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최완규 옮김, 장경덕 감수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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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9

 

 

 

  우리는 중고등학교 사회시간에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대해 배운다. 지정학은 국가의 전략으로 활용되는 학문이다. 지정학에 따르면 한 나라의 위치는 단순한 지리가 아니라, 주변 나라들의 성격에 의해 결정된다. 군사학의 일환으로 봐도 무관한 것이, 지정학자들은 한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게 될 국가전략의 수립에 있어 그 나라가 과연 어느 위치에 포진하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령, 옛 칭기즈칸이 서진(西進)할 때에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상비군을 배치시킨 것을 본 따 소련은 무려 10년(1979~1989) 동안 11만 명에 이르는 군사를 투입할 정도의 공을 들여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었다.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역사는 반도 국가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꽤 친근한 스토리이다. 아마 이원복의 『먼 나라 이웃 나라』를 통해 많은 이들이 두 나라의 역사를 읽었을 것이다.


  이 학문의 여파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세계역사의 흐름을 지정학적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지리적 요충지라든가 소위 ‘노른자 땅’이라 불리는 곳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손길이 닿을 수밖에 없고, 그곳에서의 복잡한 역사가 변덕스럽게 흘러갔다는 막연한 이해도 기대할 수 있다. 지정학 못지않게 문화적 관점도 매력적이다. 유교 문화권과 불교 문화권, 그리스도교 문화권, 이슬람 문화권, 그리고 정교 문화권 등 다양한 종교들의 분포로도 역사의 흐름을 정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던 학자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이다. 『총, 균, 쇠』는 우리나라 주요대학들의 필독 도서이고, 『문명의 붕괴』는 환경문제와 그 이외의 네 가지 원인들에 대한 실증적 연구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리뷰에 앞서 그의 주장을 조금 거칠게나마 요약해보자면 이렇다. 그에 따르면 문명은 우선 그들이 거주하는 환경에 대한 대대적인 파괴로 붕괴했다. 적어도 환경파괴는 문명의 멸망에 관해서는 필수조건이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확장도 이를 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SF영화들의 단골 시나리오 중 하나도 어떤 외계행성의 문명이 환경파괴로 인해 터전을 잃게 되자 거대한 우주선을 타고 우주공간을 떠돌아다니며 다른 행성의 문명을 숙주처럼 이용한다는 내용이다. 다른 네 가지 원인은 기후변화, 적대적 이웃, 우호적 이웃과의 단절, 주민의 반응이다. 다이아몬드는 이러한 진단을 통해 미래의 비극을 예방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애쓰모글루(Daron Acemoglu)와 로빈슨(James A. Robinson)이 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원제 : Why Nations Fail)』는 세계역사의 흐름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를 전복시킬 만한 주장을 담고 있다. 다이아몬드의 것과도 다르다. 각각 경제와 정치를 연구하는 두 학자는 국가의 존망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봤는데, 그건 바로 ‘제도(institution)’이다.


  나는 얼마 전 안데스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본 적이 있다. 시리즈 중 하나는 당연히 잉카 문명을, 특히 잉카의 멸망을 소재로 구성되었다. 충격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잉카의 멸망은 유럽 열강들의 남미 정복으로 이어졌고, 식민지화는 오늘날 남미의 현실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얼핏 보면 아따왈빠(Atahuallpa) 왕이 죽은 1533년 8월 29일과 지금 페루인들이 대물림할 수밖에 없는 가난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관련이 ‘매우’ 있다.


  우리에게 희미하게만 느껴지는 관련성을 잘 짚어낸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오프닝 장면으로 가난한 페루의 아이들을 보여줬다. 페루의 한 마을에 기차가 정차했다. 그 위에는 유럽 관광객들이 올라타 있다. 아이들은 그 근방을 떠날 생각을 않는다. 오히려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파란 눈의 외지인들에게 무엇을 바라는 눈치이다. 관광객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던져줬고, 아이들은 기차가 막 달리기 시작한 후에도 미련을 따라 기차 꽁무니를 쫓았다. 아이들의 입과 호주머니에는 사탕이 들어 있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몇 가지의 개념들로 이뤄진 하나의 견고한 관점을 통해 세계의 거의 모든 역사를 설명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두 학자는 이 책의 1장과 3장에 자신들이 앞으로 설명할 관점의 대표적인 예를 실었는데, 학설 비교에 해당하는 2장을 제외한 나머지 장들은 사실 자세한 사례 열거에 해당한다. 책의 분량이 만만치 않으므로, 혹 관심은 있으나 시간이 부족한 바쁜 독자라면 적어도 1장과 3장은 반드시 읽어보길 권한다.


