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30일

 

 



    너에게도 역시 또 다른 황금 해변에서  A ti también, en otras playas de oro,

    부식되지 않고 기다리는 보물이 있네.  Te aguarda incorruptible tu tesoro:

    광대하고, 막연하고, 피할 길 없는 죽음이.  La vasta y vaga y necesaria muerte.

 


    나에게 보르헤스는 이 하나의 연으로 기억되는 시인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덩어리의 죽음’이라는 기괴한 심상이 한동안 잊히지 않았다. 나는 대문호의 구절에 눌려 죽음은 언제나 화려하고 값비싼 언변으로 나를 홀리려고 할 것이라는 일종의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인가, 나는 간소한 걸 좋아한다. 늘어가는 건 책 뿐이다.


    얼마 전, 그의 세 번째 전집 『알렙』을 샀는데, 곁에 두고도 읽을 엄두를 못 냈다. 막연하게나마 『장미의 이름』이나 『율리시스』를 앞에 둔 느낌과 비슷했다. 거대한 유적과 유물들이 즐비한 문화유산. 해박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책장을 기웃거리면서 먼발치에서만 소심하게 바라만보다가 처음 접한 그의 작품은 단편 「죽음과 나침반(La muerte y la brújula)」이다. 이면지에 숫자, 수학기호, 방위표 따위를 적어가며 흥미롭게 읽다보니 게 눈 감추듯 끝나버렸다. 그만큼 짧다.


    보르헤스의 문고리를 잡은 느낌이 오래 남기에 이 찰나의 만남을 글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포우와 도일을 만나기 전, 당시 유럽의 독자들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언젠가 “나는 보르헤스를 모두 읽었다. 이제 스페인어 원서를 읽을 차례이다.”라는 소감을 쓸 날이 올까 기대하며, 그와의 첫 대면을 글로 풀어본다.

 

 

*    *    *

 

 

    우리나라 문학을 세계문학과 견주려고 시도할 때, 우리가 태생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시대 조응의 한계는 어딜 가든 지적되기 마련이다. 이 땅의 문학에서는 아직도 리얼리즘을 운운하지만 보르헤스는 1942년 이 단편을 쓰며 이미 그러한 비평의 영역을 훌쩍 넘어섰다. 소설은 아마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인 것으로 추정되는 알려지지 않은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또한 환상적인 분위기는 에릭 뢴로트가 집착하는 고대 그리스어,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maton : YHWH를 의미한다.), ‘트리스트 르 로이’ 빌라, 18세기 교파 등으로 충분히 드러나 있다.


    보르헤스는 환상문학을 일컬어 “실제적인 것의 더 복잡한 관계 표현”이라 했다. 근래 들어 세계문학의 히트작들을 보면 이 장르의 것들이 많다. 바르가스 요사, 움베르토 에코, 폴 오스터, 가브리엘 마르케스. 설명이 필요 없는 거장들의 대작이 쏟아져 나온 영역이기도 하다. 나는 「죽음과 나침반」이 발표된 시기가 1942년이라는 것에 놀랐다. 우리나라 문학사를 기준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나(와 ‘우리’)의 한계이지 않을까 싶다. 단순한 플롯과 눈에 보이는 반전에도 내가 거의 직관적으로 “세련됐다.”고 느끼게 된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그 ‘세련’이라는 보르헤스의 특징은 오래된 문화의 유물들을 자유자재로 작품화하는 그의 놀라운 통찰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말한 바대로 소설은 단순하다. 『올드보이(2003)』가 연상되는 독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레드 샬라크가 복수를 위해 만들어놓은 화려한 그물 안으로 어쩔 수 없이 유영해 들어가는 에릭 뢴로트, 복수에 대한 역(逆)복수를 감행하는 대수(최민식氏)에게 계속 좌절을 맛보게 하는 우진(유지태氏)의 이야기 사이에는 닮은 구석이 있다.


    레드 샬라크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의 실천이 무엇인지, 그 치밀함이란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줬다. 그가 어떤 식으로 그물을 펼쳐 에릭 뢴로트를 유인했는지는 후반부에 그의 입으로 직접 서술되는데, 사실 별도로 정리해보면 복잡한 계획이라기보다는 상대가 평소 관심 갖던 것을 미끼로 던지는 수준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자들이 레드의 계획보다 더 복잡하고 어렵다고 느낄 건, 아마도 에릭의 추리과정일 것이다. 문헌과 신비주의 신앙, 그리고 기호를 토대로 추적하는 에릭의 ‘이성적 추리’ 말이다. 첫 번째 ‘희생양’인 율법학자 야몰린스키가 죽은 건 정말 우연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형사반장 트레비라누스의 실없는 추리가 절반은 맞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자는 에릭을 따라 가며 18세기 교파의 신비한 역사와 그와 관련된 어떤 미스테리한 죽음의 베일을 벗겨갈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트리스트 르 로이의 빌라에서 레드를 만나기 전까지는. 에릭은 실패했고, ‘우리’도 그러했다. 독자는 레드의 설명을 충분히 들은 에릭의 변론, 아니 ‘요구’에 실망하게 될 것이다. 살려달라는 말은 없다. 곧 죽을 목숨인 그에 대한 연민이 생길 것 같진 않다. 그는 끝까지 이성에 매달리며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 “당신의 미로에는 불필요한 선이 세 개나 더 있습니다.”


    일직선상의 미로로 끝내는 것이 더 세련된 방법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죽게 생겼는데도! 그러나 레드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끝없는 일직선상의 미로를 만들어서 당신을 죽일 것을 약속한다. 단, 다음번에 당신을 죽일 때, 즉 당신이 여기서 살아나간다면. 그리고 방아쇠를 당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직감이 있었다. ‘안 죽였을 것이다.’ 총은 장전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보르헤스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총에 총알이 있었다는 언급은 이 소설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에릭은 풀려나지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고 해도 이성의 실패로 이미 에릭은 한 번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간, 그리고 자신의 동생을 감옥에 가두게 했던 옛날의 에릭에 대한 오늘의 복수는, 이 정도로 두뇌게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면 성공한 것이 아니었을까. 레드는 아마 만족을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다른 게임.


