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페미니스트일까?

 

'페미니즘'에 대한 깊이있는 책들을 전혀 읽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글을 읽으니 쉽게 댓글을 달기가 어렵군요. 그나마 탕기 님의 글 속에서 제게 익숙한 철학자들의 이름이나마 겨우 몇몇 발견할 수 있다는 게 이 글을 읽는 데 일말의 위로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말이 조금도 과장은 아닐 듯합니다. 그 두 사람의 철학자들 가운데 좀 더 후대의 사람이 쓴 한 권의 책을 통해 - 좀 더 정확하게는 그 책 가운데 특히 <제7장, 우리의 덕>을 통해 - '페미니즘'에 대한 그 철학자의 깊디깊은 생각들을 민낯으로 생생하게 만나봤던 기억을 이쯤에서 한 번쯤 되살려 보는 일은, 이 글이 제게 주는 또다른 뜻밖의 즐거움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봅니다. 긴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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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줄긋기)

 

지적 양심과 취미를 이루는 일종의 잔인함

 

이질적인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정신의 힘은 새로운 것을 낡은 것에 동화시키거나 다양한 것을 단순화시키거나 완전히 모순되는 것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강한 경향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은 이질적인 것이거나 '외부 세계'에 속하는 모든 것에서 특정한 특징이나 윤곽선을 제멋대로 더 강하게 강조하거나 드러내거나 자기에 맞게 왜곡한다. 이 경우 정신의 의도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을 동화시키고 새로운 사물들을 낡은 계열 속에 편입시키는 데 ㅡ 즉 성장시키는 데 있다. 좀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성장의 느낌, 힘이 커졌다는 느낌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그것과 상반되는 듯한 정신의 충동이 이러한 동일한 의지에 봉사하고 있다. 즉 그것은 알고자 하지 않거나 임의로 단절하고자 하는 갑작스럽게 솟구쳐오는 결정을 하고 스스로의 창문을 닫아버리며 이러저러한 사물을 내적으로 부정하고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알 수 있을 만한 많은 것에 대해 일종의 방어 상태에 들어가고 어둠과 폐쇄된 지평에 대해 만족하며 무지를 긍정하고 시인한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은 그 정신의 동화하는 힘의 정도에 따라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ㅡ 실로 '정신'은 위(胃)와 가장 비슷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때때로 스스로를 기만하는 정신의 의지가 속해 있으며, 아마 이 의지는 사정이 이러이러한 것이 아니고, 단지 이러이러하다고 여겨질 뿐이라는 경솔한 추측을 하면서 온갖 불확실성과 애매성을 즐거워하고 일부러 한쪽 구석의 비좁은 은밀함을, 너무 지나치게 가까운 것을, 표면적인 것을, 확대되거나 축소되거나 의치가 바뀐 것이나 미화된 것을 기뻐하며 스스로 즐거워하고, 이러한 모든 힘을 자의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스스로 즐거워한다. 다른 정신을 기만하고 스스로를 다른 정신 앞에서 위장하려는 정신이 문제가 없지 않지만 기꺼이 응하는 것, 창조하고 형성하고 변형할 수 있는 힘의 저 끊임없는 압력과 충동이 마침내 여기에 속한다 : 정신은 여기에서 자신의 가면의 다양성과 교활함을 즐기며, 여기에서 안정감을 즐긴다. ㅡ 바로 자신의 프로테우스적 기술로 정신은 가장 잘 방어하고 은폐한다! ㅡ 가장에의, 단순화에의, 가면에의, 외투에의, 간단히 말해 표면에의 ㅡ 왜냐하면 모든 표면은 외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지에 대항하여 사물을 깊이 있게 다양하고 철저하게 생각하고 생각하고자 하는 인식하는 사람의 저 숭고한 경향은 맞서 나간다 : 이것이야말로 지적 양심과 취미를 이루는 일종의 잔인함인데, 용감한 사상가는 모두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물론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눈을 자신을 위해 오랫동안 충분히 단련시켜 예리하게 했고, 엄격한 훈련과 엄격한 말에도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면 말이다. 그는 "내 정신의 성향에는 어떤 잔인한 것이 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 ㅡ 덕이 있는 사람들이나 친절한 사람들이 그가 그러한 말을 하지 못하게 말리면 좋았을 것인데! 만일 잔인함 대신 '지나친 성실성'이라는 말을 뒤에서 떠들어대고 소문이 나고 평판이 있다면, 실로 이것은 우리에게는 - 우리 자유로운, 지극히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에게는 ㅡ 좀더 점잖은 평가로 들릴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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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 인간이라는 무서운 근본 텍스트

