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3일 화요일




    “눈물을 솟구치게 하는 허벅지. 크고, 엄청나게 크고, 뚜렷한 형체도 없고, 한여름밤처럼 광활하면서도 친근하고, 난롯가인 듯이 따스하며, 여성적인… 그곳 상상의 영역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좌절에 대해, 존재하지 않는 사랑과, 어떤 끔찍한 공포가 불러일으킨 전율,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어떤 미래 공포에 대해…”(페르난두 페소아, 배수아 옮김,『불안의 서』, 171쪽)


    참으로 말다운 말이어서, 나는 새벽마다 뜯어읽는 페르난두의 마음을 접어 책상에 고아처럼, 아, 그가 슬퍼할 ‘고아’의 모양으로 덩그러니 놓아두고는 이불을 덮었다. 하필이면 내게 왜 모든 것은 이처럼 밤과 같은가. 밤이란 무엇이냐, 이렇게 묻는다면 “밀밭처럼 연한 금빛의 내 어린 머릿속”(페르난두의 책, 같은 쪽)에서는 “검은 안개요.”라는 대답만 협곡 반대 사면의 바위를 때리고 골짜기를 맴돌 것이다. 페르난두도 그랬다. 절망의 어조로 그는 ‘바람’을 찾고, ‘어머니’를 찾고, ‘고향’을 찾고, ‘침묵’과 ‘요람’과,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을 하나의 노래로, ‘자장가’로 들려달라고 애원한다. 끊임없이 불안하다. 작가이기에, 그와 동시에 譯者이자 독자이기에. 그리고 내가 어쩔 수 없이 떠올리는 불행한 사람들. 불가역의 시간과, 밀려들어와서 빠져나가지 않는 비현실의 파도와, 그런 것들. 나는 지금 위로를 찾는다.



*   *   *



    나는 페르난두가 신에게의 귀의를 꿈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신의 안에서 글 쓰는 사람이 아니다. 여러 일기에서 신을 찾으며 신을 말하고 신을 뭔가에 비유하지만, 그 모든 작업은 방 안의 홀로 된 시간 속에 있는 그와 세상의 거리만큼 다듬어져 있다. 더군다나 페르난두는 신은 침묵하니 사랑할 수 없다고 했다. (차라리 聖人을 사랑하게 된다고 했다.내가 페르난두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바로 나 자신이 神이라는 단어를 아주 작은 상자 안에 고의로 가둬놓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수많은 이들이 기복하는 신이라는 존재가 없다. 경전의 말씀처럼 신을 죽여 보는 전회 같은 건 체험해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 말의 뜻을 전혀 모른다. 그걸 아는 사람들은 붓다의 죽음을 운운한다. 하지만 그 놀라운 기예를 갖고도 버젓이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걸 보면, 와불 속에 갇힌 한 깨달은 자가 너무나도 불쌍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신은 그냥 웃겼다. 뭐 저런 신을 믿어? 이 정도가 딱 좋은 표현. 그 신들은 흡사 광대 같았다. 그래서 그런 신을 믿지 않는 대신, 내가 생각하는 신을 만들었다. 중세에 태어났다면 나는 불의 고온에서 만개했을 한 송이의 꽃 같은 고깃덩어리였으리라.


    여러 종교의 경전을 읽는다. 30대의 목표라며 올해부터 10년 간 실천코자 하는 건, 신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작업이다. 일말도 성공하지 못하리라 확신한다. 건너지 못할 급류에 노 하나 없이, 엉덩이와 배를 마스트 삼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뛰어든 꼴이다. 아, 매일 미끄러진다. 그리하여 빠져 죽지 않기 위해 나는 이 급류의 수면 아래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한 존재가 살고 있다고 믿어야만 했다. 덩치가 너무 커서 어디에서든 그녀/그의 어깨를 밟으면 수면 위로 콧구멍이나마 내밀 수 있어야 했다. 숨은 쉬어야지. 그녀/그는 반드시 거인이어야 했다. 급류와 협곡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거인이어야 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존재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보고된 바가 없다. 그래서 나는 주변 사람들이 나를 미치광이로 호도할 것을 두려워하여 (한편으로는 기꺼워하며) 책 속에 들어가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녔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나는 다름 아닌 거인들에게 그런 질문을 하고 다닌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보고 다닌 건 사람이 아니라, “눈물을 솟구치게 하는 허벅지. 크고, 엄청나게 크고, 뚜렷한 형체도 없고, 한여름밤처럼 광활하면서도 친근하고, 난롯가인 듯이 따스하며, 여성적인…”(페르난두의 글, 재인용) 존재들이긴 했다. 어떻게 그녀/그들을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까? 최소의 생물학적 조건은 이미 쓸모가 없어진, 이 세상에 없는 이들을. 내가 기억하고 숭배하려고 하는 한, 그녀/그들을 어쩔 수 없이 ‘거인’이라고 불러야만 한다. 죽을 것 같은데도 살고 있는 까닭은, 아무리 깊은 바다라 할지라도 그녀/그들의 어깨가 수면 위에서 파도를 맞으며 육지의 존재들을 보듬는 하나의 섬이기 때문이다. 육지를 밟으며 사는 까닭에 나는 선원(혹은 해적?)을 꿈꾸는 것일 테고.



