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테 콜비츠 역사 인물 찾기 2
카테리네 크라머 지음, 이순례.최영진 옮김 / 실천문학사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2012.10.14

※ 미술사 공부하던 당시 썼던 옛 리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미술에 대한 사변으로 시작해야겠다. 나는 책 리뷰에 ‘책 리뷰’만 쓰는 간편한 기술은 갖추지 못한 듯하다. (시험이 코앞인데 리뷰를 차마 미루지 못한다. ‘꼴찌’하더라도 책을 읽으라는 처칠의 말을 방패로 삼아본다.)

 

  케테 콜비츠를 만난 건 3년 전이었다.
  그 무렵, 나는 동생의 4B연필을 빌려 김충원氏의 드로잉 책에 나오는 몇몇 그림들을 따라 그리거나 아크릴 물감으로 반 고흐의 <삼나무가 있는 밀밭(Korenveld met cipressen, 1889)>을 모사하려고 했었다. 미술사 공부를 하려는 사람이 그림을 못 그려서 되겠냐는 걱정 때문이었다.


  조바심이 났던 나에게 다행이도 한 중견화가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차라리 데생을 몰랐으면 하는 것이 화가들의 바람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어린 마음은 차분하게 달래졌다.


  얕은 목표를 추구하려는 사람은 기술을 쫓는다. 하지만 심후한 경지는 마음으로 이를 수 있다. 생각해보니, 내가 최근 대학 강의로 듣고 있는 『장자(莊子)』 중 ‘양생(養生)’과 관련된 깨달음과도 닿는 바가 있다. 말은 쉽다. 마음으로 세계를 들여다본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그러나 화가의 조언 덕분에 나는 새삼 그림 속에 화가의 마음이 들어 있다는, 일종의 다른 차원의 이해를 갖게 되었다.
  ‘화가는 어떤 마음으로 저 그림을 그렸을까?’


  많은 사람들이 미술작품을 ‘이해’하는데 애를 먹는다. 아무래도 미술작품은 우리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풍경보다 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중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고, 집중의 ‘방법’에 관한 문제일 수도 있다. 여러 번 작품을 봤는데도 도무지 그 작품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내지 못했다면 - 더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그건 알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와 닿지 않은 것이겠는데 - 후자의 문제를 생각해봐야 한다.


  미술을 ‘현상’으로 보지 않는 또 다른 이해법이 있다는 것을 의외로 사람들은 모른다. 소위 ‘아카데믹’한 글들이 미술이해의 척도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각을 바꿔 미술을 ‘삶’으로 보는 방법은 어떨까. 작품에 대한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도 이 새로운 시각은 권장될 수 있다. 어떤 작품은 몇 년도에 만들어졌고, 무슨 기법이고, 사이즈는 몇 호 쯤 되고, 어디에 소장되어 있고, 누구의 영향을 받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작가의 삶을 통째로 한편의 영화처럼 “들여다보는 것”이다. 평전은 어떤가.


  그렇게 한 여인의, 아내의, 독일 화가의, 어머니의 삶을 보는 것이다. 『케테 콜비츠』를 읽는다는 것은.

 

 

 

*     *     *

 

 

 

  케테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새삼 나는 배우자를 잘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완벽한 현실주의자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나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극단적으로 끌어가고픈 욕망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예술적으로 잘 승화되면 ‘장인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고집’에 그칠 것이고. 내가 왜 케테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유를 들자면, 케테도 극단적으로 예술 그 자체에 머물고자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현실로 돌아오게 한 사람은 그녀의 남편인 카를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진료해주는 의사였던 카를의 삶은 케테를 노동자와 가깝게 만들어줬다.


  이전의 그녀가 소시민의 삶보다는 노동자의 삶이 더 아름답다고 여겼다면 카를은 그녀에게 프롤레타리아의 삶이 얼마나 비극적인가를 알려줬다. 문득 생각해보건대, 나도 케테와 유사하게 노동자의 삶을 ‘낭만’에 가져다대는 부류의 사람이리라. 그런 까닭일까. 케테의 작품 속에 비극적으로 표현된 프롤레타리아의 모습을 본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는커녕 일종의 죄책감 같은 무거운 마음만 계속 키워가는 것이었다.