 

성실성, 진리에 대한 사랑, 지혜에 대한 사랑, 인식을 위한 희생, 진실한 인간의 영웅주의 같은 아름답고 반짝거리고 소리 나는 축제의 언어가 있다. ㅡ 여기에는 한 사람의 마음을 자부심에 부풀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그러나 은자(隱者)이며 실험용 동물인 우리, 우리는 오래 전부터 은자의 양심에 걸맞는 극도의 비밀스러움으로 스스로를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즉 이와 같이 위엄 있고 호사스러운 말도 무의식적인 인간의 허영심에서 나온 해묵은 거짓 장식과 잡동사니, 거짓 금가루에 속하는 것뿐이며, 그렇게 아첨하는 색깔과 덧칠 아래에서도 자연적 인간homo natura이라는 무서운 근본 텍스트는 다시 인식되어야만 한다고 말이다. 즉 인간을 자연으로 되돌려 번역하는 것, 지금까지 자연적 인간이라는 저 영원한 근본 텍스트 위에 서툴게 써넣고 그려놓은 공허하고 몽상적인 많은 해석과 부차적인 의미를 극복하는 것, 오늘날 인간이 이미 학문의 훈련으로 엄격하게 단련되어 두려움을 모르는 오이디푸스의 눈과 막힌 오디세우스의 귀를 가지고 오랫동안 "너는 그 이상의 것이다! 너는 더 높은 존재다! 너는 다른 혈통을 지녔다!"고 인간에게 피리로 속삭였던 낡은 형이상학적 새잡이의 유혹의 방식에 귀를 막고 다른 자연 앞에 서 있는 것처럼, 후에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앞에 서 있게 만드는 것, ㅡ 이것은 생소하고 미친 과제일 수 있지만, 그러나 이는 하나의 과제인 것이다. 누가 이것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왜 우리는 이러한 미치광이 같은 과제를 선택했단 말인가? 또는 달리 묻는다면 "도대체 왜 인식이 있다는 말인가?" ㅡ 누구나 우리에게 이것에 대해 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내몰려도, 백 번이고 스스로에게 이미 그렇게 물어보았던 우리는 더 이상 좋은 대답을 찾지 못했고, 찾지 못하고 있다 ······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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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칠 수 없는 것에 이르는 이정표가 완전히 '밑바닥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될 뿐

 

배운다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것은 생리학자가 알고 있듯이, 온갖 영양을 섭취하는 것과 같은 것을 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유지'시키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근저에는, 훨씬 '그 밑바닥에는' 물론 가르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으며 정신적 숙명의 화강암이 있고 미리 결정되고 선별된 물음에 대한 미리 결정된 결단과 대답의 화강암이 있다. 중요한 문제가 대두될 때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불변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녀 문제에 대해 사상가는 배워서 고칠 수 없고, 단지 끝까지 다 배울 수 있을 뿐이다. ㅡ 단지 이러한 남녀의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에서 '확실한 것'을 마지막으로 발견할 뿐이다. 우리는 때때로 바로 우리에게 강한 믿음을 주는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낸다. 아마 우리는 그것을 앞으로 자신의 '신념'이라고 부를 것이다. 후에 ㅡ 우리는 그 신념 안에서 자기 인식에 이르는 발자취를, 우리 자신이기도 한 문제에 이르는 이정표를 보게 될 뿐이며 ㅡ  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커다란 어리석음에 이르는, 우리의 정신적인 숙명에 이르는, 가르칠 수 없는 것에 이르는 이정표가 완전히 '밑바닥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될 뿐이다. ㅡ 내가 나 자신에 대해 행했던 이러한 대단히 점잖은 태도를 감안해서 아마 내가 '여성 자체'에 대해 몇 가지 진리를 숨김없이 말하는 것을 이미 허락해주었으리라 믿는다 : 더욱이 그것이 단지 ㅡ 나의 진리일 뿐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사람들은 알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ㅡ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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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진보

 