    나는 과감하게 레드의 입장에 서봤다. 나라면 안 죽였을 것이다. 그를 풀어줬을 것이다. 또 한 번의 거대한 두뇌게임을 시작했을 것이다. 에릭은 어쩔 수 없이 이성을 무기로 나의 일직성상의 끝없는 미로를 탈출하고자 할 것이고, 나는 에릭이 내가 마련한 최종지점, 즉 죽을 곳으로 점점 향하려고 고민하는 에릭을 바라보며 쾌감을 느낄 것이다. 이번 게임에서도 내가 이길 것이다. 에릭은 박학하나 단순한 사람이고, 박학 이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를 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모른다. 승률은 100%이다. 두 번째 승리 후 그를 죽일 지, 아니면 세 번째 게임으로 이어갈 지는 또 내가 결정할 몫이다.


    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것이 나의 두 번째 소름을 돋게 했다. 보르헤스의 환상과 소설 속 긴장이 내가 순간 방아쇠를 당길 범죄자의 탈을 쓰게 만든 것이다. 이 짧은 작품을 덮으며 나는 매끈한 몸매의 여성보다 더 섹시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무한미로 속의 복수와 추적. 지금은 흔해 빠진 소재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독자를 매료시키는 보르헤스의 상상력 앞에서 나는 쌍수를 들 수밖에 없었다. 1942. 이 숫자가 나의 세 번째 소름을 돋게 했다. 나는 레드의 방진(方陣)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에릭처럼 보르헤스의 손아귀에서 도무지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맨 위에 인용한 시와도 묘하게 오버랩된다. 보물과 같은 죽음. 그 화려함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죽음. 죽음의 유혹. 게임. 일직선상의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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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6

 

 

  죽음에 대하여 나에게 허여된 유일한 사유의 통로는 피상(皮相)이다.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 움베르토 에코의 『추의 역사』, 멜라니 킹의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 등을 읽으며 나는 내가 죽음의 여러 주제들을 거쳐 가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하곤 했다. 죽음을 역사적, 철학적, 혹은 미학적으로 들여다보는 일은 즐겁다.


  단, “나는 죽음과는 멀다.”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것은 명제가 아니라 테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간혹 하지만. (참이나 거짓을 판단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애당초 ‘명제’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다.) 예컨대, “나는 죽음과 멀어야 한다.”라든지, “나는 죽음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와 같은 저항적인 선언 같은 것. 여기에 ‘언제까지나’라는 부사가 붙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선동적이겠다. 그러나 내가 왜 이 전제를 아무런 의심 없이 삶의 확고한 못 중 하나로 벽에 박아놓았는지는 알 수 없다.


  나의 전제를 신과 비교하면 어떨까 싶었다. 그것은 간혹 전지전능했기 때문이다. 특히 생동하는 봄과 찬란한 여름에 나의 몸과 정신을 휘감아 자신의 무궁무진한 힘을 유감없이 뽐냈다. 돌이켜보면 내가 지금껏 의지하고 있는 수많은 전제들 중 그것은 소위 ‘갑’이었다.


  의심해보라는 말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무장해제’니, ‘나체’니, 하여간 옷을 벗게 되는 것이라는 뉘앙스의 표현들이 의심에 들러붙은 채 마치 교양처럼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진심으로 대전제들 앞에서 고개를 좌우로 10~15도 정도 갸우뚱하는 순간 느껴지는 소름은 매우 불쾌하기까지 하다. 전제를 의심하는 나 자신을 불손하게 여기면서. 그 찰나는 수도꼭지에서 갑자기 굵은 짐승 울음소리가 남과 동시에, 공손하게 모은 나의 두 손 위로 녹물이 노골적으로 쏟아질 때의 심각한 짜증을 동반한다.


  “아, X발.” 솔직한 욕설이 화장실을 가득 채우고, 나는 손을 이리저리 털려고 하지만 사방에 오물의 자국들이 남을 것 같아 불청결의 흔적을 잠시 손 안에 묶어둔다. 바로 그 순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픈 이 더러운 영토가 혹시 내가 벗어날 수 없을 만치 광활한 것은 아닌지 - 혹은 백 년은 족히 헤맬 미로와 같은지 -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불길한 느낌들이 나를 보호하고 있는 문장의 앞과 뒤에 빠짐없이 포진하고 있는 것도 같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렇다, 이 감동스럽고 혈기 넘치는 ‘필사(必死)’라는 단어를 신발로 삼아 사위(四圍)로부터 탈출하고자 한다. 그러나 발바닥에 갑자기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必死 때문이다. mortality. 피할 수 없는 종말이라는 뜻이리라. 나는 저려진 배추처럼 축 늘어져 더러운 영토 위에 아무렇게나 눌러 붙어버린다. 대전제가 자모(子母)의 기호들로 낱낱이 해체되는 적나라한 광경이 아름다운 석양과 어울려 기괴하게 보인다. 해체된 전제가 “나는 죽음과 가깝다.”로, ‘-는’이라는 보조사가 빠지고 원근의 형용사가 교체된 채로 다시 꾸려지는 일은 없다. 대전제의 붕괴와 함께 나는 나머지 모든 전제들을 강탈당했다.


  죽음. 유일한 리얼리티. 오정희의 두 단편 「동경(1982)」과 「얼굴(1999)」에서 나는 죽음을 앞에 둔 ‘늙음(老)’을 조용히 들여다봤다. (그렇지 않은가? ‘/늘금/’은 균열이 난 벽돌 위에 찰싹 붙어 있는 기생적 존재처럼 불쾌한 발음이지 않은가?) 시선이 닿을 수 없는 저 깊고 어두운 그것의 안으로, 내가 흘린 것도 같은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칠칠맞긴’. 나는 낯을 붉혔다. 아무도 없는데, ‘요즘 눈물 날 만큼 바람이 시리잖아’고 나는 변명을 떨어뜨려 눈물의 뒤를 쫓게 했다. 진심은 여전히 막연한 죽음과 대면한 채 나를 그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정중하게.