  케테도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겉치레와 과장된 태도를 버리고 표백하지 않은 무색옷을 걸치고 다녔다. 그렇게 카를을 통해 차분해진 그녀의 삶이 한 번의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하우프트만이 초연한 희곡 <직조공들(Die Weber)>을 본 것이었다.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말은 당시 “나를 죽이시오.”라는 말과 동의어였다고 한다. 황제는 분노했지만 예술은 그칠 줄 몰랐다. 케테의 정신은 번뜩 살아났고, 그녀를 대표하는 연작으로 평가받는 <직조공 봉기(Ein Weberaufstand)>가 4년의 인고를 겪고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아쉽게도 아버지는 딸의 작품을 보지 못한 채 바로 그 해에 작고했다. 나는 그 작품을, 누구보다도 그녀의 아버지가 꼭 봐야했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어두운 화면들. 출구 없는 절망감. 생활과 노동이 비참하게 엉켜져 있는 삶. 허기. 발육부진. 감히 단순한 바니타스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해골. 칠흑과 같은 낮. 잡다한 용구. 빈곤과 곤궁, 죽음과 삶에 대한 짙은 회의를 함께 끌어안고 쇠약해져만 가는 노동자들의 모습. 이 작품은 그들의 삶을 낮은 시선으로 보여주고, 행진과 돌격, 비극적 결말까지 함께 그려낸다. 하지만 마지막 삽화에서는 끝내 그러한 삶과 비극이 결코 병약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어두운 화면에 문과 창문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들어오고 있다. 우리가 그토록 찾던 ‘희망’이라는 것.


  굵은 선과 그 선 사이의 세밀한 선들이 백지 위에 드러낸 비극. 나는 아름다움을 느낄 새도 없이 감정의 저 낮은 층위로 굴러 떨어진다.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처럼 나도 그렇게 되고, 작품 속 아이를 뒤에서 껴안아 보호하고 있는 어른들의 굳건한 손과 팔이 나의 뒤에서 뻗어 나온다.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삶의 앙상함과 흑백의 담담함이 이윽고 사위(四圍)를 감싼다. 그렇게 나는 책과 모니터 앞에 내던져져 있다. 복잡한 생각도, 철학도 뒤로 물러난다.


  나는 멋도 모르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은 인간이다.”
  하지만 나는 이 생각을 철회하고 싶지 않다.

 

  1914년 케테는 페터를 잃었다. 플랑드르에서 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한 '어머니' 케테. 전쟁터에 아들을 보낼 무렵에 그녀는 이렇게 일기에 적었다. “다시 한 번 이 어린것을 탯줄에서 잘라내는 기분이었다. 첫 번째는 태어나기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죽음을 향해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10월 22일 전사했다. 하지만 케테는 24일에 그의 편지를 받았고, 페터는 “포성을 들으셨겠지요?”라고 적었다. 그 포성 사이에서 죽은 케테의 전사 통보는 30일에 왔다.


  어느 날, 케테의 일기. “나의 페터야, 제발 내 곁에 머물러다오. 나를 도와다오. 나에게 모습을 보여다오. 나는 네가 거기에 있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언제나 두꺼운 안개가 앞을 가린다. 내 옆으로 오렴.” 이듬해 4월 11일의 일기. “나의 아가야, 봄이 왔다.” 그리고 그녀는 훗날 작업을 할 때면 언제나 일기장에 “나는 너와 함께 작품을 만들고 있다.”라고 적었다. 케테는 페터의 두상을 만들 때면 어김없이 울었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자원해서 전쟁에 나가겠다고 했을 때, 울음으로라도 끝까지 잡아놓을 것을……

 

