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5일 토요일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다음 날, 나는 그 순간을 잊어버린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는 몇 주, 글을 다 쓸 때까지는 며칠이 걸리지만, 강물 위에서 흩어지는 비누의 거품으로 모든 기억은 사라진다. 남는 건 시간이다. 시간이 전부다. 하지만 나는 시간을 모른다.


    “진짜로 존재한다는 느낌, 자신의 영혼이 실제 존재자임을 깨닫는 느낌, 그런 느낌을 그대로 묘사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어떤 인간의 어휘를 사용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지금 열이 난다는 환각 속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그동안 내내 열병처럼 달아오르던 내 일생의 잠이 드디어 사라지는 것인가. 나는 알지 못한다.”(페르난두 페소아, 배수아 옮김, 『불안의 서』, 85쪽)


    페르난두는 진짜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신세를 한탄했다. 1930년 2월 21일. 그 날의 일기를 곱씹었다. 아니, 곱씹어볼 수밖에 없었다. 책 읽고 글 쓰는 나의 마음이 가서 부딪히는 문장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어딘가가 아리고, 혀끝에서 피 냄새를 낚아채는 새벽. 정신의 생채기에 드는 연고 같은 건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어제도 상처를 만졌던 손으로, 오늘 또 다른 아픔을 보듬는다. 페르난두의 ‘삶’을 나의 ‘독서’로 변환하지만, 그 결론의 값은 하나도 다를 게 없다.



*   *   *



    지금껏 여러 글로 독서를 생각해보려 했으나, 결국 그 글들이란 창피한 흔적과 다름없었고,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서의 순간은 분명 있다. “존재한다.”고 못 박아 선언할 수 있다. 문자를 바라보며, 생각의 우물을 들여다보고, 질식과 돌파와, 아니 그보다는 미궁 속에서 아리아드네의 실낱을 제대로 손에 쥐고 있는지 두려움에 떠는 모든 과정, 순간, 그리고 수많은 자세. 독서의 순간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은 본래 낯설다. “기억을 상실한 채 오랜 시간을 건너뛰어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페르난두의 책, 같은 쪽) 개체로 산다. 집중과 산만, 혹은 이해와 몰이해의 징검다리를 건넌다. 독자의 발밑으로는 강물이 흐른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나는 다리 한가운데서 정신이 들었고, 다리 아래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면서, 지금껏 나였던 그 다른 인간보다 지금의 내가 더 영속적인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페르난두의 책, 같은 쪽)


    독서와 작문은 어쩌면 페르난두가 말한 그 다리 위에서 강물을 바라보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독서토론이나 낭독이 아니라면 저 작업들은 고독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고독을 틈타 진리의 변경에서 저 높은 진리의 성벽을 넘어가기를, 혹은 어디 구멍이 없나 살폈다가 기어들어가기를 노린다. 한 번도 성공해보지 못했고, 성공의 소문조차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전설의 성도(聖都) 곁에 위치하는 작업은 그렇다. “글을 쓸 때처럼 혼자서 말없이 말하는 것은 아침 일찍 일어나 자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처럼 상쾌한 감각으로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진리를 지각하는 것이다.”(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이재만 옮김, 『공부하는 삶』, 289쪽) 이 성스럽고도 긍정적인 신학자의 조언에서, 나는 ‘진리에 귀 기울임’만 뽑아간다. 그리고 이 작업이야말로 과거의 나보다는 나를 훨씬 전면에 서게 하는 일이다. 아무리 어려운 글을 읽거나 써도, 그 순간만큼은 나와 확실히 대면하는 것이다.


    그런데 독서의 보증인 작문과 그 작문의 보증인 독서가 분명한 관계라면, 게다가 그 둘 모두가 무엇보다도 선명한 나와의 조우라면, 왜 우리는 그 모든 작업과 과정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하게 풀어져버리는 비극을 맛봐야만 하는 것인가? 읽음의 확실함, 씀의 확실함, 그리고 조우의 굳건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글을 쓰는 나에게도, 이 졸문을 구태여 읽어 내려가는 당신에게도 현전한다. 때때로 그것은 심장 뛰는 소리만큼이나 친숙하다. 우리는 읽는 사람이고, 쓰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 순간도 언젠가는 잊힐 것이며, 제아무리 강렬한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애인의 스치는 살결, 새벽에 엄습하는 죽음의 막연한 공포, 가을의 낙엽과 한 몸으로 구르는 허무함 같은 순간보다는 빨리 잊힌다. 그 순간을 제대로 기억한다고 자랑하는 이들의 오만. 그건 제 혀와 마음을 허투루 쓰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왜일까? 모든 독자들처럼 나 역시 매일 생각했다. 망각의 저주, 아니 망각을 망각하는 저주에서 나는 그것을 차라리 하나의 축복이라 믿기로 하고 거짓부렁의 글을 쓰기도 했다. 뇌와 심장의 용량이니 뭐니 떠들면서 나는 잊을 건 잊고 마는 것이 길게 보면 좋은 일이라고 술회하곤 했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잊지 말아야 할 걸 잊거나, 잊고 싶은 걸 거의 영원토록 기억한다. 그것도 불안과 우울을 틈타 마음의 전신을 때리듯 내게 쏟아진다. 망각이 축복이라고? 우리의 여력으로 어찌할 수가 없는 ‘망각’이라는 것이 어떻게 축복일 수가 있는가? 그것은 그저 실수일 뿐이다. 그것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것이며, 따라서 개개인마다 다른 국지성 호우일 뿐이다. 내가 맑은 날에도, 당신에게는 비가 내릴 수 있다. 망각의 구름은 저주다.