  나는 대전제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 어떤 작업을 해야 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고민이 필요 없는 작업이었다. 루이스 월퍼트의 『믿음의 엔진』에서처럼 그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죽음이 일상의 제국에서 정1품의 관모(官帽)를 쓸 일은 없다. 매일 오고 가는 신촌 명물거리이며, 대학 캠퍼스이며, 홍대역 근처이며, 합정이며, 연대 앞 정류장, 그리고 사람 많기로 손에 꼽아주는 이곳 일산이며, 그런 이름의 성곽들은 그야말로 잡다한 들숨과 날숨의 저자거리이지 않은가 말이다. 이따금 시리아와 방글라데시, 이집트 등지에서 수많은 목숨이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사라졌음을 일회적으로 경청할 뿐이다. 게임에서는 ‘몬스터’나 ‘에너미(enemy)’를 키보드로 처단한다. 가까운 죽음만이 특별한 이벤트와 악몽의 소재가 된다. 나는 이런 것들이 우리 세대가 죽음에 대해 가질 수밖에 없는 인식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해봤다. 자신과 타인의 죽음은 둘째 치고, 죽이는 행위의 고전적 의미마저 퇴출당한 상태.


  그러니 노인의 삶이 내가 읽고 접해야 할 주제들 중 낮은 서열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했다. 굳이 ‘카르페 디엠’을 누군가가 외쳐주지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현재에 집중하게 되는 삶에서 5~60년 이후의 단조로운 일상을 그려보는 것은 시도할 생각도 못했다. 안타깝게도 그건 일상을 조명하는 수많은 작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꿔 말하면 「동경」을 쓴 1982년에 그녀는 서른다섯이었는데, 생각해보면 한국문학사적으로 거의 예외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젊은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서른다섯이면 한창 자리 잡은 일상의 매력에 취해 있거나 젊음을 반추할 시기라지 않던가.


  나는 오정희가 동네 노인정에 나가 한동안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권태롭고도 아린 맛이 진하게 배어나오는 한낮의 풍경을 상상해봤다. 무섭도록 긴 시야가 있다. 어쩌면 인간에게 진정한 의미의 ‘망원경’은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갈릴레이가 벨기에에서 수입해서 행성들을 관찰했다는, 그런 용도를 제외한다면. 이미 우리가 볼 인생의 먼 날들은 주변에 산재해 있다. 때문에 우리는 늙음을 혐오하는 자연스런 감정을 부끄러운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가? 철학자나 정치인이나 작가나, 여하튼 역사가 기억하는 위대한 인물들의 옆에 나란히 놓인 괄호 속에 생몰을 나타내는 두 종류의 숫자가 있고, 둘 사이에 물결 표시가 나 있는 그 기호들을 보고 있자면, 닫힌 괄호 앞에서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나는 2100년까진 못 살 것이니 괄호 앞 숫자에는 ‘2’, ‘1’의 입주가 확정되어 있는 셈이다. 숫자라는 기호로 기억될, 때론 묘비 후면에 새겨진 한자들로도 기억될 생사의 여정은 지극히 막연하기만 하다. 나는 궁금했다. 노인들은 어떤 생각으로 하루를 보낼까.


  「동경(銅鏡)」에는 삶에의 갈망이 자전거를 타고 이따금 경적을 울리는 아이, 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꽃, 노부부의 집을 방문한 젊은 청년 따위 등으로 드러나 있다. 살아있는 것들은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더 싱싱하게 보일 것이다. 반면, 30분을 산책하면 적당히 땀을 흘린다는 할아버지의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는 아이의 자전거 속도와 확연히 대비된다. 버스를 타기 위해 집 앞 거리를 지날 때면 나는 으레 이른 아침이든 대낮이든 산보를 즐기고 있는 노인들을 보게 된다. 그 느린 속도. 내가 허용할 수 없는 공백이 그들의 뒷모습에 새겨져 있다.


  내가 동경(憧憬)하는 건 그런 속도가 아니다. 이따금 버스에서 볼 수 있는, 광화문으로 서울 나들이를 나가는 중절모의 ‘멋쟁이 노년 신사’가 미래의 나였으면 한다. 쪼그라들고 초라해지긴 싫다. 정년을 앞둔 교수들도 멋있다. 그들이 캠퍼스를 느릿하게 걷고 있으면 나는 그 뒤를 따라 붙어 속도를 흉내내보곤 했다. 얼마 전 사라진 가을에는 그들의 우수에 젖은 눈빛도 참으로 근사해보였다. 다만 나는 그들이 지극한 예외라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을 뿐이다. 20대에는 누구나 그렇듯 자신은 굴러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자부한다지 않은가.


  「얼굴」은 그런 의미에서 큰 충격이었다. 반신불구에 말도 제대로 못 하는 할아버지가 방에 누워 있고, 그의 ‘똥오줌’을 가려주던 아내는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 치매와 비슷한 증상이다 - 그 오락가락하는 정신에 지하철과 버스를 타겠다고 나간다. 노부부를 힐끔힐끔 쳐다보던 검은 개가 저승사자마냥, 할아버지가 홀로 있는 방 안에 들어와 죽은 뒤를 맛있게 먹고 나른한 잠에 빠졌을 때, 그 소름끼치는 장면에서 독자라면 누구나 죽음의 한 양태를 느꼈으리라.


