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2일 월요일





    이것 참 곤란하다. 시간을 유기물로 느껴서는 곤란하다. 시간을 유기물로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만질 수 있는 하나의 덩어리로 여긴다거나, 혹은 그보다 더 심한 경우로는 불명확하게나마 그것을 볼 수 있는 무언가로 생각한다는 것인데, 그 누가 이를 착각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와서 나는 그런 착각에 대해 말하고 싶진 않다. 내가 보르헤스적 글쓰기로 실천하고 싶은 것은 (생각하고 싶은 것은) 예의 것들에서 빗나가는 하나의 상상을 통해 모든 것으로 연결되는 현상의 체험이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 나는 어디까지나 ‘상상’이라고 말했다. 현실로 말하자면 이건 그저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이며, 따라서 여기서 시작해 여기로 돌아오는 일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빗겨나가는 것이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시간은 기억들을 묽게 만듦에도 불구하고 자이르에 대한 기억만큼은 도리어 가중시킨다.”(보르헤스, 황병하 옮김,『알렙』, 160쪽)는 것이다. 보르헤스가 “El tiempo, que atenúa los recuerdos, agrava el del Zahir.”라고 한 말이다. 여태 <자이르>에 비유됐던 모든 것들, 보르헤스가 역사의 앞을 좇으며 제시한 모든 물건들, 어쩌면 저주일 수도 있는 것들은 무언가에 굶주린 인간 자체를 상징한다. 소유 강박과 중독. 그리고 종교로까지 뻗어나가는. 지구의 다른 말은 <자이르>다. 보르헤스는 그렇게 말했다. 아니, 우리에게 물었다.


    나의 <자이르>는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그의 단편 「자이르(El Zahir)」는 읽는 이 모두에게 자신의 <자이르>를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하지만 그 <자이르>가 어떤 사물, 대상, 혹은 관념인지, 그건 중요한 건 아니다.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자이르>라는 것이 실재한다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과연 주화 뒤에 있는 하느님을 발견했을까? 놀라운 단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세상의 모든 자이르가 이 소설에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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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자이르>란 대체 무엇인가? 나는 황병하 씨의 번역으로 서너 번 고쳐 읽고도 도무지 갈증을 참지 못해 (스페인어는 단어들을 빼면 도무지 읽지 못하므로) 영문판을 찾아 읽었다. 보르헤스는 1961년 『Antología Personal』이라는 제목으로 에세이, 시, 문학비평 등을 담아 모음집으로 냈다. 여섯 해가 지난 1967년, 미국의 Grove Press에서는 『A Personal Anthology』라는 영어 제목으로 이를 번역 출간했다. 편집과 서문은 앤소니 케리건(Anthony Kerrigan)이 맡았다. 내가 황병하 씨의 번역과 비교해서 읽은 건 그 책에 실린 「The Zahir」이다. 영어로 읽어본 <자이르>의 뜻 다음과 같다.


    beings or things which possess the terrible virtue of being unforgettable, and whose image finally drives people mad. 황병하 씨의 번역은 이렇다. “결코 망각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속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의 형상을 본 사람을 미쳐버리게 만드는 어떤 존재, 또는 사물을 뜻하는 무엇”(보르헤스의 책, 157쪽)


    보르헤스는 그런 <자이르>를 6월 7일 새벽에 손에 넣게 된다. 그것은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에서 <자이르>가 어떤 운명적 속성을 지닌 무언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우리는 당연히 하게 된다. 그 계기는 보르헤스가 마음에 두었던 ‘떼오델리나 비야르’라는 한 여인의 죽음이다. 그는 보르헤스다운 문장들로 비교적 상세하게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주변 풍경과 자신의 심정을 적어나간다. 그리하여 우리가 느끼게 되는 그의 상실감. 운명이 여기에 달라붙었던 것일까? 떼오델리나는 보르헤스가 <자이르>를 손에 넣은 바로 전 날 목숨을 끊었으며, 그 사건은 보르헤스가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까지 만들었다”(보르헤스의 책, 148쪽)고 술회했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이를 감안하고 이후의 행적을 살펴봐야 한다.


