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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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9

 

 

  역사적 사건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려준다. 에릭 블레어(Eric Blair), 아니 필명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서 1937년에 이르는 유럽의 충격적인 사건들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깨달았다고 했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오웰의 짧은 글을 읽어보면, 그가 왜 굳이 소설 속에 저널리즘의 뉘앙스를 심어놓을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된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그는 글을 쓰는 모습까지 영락없는 행동파였다. 전체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 그리고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사랑이 담겨져 있다.


  1903년 인도에서 태어난 그는 마흔일곱 해를 살고 세상을 떠났다. 미켈란젤로만큼만 오래 살았으면 그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목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동물농장』에는 무너져 가는 전체주의의 결말이 실려 있다. 이를 두고 ‘예언자적 작품’이라고 하던가.  사실 『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원제 : Why Nations Fail)』을 쓴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A. 로빈슨 등 경제학 분야에서 역사를 분석하는 석학들에 따르면 소련은 착취적 경제제도 때문에, 중공업으로 전환한 후 이룩한 놀라운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얼마 못 가서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붕괴가 문학적으로 ‘예견’될 때에, 독자들은 역사에 한층 고양된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듯하다.


  『동물농장』은 그로테스크한 우화이다. 동물들 중 그나마 똑똑한 돼지들이 동물들을 선동해서 농장주인 존즈를 몰아내는 것까지는 제법 그럴싸한 우화라는 느낌을 줄지도 모르겠다. 동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90년대 영화, 가령 『꼬마돼지 베이브(BABE)』나 『베토벤(Beethoven)』등의 아기자기한 매력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영화의 여러 장면들을 떠올리며 『동물농장』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되면 전개될수록 동물들의 행동은 놀라울 만치 사람처럼 ‘진화’한다. 글을 읽고, 현판을 쓰고, 곡식을 분배하며, 풍차를 세운다. 그 중에는 사람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부류와 애당초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교육’받은 부류 - 나폴레옹이 특별히 양육한 개와 돼지들 - 가 있어 그들은 결국 ‘진화’에 성공하는 부류의 통치를 받게 된다. 나폴레옹과 그의 세력은 “설마 존즈가 되돌아오길 바라는 것은 아닐 거고?”라는 질문으로 몰아붙이면서 부인했겠지만, 동물농장에는 마침내 전체주의에서 볼 수 있는 ‘계급’이 생긴다.


  소설이 길지 않은 만큼 오웰은 사건과의 냉소적 거리를 유지한 채 독자들을 거침없이 ‘동물농장의 파국’으로 끌고 간다. 사건들이 - 인간의 것과 매우 닮았다는 점에서 - 충격을 주고, 오웰은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시점은 동물농장 안에만 머물러 있어 복서가 결국 도살을 당했는지, 스노볼이 정말로 프레데릭의 농장과 필킹턴의 농장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인지, 독자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나폴레옹이 어떤 돼지 - 사람의 탈을 쓴 돼지 - 인지 알아차린 후부터는 모든 것이 의심된다. 동물들이 당하는 비극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계명이 바뀌고, 자백과 처형으로 수많은 동물들이 도살되고, 암탉들의 시위가 수포로 돌아가고, 상처뿐인 승리에 허황된 의미를 갖다 붙이는 스퀼러의 논변에 동물들은 속아 넘어간다. 다 알지만 그것을 말해줄 수 없다는 점에서 독자들은 하나 같이 늙은 당나귀 벤자민이 되는 것이다.


  “일요일 아침이면 스퀼러가 길다란 두루마리 통계 숫자 목록을 펴놓고 그간 농장의 각종 식량 생산량이 200퍼센트, 300퍼센트, 혹은 500퍼센트씩 늘어났다고 발표했다. 동물들로선 ‘반란’ 이전의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 지금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스퀼러의 발표를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동물들은 통계 숫자보다는 먹을 것이나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때가 자주 있었다.”


  『동물농장』은 당대를 고려하면 현실과 1대1의 대응이 가능한 우화이다. 가령, 나폴레옹과 그의 정책을 의심하는 동물들에게 나폴레옹을 찬양할 만한 소식을 전해주는 꼴사나운 스퀼러 같은 경우에는 공산당 시절의 기관지인 프라우다(Pravda) - 지금도 국영 일간신문으로 있으나, 성격은 다르다 - 라 할 수 있고, 나폴레옹은 스탈린, 그로부터 쫓겨나고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여겨진 돼지 스노볼은 트로츠키일 것이다. 스탈린으로부터 쫓겨나 1940년 결국 멕시코에서 암살당한 트로츠키는 유럽의 각 나라들에서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야 러시아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단독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스탈린과는 정반대의 의견인데, 스노볼도 트로츠키처럼 일종의 연합을 주장했다. 인간들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다른 농장에도 비둘기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사건들도 현실과 대응된다. 스탈린 정권이 1930년부터 무려 9년 간 진행했던 대숙청도 나폴레옹의 회의 폐지에 반대했던 돼지 네 마리, 달걀 사건을 주도한 암탉 네 마리, 옥수수 이삭 여섯 개를 먹은 거위 한 마리, 나폴레옹을 따르던 늙은 양 한 마리를 죽인 양 두 마리, 먹는 물웅덩이에 오줌을 싼 양 한 마리가 즉석에서 도살당한 이야기와 유사하다. 동물들의 반란을 이끌어내고, 나폴레옹의 독재 이전까지 회의의 마지막을 늘 장식했던 노래 ‘잉글랜드의 짐승들’은 “잉글랜드의 짐승들이여, 아일랜드의 짐승들이여, 온 세계 방방곡곡의 짐승들이여”로 그 대상이 확장된다는 점에서 코민테른을 닮았다. 이 노래는 나폴레옹이 폐지하는데, 스탈린도 대숙청을 통해 결국 1943년에 제 3 인터네셔널을 강제적으로 해산시켰다.