  “저무는 날, 길은 더욱 멀고 아득하다.(「얼굴」中)


  50대에 접어든 오정희의 시선은 「동경」에서보다 한층 죽음에 근접해 있다. 나는 할아버지의 이 표현에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하루의 무게가 얼핏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반신불구는 하나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폐차장의 고물들처럼 볼품없이 ‘찌부러지는’ 나약한 육체가 정신의 영역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오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삶을 꿈꿀까? 죽음을 받아들일까? 두 경계가 없는 생각이란 있을까? 나는 다시 두려워졌다.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2002)』나 데이빗 핀처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 등 여러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나는 죽기 전에 먼저 죽음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 정신적 준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막연한 각성과 다짐 따위를 꿀꺽 침과 함께 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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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4

 

 

  밥솥이 기차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쌀알들을 고온으로 짓누른다. 남김없이 패배시킨다. 다 된 밥솥 뚜껑을 막 열어 그 섬뜩한 증기에 얼굴을 가져다댄 사람은 알 것이다. 밥솥은 무서운 도구이다. 저 안에 내가 한 알의 쌀이 되어 들어가 있다면? 엽기적 연상이 될 때마다 나는 숨쉬기도 힘든 가마솥 찜질방에 대한 기억에 몸서리를 친다. 돌연 헛구역질을 하기도 한다. 열기라는 것의 위력. 그것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차라리 삶이라는 것은 고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 하지만 미온은 간직한 채 - 있는 상태의 평정심으로부터 지배를 받는 것은 아닐까. 나 자신을 돌아봐도, 격정적이고 날카로운 파장 탓에 마치 100미터를 전력으로 달리는 순간은 얼마 없다. 심장이 오래 견디지 못하는 일을 삶의 주식(主食)으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열렬히 사랑하다가도 언젠가는 긴 냉온의 일상을 보내고, 그로부터 또 한 번 격렬한 연애를 꿈꾸다가도 자신이 감당할 만한 체온으로 돌아가며, 난폭한 몸짓과 화를 식혀 용서의 형국으로 진입한다.


  권지예의 <뱀장어 스튜>은 약불[弱火]에서 보글보글 끓는, 이 ‘용서’에 관한 감각적인 이야기이다. 우리 모두는 한 마리의 ‘원숭이 암컷’이기에. 각자 돌아갈 동물원의 문이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진 않은지, 생각해볼 일이다.

 

 

*    *    *

 

 

  찜인 브레이징보다는 짧지만 - 재료를 보통 한 입 크기로 자르니까 - 스튜 역시 적잖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음식이다. “아주 고요하고 평화로운 화력(火力)”으로. 권지예는 이 스튜에서 “세월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피카소가 79세에 그린 작품답다는 뜻이다. 노년의 화가와 스튜. 사랑을 회상하기에도 어울린다. 화려한 요리도 아니라서 ‘인생’스럽다.


  소설은 피카소의 스튜 그림, 그리고 남편이 스튜 냄비에 삼계탕 할 거리들을 다 넣어놓고 1시간 타이머를 맞춰놓은 순간, 이 두 개의 장면으로부터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그 사이에 권지예가 삽입한 남편과의 이야기, 입양된 아이에 대한 회상, 그리고 옛 애인인 남자와의 사랑 이야기는 1시간이 지난 타이머의 ‘땡’소리와 함께 하나의 단어로 수렴된다. 그리고 그것은 스튜와 닮아 있다.


  “무언가를 죽여 보지 못한 사람은 무언가를 사랑할 수도 없다는 거야. 이렇게 죽어 있는 닭들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닭을 다시 키운다고 해도 애정 따윈 생겨나지 않지.”


  단번에 죽이지 못해 목이 너덜너덜한 채로 달아난 닭이 자신의 머리맡에 있었다던, 기이한 일화를 소개한 남편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살의를 갖는다. 그것도 두 번이나. 한 번은 바퀴벌레 새끼들을 눌러 죽이는 남편에게, 다른 한 번은 노르망디 지방의 바닷가 마을(에트르타) 절벽에서 남편에게. 그것은 사랑에의 갈구였을까. 아니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일시적인 혐오, 혹은 본능적 충동이었을까. 누구라도 이 장면에서 저 둘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남편은 아내에게 탐탁지 못한 남자가 되었다. 그녀가 받은 첫 감동은, 자신의 상처를 애무해주는 남편으로부터 치유되는 듯했기 때문에 일어난 느낌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은 다시 그래줬으면 하는 아내의 말 못할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아내도 이제는 더 이상, 상처를 애무하는 남편에게서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다. 전희를 위한 전초전 정도. 둘의 삶에는 선명한 균열이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폭발하는 감정을, 독자들은 프랑스에 입양된 한 한국인 여자아이를 만난 식당에서 읽게 된다. 아이에게 한국을 소개해달라며, 호텔비까지 내주겠다는 프랑스인 중년 부부의 요구를 아주 간단하게 묵살한 채, 아내는 차에 가 시동을 건다. 스프링처럼 튀어나간 남편에게 그녀는 안기지만 남편은 차에서 내려 소변을 볼 뿐이다. 합일감이라는 것이 전혀 없다. 도대체 그녀에게 어떤 과거가 있었나. 갑작스럽게 등장한 ‘나’라는 서술자가 말한다.


  “꼭 꿰고 싶은 구슬을 놓치는 적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구슬을 놓친 것이다. 시공이 이동하고, 독자들은 고딕체로 적힌 하나의 편지를 읽게 된다. 동물원을 탈출한 암컷 원숭이에 대한 이야기. 아니, ‘산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서 나는 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불륜이다.’


  장소는 파리가 아니라, 한국이다. 그녀는 나체로 일어났고, 부엌에서는 한 남자가 거의 벗은 거나 다름없는 옷차림으로 샐러드를 만드는데, 둘은 삼 년 만에 만난 것이고, 그녀는 집을 떠난 지 거의 두 달이 되어가는 날이었다. 남편으로부터 온 편지는 이렇다.


  “마음속에 당신을 향한 쪽문을 잠시 열어 두리다.”


