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반양장)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 예경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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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6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심이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선언을 좋아한다. 우리가 비근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우대되는지 모르는 그런 개념어들이 실은 플라톤의 어깨 너머에 있을 뿐이라는 식의 선언 말이다. 미술이론을 조금이나마 공부했고, 그것을 동경했던 나 같은 사람들에게 곰브리치의 저 선언은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미술을 공부할 때, 실은 나 자신이 그림을 전혀 그리지 못한다는, 조각 역시 하지 못한다는, 벽돌 한 번 쌓아본 적이 없다는 한계에 자주 시달렸었다. 이는 예술 분야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미술가들에게는 없을 수 있는 ‘작품과의 어떤 객관적 거리’를 내가 가질 수 있다손 치더라도 나는 미술 속에 들어가 있는 그들이 정말 부러웠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탓에 “미술의 바다 위를 방황했다.”는 식의 회상들을 나는 곧바로 지워야만 했다. ‘미술의 바다 위’는 사실 사막의 신기루였던 것이다.


  미술에게 보낸 지난 2년 반의 집중과 헌신은 나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몇 가지 견고한 시각들을 줬다. 세세한 것에게 애정을 기울이고, 큰 틀을 다시 바라보는 예술의 태도, 바로 그것이었다. 때문에 이 모든 공부의 시작인 곰브리치의 이 책은 나에게 특별한 책이다. 말하고 싶지 않은 일기의 일부분이다. 미술사를 나처럼 막연하게나마 동경했었다면, 이런 유치한 수준의 자기고백에 십분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글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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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책이 그렇듯 곰브리치의 서문은 이 책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단, 미술을 처음 접한 사람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술’이라는 것을 ‘기호(嗜好)’나 ‘시각(視覺)’ 등의 단어로 바꿔 이해할 수 있다면 그들이라고 해서 저자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새삼 말하자면, 지금까지 내가 미술을 공부하며 깨달은 바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실제의 시각이 우리가 지닌 ‘여러 시각’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것들은 취향과 편견의 틀을 거쳐 인식된다는 것이다. 장담 한 번 해보자. 만약 현대인들에게 숙고할 시간을 전혀 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들이 모두 거짓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상당수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멤링의 그림보다 좋아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좋아함’의 판단은 거의 직관적이어서 별다른 장애 없이 우리의 ‘감상’이라는 영역을 확실히 점령한다. 곰브리치는 그런 우리에게 시간을 스스로 마련하라고 부탁해본다. 그렇다면 멤링의 그림 역시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곰브리치의 부탁은 앞서 말한 나의 첫 번째 깨달음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의 부탁을 수행할 넉넉한 시간을 우리가 간단히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나의 두 번째 깨달음의 영향력이 더욱 크다. 기호대로 산다는 것을 - 사실 미술작품 관람에 있어 기호를 따르는 것이 우리의 건강이나 도덕에 잘못된 영향을 주는 아니므로 - 만류할 수는 없다. 작품 감상은 옳고 그름[是非]의 문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감상에는 퍽 아쉬운 면이 있다는 것이 곰브리치에게서 뽑아낸 나의 지론이다. 우리는 대체로 쉬운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어려운 것들을 생각해보지 않는 우리의 삶을 원색적으로 비난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들에게 여건만 주어진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는 각자의 삶을 더 깊게 숙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나는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고(再考)라는 것은 몸 바깥으로 튀어나간 어떤 생각을 다시 자신의 몸으로 들여보내서 ‘필터링’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우리에게 넓은 시야를 갖게 해준다는 이점이 있다는 깨달음이 우리의 삶에 있어 자주 권장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을 것이다. 취향에 의지한 작품 감상은 좁은 소견을 벗어나기 힘들다. 미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더 넓을 수밖에 없다. 이곳을 제대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말마따나 “반감을 극복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갈림길을 만나면 익숙한, 혹은 잘 닦인 곳으로만 가지 말라고,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늘 가르치지 않던가. 하물며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들 앞에서는 어떠할까.