    독서와 작문에 한해 생각해보면 (그 외의 삶에 대해서는 도무지 말해볼 자신이 없다.) 망각의 비를 뿌리는 자연의 어떤 본성이 있으리라, ‘정신’이라는 자연의 특질이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미 한 결론에 이른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허무맹랑한 것임을 알고 있고, 그 결론을 알게 된 당신 역시 이 글이 하나의 졸문에 지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말겠지만, 모르는 독자들이 너무 많다.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굉장한 것을 추구하고, 읽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술회하며, 자신의 생산력을 자랑 삼아 다량의 글을 쓰고 읽는 자들. 엉겁결에 책의 표면에서 미끄러지며 사는 자들. 허무맹랑한 결론을 모르는 자들. 이 결론을 아는 사람들은, 그걸 모르는 이들의 글을 안다. 첫 머리부터 안다. 그리고 읽지 않는다. 곁에 두지 않아도 되는 얄팍한 정신이다. 그렇지 않아도 들여다봐야 할 우물이 이 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가. 페르난두가 86년 전에 한 결론을, 우리 독자의 정답을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 도시를 모른다. 거리들은 낯설다. 이것은 치유될 수 없는 재앙이다.”(페르난두의 책, 같은 쪽) 낯선 정신의 도시. 페르난두는 혹 ‘전설의 성도’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가 부럽진 않다. 부러울 수가 없다. 익숙한 모든 것에서 마음을 해체하고 낯선 공간으로, 그것이 두꺼운 책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광활한 백지와 무수한 문자 사이로 자신을 떨어뜨리는 독자의 삶도 페르난두가 말한 그 ‘낯선 거리’이니까. 순간 자기 자신을 봤거나 혹은 본 것 같은 착각이 이어지고, 그런 순간들이 듬성듬성 하나의 독서와 하나의 작문을 이룬다. “자신을 모른다는 것, 그것이 삶이다. 자신을 거의 모른다는 것, 그것은 생각이다.”(페르난두의 책, 86쪽) 그리고 혹 자신을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대단히 낯선 일일 수밖에 없다.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순간을 제대로 남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글은 엉성하기 짝이 없다. 그녀/그들의 글과 우리 독자는 단 한 번도 완벽한 조우를 해본 적이 없다. 다 낯설다.


    “지금 돌이켜보니 타고난 허황함, 숙명적인 멍청함, 엄청난 무식함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음을 깨달을 때, 나는 가히 형이상학적인 충격을 느낀다.”(페르난두의 책, 84쪽)


    낯섦은 불가해(不可解)다. 설명할 수 없도록 결정된 순간들이며, 우리를 (진정 그런 것을 묘사할 수 있다면) 자아의 중심부에서 철저하게 밀어내는 강력한 힘이다. 나는 ‘나’로 살고 있다고 믿는 것일 뿐이다. 당신 역시 ‘당신’임을 믿는 사람. 설명하려는 순간 낯설어지는 자기 자신을 구태여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 나는 차라리 페르난두와 같은 솔직한 낙담에서 위안을 얻는다. 소음 같은 글들 사이에서 오롯이 정신을 집중해 바라볼 수 있는 어떤 공간에 그의 글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그와 같은 사람들 역시 그 공간을 공유한다.


    나는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질소 같은 것, 다시 말해 대부분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침묵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아무 말 없이 내뱉고, 귀 없이 들을 수 있다. 그 점에서 침묵은 공기와 닮았다. 호흡으로 전해진다. 그 침묵이 오래 전부터 녹아들어 여러 곳에서 화석을 드러내는, 나는 그런 사람들의 글을 읽고, 또한 갈구한다. 페르난두는 모르겠다며, 피곤하다며 글을 맺는다.


    “자기의 본질 속에 아직도 침묵이 존재하는 인간은 그 침묵으로부터 외부 세계로 움직여 나아간다. 침묵이 그 사람의 중심이다. 그때 그 움직임은 직접적으로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침묵으로부터 다른 사람의 침묵으로 나아가는 것이다.”(막스 피카르트, 최승자 시인 옮김, 『침묵의 세계』, 70쪽)


    나는 침묵으로 말하길 바란다. 당신의 ‘말없음’에 아무 말 없이 대답하며, 당신 역시 나와 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이 문자와 문자 사이에는 낯섦과 침묵이 아니면 아무 것도 소용이 없으며, 다른 모든 것은 위선이요, 가짜 향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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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3-05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현력이 대단한 글입니다. 다소 현란하다는 느낌이지만, 잘 읽었습니다. ;^^

탕기 2016-03-05 23:58   좋아요 0 | URL
시인이시니 물론 문양에 속진 않으시겠지요. 건필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