  ‘잠시’라는 부사가 촉박한 시간을 의미하는 것 같진 않다. 동물원 우화 속 암컷 원숭이는 동물원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열린 쪽문으로 암컷은 들어갈 것이다. 그곳에는 수컷 원숭이와 그 둘이 낳은 새끼원숭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관절 그녀는 왜 나신의 남자에게로 떠나온 것일까.


  “남편의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여자가 보기엔 그는 세상에 대해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남자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전의는 모두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녀의 사랑도 상실당한 것이었다. 그녀는 현재의 남편이 아닌 남자에게, 그로 상징되는 과거에 와 있다. 그것은 ‘솔미재’라 언급된, “한평생 마음의 고향”과도 닿는다. 치매가 들어 저녁때마다 어머니가 외쳤다던, 옛 짝사랑 총각이 살던 마을. 그녀에게 ‘솔미재’는 남편이 아닌 남자가 될까. 그러나 그녀는 묻는다. 남자는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녀도 언젠가부터 남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중독일까. 충동일까.


  그녀는 남자를 온몸으로 받아준다. 그 수용에는 연민이 있다. 늙어가는 남자의, 홀로 사는 에고이스트의, “여자를 구속하고 길들이길 싫어하는” 남자의, “떠나기 위해 온몸을 바쳐 사랑하는 관계.”를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이 마치 늙은 피카소라도 된 양 바라보는 연민.


  혈육의 정에 대한 남자의 본성은 거의 귀소본능과도 같은 것일까. 내가 그의 심정을 이해해보려고 한다는 것은, 우스운 시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막연히, 아주 먼 산의 실루엣만을 바라보듯 해서, 결혼이라는 것이 고독의 근원을 잘라 내줄 것이라고는 믿고 있다. 그것이 가벼운 젊음의 섣부른 믿음이라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고독은 낯선 것.


  늘 마주하는 것이 낯선 것일 수밖에 없는 상황은 고독만이 가진 특징이다. 고독의 무력이다. 나는 그가 그녀에게 자신을 넣으며, 그녀가 그를 생각하듯 그 자신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었을 것이라, 또한 막연히 생각해봤다. 그녀는 그와 오래 전에 낳은 한 아이를, 외국으로 입양 보낸 그 아이의 존재를 그에게 설명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고독의 중첩, 관계에 대한 배신, 그런 것들 따위만을 줄 뿐이니까.


  돌아왔다. 옆에는 남편이 있고, 곧 타이머가 울릴 시간이다. 남자에게 가졌던 연민이 남편에게로 옮아간다. 싫어하는 만큼 사랑하는 것은 질긴 실을 만드는 일이고, 그것은 삶을 함께 하는 것이다.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말이 용서로 이어지고, 집에 돌아온 그녀에게 끓여주는 남편의 삼계탕으로, 슈미즈 차림으로 담배를 태우는 그녀에게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타이머 종소리로 이어진다.


  “평화로움에 길들여지는 일.”

  피카소가 스튜 재료들을 살뜰하게 그리며, 생각한 것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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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4 2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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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5 21: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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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1

 

 

  잡담으로 열어본다.


  군대에서였다. 내가 상병이었을 때, 일군의 하사들이 포대(중대)에 들어왔다. 그 중 한 명은 나보다 어린 87년생이었다. 소위 ‘행정왕고’였던 나에게 그는 많은 걸 물어봤고, 나는 그와 빨리 친해졌다. 업무를 위해 속초 시내로 나갈 때마다 나는 으레 그에게 뭐 필요한 것이 없냐고 물어보곤 했으니. 말단 하사인 입장에서 그도 나의 도움이 달가웠으리라. 그런 그가 나에게 몇 번 부탁한 일이 있었는데, 아직도 나는 그 일을 기억한다.


  하루는 그가 매우 곤란하다는 표정을 하고 행정실로 들어왔다. 각종 일지를 쓰고 있던 나에게 행정보급관 몰래 눈치를 주더니 기어이 나를 복도로 끌어냈다. 무슨 일이냐고 의아해하며 묻자 그는 나에게 핸드폰을 주며 전화 좀 받아달라고 했다. 전화? 무슨 전화입니까? 일단 받아서 나 훈련 중이라고 나중에 전화 걸라고 좀 해줘라.


  받아보니 한 여자의 - 나는 이 표현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 설악산 골바람보다 서린, 경계근무 중인 병사의 군화 발치에 엄습하는 차디 찬 한풍(寒風)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〇〇씨, 자꾸 이렇게 나 피할 거예요? 그러면 내가 전화 않고 가만히 있을 줄 알았어? 당신 정말 이렇게 나오기야? 〇〇씨, 내 말 듣고 있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뭔 ‘시츄에이션’인가. 업무로 바빠 죽겠던 나를 그가 간곡히 불러낼 정도의 일이 한 여자의 전화를 받아주는 것? 하사는 행정실 건너편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문틈 사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든 좀 둘러대 봐. 딱 이 표정이다.


  통신보안. 나는 일단 군인처럼 딱딱하게 전화를 받고, 그 여자가 확실히 달라진 저 편의 목소리에 잠시 당황하며, “누구세요?”라고 하는 틈을 타 “여보세요?”라고 말투를 바꿨다. 통신원이구나. 나는 생각했다. 아니면 사기전화를 거는 사람이거나. 내가 아는 한 하사는 애인이 없었다. 생전 처음 겪는 일임에도 나는 눈대중으로 탄알이 몇 개인지 금방 셀 줄 아는 병사가 된 듯 사건의 전말을 대강 파악했다. 참 곤란하게 됐군. 모른다고만 둘러대자.