  애쓰모글루와 로빈슨의 주장은 이렇게 구성된다. 우선 두 학자는 정치제도가 경제제도를 결정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3장에도 나와 있는 예인데, 남북한의 빈부 차이로 이것을 설명할 수 있다. 북한은 착취적 제도이다.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빈곤을 조장하는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15~16세기 콩고 왕국의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가난’이라든지, 17세기 초반의 바베이도스와 같은 경우에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북한은 이걸 조장한다. 정치제도가 그렇기 때문에 경제 역시 착취적(extractive) 경제제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오늘날 포용적(inclusive) 경제제도를 갖고 있다. 다원주의와 중앙집권의 시너지 효과로 인해 옛 사회의 엘리트층들이 두려워했던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가 일어났고,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었으며, 자유경쟁을 독려하는 인센티브가 북한에 비해 훨씬 잘 갖춰졌다. 물론 박정희 정권을 예로 들자면 우리나라도 착취적 경제제도에 있었다. 그러나 이 독재의 시대에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민주화에 대한 열렬한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빠른 산업화와 빠른 민주화를 동시에 일정부분 달성할 수 있었다. 북한은 정치제도로 인해 애당초 이러한 발전의 가능성이 모두 차단된 상태이다.


  두 학자는 잉글랜드와 미국, 그리고 프랑스로 대변되는 포용적 제도의 선진국들이 왜 선진국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추적해간다. 그 중 흥미로운 것은 1장에 언급된 남미와 북미의 식민지 진행과정이다. 인구밀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던 북미에서는 잉글랜드의 식민지 전략이 효과적으로 실행될 수 없었다. 반면, 에스파냐는 오늘날의 남미를 지독한 가난에 빠뜨린 오래된 족쇄들, 예컨대 엔코미엔다, 미타, 레파르티미엔토 데 메르칸시아스, 트라진, 그리고 인두세 같은 살인적인 정책들을 얼마든지 실행할 수 있었다. 남미에서는 독점화가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인센티브를 받을 수 없었고, 당연히 일할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이러한 ‘닫힌사회’에서는 와트나 에디슨이 나올 수 없다.


  유럽의 역사가 갈림길에 섰던 여러 역사적 상황들이 있다. 그 중 로마의 멸망과 흑사병 창궐은 시대를 구분(고대/중세, 중세/근대)하는 큰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갈림길에서 국가나 집단들은 어떤 미래를 꿈꿀 것인지 선택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전적으로 그들이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역사에는 우발성 역시 있다. 예측하기 힘든 복잡한 상황 속에서 꾸준한 성장을 하는 국가들은 결과적으로 두 학자의 진단처럼 ‘열린사회’를 지향한 국가들이었다. 동유럽은 영주들의 사유지 규모가 서유럽보다 훨씬 컸고, 인센티브로 노동력을 예속시킬 만한 경제적 부도 있었다. 그곳에서는 무려 18세기까지 농노제(serfdom)가 존재했었다.


  반면 서유럽에서는 농노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흑사병 창궐 이후 농노들이 계약을 요구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더니, 1688년에는 세계최초로 포용적 정치제도를 보장하는 명예혁명이 영국에서 일어났다. 독점은 철폐되고, 사유재산은 인정되었다. 사람들은 일할 의욕이 생겼으며, 산업과 인프라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영국과 다른 나라들의 결정적인 정치제도 상 차이는 강력한 의회의 유무였다. 에스파냐에도 ‘코르테스’가 있었으나, 그들은 왕의 권력 독점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영국 의회는 왕을 견제하기에 충분했다. 의회는 왕을 견제하는 수단임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누구라도 끌어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포용과 착취. 이 두꺼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두 단어이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책제목에 두 학자는 “착취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이런 종류의 진단과 관점이 별로 낯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불과 2~3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계의 내로라하는 학자들마저 착취적 제도로 성장하는 한 국가의 놀라운 신화를 목격했다. 바로 소련이다. 소련은 낙후된 공업에 소위 ‘올인’하기 위해 집산화(collectivization)라는 것을 했다. 그리고 집산화를 통해 그들은 1928년부터 1960년까지 연간소득이 꾸준히 6%씩 증가하는 역사상 유례없는 초고속성장을 이룩한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소련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소련의 실패는 ‘제한적 성장’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실패한 나라들의 대부분은 한 때 영광을 누리던 나라들이었다. 로마와 베네치아가 그렇다. 이슬람 문화권의 위대한 제국들도 그러하고, 중국의 역대 왕조들 역시 그렇다. 아프리카에도 우리가 잘 모르는 거대한 왕국들, 예컨대 콩고의 쿠바 왕국이나 악숨 왕국 같은 나라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화려했다. 그러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독재와 노예제 때문이다. 설령 이런 형태의 나라가 지금 존속하는 사례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선진국 반열에 드는 경우는 없다. 발달을 가로막는 장벽은 엘리트층의 두려움이다. 오스만 제국은 반란을 두려워해서 인쇄를 금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백성들이 잘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철도건설을 막았다. 그곳에서는 산업혁명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열린사회’를 지향하며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한 서유럽의 강대국들은 17~19세기에 걸친 식민지 경쟁을 위해 ‘닫힌사회’를 이용했다. 네덜란드는 1621년 동남아 반다 제도에 착취적 경제제도를 심으려는 목적으로 원주민 15,000명을 학살하는 끔찍한 죄악을 저질렀다. 그들은 향신료를 생산할 수 있는 적당한 노예들만 남겨놓고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 사실에 충격을 받은 동남아의 이웃 국가들은 일제히 특산품 생산을 중단했다. 네덜란드와 같은 열강들이 쳐들어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성장은 없었다.