  미술의 효용을 주장하는 건 나의 사고에는 잘 맞지도 않고, 익숙하지도 않는 것이지만 그것에 대해 한 마디 하자면, 미술은 거의 모든 교육의 합치(혹은 매개체)와도 같다. 영국의 한 학교에서 한 장의 그림만을 가지고 여러 과목을 하나로 가르치는 교과과정을 실험한 적이 있었다. 예컨대, 터너의 <노예선>을 가지고 화가 개인의 삶, 미술사, 기법 등 우리가 보통 미술을 공부하며 일반적으로 알게 되는 그런 지식들뿐만 아니라, 당대 사회상과 역사의 변천, 인권 등의 문제를 다 같이 가르친다는 것이다. 새삼스러울 것이다. 하나의 작품으로부터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뽑아내고, 교훈을 얻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런 교육법은 지금껏 통용된 적이 없다. 일종의 교양에 머물었다는 뜻이다. 대학에 가면 이런 종류의 복합적인 교육은 수준 낮은 것으로 치부된다. 내가 겪은 바로는 아직도 전공수업의 질적 우위를 주장하는 교수들이 많다. 그것이 사실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나누는 사고’와 더불어 ‘종합하는 사고’ 역시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 말만 그렇게 할 뿐, 실상 주장하는 바들을 보면 - 굳이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린네의 종(種)분류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지난 역사는 칼같이 정리되었고,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바람직한’ 인식인 것으로 비춰져왔다. 균형과 경계가 근대사회에 얼마나 큰 안정감을 줬는지를 이 자리를 빌려 굳이 회고해보진 않겠다. 문제는 그것이 우리에게 심지어 “좋고 나쁜 작품”이라는 획일적인 사고방식마저 학습하도록,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올바른 감상인양 권유했다는 것이다. 로제 드 필처럼 화가들에게 점수를 매길 수 있을까? 아니, 화가들이 교수나 선생에게 작품을 제출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미술사상 가장 강력했던 사관(史觀) 중 하나인 빙켈만의 신고전주의 이론이 오늘날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주지해보자.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저와 같은, 흡사 우생학을 떠올리게 하는 가치화 작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수많은 블로거들이 그저 자신이 좋아한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화가들의 작품들을 객관화시킨 흔적을 볼 수 있다. 유감스럽지만 이건 중견 평론가들에게도 해당된다. 그들의 객관화된 근거를 5~60년 후의 우리 다음 세대들이 본다면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릴까. 설령 그들의 주장이 너무나도 강력하고 튼튼해서 또 하나의 ‘빙켈만적 사관’으로 구축된다고 하더라도 미술은 언제나 객관과 절대의 기준을 깨고 인간이 어디까지 창조적일 수 있는지를 과시하기라도 하듯 무한의 영역을 유영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미술을 좋아하는 결정적인 까닭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미술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비록 평론가 수준의 지식이나 사관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그들이 취향, 편견, 시각 등의 문제를 인식하게 된다면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이 봐온 작품들을 재고하는 힘겹고도 보람된 작업을 기꺼이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저 깨달음의 순간에 정말 필요한 것은 각양각색의 이론들이 아니라, 용기와 양심이다. 곰브리치는 서문에서 그것을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이 책은 곰브리치가 밝혔듯이 그가 알고 있는 미술에 대해서만 다뤘기 때문에 엄연히 말해 그 ‘Art’라는 것은 그 자체의 하위개념일 수밖에 없다. (나는 이를 소문자 ‘art’와 대문자 ‘ART’로 나눠 기술하곤 했는데, 사실 둘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정작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미술을 관통하는 곰브리치의 기본적인 사고이다. 그것을 알게 된다면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거 좋아해서 뭐해?”라는 주변의 비아냥거림을 기분 좋게 받아칠 수 있다. 곰브리치의 이 말이 주는 울림은 크다.


  “우리는 꽃이나 옷이나 음식에 관해서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까다롭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그처럼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성격으로 보이기 때문에 억제되거나 감추어진 것이 미술의 세계에서는 그 자체의 가치를 발휘할 때가 많다.(pg.33)


  독자들 중 일부는 이미 그 가치를 직접 작품 감상을 통해 느껴봤을 것이다. 이 책은 미술공부를 막 시작한 초년생을 위한 책임과 동시에 그 공부의 양이 상당한 ‘고급반 학생’들에게도 여전히 유용하다. 그 이유는 앞선 인용문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어떨까?