  지금 훈련 중이라 〇〇하사님은 연병장에 계십니다. 그래요? 언제쯤 와요? 잘 모르겠습니다. 애써 침착하게 대응했다. 여자는 뭔가 메시지를 남기려고 했던 것 같다. 뜸들이더니 알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하사에게 핸드폰을 건네주면서 무언으로 물었다. 한 고비 넘겼다는 표정을 짓더니 하사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전화 건 여자를 자신은 누군지 모르는데 얼마 전부터 계속 전화를 걸면서 사귀자고 하더라고 말이다. 마침 옆에서 이를 쭉 보고 있던 옆 포대(중대)의 중사 한 명이 “또 걔냐?”라고 말했다.


  이후 나는 그녀의 전화를 몇 번 - 한 번은 그녀가 나에게 “목소리 바꿔서 받는 거지?”라고 윽박지르기에 겨우겨우 내가 다른 사람임을 확인시키기 위해 진을 다 뺀 적이 있다 - 더 대신해서 받았다. 행정실 식구들은 그 여자를 ‘미친년’이라 부르게 되었다. 후임이 일을 잘 할 즈음 되자, 나는 행정실에 출입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대신 포대장(중대장)과 행정보급관을 설득해 막사의 환경미화를 한답시고 속초 시내에 있는 생활용품점과 철물점에 나갔다 오는 시간이 늘어났다. 말년병장으로 늘어져 있지 않기 위해 나는 나름 보람 있는 소일거리를 찾아냈고, 바빴으며, 그 하사와 막사 내에서 마주치는 시간은 줄었다. 듣기로는 그 하사 역시 더 이상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렇게 ‘그 여자’는 잊히는 듯 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여자’나 ‘광기’, 혹은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를 제대 후 접할 때마다 그 여자의 이미지를 곧장 떠올렸다. 어쩌면 그녀는 그런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사가 말 못할 부끄러운 일이 베일 속에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그 하사가 난잡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확신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아니면 신분이 말단 하사였기에 부대에서 바르고 때론 고지식한 사람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여하튼 그녀의 섬뜩한 목소리는 가을바람에 당연히 날릴 수밖에 없는 낙엽처럼, 내가 가진 ‘여자’라는 이미지의 한 축을 맡아 버티고 서 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인상적인 집착을 목격했다. 그 톤은 아직도 기억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말 재밌게도 나는 그런 목소리에 매력을 느꼈었다. 처지가 사람을 만든다니까. 생각했다. 나는 그런 목소리에 대꾸해보고픈 누군가의 애인이고 싶었던 것이리라.

 

 

 

 

*     *     *

 

 

 

  하릴없이 낮잠을 잔 탓에 새벽의 말똥말똥한 눈으로 오정희의 <바람의 넋>을 단숨에 읽고, 나는 이젠 자야지 하며 누웠다가 이번에는 김영하의 <당신의 나무>를 읽었다. ‘당신은……’이라는 서술. 나는 단번에 가오싱젠의 <영혼의 산>을 떠올렸다. 2인칭이다.


  삶을 전연 모르던 6년 전의 내가 ‘노벨문학상’이라는 간판에 홀려 사들었다가 1권도 채 못 읽고 포기했던, 그 긴 작품 속에 두 개의 장이 있다. 하나는 ‘나’에 대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당신’에 대한 이야기.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오싱젠이 “당신은……한다.”라고 쓴 부분을 따라 중국의 한 마을로, 오지로 끌려 다니며 받았던 무저항의, 혹은 비가역의 느낌은 잊을 수 없다. 흔히 ‘전지적 시점’이란 말을 쓰는데, 2인칭은 그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구나, 어린 마음으로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한편으로 내가 떠올린 것은 바로 ‘그 여자’였다. 김영하가 ‘당신’이라 부르는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는 남자라면 누구든 소설 속의 그녀와 몸을 섞는 사이가 된다. 그리고 그녀의 무서운 - 나중에 가면 ‘당신의 집착’이라 새로이 해석되기도 하는 - 집착을 경험하게 된다. 소설의 여러 전제들 중 나는 그 점이 가장 무서웠다.


  나는 갑자기 ‘나’ 없이 홀로 그 전화를 받으려는 하사의 심정을 상상해봤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순간, 당신 어디야, 지금 뭐하고 있어, 따위의 질문을 무감각하게 쏟아내는 그 여자의 숨은 노기(怒氣)는 얼마나 끔찍했던가. 소설 속 그녀는 한 번은 자신을 죽이려고, 두 번은 ‘당신’을 죽이려고 했다. 그럼에도 당신은 그녀의 체취와 육체를 기억해낸다. 나는 “이런 게 사랑의 가장 더러운 면이다.”라고 생각했다.


  이 소설에는 두 가지의 심상이 나타난다. 굳이 대립이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둘은 전연 다르다. 하나는 나비효과이고, 다른 하나는 나무가 앙코르와트를 잡아먹는 이미지. 모든 것을 하나의 연으로 이어 퍼져나가는 것, 그리고 잠식해가는 것. ‘당신’은 그릇의 미세한 마찰로부터 비극이 연쇄적으로 발생했고, 심지어 저 먼 우주에서의 일까지 발생했다고 본다. 웃긴 연상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미 ‘당신’이 되었고, 웃지 못한다. 작은 씨앗에서 시작해 사원 하나를 통째로 삼킨 ‘판야나무’에게도 ‘당신’은 공포를 느낀다. 그것은 김영하에 따르면 ‘당신’, 아니 우리에게 이런 존재가 된다.


  “거대한 나무가 되어 당신의 뇌를 바수어버리며 자라난, 이제는 제거 불능인 존재.”


