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철학하기 -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바꾸는 101가지 철학 체험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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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5

 

 

  서재에 여러 철학책들이 꽂혀 있다. 나는 그것들 중 대부분을 완독하지 못했다. 읽지 못한 책들의 대부분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계륵과도 같아 차마 버리지는 못한다. 하루는 그것들에게 막연한 동경과 독서의 의무감을 느끼지만 다음 날이면 으레 그렇듯 잊어버리곤 한다. 철학은 내게 그런 존재이다. 늘 생각하고 있다고 믿고 싶으나 실제 그렇진 않으며, 한편으로는 그 드문드문 찾아오는 객인이 내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그것은 전체인 것도 같고, 부분인 것도 같다.


  마켓에 가면 소위 ‘지름신’ 내리는 사람이 있듯이, 나는 책을 앞에 두거나 생각을 글로 옮기려고 할 때마다 ‘철학신’이라는 것이 내린다. 물론 이는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기 몇 줄에 하루의 무게를 옮겨놓고자 키보드를 누르는 순간, 혹은 펜으로 백지 위에 첫 획을 긋는 순간 우리는 복잡한 현상 속에서 어떤 정돈된 의미를 뽑아내려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이처럼 철학의 자세, 즉 스탠스(stance)는 철학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와는 달리 적극적이다. 철학은 혼돈 속에 뛰어들 각오가 된 전사의 무기이다. 다만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궁극을 추구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그 마음은 용광로처럼 뜨겁다.


  철학이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까닭은 본래 뜨거운 사람들의 위대한 구상들로 건축된 ‘꺼지지 않는 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철학적 질문과 ‘철학하기’라는 행동이 한 가지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카이로스’이다. 철학은 우리에게 잠시 멈춰 있는, 진공 속의 ‘나만의 시간’을 허하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으로부터 우리는 무한에 대하여, 환상에 대하여, 영원과 신에 대하여,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끝없는 사유를 허락받는다. 이것은 막강한 권한이다. ‘생각하는 나’와 ‘실존하는 나’가 일치하는 순간은 오로지 철학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때문에 그럴까. ‘일상’은 철학과 너무 동떨어진 단어인 양 여겨져 오고 있다. 일상은 ‘카이로스’가 되기 힘들다. 회사원은 회사원대로의, 대학생은 대학생대로의, 주부는 주부대로의 일상이 있고, 그것은 삶의 대부분을 잠식하기에 충분한 위력과 설득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저들을 반대로 설득하기 위해서 철학은 일상 이상의 감동을 줘야만 한다. 돈, 성공, 유흥 등이 줄 수 없는 단 하나의 감동. 그것은 반드시 효과적이어야만 한다.


  고리타분하기도 하고, 어떨 때에는 묵직한 깨달음을 주기도 하는 두꺼운 철학책들의 틈새에서 철학의 효과를 찾아내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니,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철학은 할 일이 있다. 두꺼운 철학책들의 난해한 문구가 아니라, ‘철학하기’라는 실천을 통해서라면, 분명 철학은 우리에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뛰어가는 우리에게 잠시 손을 내밀어 “나에게 시간을 조금만 주시오.”라고 말을 거는 일부터 시작해서, 저 위대한 철학의 아포리아들 속으로 우리를 집어넣어 하나의 문장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바로 ‘읽는 삶’이 아니라, ‘실천하는 삶’을 권유하는 철학이 지니고 있는 무궁무진한 위력이며, 기술사회의 오늘날에도 우리가 여전히 철학을 갈구해야 하는 까닭이다.


  “Stop!”이 적혀 있는 대중적인 철학책들은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 나는 성공을 위한 가이드북들보다는 이런 종류의 가볍지만 진중한 철학책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공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실존’이다. 그것은 존재의 전체이다. 이것이 잘 다져진 건물은 성공하지 못해도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토대부터 차근차근 만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철학이 제시하는 건축도안을 참조할 필요가 있는데, 세부적인 청사진과 롤모델은 제각각 다를지 몰라도 건축 방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프랑스의 대중적인 철학자 로제-폴 드르와가 쓴 『일상에서 철학하기』에는 앞서 말한 세부적 청사진과 롤모델들이 무려 101가지나 나와 있다. 그러나 사려 깊은 독자라면 책을 꼼꼼히 읽어본 후 101가지나 되는 곁가지들이 실은 몇 안 되는 굵은 가지들로부터 뻗어 나온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들 중 몇 개를 질문으로 거칠게 열거해보면 이렇다.


  “는 누구인가?” (이것이 확장되면 “우주(세상)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된다. 드르와의 책에는 ‘나’라는 존재의 실존적 체험에 관한 방법들이 가장 많이 소개되어 있다. 책의 중추를 구성하는 단어는 다름 아닌 ‘나’이다.)
  “순간영원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으로 “시간이란 무엇인가?”와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있다.)
  “낯섦익숙함은 무엇인가?” (이것은 “정상과 비정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진짜가짜는 무엇인가?”
  “배회란 무엇인가?” (우리를 ‘유동적 존재’로 만들어보는 질문이다.)
  “경계란 무엇인가?”