  1918년 전쟁은 끝났다. 신문 기사에서 “전쟁의 마지막 총성이 사라졌다.”라고 선언했고, 케테는 이렇게 생각했다.
  “마지막 총탄으로 희생된 사람은 누구인가?”
  그녀는 페터의 기념비를 만들기로 계획한다. 그리고 그 작업을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오늘날 케테를 아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녀를 프롤레타리아와 혁명의 예술가로 기억한다. 그녀가 페터의 죽음을 목격하고 죽음, 임종, 추모 등의 소재로 판화를 제작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사람이기를 꺼려했다. 그 이유는 케테 자신이 말한 것처럼 “비겁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주 유명했을 때는 1920년대였다. 그 전에도 유명했지만 사람들은 이제 케테의 이름에 프롤레타리아를 입혔다. 그런 상황을 케테는 당황스러워했다. 그녀는 스스로도 혁명론자가 아닌 발전론자이기를 원했다. 나이도 50대였다. 자신의 아들 페터, 그리고 비슷한 나이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에서 고통을 받다 죽어가는 것도 보았고, 이 지구상에 벌어지고 있는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등 ‘악마적인 것’도 보았다. 그녀는 지쳤다고 고백했다.


  “제발 사람들이 나를 좀 조용히 내버려두었으면 한다.”
  상황은 너무나도 복잡했고, 여성으로서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다만 예술가로서 이러한 상황 모두를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뿐이라고 생각했다. 정치노선은 추종하지 않지만. 노동자들을 애도하는 것은 그녀의 권리였다. 이것이 케테의 의미이기도 하다.

 

  당시 러시아혁명의 결과를 기다리던 독일은 1920년 벽두부터 침울했다. 시대가 나아질 기미는 점차 사라졌다. 때마침 혁명의 기치를 부러뜨리기라도 하듯이 러시아에는 극심한 기근이 찾아왔다.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는 것처럼 보였다. 대공황도 왔다.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때의 독일로 돌아가 빵 한 조각을 사먹으려고 했다면 우리나라 돈으로 1조 14억 원을 내야만 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낼 것이다.


  1933년 히틀러가 총통이 되자, 콜비츠 부부는 아인슈타인, 토마스 만의 형인 하인리히,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와 함께 독일의 모든 자유가 억압될 것을 우려하여 좌파 인사들의 서명을 단행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하인리히는 프랑스로, 슈테판은 영국으로 망명을 갔고, 콜비츠 부부는 국내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생활은 힘들었다. 그녀는 교조적인 목표를 따라가는 것을 싫어했다. 오직 ‘살과 피’를 가진 살아있는 노동자들의 운동과 그들의 정의에 대한 타는 열정을 따라가고자 했다. 하지만 자유를 억압하는 시대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명성은 결코 억압될 수 없었다. 러시아에서의 케테는 가히 신적인 존재였다고 한다. 의도와는 달리 그녀는 ‘탁월한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대명사였다. 미국에서는 그녀의 71주년을 기념해서 전시회를 개최할 것이라고 하였으며, 그녀가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오기를 원한다고도 했다. 루쉰은 당시 침묵을 선고(케테는 1936년 나치스로부터 ‘개인적 전시회 금지’ 통보를 받았다.)받은 케테에 대해서 “예술의 언어가 이해되지 않는 곳은 없다.”라는 말로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고마움을 표시했다.


  케테는 당시 나치스로부터 ‘퇴폐미술가’라는 낙인이 찍힌 여러 미술가들처럼 어두운 그늘 밑에서 조각을 해야만 했다. 작품을 주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그녀의 주된 장르인 인쇄예술은 사회대변혁 시기에 유행한다. 회화보다 격동적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조각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의 초기 조각 작품들은 대부분 그녀 스스로가 파괴했고, 남아있는 작품은 7점에 불구하다. 지금은 대표작이라 평가받는 <쌍둥이와 어머니(Mutter mit Zwillingen>는 제작기간만 13년이 걸렸다. 그 기간의 일기가 케테의 심정을 말해준다. “아무리 일을 해도 아무것도 되는 게 없는 절망적인 나의 상태”. 그것은 곧 자살의 심정이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괴로움. 그러다 그녀는 묘비를 꾸미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죽음을 두려워하던 그녀는 1942년 겨울의 일기에 “죽는다는 것, 오, 그것은 나쁘지 않다.”고 썼다. 그리고 아들 한스와 그의 며느리에게는 “내 시대는 이제 다 지났다.”며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1945년 4월 22일. 그녀는 떠났다. 그녀의 죽음은 나치스의 붕괴 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브라크는 이런 말을 했다.
  “예술가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인간을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 있다.”
  케테는 말했다. “인간은 거기 있어야 한다.” 바로 그림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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