  노예제를 따라한 것은 아프리카의 왕국들도 마찬가지였다. 윤리 관념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던 저 왕들은 자국민들을 너무 많이 노예로 팔아버린 탓에 다른 왕국을 침략해 그 포로들로 노예 사업을 추진했다. 노예제는 노예들의 해방 영토인 라이베리아에서도 20세기까지 이어졌다. 아파르트헤이트로 유명한 옛 남아공 정부는 의도적으로 원주민들만 모아놓은 자치지구를 낙후시켜 저임금 노동력을 빼 쓰는 방법으로 21세기 바로 직전까지 악행을 일삼았었다. 사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오늘날 선진국들이 역사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오랜 시간 투쟁해서 ‘열린사회’를 구축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열린사회’는 식민지 인력과 자원들의 막대한 희생을 먹고 자랐기 때문이다.


  이미 세계는 큰 편차를 보인다. 영국, 프랑스,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처럼 포용적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를 갖춘 선진국들은 선순환의 절차 속에서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어간다. 한 번 개방된 사회가 폐쇄되는 역사적 사례들도 이 책에 소개된 것처럼 많으나, 유혈(流血)을 통해 얻은 가치를 이 나라의 후손들은 결코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착취적 정치제도와 경제제도 속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창조적 파괴’를 원하면서도 연합세력을 결성하기 힘들다는 이유,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투명한 미래전망으로 인한 무기력증 때문에 21세기의 한복판에서 고립된 채로 살아가고 있다. 악순환이 된다. 암울한 것은, 영국의 경우에는 수 백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민주주의를 완성한 까닭에 엘리트층의 완고함이 조금씩 풀렸지만 가난한 저들은 급진적 방법을 택해 사회 구성원 전체를 만족시킬 수 있는 대안을 선택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중동은 민주화 바람이 한창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집트의 경우처럼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마치 우연인 것처럼도 보인다. 역사는 방대하며,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흐른다. 두 학자도 이를 분명히 한다. 그들의 이론에 역사의 우발성이 포함되어 있는 까닭은 역사 자체가 때론 우연하기 때문이다. 로마가 멸망했을 때, 당시 ‘촌동네’에 지나지 않았던 잉글랜드에서 17세기의 명예혁명이 일어날 것이라 그 누가 예측할 수 있었을까. 무적함대 아르마다와 부딪히던 그 날, 잉글랜드 사람들 중 그들이 훗날 대서양 무역의 전권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한 이가 있었을까. 에스파냐의 콧대 높은 군주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창녀’라 비하했고, 이번 기회에 잉글랜드에게 제대로 쓴맛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해전에서 철저한 승리를 거둔 건 잉글랜드이다. 바로 그런 일들이 역사에서는 종종 여러 이유들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그러나 이 모든 우연한 사건들을 하나로 꿰고 지나가는 것이 바로 두 학자의 이론이다. 착취적 제도는 장기간 존속할 수가 없다. 외부에서 그들을 붕괴시키든지, 아니면 내부에서 어떤 폭발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오늘날 세계는 열리고 있고, 우리는 열린 곳으로 나아가길 권유받는다. 리프킨이나 노르베리-호지 등 유명한 석학들이 세계화에 반대하며 지역사회로 돌아가자고 강력하게 호소한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흐름은 비가역적인 듯하다.


  두 학자는 이 이론으로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포용’과 ‘착취’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지난 역사를 훑고 지나오며 내린 결론처럼, 우리는 미래 역시 그렇게 진행될 것이라 예측해볼 수 있다. 또한 앞선 실패의 사례들, 그리고 오늘날 낙후된 국가들의 고통을 통해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바를 보다 선명하게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책이 지적하진 않았으나, 사실 ‘열린사회’에도 ‘닫힌사회’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포용적인 우리나라 사회의 어느 구석에는 착취적 제도들로 인해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마땅한 인센티브도 없이 거의 반(半)강제적으로 일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와 이전 세대가 투쟁하여 얻은 권리를,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나눠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교과서적인 이야기이다. 이미 얻은 것들은 잘 보이지 않으니, 우리도 아전인수격으로 일종의 ‘엘리트화’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일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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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1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1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