  드르와가 위의 질문들을 직접 던져놓은 것은 아니다. 그는 그저 우리에게 행동하라고 권유할 뿐이다. 철학은 우주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심오한 질문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여겨지곤 하는데, 사실 그 이면에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질문에 다가가는 모습도 있다. 드르와가 권유하는 행동은 소요시간, 도구, 공간 등이 의도적으로 마련되어 있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을 카이로스로 잠시 이탈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어렵다. 우리들 중 대부분은 카이로스를 통한 철학을 해본 적이 없고, 심지어 그러한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다. 어쩌면 우리는 부모의 보호 없이 야생에 던져진 유아와 같은 상태에 있는지도 모른다. 철학적으로 던져진 존재 말이다. 그러나 드르와가 제시하는 행동들은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할 수 있는 것인데 하지 않았고, 그것을 하면 우리가 원하는 가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드르와의 권유가 세계적인 인기를 누린 것이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애당초 이 책은 씁쓸한 실패를 맛봤을 것이다.


  제시된 방법들은 대체로 ‘나’라는 실존에 집중한 상태에서 주변을 낯설게 만들거나, ‘나’의 옛 기억들을 구성하는 익숙한 것들로부터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다. ‘나’를 해체하거나 ‘나’ 이외의 것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사유가 우주적으로 확장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허탈함과 충격을 의도적으로 경험하기도 한다. ‘나’에게 스스로 칼을 가져다댔다가 나중에는 상처를 스스로 위무(慰撫)하는 것이, 아마 이상하고도 쓸데없는 행동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앞서 철학의 스탠스가 매우 적극적이라고 했었는데, 다시 한 번 그 말을 강조해야 할 것 같다. 철학은 심지어 이런 사디즘적이며 변태적인 권유도 한다.


  “물의 무게 속에 당신 전체를 압축해 집어넣어보라. 오직 이 느낌에만 집중하라.”


  그러나 이 아픔 뒤에는, 고통의 순간 뒤에는 평온함이 찾아오게 된다. 물속에 들어가 하나도 빠짐없이 눌려버리고 터져버린 건 나의 몸이 아니다. 나의 근심이다. 근심은 생각인 주제에 우리의 몸을 곯아버리게 만든다. 따라서 철학은 생각을 어루만져 근심을 녹여버리고, 몸을 제 그대로 멀쩡하게 회생하도록 도와준다. 또한 철학은, 미드 애청자들이 시신을 검식하는 CSI의 배우들을 보고 열광할 때에 우리의 시선을 작은 새의 시체로 옮겨놓는다. 그리고 “오로지 현재만 있다.”라는 삶의 가치를 찾아내게 한다.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드르와에게서 동양철학의 향기를 느꼈을 것이다. 그는 실제 동양철학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대표적인 서양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동양철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불교나 노장(老莊)사상 등이 그러하듯 관점의 차이를 역설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만물이 손등과 손바닥 차이라고 주장하고, 장자는 광인(狂人)들을 사례로 들며 이 정상적인 세상을 순식간에 미친 세상으로 바꿔버린다. 철학자의 힘은 여기에 있다. 손을 뒤집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아기도 한다. 그러나 그 행동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 혹은 타인의 권유에 의해서만 발생한다. 쉬운 일도 목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귀여운 이 책의 표지에는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바꾸는 체험”이라는 문구가 있다. 나는 국문학도인 탓에 이런 문구를 보면 어쩔 수 없이 러시아 형식주의를 떠올리게 되는데, 사실 저 문구는 문학사적으로나 철학사적으로나 늘 특별한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그 반대편에는 어쩔 수 없이 불편하고 낯선 것들이 존재하게 된다. 만약 드르와의 권유대로 여러 번의 체험을 통해 우리가 반대편의 세상을 일상의 곁으로 끌어당길 수만 있다면 그 이후의 일상은 분명 놀라울 만큼 변해 있을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변할 것이고,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인가. 알 수 없다.


  드르와는 이러한 무거운 주제의 대화들을 ‘심심풀이 책’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설명해버린다. 얼마나 우습고, 또 우스운가. 그동안 삶에 대해 쩔쩔매던 우리들의 모습은. 드르와의 ‘심심풀이 책’은 우리의 삶을 기차여행으로 만들고, 철학을 ‘심심풀이 땅콩’으로 격하시킨다. 바로 이 격하로부터 우리는 철학의 힘을 느끼고, 위로를 받으며, 비로소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그렇다. 삶의 척추가 다시 기립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철학을 제외한 채로 걸어 다닐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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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8 11: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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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8 13: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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