여성은 자립하기를 원한다 : 그리고 그 때문에 '여성 자체'를 남성들은 계몽시키기 시작한다. 이것은 유럽이 일반적으로 추악해지는 최악의 진보에 속한다. 왜냐하면 여성의 학문성과 자기 폭로의 이러한 서툰 시도가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부끄러워해야 할 많은 이유가 있다. 여성에게는 현학적인 것, 천박한 것, 학교 선생 같은 것, 하찮은 오만, 하찮은 무절제와 불손함이 많이 숨어 있다. ㅡ 여성이 어린아이를 상대하고 있을 때를 살펴보라! ㅡ 이러한 것은 근본적으로 지금까지 남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장 잘 억제되고 제어되어왔다. 만일 '여성에게서의 영원히 권태로운 것이 ㅡ 여성에게 이것은 풍부하게 있다! ㅡ 과감하게 밖으로 나오는 일이 생긴다면, 이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만일 여성이 우아하고 장난스럽고 근심을 없애주고 마음의 짐을 벗어나게 하고 매사를 쉽게 생각하는 현명함과 기교를, 만일 여성이 유쾌한 욕구를 처리하는 섬세한 솜씨를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잊어버리기 시작한다면, 이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성스러운 아리스토파네스에게 맹세코 말하는데, 지금은 이미 경악하게 하는 여성의 소리가 커져가고 있으며, 여성이 궁극적으로 남성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의학적인 확실함으로 들이닥치게 된다. 여성이 이와 같이 학문적으로 되려고 한다면, 이것은 가장 나쁜 취미가 아니겠는가?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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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자체'에 유리한 무엇이 증명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만일 어떤 여성이 바로 롤랑Roland 부인이나 드 스탈 부인 또는 조르주 상드George Sand를 끌여들여, 그것으로 인해 '여성 자체'에 유리한 무엇이 증명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ㅡ 악취미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을 도외시하고라도 ㅡ 이는 본능의 타락을 드러내는 것이다. 남성들 사이에서 위에 언명된 사람들은 세 명의 우스꽝스러운 여성 자체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그리고 이들은 바로 해방과 여성의 자기 예찬에 대한 의도하지 않은 최상의 반증이 될 뿐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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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든 딸들에게 주고 싶은 한 마디 말

 

부엌에서의 어리석음. 요리사로서의 여성. 가족과 가장의 섭생을 배려하는 데 끔찍할 정도의 무신경함! 여성은 음식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요리사가 되고자 한다! 만일 여성이 생각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수천 년 간 요리사로 활동을 해왔으니 최대의 생리학적 사실들을 발견하고 의술도 획득했어야 할 것이다! 서투른 요리사로 인해 ㅡ 부엌에서 이성이 완벽하게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발전은 가장 오랫동안 저지되었고, 가장 심하게 해를 입어왔다 :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정은 좋아지지 않고 있다. 더 나이가 든 딸들에게 주고 싶은 한 마디 말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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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나지 않도록

 

이제까지 여성들은 남성들에 의해 어떤 높은 곳에서 그들에게 잘못 내려온 새처럼 취급되어왔다 : 좀더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우며 거칠고 경이로우며 감미롭고 영혼이 넘치는 어떤 것으로, ㅡ 그러나 달아나지 않도록 가두어두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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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시

 

'남성과 여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잘못 생각하고, 여기에 있는 헤아릴 길 없는 대립과 그 영원히 적대적인 긴장의 필연성을 부정하며, 여기에서 아마 평등한 권리와 교육, 평등한 요구와 의무를 꿈꾼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시이다. 이러한 위험한 장소에서 스스로 천박하다는 것을 ㅡ 본능에서의 천박함을! ㅡ 드러내는 사상가는 대체로 의심스러운 존재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내고 폭로된 것으로 여겨도 될 것이다 : 아마 그는 미래의 삶을 포함한 삶의 모든 근본 문제에 너무나 '근시안적이며' 결코 어떤 심연으로도 내려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자신의 정신에서나 욕망에서도 깊이가 있고, 엄격하고 혹독할 수 있으며 또 그러한 것들과 쉽게 바꾸는 호의의 깊이를 가지고 있는 남성은 여성을 언제나 동양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 그는 여성을 소유물로서, 열쇠로 잠가둘 수 있는 사유 재산으로, 봉사하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고 봉사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하는 존재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ㅡ 그는 이 점에서는 아시아의 거대한 이성의 편, 아시아적 본능의 탁월함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일찍이 이러한 아시아를 가장 훌륭하게 계승한 자이며 제자였던 그리스인들이 행했던 것과 같은 것으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리스인들은 호메로스에서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힘이 미치는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여성에 대해서도 한 걸음 한 걸음씩 더욱 엄격해지고 간략히 말해 동양적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얼마나 필연적이며, 논리적이고, 그 자체로 인간적으로 바람직한 것이었던가 : 이에 관해 우리는 스스로 숙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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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진보를 자신들의 깃발에 적고 있는 동안

