스가 ‘정의론’을 통해 발전시킨 것이 바로 정치철학사의 중요한 계보학적 사례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런 반론은 저자의 논점에서 벗어났다. 정치와 철학은 체질 상 맞지 않는다. 철학은 강요하면서 정치를 왜곡시킬 수 있다. 플라톤처럼! 그래서 저자는 <국가>가 현대인들에게 답답함을 주는 까닭은 ‘인간 복수성의 묵과’에서 찾는다.


  이어지는 논의는 ‘진리의 판별기준’이다. 철학은 진리를 어떻게 판별하기에 정치와 맞지 않는다는 뜻일까? 이런 질문은 이 책의 그 어떤 독자라도 바로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 기준은 이렇다. 대응, 정합, 합의. 대응은 말 그대로 A와 B 사이의 일치 여부를 가지고 진위를 판별하는 것이고, 정합은 논리성을 따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합의는 어떤가? 독자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치와 철학의 교차점이라고. 그러나 과연 그럴까?


  철학에서의 합의는 이상적 대화의 결과이다. 화자인 A와 B가 내용을 교환한다. 당사자의 관계와 대화의 (상황)적합성이 분명 이 대화 자체에 개입되어 있다. 그러나 정치는 이런 이상적 대화가 아니다. 정치는 ‘의견 주장’이다. 다양성이 생명이다. 그건 설득하는 것이고, 동의를 유도하는 것이다. 기준이나 근거는 없다. 따라서 잠정적인 참도, 잠정적인 거짓도 없다. 정치적 ‘합의’는 오직 그것이 “타당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로 결정된다. 여기서 한 가지 특징을 도출할 수 있다. 이 대화 자체의 ‘대표성’이다. 정치인이 그것을 대표하게 된다.


  저자는 정치를 ‘예술작품관람’에 비유하며 그 준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훌륭한 비유를 하면서 독자들에게 - 그럼에도 철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 그 ‘준거’에 대해 설명한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 감각이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건 일반성을 갖는다. 물론 엄밀히 고려해본다면 이 개념조차 애매하긴 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그 세밀함은 다를지라도 우리는 이 일반성에 따라서 정당의 선호도를 판단하지 않는가? 어떤 준거가 있을까? 왜 우리는 ‘새누리당’이 아닌 ‘민주통합당’을 지지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입장을 가질까? 혼자 그렇게 생각해서? 돌이켜보건대 우리 개개인은 그 정도로 정치에 소위 ‘올인’해서 비판을 하거나 정치적이지 못하다. 대표성은 그래서 있는 것이다. ‘보수성’이든 ‘진보성’이든 그런 단어들은 오로지 ‘공동체 감각’ 내에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제 독자들은 저자가 뭘 말하려고 했는지 감이 잡힐 것이다. 그는 한나 아렌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으나, 그녀와 저자의 논지는 결국 정치는 진리가 아니므로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저 대표성이 자신의 생각을 잘 대변하고 있는지 감시해야 하고, 정권을 겨냥한 비판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연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나는 작년 수능 시즌에 한 칼럼을 읽었었다. 한 대학생이 쓴 것인데,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연대를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나는 속으로 지젝의 ‘지젝거림’ 중 일부로 파편적인 운동들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진리적 주장’을 꺼내놓고 그 칼럼을 비판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대를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말 우리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실현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한 철학교수는 내게 “우리 사회가 왜 정의롭지 않은지 아나? 그건 우리가 정의롭지 않고자 하기 때문이야.”라면서 인간이 평등보다는 자유 - 개성의 드러냄, 타인과의 차이 등 - 를 선호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연대는 생각보다 상당히 중요했다. 그것을 이 책을 읽은 직후 깨달아 나는 그 대학생에게 - 그는 나를 모르겠지만 - 보낸 비판을 당장 철회해야 한다고 여겼다.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으로 세계에 큰 충격을 줬다는 것은 식자층 사이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비단 식자층뿐만이 아니라, 이건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충격이었다. 바로 ‘아이히만’ 해석 말이다.


  내용은 차치하겠으나, 그 요는 ‘평범한 악’이다. 우리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아마 지구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 우리에게 설명해준 것이었다. 사실 ‘수싸움’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우리는 “여럿이 함께 생각하는 삶”이 역사의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가스밸브를 잠갔는가?”를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 함께 확인하는 것이 우리에게 그 ‘확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높은 신뢰를 준다. 이건 자명한 사실이다. 권력을 감시하는 눈이 여러 개일수록, 쉽게 말해 연대의 권력이 강해질수록 정치 환경은 더욱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연대가 이익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생각해보건대, 우리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연대는 회사의 이익, 지역의 이익, 학교의 이익 등 일부 집단들의 제한적 이익을 부르짖는 연대일 수가 없다. 더 나아가 그것은 저자가 ‘세계연대’라고 말한 초국적 연대도 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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