  “미술에 관해서 재치 있게 말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평가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은 이미 너무나 많은 상이한 문맥 속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정확한 의미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pg.37)


  “단어로 표현된 미술은 죽은 것이다.”라고 생각한 적이, 나는 있었다. 저 생각의 일부는 아직도 남아 있다. 여러 미술서적을 읽어본 이라면 접해봤겠는데, 마테오 마랑고니의 <보기 배우기>라는 책을 읽어보면 곰브리치가 ‘설익은 문장’들이라고 비판한 그런 종류의 비평들에 대해 거침없는 비난을 쏟아 붓는 한 늙은 학자의 응어리진 불만을 확인할 수 있다. 미술사 공부에 매진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권장되는 경고인데, 미술에게 우리가 화려한 언어를 가져다댈수록 - 물론 그것은 오래지 않아 화려함을 잃고 말 것, 즉 식상해질 것이다 - 미술을 관람하는 우리의 직관적 본질은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왜곡되고 만다. 그 언어들이 미술을 공식화하는 것은 곰브리치의 말마따나 “언제나 실패”했다.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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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게 적어 내려왔으나, 결국 곰브리치가 말하고자 한 것은 미술의 불가사의이다. 알 수 없는 것 앞에서 우리는 “알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무리한 시도는 어려운 이론조차 속화(俗化)시키곤 했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올바른 태도란 늘 참신하고 진심 어린 마음가짐뿐이다. 또한 그런 마음가짐은 우리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내 안에서 솟아나오는 감수성을 따라 작품 주변에 놓인 사실들을 조화하여 저만의 해석을 내리는 과정을 진정으로 경험해본 이라면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겸손인지를 잘 알게 된다.


  “미술에 관해서 속물근성을 조성하는 설익은 지식을 갖는 것보다는 미술에 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훨씬 좋다.(pg.36)


  첫 번째 겸손은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 - 사실 이 점이 굉장히 어렵다. 일반인들은 이런 것들을 습득할 시간적 여유가 없고, 마랑고니와 같은 보수적인 미술사학자들은 제대로 된 미술요소들을 이해하지 않고 비평을 하는 ‘젊은 비평가’들을 맹비난한다 - 이고, 두 번째 겸손은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는 ‘열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들 두 겸손은 지식과 새로운 해석이 나만의 영역으로 들어왔을 때 발생하는 일종의 ‘재채기’를 방지해줄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해야만 곰브리치가 말한 “새로운 발견의 항해”가 계속된다.


  미술사의 전반적인 흐름이나 작품정보, 작가비교 등 우리가 별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기초지식들은 굳이 이 책으로 배우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이 책이 그런 지식들을 얻을 수 있는 종류의 책 중에서 단연 최고 중 하나로 꼽힌다는 것은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미술지식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사관(史觀)의 차이는 있겠지만 최근 서점가에는 다양한 미술사책들이 독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곰브리치의 책에서는 마니에리스모, 현대미술 등에 대한 질 좋은 정보는 얻지 못했다. 그에 관해서는 오히려 다른 책들을 추천한다. 다시 말하자면, 저 시대의 미술을 곰브리치는 - 다른 시대들보다는 - 잘 모른다. 사실 이런 종류의 허점이야말로 역사책의 기본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행이란 갈림길 앞에서 하나의 길을 선택하는 과정의 연속이 아니던가. 곰브리치를 만난 후에 독자들은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할 것이니, 이 책을 그 초두로 삼는 것은 다른 책들로 여행을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다만 미술공부의 초입에 곰브리치를 만나 그를 반추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나만의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는 까닭은 언제든지 복기할 수 있는 곰브리치의 서문 때문이다.


  나는 단편적이거나 종합적인 여러 미술사책들을 읽어봤다. 그러나 그들 중 그 어떤 책도 곰브리치의 서문에 비견될 만한 ‘아름다운 글’을 그들의 머리맡에 두지 못했다. 뛰어난 독자라면 여러 책들의 내용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조합하여 큰 틀의 미술사를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당신이 현명한 독자가 되고자 한다면 부디 곰브리치의 서문을 여러 번 음미해보길 권한다.


  나는 미술이 아름답다고 늘 믿는다. 그것이 실제 아름답게 보이든, 아니면 추한 것조차 우리가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전환의 힘이 진정 요구되기 때문이든 간에 미술은 수많은 카메라 세례를 받아도 그 어떤 각도에서든 아름답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 까닭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도 아름답게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비싼 전시회에서 작품들을 힐끗힐끗 보고 지나가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다고 할 수 있다. 곰브리치의 이 책을 읽은 이만이 그 앞에 머물며 제임스 엘킨스의 <그림과 눈물>에 나온 예화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곰브리치는 미술에 대해 실로 많은 중요한 것들을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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