 

어느 시대에도 우리 시대만큼 나약한 성이 남성에게 이렇게 존경을 받은 적은 없다. 이것은 노인에 대한 불경(不敬)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적 경향과 근본 취향에 속하는 것이다 ㅡ : 이러한 존경이 바로 다시 악용되는 일이 있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 않는가?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은 원하게 되고 요구하는 것을 배우게 되며, 마침내 저 당연히 치러지는 존경을 거의 모욕으로 느끼고, 그리하여 권리를 위한 투쟁, 아니 실로 투쟁 자체를 선호하고자 한다 : 어쩄든 여성은 수치심을 잃어가고 있다. 여기에 부가적으로 덧붙인다면, 여성은 또한 취향도 잃어가고 있다. 여성은 남성을 두려워하는 것을 잊고 있다 : 그러나 '두려워하는 것은 잊는' 여성은 자신의 가장 여성적인 본능을 포기하는 것이다. 남성에게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 더 명확하게 말해 남성 안에 있는 남성을 더 이상 원하지 않고 남성이 크게 육성되지 않게 될 때, 여성이 과감하게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거니와 또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바로 이러한 이유로 여성이 퇴화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일들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다 : 우리는 이것에 대해 잘못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중략) 여성이 이와 같이 새로운 권리를 자기 것으로 하고 '주인'이 되고자 하며 '여성'의 진보를 자신들의 깃발에 적고 있는 동안 놀라울 만큼 명확하게 반대의 일이 실현된다 : 여성이 퇴보해가는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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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하게 격분하며 주워 모으고 있는 것

 

프랑스 혁명 이래 유럽에서 여성의 영향력은 여성의 권리와 요구가 증대한 것에 비례하여 감소되어왔다. 그리고 '여성 해방'이란 (천박한 남성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여성 자신에 의해 요구되고 촉진되는 한, 이와 같이 가장 여성적인 본능이 더욱 약화되고 둔화되는 현저한 증후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는 행실이 바른 여성이라면 ㅡ 더구나 영민한 여성이기도 하는데 ㅡ 근본적으로 부끄러워했을 어리석음이, 거의 남성적인 어리석음이 있다. 그 대신 여성은 어떤 기반에서 가장 확실하게 승리하게 될 것인지를 맡는 후각을 상실해가고 있다. 여성 특유의 무술 연습을 게을리 하고 있다. 전에는 예의 바르고 섬세하고 꽤 겸허함도 몸에 지니고 있었는데, 남성 앞에서 자제력을 잃고 아마 '책에까지' 손대고 있다. 여성 안에 감추어진 근본적으로 다른 이상과 영원히 필연적인 여성적인 것을 믿는 남성의 믿음에 대해 고결한 듯한 불손한 태도로 반대 행동을 하고 있다. 여성은 훨씬 섬세하고 놀라울 정도로 사납고 때로는 마음에 드는 애완 동물처럼 양육되고 보살핌을 받고 보호되고 아낌을 받아야 한다는 남성들의 생각을, 여성은 힘껏 수다를 떨면서 그 말을 끝내 버리고 있다. 지금까지 사회 질서  속에서 여성의 지위 자체가 지니고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지니고 있는 온갖 노예적인 것과 노비적인 것을 어색하게 격분하며 주워 모으고 있는 것이다 (마치 노예 제도가 모든 고도의 문화, 문화 상승의 조건이 아니고 그 반증인 것처럼) : ㅡ 이 모든 것이 만약 여성적인 본능의 파괴와 탈여성화가 아니라면, 무엇을 의미한다는 말인가?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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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최초이자 최후의 천직

 