*   *   *



    페르난두의 새벽을 보내는 당신에게, 굳이 어느 섬에 들렀고 그곳에선 또 얼마나 묵었는지 묻지 않는다. 어차피 대부분이 바다 밑에 가라앉은 이 행성에서 우리가 디딜 육지는 그다지 많지 않다. 머지 않은 날에 또 다시 마주칠 수밖에 없는 법. 똑같은 술집에서 만나 예의 저녁을 시켜놓고, 한 통의 웅성거림으로 거인들을 읊을 수밖에 없는 법. 물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연민을, 바다에 빠져죽은 이들에게는 위령의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법.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당신과 나를 불쌍히 여길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믿지 않는 신에게 나는 묻는다. ‘왜 당신은 이토록 적은 수의 섬만 남기고 하늘로 날아가 버린 것입니까? 이 불완전한 창조란 대체 무엇입니까?’ 그러면 신은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대답한다. 그 대답은 토시 하나 다른 것 없는 말의 갈피를 내일도 지닐 것이다. ‘이 세상은 원래 바다의 것이니라.’ 아, 그런 것이었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내일도 다시 묻겠습니다. 신의 답변을 바꾸는 첫 인간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도무지 짜증이란 걸 낼 줄 모르시는군요. 저도 아예 그렇게 빚어주시지 그랬습니까.


    “우리 모두는 삶의 바람이 한번 휘몰아치면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다시 땅바닥에 내려앉는 먼지나 다름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단단한 지지대, 우리의 작은 손을 편안히 맡길 수 있는 어떤 다른 손을 간절히 바란다. 시간은 불확실하며, 하늘은 멀기만 하고, 인생은 언제나 낯설기 때문이다.”(페르난두의 책, 3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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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하여 나는 독자로 산다. 마지막 단검을 빼든 것이다. 이 세상의 허구한 쓸모없는 것들에 일희일비하는 장난감 인형 같은 삶 속에서 한 권의 픽션과 한 권의 논픽션으로 사는 것이다. 거인의 어깨를 밟는 것이다. 가뭄 들지 않는 살갗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이다. 동물인 척 하는 사람들의 광기 사이에서 동물이 아닌 척 하는 광기를 부려보는 것이다. 영원을 읽고, 영원을 쓰며, 끝내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동물 같지 않은 동물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심지어 “apothanein thelo.”라는 말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아폴론에게 빌었던 영원을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그저 한 명의 선원으로, 바람과 별자리가 없으면 한 발자국도 노 젓지 못하는 무능한 선원으로 산다. 대가들의 책 틈에 한 장의 사람으로 비집고 들어간다. 한 권을 이룬 이들 사이에서 언젠가 마침표를 찍고 먼지 사이에 묻힐 때까지. 독자의 공간적 행위. 그건 이렇듯 인위의 작업이다. 책 쉽게 읽는 비법 아는 사람은 어디 나에게도 그 좋은 방법을 좀 알려 달라, 이 사기꾼아. 나는 오늘 한 글자라도 제대로 읽었을까. 그런데 뭘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일까. 내 힘으로는 마칠 수 없는 푸념이라 다시 페르난두의 새벽을 불러온다.


    “내 말을 듣고는 있지만 귀를 기울이지는 않는 당신은 이것이 얼마나 슬픈 비극인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페르난두의 책, 495쪽)


    당신에게도 새벽은 어김없이 찾아오기를. 그리하여 마침내 한 사람의 마침표로 자신의 이야기를 끝맺을 수 있기를. 나는 항아리 속에서 애절하게 죽고 싶어 했던 고대의 마녀처럼 간절하게 바란다. 당신의 새벽을 위하여. 당신과 나는 섬의 술집에서 곧 다가올 밤을 예비하고 있다. 당신의 흔들리는 동공이 내게 다음 항해에 대해 묻는다. 술잔을 쥔 이 손의 냉증도 당신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 항구에는 새벽이 내려온다. 내일의 출항을 위해 배들도 고이 바다 위에 누웠다. 다시 마지막 인삿말을. 당신의 새벽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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