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쪼가리 자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1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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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0

 

 

  첫째, 세상에는 착한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다.
  둘째, 착했다가 나빠지는 사람도 있고, 나빴다가 착해지는 사람도 있다.
  셋째, 그러나 착하고 동시에 나쁜 사람은 없다.

 

  동화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세상은 이렇다. 아이들은 “착하고 나쁜 사람”이라는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엄마, 저 아저씨는 왜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끌려가?” 아이가 물었다.
  “죄를 지어서 그래. 나쁜 짓을 했거든.”


  그런데 TV 채널을 돌리던 아이는 방금까지만 해도 경찰들의 인도를 받으며 후송 차량에 올라탔던 사람이 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나와 열심히 춤을 추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는 모습을 봤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아이가 말했다.

 

  “어? 엄마, 아까 잘못한 아저씨가 춤추고 있어.”


  어머니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건 나쁜 짓을 하기 전이야.” 정도로 손쉽게 둘러댈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는 겨우 그 정도의 대답을 듣고자 질문한 것이 아니다. 아이는 그가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물어본 것이다. 동화의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사람. 착했던 시절에 동시에 나쁜 짓을 해서, 겉보기에는 “착했다가 나빠진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


  아이는 부모가 들여다볼 수 없는 마음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혼란을 마주하고 아주 간단한 질문들을 던지며 의심해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착했던 사람이 나쁜 짓을 했었을까. 세상에는 착하고 동시에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닐까.


  ‘착하지만 나쁘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러나 아이의 질문이 비단 그의 것만은 아님을 나는 평생 상기하며 살 것이라 감히 다짐해본다. 어른이란 ‘착하지만 나쁜 것’에 대해 이미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그것을 잘 알고 있으리라 자신한다. 또한 대부분이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우리가 어떨 때에는 착하고, 또 어떨 때에는 나빠야 하는지를 잘 판단하는 것이지.”라고 조언할 것이다. 그들은 불안한 시간을 보낸다고 하면서도 실은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속설에 따르자면 여자는 그 믿음으로 아이를 키우고, 남자는 그것으로 아집을 키운다지.


  도덕의 문제는 끝나는 법이 없다. “착하지만 나쁘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원제 : Il Visconte Dimezzato)』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우리의 대부분이 아노미의 대양 위에서 여유롭게 인생을 즐길 때, 저 이탈리아의 작가는 17세기의 한 전쟁터에서 메다르도 자작을 두 동강냈다.


  소설은 짧고 아주 단순하며, 전하려는 메시지가 분명하고, 동시에 환상적인 그로테스크들이 수놓인 기괴한 직물과 같다. 칼비노는 착한 메다르도와 사악한 메다르도를 만들기 위해 그를 전쟁터로 데려가 (별 위엄 없는 황제로부터 ‘중위’로 임명받게 한 뒤) 투르크인들의 대포 앞까지, 그 코앞까지 끌고 갔다. 메다르도는 그곳에서 정확히 둘로 나뉘었다. 그리고 둘 모두 살아남았다. 사악한 메다르도는 들것에 실려가 막사의 의사들로부터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고, 다른 시체더미들 사이에 깔려 있었던 착한 메다르도는 두 무명의 수행자가 향료와 연고로 살려냈다.


  칼비오가 먼저 영지로 돌려보낸 건 사악한 메다르도였다. 그는 무슨 짓을 했을까. 아버지 아이폴로 자작에게 큰 실망과 허탈함을 안겨줘 결국 죽음으로 몰아갔고, 여러 죄목들을 만들어 사람들을 죽였으며, 방화를 일삼았다. 양어머니이자 유모인 세바스티아나에게 화상을 입혀 마치 문둥병인 것처럼 보이게 한 뒤 그녀를 내쫓는 장면은 악행의 압권이다. 메다르도 자작 때문에 마을은 긴장했고, 장인(匠人) 피에트로키오도는 고문 기구를 만들며 번뇌했다.


  “페스트와 기근”을 외치고 다니는 위그노교도 에제키엘레와 그의 무리들이 “왼쪽 병신”이라 부른 사악한 메다르도 말고, 착한 메다르도가 갑자기 나타났는데, 처음에 사람들은 악한 메다르도가 실은 이중성격의 소유자가 아닐까 의심했다. 스티븐슨의 ‘지킬박사’나 톨킨의 ‘골룸’처럼 말이다. 그러나 소설 속의 ‘나’가 친구라 여겼던 늙은 (무늬만) 의사 트렐로니는 우연한 기회이 두 메다르도가 모두 마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처음 착한 메다르도를 발견한 사람은 사실 ‘나’였다. ‘나’는 자신이 본 자직의 손이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임을 기억해냈으나 도무지 정리를 하지 못했다.)