사람들은 거의 어디에서나 온갖 종류의 음악 가운데 병적이고 가장 위험한 음악으로 (우리 독일의 최신 음악으로) 여성의 신경을 망쳐놓고 그녀들을 매일 더 신경질적으로 만들며 강한 아이를 낳는다는 여성의 최초이자 최후의 천직을 무력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여성들을 일반적으로 더욱 '교화'하려고 하며, 이른바 '나약한 성'을 문화를 통해 강하게 만들고자 한다 : 마치 인간의 '교화'와 허약화 ㅡ 즉 의지력을 허약하게 하는 것, 분열시키는 것, 병약하게 만드는 것은 항상 서로 보조를 같이했다는 사실과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영향력 있는 여성들(마지막으로 나폴레옹의 어머니가 그러했는데)은 바로 자신의 의지력 덕분에 ㅡ 학교 선생들의 덕택이 아니라 ㅡ 남성들을 능가하는 자신의 힘과 우월함을 자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가 가능한 한 절실하게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말하듯이 말이다. 여성에게서 존경과 때로는 공포마저 일으키는 것, 그것은 남성의 자연보다 더 '자연적인' 그녀의 자연이며, 이러한 것으로는 진정하게 맹수같이 교활한 유연함과, 장갑 아래 숨겨진 호랑이 발톱, 이기주의의 단순함, 교육시키기 어려운 속성과 내적인 야성, 욕망과 덕성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 폭넓은 것, 방황하는 것이 있다 ······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공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위험하고 아름다운 고양이인 '여성'에게 동정을 갖게 하는 것은, 여성이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더 고통스러워하고 상처받기 쉬우며 사랑이 필요하고 환멸을 느끼도록 선고받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 남성은 이러한 감정을 가지고 여성 앞에 서 있었으며 언제나 한 발은 이미 황홀해하며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비극에 넣고 있었다 ㅡ . 뭐라고? 이것으로 이제 끝내려 한다고? 여성의 매력 상실이 일어나려고 한다고? 여성의 무료화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고? 오 유럽이여! 유럽이여! 너에게는 언제나 가장 매력 있었으며 너를 거듭 위험에 빠뜨리려는 뿔 달린 동물을 우리는 알고 있다! 너의 낡은 우화가 다시 한번 '역사'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ㅡ 다시 한번 엄청난 어리석음이 너를 지배하게 될 수도 있으며, 너를 운반해갈지도 모른다! 그 어리석음 아래에는 어떤 신도 숨어 있지 않다. 그렇다! 단 하나의 '이념', '현대적 이념' 만이 숨어 있을 뿐이다! ······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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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단순히 여성혐오주의자로서만 읽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

 

근대의 민주주의는 인간들의 평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근대의 제1세대와 1960년대 이후 제2세대 페미니즘은 제도적·정치적으로 억압된 여성의 지위를 끌어올려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확보하려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여성운동의 역효과는 고유한 성적인 차이를 보지 못하고, 여성성에 기반 하지 않은 남성성과의 인위적인 동일화로 인해 여성만이 가진 내밀한 고유성들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니체는 페미니즘이 지닌 이러한 단점을 근대 민주주의가 초래한 병폐로 보고 이것을 비판한다. 양성의 동일한 사회적 활동이 양성의 무화로 퇴락하는 것을 니체는 경계한다. 성의 차이가 사라진다면 인간은 그 생존을 그치게 되고, 긴장감이 부재하는 양성의 관계는 위버멘쉬의 탄생도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니체는 초기 페미니즘의 동일화 운동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현대 제3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은 니체가 제기했던 이러한 인식을 수용하고, 여성성이 파괴되지 않는 양성의 평등을 위해 니체를 재평가한다. 생물학적 양성의 존속이유는 2세의 출산이다. 여성성과 여성의 몸은 2세의 출산과 육아에 관한 한 핵심적 역할을 한다. 여성성은 늘 생명을 의식하며, 그러므로 미래를 의식하는 성향이다. 이에 비해 남성성은 2세의 출산에 관한 한 보조자의 역할을 할 뿐이다. 또한 여성성이 지니는 고유한 장점을 결핍으로 파악하고, 이를 인위적인 남성성과의 동일화운동으로 없애려한 페미니즘의 경향은 니체가 볼 때 여성성을 죽이는 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니체를 과거의 페미니스트들처럼 단순히 여성혐오주의자로서만 읽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일 수밖에 없다. 현대의 여성은 가정과 사회 모두에서 그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이 구조에서 여성들의 고유성들은 쉽게 파괴되고 무시되곤 한다. 자연적인 것을 인위적으로 부자연스럽게 만든다는 것은 반인간적인 발상이다. 이렇게 단순화된 평등론이 함의하는 위험을 이미 니체는 경고하고 있는 것이며 그 경고가 현대 사회의 여성 운동에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 정영수, 『니체와 페미니즘』, 순천향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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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기 2016-03-06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문제이군요. 판단을 유보하는 어리석은 독자가 되고 싶진 않지만, 니체와 페미니즘 양쪽 모두 주장과 사상의 온도가 대단히 높아서, 자칫하면 살갗들이 한쪽으로 완전히 붙어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입니다. Oren 님께서 정성 들여 인용해주신 니체의 모든 구절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음...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니체에게서 느껴지는 `의지`에의 전투적인 강조... 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조금 엇나가긴 햇는데, 여하튼 그런 강한 확신이 아직까지 저의 빈약한 마음에는 와닿지 않은 까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다 역량 부족이겠지요.