    보르헤스는 커다란 슬픔에 잠겨 새벽 2시 즈음 한 구멍가게에 들러 술을 마신다. 이는 그가 말한 것처럼 다분히 모순적이다. 모순어법, oxymoron이다. 슬픔을 물리기 위한 “천박함”과 “용이함”으로 버틴다. 하지만 그 모순 속에서 <자이르>가 그에게 다가왔다. 불분명하다. 그가 찾은 것인지, 아니면 그를 찾은 것인지. 소설을 고쳐 읽는 내내 생각했지만, (독자들마다 분명 다를 것인데) 나는 아무래도 전자의 이해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보르헤스는 슬픔에 대한 보상을 속으로 깊이 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주인이 그 은화를 건네주는 순간부터 그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역사 속의 수많은 은화이니 금화이니 하는 것들을 생각해낸다. 박식이 그를 저주로 이끈 것이리라 해도 될 만큼. 그의 열거에서 느껴지는 피로감. 심지어 보르헤스는 자신이 주화가 되는 신화 속 꿈을 꾼다. 이 정도면 충분히 돌아버린 것이리라.



*   *   *



    도무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보르헤스는 <자이르>를 버릴 결심을 한다. 아주 철저한 계획으로 “그것이 행사하는 악마적 영향”(보르헤스의 책, 152쪽)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잘 모르는 거리까지 간 다음에 <자이르>를 내고 술 한 잔을 산다. 그리고 그곳의 거리 이름이나 주소 따위를 전혀 보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성공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아니면 금단 현상 같은 것이 있었는지, 보르헤스는 그 달 말까지 단편 하나에 매진한다. 그는 그걸 시답지 않은 작업이라 불렀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것이 하필 니벨룽들의 보물이니, 우리는 보르헤스의 실패를 읽을 수밖에 없다. 결국 그는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는다. 그리고 율리우스 바를라흐의 『자이르에 얽힌 사건에 관한 기록』이라는 책을 찾아 <자이르>를 연구한다. 물론 세상에 없는 작가와 책이다.


    여기서 앞서 영문으로 인용했던 <자이르>의 속성이 드러나며, 그것은 뒤이어 묘사되는 환상적인 어떤 호랑이에 비유된다. 그 호랑이라는 것은, 즉 <자이르>라는 것은 <자이르>의 성질을 갖는 세상 모든 물건을 의미하지만 우리에게 <자이르>는 이 세상 단 하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요컨대, “단지 한 가지만이 사람들을 매혹”(보르헤스의 책, 158쪽)시킨다. 그것은 사물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 있으며, 관념일 수도 있다. 이 매혹은 심각한 경우 사람들을 돌아버리게 한다. 보르헤스는 떼오델리나의 여동생인 (책에서는 ‘훌리따’라고도 나오고 나중에는 ‘훌리아’라고도 언급되는) 훌리아 아바스깔 여사가 “주화에 대한 공포에”(보르헤스의 책, 160쪽) 시달리다가 요양원에 갇힌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10월이 돼서야 알게 된다. 자신도 그렇게 되리라는 공포가 엄습한다.


    그리하여 보르헤스는 깨닫는다. 서두에서 인용했던 구절이다. “시간은 기억들을 묽게 만듦에도 불구하고 자이르에 대한 기억만큼은 도리어 가중시킨다.”(보르헤스의 책, 재인용) 생각건대, 그렇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짙어지는 <자이르>에 대한 집착의 농도에서 우리는 뭘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그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일 뿐인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보르헤스가 깨달은 건 사물이나 대상, 혹은 관념에 대한 광기 어린 집착이 아니다. 좁아지는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왜 그가 하필이면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구를 언급했을까. 보르헤스가 언급한 알프레드의 시는 영국의 빅토리안 시대 조각가 조지 와트가 만든 알프레드 기념상에도 적혀 있는 짧은 작품이다. 원문은 이렇다.


    Flower in the crannied wall,

    I pluck you out of the crannies,

    I hold you here, root and all, in my hand,

    Little flower—but if I could understand

    What you are, root and all, and all in all,

    I should know what God and man is.