  남자에게 여자는 ‘씨앗’이 될 수 있다. 여자에게 남자는 ‘씨앗’이 될 수 있다. 상담자와 피상담자의 관계에서 서로 살을 섞는 사이가 된 이후로 둘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여자는 소위 ‘올인’했고, 남자는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여자가 변하는 걸 별로 원치 않는다. 여러 가능성을 냉정하게 생각해보려고 하는 습관 때문에 여자의 무조건적인 입수(入水), 몸을 사리지 않는 그 큰 소리의 “첨벙!”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숙고하려고 한다. 만약 여자가 계속 ‘당신’에게 빠지려고 한다면 그야말로 미칠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남자는 떠나가고, 여자는 그를 찾는다. 체념한 듯 하는 말 속에는 그리움이 심하게 자신의 입 냄새를 풍기고 있다. 누구라도, 저건 체념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나 연인 사이에는 그렇다. 나는 널 잊었어.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사랑에는 얼마나 많은 거짓말들이 있는지 새삼 기억해내고 싶을 것이다. 저마다의 연인들에게 사랑한다는 마음을 핑계로 심어놓았던 수많은 씨앗들이 우리를 어떻게 부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나는 쓰라렸다.


  남자는 다시 전화를 건다. 여자의 육체가 그리워서이다. 남자에게 여자는 사랑의 정신이기도 하고, 사랑의 육체이기도 하고, 혹은 둘 중 하나의 압도적인 우위를 통해 새겨진 잘못된 인상이기도 하고, 여하튼 그렇다. 이 생각에서 조금 더 나아가야 남자는 후회를 하게 된다.


  “당신이 내뱉은 말들은 그녀가 휘두른 과도보다 더 위험한 건 아니었을까. 과연 누가 나무이고 누가 부처인가.”


  그녀가 과연 ‘당신’을 과도로 두 번이나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 그 휘두름은 살해의 의미였을까. 아니면 자신을 죽이지 말라는 역설적인 발악이었을까. 어쩌면 사랑하고 있어도 전연 사랑이 아닌 듯하여 ‘당신’에게 들려주고자 했던 메시지의 최종적 발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걸 제대로 들었다면 사랑은 놀라운 진전을 보였을 텐데.


  우리는 의식의 부족으로, 경험의 부족으로, 사랑이 진화할 기회를 매번 놓치곤 한다. 그리하여 거의 모든 사랑은 실패하고, 그것은 하나의 포맷이 되어 인류가 달성하지 못한 이데아의 어느 편에 박혀 있는, 보석처럼 빛나는 별자리의 어느 하나의 깜빡임 정도로 항간에 향유된다. 수많은, 그와 관련된 노래들. 너무나도 왜곡되었고, 실체도 없는. ‘일루션’이라 하던가.


  나비효과. 사원을 집어삼키는 나무. 그녀가 휘두른 과도. 여자 어머니의 자살기도. 초신성의 대폭발. 앙코르와트. 다시 떡갈나무. 나에게는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들이 들어앉았다. 갑자기 아무에게나 전화를 하고 싶어졌다.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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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2 0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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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2 18: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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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5 22: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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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5 23: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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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1

 

 

  정신 나간 아내를 둔 남편, 거의 정신병에 시달리는 것 같은 엄마를 둔 아이. 그리고 그녀. 이 가정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다룬 소설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불륜을 의심도 했다. 주간지와 텔레비전 드라마에 길들여진 ‘누님’의 의심처럼. 임신 중의 히스테리인가는, 나로서는 생각지 못했으나 작가는 그마저도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줬다. 한편 나는 불안하고 초조할 때마다 담배를 물었다는 남편의 진술을 통해 그녀가 혹 마약에 빠진 것은 아닌가 생각도 했다.


  정체를 종잡을 수 없는 그녀에 대한 묘사, 그리고 남편의 분노는 이 짧은 소설의 초입에 선 나를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다. 번잡한 마음을 남편에 대한 연민을 빌려 달랬을 정도였다.


  인내심이 거의 바닥이 날 무렵이었는데, 소설은 막 2장의 시작을 알리며 놀랍게도 전환된 시점을 보여줬다. 그녀의 마음이 작가의 시선을 통해 낱낱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였다. 내가 ‘오정희’라는 작가와 작품 속 ‘은수’라는 여인의 경계를 까마득하게 잊으며 하나의 ‘여자’라는 존재를 신비하게 바라보게 된 때는.


  오정희의 <바람의 넋>을 다 읽으니 새벽 1시 8분. 아파트 앞 공원에는 소란스럽지 않은 비가 내리고 있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뭐가 있다고, 하지만 비가 ‘여자를 닮았다.’고 나는 직관적으로 웅얼거렸다.

 

 

 

*    *    *

 

 

 

  첫 가출은 신혼여행지의 의미에 대한 암시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2장의 시작과 함께 나는 그녀가 정신병 환자가 아닌 것을 확신(확인)했다. 사연이 있음이 분명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쉽게 미치자, 나는 살짝 겁이 났다. 내가 이 책장들을 다 넘기면 그녀의 사연에 공감할 수 있을까. 해보지도 않은 일에 대한 기우는 사실을 앞에 둔 소심증이 자주 낳는 것이니.


  걱정은 내가 ‘남자’이며, 그녀의 남편인 지세중의 심정을 혹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2장에서 시점이 옮겨진 것을 눈치 채고, 내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나는 여자가 아니다.”였다. 작가가 여자라는 사실이 새삼 내 앞에 와 섰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것을 해보지 못한 나의 입장에서 더 와 닿는 세중의 마음은 “빈번히 자행되는, 아내의 명분 없는 출분을 참아낸 사내가 이 세상 천지 어디에 있겠는가.”라는 한탄보다는 “아내는 대체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걸까.”라는 궁금증이었다. 이해를 위한 의지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 나는 독서의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은수의 입장에서 서술되기 시작하면서 소설은 감상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녀는 남편이 싫어서 가출하는 것이 아니다. 은수의 마음은 당초 이렇다.


  “비죽 드러난 살이 없고 뼈가 두드러진 커다랗고 헐벗은 발을 모두어 가슴에 안았다. 거의 비애라고나 말해야 할 슬픔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조용히 차올랐다. 이것인가, 함께 살아온 여섯 해의 부피는 이런 것인가.”