니체가 반발하는 `단순화된 평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하지만 저도 무척 공감합니다. 제 글이 좀 길고 중구난방인이긴 했습니다만(솔직히 너무 쓸데없이 길게 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히 언급했듯이 저는 인간은 차등적 존재라고 확신합니다. 우생학의 기본 전제는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니체가 반발하는 `인위성`이라는 걸 제도로 도입하는 (이걸 일본의 한 젊은 철학자는 `역사의 도박장`에 카드를 들고 들어가는 일이라고 표현하는데) 과정을 통해서 그 차등을 상보해줄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도 인간인 것 같습니다. 페미니즘이 모두 `단순화된 평등`이라는 안위성을 추구하진 않는다는 점에서, 정영수 씨의 글에 전부는 공감할 수가 없고요. 하지만 그분의 글이 정확히 겨냥하고 있는 표적에 대해서는 알고 있고 그것에 한해 생각해보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페미니즘을 읽으며 극복해야 했던 어떤 부정적 이미지들? 그런 것들을 날카롭게 지적해주고 계시거든요. 저 사상도 스펙트럼이 워낙 넓어서, 사실 갈필을 잡기가 힘듭니다.

Oren 님의 인용문들을 이면지에 낙서해가면서 천천히 곱씹어봤습니다. 니체를 경외하고 있는 덕분에, 어쩌면 왜곡될 소지가 있는 부분들을 (아마도) 꿋꿋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도 같고요. 공감할 수 없는 글이라 할지라도 밀어내지 않는, 순전한 호기심이 있는 것도 다행인 듯도 합니다. 여하튼, 한편으로는 니체가 20세기 들어 진행된 `여성현대예술가`들의 진일보와 20세기 중반부터 급속도로 퍼진 (제3 운동을 포함한) 페미니즘을 봤다면 어떤 의견을 내놓았을까 상상해봤습니다. 같은 말을 했겠지요? 니체는 역사의 변화를 예견했었을까요? 혹시 이 부분과 관련된 인용 구절이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음. 정영수 씨의 글에서 느껴지는 의견 차는 조금 거칠게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저는 『야전과 영원』이라는 텍스트에서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역사의 제도는 인위적이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꼭 그렇게 되어야 할 필연성을 부정한다고 할까요? 그래서 ˝자연적인 것을 인위적으로 부자연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라는 인용 구절에는 공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사에 `자연적인 것`이라는 건, 제가 생각하기에 없습니다. 인간은 자연에 `인위`로 적응한다고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이타적 유전자』라는 매트 리들리의 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가장 위대한 텍스트인 성문법과 그 휘하 콘텍스트들이 만든 것이고, 그런 것들이 사회 속에 하나의 거대한 습관으로 남아 `자연스러운 것처럼` 길들여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프랑스 법철학자인 르장드르의 고증을 여러 차례 살펴보고 푸코의 이로를 따라가면서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게 됐거든요. 확실히 대학 시절과는 다른 시각인 것 같아요. 저는 당분간은 그쪽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옳았는지는 또 다른 의견을 계속 읽어가면서 판단하게 되겠군요.