  한 명의 메다르도가 한 일은 정확히 갈라진 몸처럼 도덕적으로도 정반대의 평가를 받았다. 착한 메다르도가 의사 트렐로니에게 마을 사람들을 치료해달라는 신호로 손수건, 달팽이, 닭들의 하얀 똥을 놓아두면 사악한 메다르도가 그것을 모두 망가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칼비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메다르도의 선악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악한 메다르도가 죄를 씌워 죽인 이들의 시체가 교수대에 매달려 있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계속 지켜보길 원했다.


  “처음에는 그 누구도 그것을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으나, 곧 그들이 만들어 내는 장엄한 광경을 발견했다. 우리들의 판단력도 여러 감정들로 잘게 부서져 그 시체들을 떼어 내거나 그 커다란 기계가 분해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33쪽)


  위그노교도들, 그 중 특히 에제키엘레의 아들인 에사우의 행동은 종교윤리가 제시하는 선악의 개념은커녕 의례조차 오래 전에 잊어버리고 오로지 그들만 잘 살면 된다는 안이한 의식이 어떻게 행동으로 드러나는지 보여준다. 착한 자작이 노새를 타고 그들의 집을 방문했을 때, 에제키엘레는 도덕적으로 살라고 조언하는 자작을 지겨워한다. 그리고 에사우는 사기를 친다.


  “에사우는 노새에게 가서 여물통을 빼앗고 노새를 발로 차서 노새는 조금씩 절뚝거리며 걸어야만 했다. 그는 여물을 원래 있던 데로 갖다 놓으려고 나머지를 숨겨 버렸다. 그들은 여물을 자기들 가격대로 팔 생각이었다. 그리고 착한 반쪽에게는 노새가 벌써 여물을 다 먹어 버렸다고 말했다.(101쪽)


  사악한 메다르도의 명령에 따라 고문 기구를 만들던 피에트로키오도의 혼잣말은 선악의 문제가 비단 메다르도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혹시 내 영혼에 사악함이 있기 때문에 잔인한 기계밖에 만들 수 없는 게 아닐까?(103쪽)


  칼비노는 이렇게 독자들을 ‘악함’으로 잠시 끌고 간다. 문둥병 환자들이 방탕하게 살던 곳으로 쫓겨난 세바스티아나는 착한 메다르도가 매일 자신을 찾아올 때마다 잔소리를 하면서 ‘비인간적인 선함’이 사람들을 충분히 질리게 하거나, 혹 선한 행동이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곤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게 됐다.


  “악한 반쪽보다 착한 반쪽이 더 나빠. (중략) 대포 포탄이 그를 두 쪼가리로 만든 게 천만 다행이지 뭐야. 자작이 만약 세 조각이 났다면 우리는 무슨 일을 겪었을지 알게 뭐람.(109쪽)


  우리는 세 조각이 아니라, 수 천 조각, 아니 수 만 조각으로 나눠진 존재이진 않을까 의심하게 된다. 너무 복잡하니, 조금 더 단순하게 생각해보려고 노력하더라도 지금의 우리는 아잇적의 간단한 이분법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인생의 경험이 축적되는 일은 우리가 이전의 생각보다 훨씬 잘게 쪼개진 존재라는 것을 알아가는 일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이른 까닭에 나는 칼비노가 파멜라와의 결혼을 빌미로 두 자작, 아니 메다르도 자작이 자신과 결투를 하도록 했을 때, 결국 자작을 네 등분으로 잘라버려 우리를 더 깊은 혼란로 내던져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칼비노는 놀랍게도 둘을 다시 붙여버렸다. ‘나’의 생각과는 달리 선상(船上)의사 트렐로니의 기술은 녹슬지 않았고, 트렐로니는 피범벅이 된 메다르도 자작의 반쪼가리들을 붙여 정맥과 살과 내장을 꿰매고 무려 1km나 되는 붕대로 감아 결국 자작을 살려냈다. 자작은 이전의 형체를 되찾았다. 그러나 ‘분리’의 경험을 가진 그였다. 칼비노는 전쟁터에서 메다르도를 두 동강냈지만 결국 그를 다시 붙였다. 1+1이 2가 아닌 2 이상의 숫자로 비약되는 즐겁고도 유쾌한 상상을 해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자작은 1+1이 그대로 1로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따라서 칼비노는 장자(莊子)적 질문도 가능하게 만든다.


  “한 때 나는 착했고, 또한 한 때 나는 사악했으니, 나는 착한가, 아니면 사악한가?”


  칼비노는 말한다. 착하고 사악한 것이 온전한 사람이다. 이를 모르는 사람은 현명해질 수 없으며, 자작처럼 올바른 통치를 할 수도 없다. 나는 이 간단한 메시지 하나를 손에 쥔 채 방문을 잠그고 남몰래 나의 선함과 나의 사악함을 만나고 싶었다. 그것은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세계를 살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제임스 쿡 선장과 함께 모험을 떠나는 늙은 의사 트렐로니에게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나’는 결국 “의무와 도깨비불만 가득한” 세상에 남아 ‘인간’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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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8 11: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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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8 13: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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