  나폴레옹이 어떤 방식으로 동물들을 기만하는지를 보면 오웰이 대중들의 ‘앎’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스노볼과 나폴레옹의 주도로 동물농장에는 ‘동물주의’의 원리를 축약한 일곱 계명이 새겨진다.

 

  1. 무엇이건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다. (Whatever goes upon two legs is an enemy.)
  2. 무엇이건 네 발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것은 친구이다. (Whatever goes upon four legs, or has wings, is a friend.)
  3. 어떤 동물도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No animal shall wear clothes.)
  4.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 (No animal shall sleep in a bed.)
  5. 어떤 동물도 술을 마시면 안 된다. (No animal shall drink alcohol.)
  6.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선 안 된다. (No animal shall kill any other animal.)
  7.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All animals are equal.)

 

  그러나 계명은 나폴레옹과 그의 세력의 편의에 따라 수시로 변경되는데, 결국 동물들은 스퀼러가 어느 날 자정 무렵 계명의 현판을 페인트로 고쳐 쓰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러나 그들은 영문을 몰랐고, 오로지 진실을 아는 이는 늙은 당나귀 벤자민 뿐이었다. 인간들과는 절대 거래하지 않겠다고 내렸던 결정이 번복되는 장면에서는 스퀼러가 동물들에게 다가와 이렇게 설득한다. 아니, 거의 협박에 가깝다.


  “동무들, 그거 혹시 동무들이 잠결에 꾼 꿈 같은 거 아니오? 아니라고 확실히 장담할 수 있소? 동무는 그 결의에 관한 기록을 가지고 있소? 그런 기록이 있소?”


  계명도 이런 식으로 동물들의 ‘무지’를 이용해 고쳐졌다. 나폴레옹이 존즈의 본채에 들어가 침대에서 잔다는 소문이 퍼지자 제 4계명에는 “시트를 깔고”가 추가(No animal shall sleep in a bed with sheets)되고, 대숙청 이후 제 6계명에는 “이유 없이”가 추가(No animal shall kill any other animal without cause)된다. 나폴레옹이 양조법과 알코올 증류법에 관한 책들을 사오라는 지시를 내린 후에 제 5계명에는 “너무 지나치게”가 추가(No animal shall drink alcohol to excess)된다. 그러나 최후의 사기는 이보다 궁극적이다. 그것은 오웰의 이상을 배반한 전체주의의 대사기, ‘평등’을 가장한 독재의 사기이다. 제 7계명은 이렇게 바뀌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All animals are equal, but some animals are more equal than others).”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자신의 의식을 분명하게 밝혔다.
  “책을 쓰는 이유는 내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목적이 결여된 책은 생명력이 없는 책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 그는 『동물농장』을 통해 당대의 ‘거짓말’을 드러내기 위해 ‘우화(fable)’라는 오래된 문학적 기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독자들이 무엇에 대한 우화인지 모르고 읽더라도 그것을 자신이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는 어떤 역사적 사건, 혹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동물농장』의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느끼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이다. 오웰의 『동물농장』이 성공적인 평가를 받는 까닭은 그가 밝혀내고자 한 ‘거짓말’이 비단 스탈린의 전체주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나폴레옹과 그의 세력들, 특히 나폴레옹이 본채에서 지내길 선호한 독재의 시대부터는 주로 스퀼러를 통해 언급되던 ‘거짓말’들은 독자들에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대중들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웰은 ‘문맹(文盲)’이라는 다소 극단적인 - 하지만 결코 극단적인 것만은 아닌 것이 19세기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러시아의 문맹률은 무려 90%를 넘었기 때문이다 - 장애를 설정했지만 “읽지 못한다.”라는 것이 꼭 독해에 관한 비유로만 받아들여질 필요는 없다. 그것은 현실을 읽지 못하는 무지한 대중, 혹은 그럴 의지조차 없는 안이한 대중들에 관한 따끔한 비유라고도 할 만하다.


  “선전선동은 타인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죄의식을 느낄 이유가 많을수록 선전선동은 더 격렬해진다.”


  『맹신자들(원제 : The True Believer)』을 쓴 에릭 호퍼의 말이다. 볼셰비키, 파시스트, 나치즘 등은 아이러니하게도 ‘독재를 원하지 않는 것 같던’ 대중들이 누군가에게 복종하고 추종하려는 열망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에 등장한 비극적 역사의 단면들이다. 우리는 왜 ‘선동’되는가? 우리는 과연 우리가 가려고 하는 방향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을 잘 알고 있는가? 역사는 누가 이끌어 가는가?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선택권이 있는가? 늙은 수퇘지 메이저가 처음으로 동물들을 선동했던 말 자체는 매우 이상적이다.


  “우리 삶의 이 모든 불행이 인간의 횡포 때문이라는 게 너무도 명백하지 않소? 인간을 제거하기만 하면 우리의 노동 생산물은 모두 우리 것이 됩니다. 하룻밤 사이에 우리는 부자가 되고 자유로워집니다.”


  그러나 혁명의 결과는 『동물농장』의 가장 그로테스크한 마지막 장면으로 이어진다. 나폴레옹이 근처의 농장주 대표단을 초청한 자리에서 카드게임이 시작됐는데, 결국 “동시에 똑같은 스페이드 에이스를 내놓은 것”으로 발단된 싸움이 오웰에게는 이렇게 보였다.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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