공감이 다 되진 않으면서도 곱씹고 이면지에 옮겨 적게 되는 것은, 니체만의 마력인 것 같습니다. 정말 `마력`이라는 단어가 아니면 딱히 표현할 길이 없어요! 다행이도 제게는 두 쪽 다 낯섭니다. 니체도 낯설고, 페미니즘이 말하는 성정치학, 특히 새로운 언어의 도입 같은 부분은 정말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저는 `남자`라는 젠더로 길들여져온 청년이니까요. 하지만 니체도 그렇고 페니미즘도 그렇고, 저 첨예한 부분에 겁 먹지 않고 계속 서 있어야 <인간>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그것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저만의 답이 나올까요? Oren 님처럼 많은 걸 읽고 또 많은 경험을 하고 시간의 축적을 `축복`으로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있는 어른이 된다면, 그때는 제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지 무척 궁금합니다. 하지만 설레는 것보다는 그 모습이 두렵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래도 저는 피하지 않는 독자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런 댓글을 달 때마다 너무 두서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날씨 정말 좋았습니다. 황사가 다행이도 약해서 오후 내내 자전거를 타고 들어왔는데, Oren 님께서는 가족분들과 즐거운 주말 보내셨는지요? 다음 한 주도 저는 버거운 주제와 씨름하고 늘 실패하는 하루 하루를 보내겠지요. 고비 때마다 인용해주신 구절들에서 번개 같은 순간을 맞이하기도 하고, 몰래 구절을 훔쳐가기도 합니다. 늘 좋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

oren 2016-03-06 23:54   좋아요 1 | URL
저도 두서없이 `니체의 말들`을 매우 길게(그렇지만 나름대로는 `맥락`이 이어지는 방향으로) 인용했습니다만, 니체의 사상들을 아무런 비판이나 저항도 없이 수용하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의 주장은 매번 `인류 전체`를 걸고 `기존의 도덕과 가치체계` 자체를 전복하려는 시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니체는 `계급`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듯한 모습도 거리낌없이 보여줄 정도니까요.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짖은 `평등`에 대해서도 `어리석은 일`이라고 폄훼할 정도였지요.(그 때문에 루소와 볼테르가 몇 번씩이나 불려나와 혼쭐이 납니다. 그와 반대로 나폴레옹은 매번 극도로 존경을 받고요.ㅎㅎ)

어쨌든 그는 모든 `왜소화`와 `후퇴`와 `퇴화`와 `삶의 위축`등 `삶을 위혐하는 경향들`에 결연히 반대를 부르짖었는데, `조건없는 평등`이나` 민주주의 운동`이나 `여성해방 운동`이나 심지어 `진보`를 내세우는 거의 모든 철학들이 결국은 `노예 도덕`일 뿐이라며 비판할 정도였으니, 탕기 님께서 말씀하신 `인간은 차등적 존재`라는 생각쯤은 니체에겐 `귀족주의`나 `지배자 도덕`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재고할 필요조차도 없을 만한 기본 토대였겠지요.

니체는 아마도 역사의 다양한 변화 방향들을 얼마쯤은 예견할 수도 있었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는 문헌학자였으니만큼 특히나 고대 헬레니즘의 문화와 철학에는 아주 정통할 정도로 `과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몸담은 현재의 현대성 문제`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비판했으며, 결국 자신이 제기한 인류 도덕의 근본 문제들이 해결책을 모색하게 될 새로운 무대인 `미래`를 내다보는 일에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을 정도로 아주 용의주도했으니까 말이지요.

비록 니체가 `서양 형이상학의 종결자`라는 궁극적 위치까지 넘볼 정도로 높이 평가된 적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는 이미 우리에겐 까마득한 옛날이었을 뿐인 과거를 `현재`로 삼아 철학을 했던 인물인 것도 사실이지요. 그러니만큼 그의 철학들이 우리들의 `현재`에 얼마만큼의 울림을 주는지는 각자가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나 태도`에 따라 현격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자주 해 봅니다. 그는 늘 자신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예민한 귀`를 가진 `극소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그것도 무려 `백 년 후에나` 겨우 제대로 읽히게 될 글들을 쓰고 있노라고 자주 주장했는데, 그런 만큼 그에 대한 오해 또한 이해보다 더욱 커질 여지도 얼마든지 많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더군다나 그가 남긴 책들만 해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그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과제가 오죽이나 힘든 일일까 싶은, 그런 생각도 가끔은 듭니다.

탕기 님께서 뜻밖에도 너무 긴 댓글을 남겨주셔서, 제 글도 그냥 하는 수 없이, 이쯔네거 아무런 두서없이 맺어야겠다 싶습니다. 내내 즐거운 시간 만드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