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1일 일요일




    일찍이 박이문 선생께서 한 서문의 자리에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신 적이 있다. “슬프게도 타고난 재주가 없어 예술가의 길에서 벗어나 딴 직업을 갖게 되었으면서도 예술에 대한 나의 막연한 향수는 버릴 수 없었으며, 예술은 언제나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가장 멋있는 것으로만 느껴진다.”(박이문,『예술철학』, 10쪽) 아, 이것은 내 마음이다. 미술을 유랑하는 두 발의 힘, 먼 언덕에 걸린 작품을 희미하게나마 바라볼 수 있는 두 눈의 힘, 그리고 미술의 책장을 넘기는 두 팔의 힘, 여하튼 이 노마드의 모든 힘은 동경에서 샘솟는 것이었다. 나는 언제까지고 그렇게 술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술 하는 것’과 ‘예술을 동경하는 것’에는 얼마나 큰 간격이 있는가. 예술을 동경만 하는 주제에 마치 예술을 하는 것처럼 세상을 속여 예술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요쓰야 괴담(四谷怪談)의 독약 같은, 그리하여 예술과 우리의 결합에 훼방을 놓는 가증스런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그런 이들이야 이름을 얻고, 돈을 벌고, 독자들에게 빌붙고, 세상에 아부하고 떠나버리는 먼지일 뿐이지만.) 건너지 못할 강의 한쪽 하안에서 아무리 석벽을 쌓고 석교를 놓으려고 해봐도, 계절마다 찾아오는 홍수처럼 나의 의지를 쓸어가 버리는 것이 있다. 그 위력을 나는 안다. 알 수밖에 없다. 그것도 아주 처절하게. 얼마간 나는 그것을 ‘광기’라는 단어가 아니면 도무지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언젠가 다른 단어로 표현할지도 모르겠으나, 어디까지나 그 의미는 내가 넘보지 못하는 순간과 세계에 담겨있으리라. 예술의 대가들에게 갖는 존경은, 내게 이런 것들이다. ‘어렸을 적부터 예술가로 단련되었으면…’이라는 어리석은 후회를 하루에도 수 번 한다. 나에게는 딱지를 떼어내고 아린 상처에서 일부러 피의 맛을 보는 못된 버릇이 있다.


    하지만 다행이도 나는 독약 같은 자가 되지 않았다. 양심을 지켰다. 예술가로 자란 불행 속에 살고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차라리 한 명의 훌륭한 칼잡이일 것이다. 베어버리는 쾌감으로 미쳐가다가 제 목을 그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독자라서 차라리 이렇게 빌붙어 사는 삶으로 연명하는 것이다. 불쌍하다, 예술가들이여. 몇 안 되는 예술가 : (일동,  무대 밖을 향해 관객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대사는 없으며, 무표정.) 그리하여 행복하다고 말하는 예술가들을, 나를 오른팔을 내밀어 흔들며 이 마당에서 쫓아버린다. 휘이, 저리 가거라. 페소아와 피카르트와 블랑쇼와 소세키와 포와 카잔차키스와 보르헤스와 칼비노와 가오싱젠과 ... 그리고 무엇보다도 니체(오, 불쌍한 니체)가 있어야 할 곳에, 왜 그대가 멀뚱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서있는가. 염치도 없이. 그러나 그것은 연민의 마음까지는 되지 못하고, 때때로 나는 예술가에게서 아무런 정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으니, 그건 엄연히 동경의 마음 때문이다. 나의 든든한 어리석음 탓이다. 그 짝이 오히려 쓸모가 있는 일. 동경이 제일 크다. 여태 그래왔다. 불쌍하다는 말의 안팎을 굳이 구분하는 않는 까닭도, 그거다.


    이 어리석음. ‘동경’이라는 이름의 어리석음은 예술의 바다를 항해하는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튼튼한 돛이요, 노를 젓는 강인한 완력이다. 그리하여 나는 단 몇 분이 되더라도 하루도 빠짐없이 해와 북극성을 바라보며 배의 방향을 구한다. 정 힘들 때면 카시오페이아까지만 본다. 그러고 보니, 이 공간의 이름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gyrocompass로 지었다. 아무 생각 없이 붙인 이름인데, 내 안에 그런 연원이 있는 까닭에 저도 모르게 끌린 단어였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gyrocompass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나의 좁은 식견으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으나. 어쨌든 그것은 방향. 보르헤스의 시를 읽을 때부터 나는 언제나 선원(혹은 해적?)이 되고 싶었다. 바다와 예술은 퍽 어울린다. 항해는 나의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너에게도 역시 또다른 황금 해변에서          A ti también, en otras playas de oro,

    부식되지 않고 기다리는 보물이 있네          Te aguarda incorruptible tu tesoro:

    광대하고, 막연하고, 피할 길 없는 죽음이     La vasta y vaga y necesaria muerte.


    (보르헤스, 우석균 옮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 72쪽.「장님의 자리(Blind Pew)」 中)



*   *   *



    동경은, 한편으로는 무언가에 대해 안달을 내는 것이다. 속에서 열이 나서, 안에서부터 익어가는 것이다. 겉으로는 차분한 척 예술을 읽고 듣고 보면서도, 그 속에 용광로 하나 가져보지 않은 이가 어디 있는가. 그리하여 하나의 시가 생각난다.


    꽃무늬 팬티를 입으시는 어머니를 둔 김경주의 한 시 앞에서 한참을 울던 날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 시집을 기억하는 건 〈백야(白夜)〉라는 다른 시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도무지 모를 그 말들 사이에서 침잠의 새벽을 보내다가 불판의 고기를 맨손으로 짚는 광기를 부리며 한 구절을 이면지에 옮겨 적었었다. 김경주,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풀에게 흉터를 남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제 속의 열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김경주,『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45쪽)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마음으로는 정말 수 십 년을 보낸 것 같은 가증스런 상상을 하면서, 바로 오늘 다시 그 시와 구절과 그 날을 떠올린다. 나는 풀이요, 그것도 아주 열병이 나버린 풀이다. 안에서부터 익어가는 기이한 살덩이를 지닌 한 마리의 고기일 수도 있겠다. 무엇이 나에게 그런 얼토당토않은 흔적을 남기는가. “바람을 버리고 우수수 떨어”지는 이 밤은 (실로 밤이야말로 바람이 지탱하고 있는 어둠이 아닌가) 시인의 눈[眼] 속을 흐르는 겨울열매[雪]가 도무지 이상하지 않은 차디찬 계절. 이 극명한 온도 차가 오히려 속의 안달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것인지도.


    예술을 읽는 두 손의 냉증과, 예술을 보는 두 눈 앞을 가로지르는 찬바람과, 하여 그런 것들이 열병을 식혀주기도 하는 이 다행인 계절에, 나는 바람이 아닌 흉터의 결대로 이리저리 꺾이며 춤을 추는 하나의 풀이 된다. 서재에 장작은 충분하다. 화력 앞에서 증기를 뿜어대지 않는 열차는 없다. 나는 이런 글로 굉음을 낸다. 달리고 있다는 증거로 하얀 거품들을 머리 위로 뱉어낸다. 나의 속도대로 예술이 풍경처럼 지나간다. 나를 선로 위에 얹어놓고 강철로 무장시킨 모든 대가들에게, 나는 거치는 모든 역마다 손님들을 내리고 싣는 봉사로 답한다. 그녀/그들은 모두 나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이 추운 왕국의, 열병을 지닌 신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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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21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좋은 글들과 감상 잘 읽었습니다. 즐거운 밤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