    알기 쉬운 말로 이 세계의 오묘함을, 작은 것 하나에서 세상 전체와 우주의 몸통으로 뻗어나가는 그 “인과론적 연쇄”(보르헤스의 책, 161쪽)를 노래한 알프레드의 위대한 정신. 보르헤스는 그걸 알게 된 것이다. 아무리 감내하기 힘든 <자이르>라고 할지라도, 그리하여 보르헤스가 마치 미래의 자신이 눈이 멀게 될 것이라는 걸 암시하는 구절로 온전치 못한 노년을 기약할지라도, 그는 <자이르>를 통해 세상을 보며, <자이르>만을 보게 될 것이었다. 이 위대한 아르헨티나의 시인은 정말 그렇게 했다. 대가의 반차는 바로 <자이르>를 꿈꾸는 자들의 것이다. 부단히 단순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문자 그대로 단순해지는 것일까? 누구도 그렇게 말하진 못하리라.


    Cuando todos los hombres de la tierra piensen, día y noche, en el Zahir, ¿cuál será un sueño y cuál una realdad, la tierra o el Zahir? 황병하 씨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지상의 모든 사람들이 밤낮으로 자이르를 생각하고 있다면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일까, 지구 아니면 자이르?”(보르헤스의 책, 162쪽) 지구의 절반을 꿈이라고, 그리고 나머지 절반을 현실이라고 해보자. 이 거친 상정, 역사적 소행이라고도 할 만한 이 상정에서 우리는 <자이르>라는 것의 위치를 알게 됐다. 보르헤스의 도움으로 우리는 꿈을 꾼다. 그 주화의 뒷면에서 무엇을 발견할지는 각자의 몫이며, 그 작업이야말로 독자인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나의 <자이르>는 무엇인가? 다시 묻는다. 보르헤스는 그 뒤에 하느님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두 가지 사물이 동시에 존재하도록 허용치 않는”(보르헤스의 책, 158쪽) ‘무한히 자비로운 하느님(el Todomisericordioso)’의 불가해를. 보르헤스의 구체(球體) 시야의 한가운데 <자이르>가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역시 그러하다. <자이르>를 갖지 않은 사람은 없다. 반면, 그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많다. 하지만 <자이르>를 무시하여 도망가려는 이들이 세상에는 더욱 많다. 그리하여 가뭄 중의 콩처럼 대가들이 발아하는 것이며, 예술이 때때로 우리들에게서 멀리 도망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자이르> 앞에 서라. 새벽의 거리를 걸어라. 이 무시무시한 말에 대한 환상적 단편의 하나. 보르헤스의 위대함은 언제나 그랬듯이 이런 선언들에서 노트르담의 종소리처럼 사방의 도시로 울려 퍼진다. 이 도시 어딘가에 당신의 <자이르>가 있다. 이 소문에 당신은 밤잠을 설친다. 영락없는 독자다. 그 불면증이 나는 반갑다. 대체로 이런 글은 새벽의 어둠을 따라 출렁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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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6-02-22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여태껏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자이르>에 대한 얘기가 알 듯 모를 듯 그저 알쏭달쏭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보르헤스의 작품 속에 테니슨의 저 유명한 시가 등장한다니 갑자기 <자이르>에 급관심이 생기기도 하는군요. 저도 예전에 언젠가 글 한편 쓰면서 테니슨의 시를 짧게 인용한 적이 있었는데, 탕기 님의 이 글을 읽으니 왜 갑자기 생뚱맞게도 `죽지 못해 안달했던` 쿠마에의 무녀 시뷜라가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봄이 그리 멀지 않아서 그럴까요?

* * *

한번은 쿠마에 무녀가 항아리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지.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어.
˝죽고 싶어˝

- T.S.엘리엇,『황무지』

* * *

얼마나 지루한 일인가! 멈춘다는 것, 끝낸다는 것, 광을 내지 않아
녹 슬어 버린다는 것, 사용해서 빛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 앨프리드 테니슨,『율리시스』

탕기 2016-02-22 19:0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Oren님의 느낌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l Zahir는 저주의 굴레를 쓴 영원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을까요? 죽기 전까지를 `영원`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자이르>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그렇게 본다면 저는 Oren님께서 받으신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시빌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저는 정말이지 아폴론에게, 손 안에 든 모래알과 같은 수명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을 겁니다. 모래처럼 부서지고 목소리만 남을 바에야...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오만일 수도 있겠군요.

내일은 눈이 내린다지만 Oren님 말씀처럼 봄이 오고 있습니다. `apothanein thelo.`라는 말의 뜻이 엇갈리며 새싹의 세상을 예비할 거고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수록 참으로 많은 말들이 떠오릅니다. 그런 듯 합니다. 봄이 와서 그런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