  그런데 그녀에게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긴 끈이 하나 있다. 가출하기 시작할 무렵에도, 그러니까 그녀가 세중과 결혼한 지 6개월이 된 후에도, 그녀는 이미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생모가 아닌 어머니에게 들은 바로 그녀는 전쟁고아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진실이 숨어 있을 것 같았으나, 어머니는 더 이상 말을 않았다.


  과거를 알고 난 그녀는 ‘새로운 파종’이라고 한 결혼이 그 검은 옛 기억들을 잊어버리게 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내심 바랐을 것이다. 그 놈의 ‘두 짝의 고무신’의 정체, 하지만 그것이 결코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현실 속에서 은수는 과거를 찾아 끝없이 헤맬 수밖에 없다. 나는 체증을 느끼며 그녀의 기구한 삶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니, 이상하다고까지 할 것은 없는데 도통 나의 시선이 어떤 것인지 설명할 수 없었던 까닭에 나는 그걸 이상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들 승일이 어린 마음에 바람이 왜 부는지 묻는다. 그러자 은수가 답한다.
  “바람은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서로 부르며 손짓하는 것이란다.”


  왜 하필 ‘바람’일까. 불륜을 뜻하기도 하는 이 단어로부터 소설은 이탈하기 시작한다. 바람 본연의 차디차고 냉정한, 그리고 형체 없는 특징들이 은수의 과거로부터 이곳으로 끌어당겨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녀가 어떻게 세상에 나게 되었는지 더듬거리게 되었다. 불의의 강간을 당하는 장면에서, 은수가 그 소름끼치는 동안 불현듯 ‘두 짝의 고무신’을 떠올렸기에 나는 그녀가 혹 그러한 방식으로 태어난 아이는 아니었나 의심도 하게 되었다. 출생의 ‘더러움’이 은수의 현실을 과거로 잡아끄는 것은 아닌가, 하며 말이다.


  온통 그녀의 과거에 대한 궁금증으로 꽉 들어찬 독서에 남편 세중의 소심한 생각들이 끼어들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 그의 사람됨에 대한 이야기도 역시 감상해봐야 할 것이었다. 별로 특이한 것은 없다. 그는 그저 가정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회사에서는 일 잘 하고 성격 좋은 대리이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는 때때로 무심한 것이 상책이라고 믿는 소심한, 어찌 보면 오늘날 이곳에 널려 있는 남자들의 전형이라 할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말라 있는 감성이네 어쩌네 하지만 자기변호나 두둔은 하나같이 감상으로부터 도출시키는 그런 사람 말이다.

 

  이 감성이라는 것이 어떨 때에는 자기변호를 실패에 빠뜨린다. 다시 만난 아내의 헤진 구두를 보다가 그는 “연민 때문에 물러서서는 안 된다.”고 다짐한다. 주택적금을 깨서 200을 아내에게 건네주면서도, 그 행위는 분명 이혼 - 최소한의 별거 - 의 제스처였지만 세중은 여전히 마지막 끈을 놓지 않으려는 속내였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왜 자신을 잡고 울지 못했냐고 그녀를 맘속으로 채근한다. 실은 그 자신에 대한 질책이다.

 

  갈등의 최고조는 이렇게 끝난다. 은수는 갈현동에 있는 그녀의 - 생모 아닌 - 어머니 집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이를 생각한다. 승일을 떠올리며 어머니로서 그녀가 가질 수 있는 따뜻한 감정으로부터 용기를 얻어, 하루는 세중의 일터에 찾아가 용서를 구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가보니 그는 잘 살고 있다. 배신감이 일어난다. 결국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M시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나는 몹시 불안했다. 내가 상상하던 결말이 나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녀의 과거, 방랑벽의 원인. 그 무엇 하나 확실하게 아는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아이를 데리고 바닷가로 간 것은 분명 나에게 섬뜩한 심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자살? 이렇게 의문을 쏘아붙이고 나는 애써 그 순간을 지워버렸다.


  “이건 유괴가 아니야, 내 아이를 내가 데리고 있을 뿐이야.”


  은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여하튼 상상력의 부족이 다행스런 나의 결점이었기에 망정이지 그 이상을 나는 그려내지 못했다. 그녀가 한시라도 빨리 서울로 돌아갔으면 했다. 승일을 걱정한다는 점에서 나는 여전히 세중의 마음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돌연 자신의 유년시절 기억이 있는 그곳으로 아들과 함께 찾아간 은수의 의도로부터 나는 심연에 침잠되어 있는 ‘과거에의 추궁’을 발견했다. 왜 나는 그녀가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갈망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것일까.


  “내게 보이는 건 유폐와도 같은 어둡고 막막한 희망없는 미래뿐이에요.”


  서울로 돌아온 아들을 데리고 세중은 갈현동을 떠났고, 은수는 어머니와 남아 술자리를 가졌다. 해소의 자리이다. 속으로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토록 하고팠던 말을 속으로 내뱉었다. 드디어 어머니의 입에서 과거가 흘러나오는구나. 드디어!


  과거는 이해될 만한 수준을 훨씬 웃도는, 안타까운 사실이었다. 은수는 쌍둥이였고, 부모와 은수의 쌍둥이 자매는 전쟁 때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쌍둥이였다! 영혼을 나눠 갖는다는 그 사이. 무엇이 은수를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게 했었는가, 과거가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나는 갈등이 해결되기만을 막연하게 바랐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은수가 이 사실을 알게 된 직후 곧바로 모든 일이 해결된 쾌감을 맛봤을까. 그럴 리 없다. 이건 안고 가야 하는 사실이다. 문 걸었냐. 어머니의 물음에 은수는 깊은 밤 골목을 내다보다 그곳에서 자신의 어린 넋을 바라봤다.


  “오라, 나의 어린 넋이여, 바람되어 떠도는 넋이여, 하염없는 그리움 잠재우고 이제는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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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5 22: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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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0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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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1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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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14: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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