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크리스 임피 지음, 이강환 옮김 / 시공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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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3

 

 

  얼마 전, 영화 <콘택트(Contact, 1997)>를 다시 봤다. 지금 보기에는 약간 어설픈 컴퓨터그래픽과 다소 비약 있는 반전이 눈에 거슬리는 사람도 있겠으나, 사실 그보다는 감독이 관객들에게 심어주는 호기심, 그리고 자연스레 관객들이 받게 되는 질문이 더 중요한 영화이다. <콘택트>는 외계문명과의 조우를 꿈꾸는 열정적인 과학자들을 보여준다.


  영화를 다 보고, 나는 자석처럼 이끌려 영화가 시작하는 부분으로 돌아갔다. 극중 스파크(조디 포스터)의 아역을 맡은 지나 멀론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묻는다.


  “Could we talk to moon?”


  스파크의 질문은 목성과 토성으로 이어진다. 목성과 토성에 외계인이 살 확률은 영에 가깝다. 그러나 21세기는 어린 소녀의 질문을 더 이상 실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우주과학자들은 결코 그녀를 비웃지 않는다. 그들은 당장 관측과 조사를 시작할 것이다. 과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보이저 호가 목성과 토성을 지나갔다는 사실(각각 1979년 3월 5일, 1980년 11월 12일)을 알 것이다. 스파크는 심오한 과학적 질문을 던졌다. 외계지적생명체탐사, 소위 SETI와도 관련이 있다. (영화의 내용도 미국 정부의 지원이 끊긴 SETI가 사기업들의 투자에 의존하게 된 1995년 실제 상황을 모티프로 한다.) 조만간 지구형 행성에 관한 만족스러운 데이터파일들이 축적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스파크가 정말 하고자 한 질문은 이것이다.


  “Could we talk to mom?”


  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면서, 아버지는 아무리 큰 안테나라도 죽은 엄마가 있는 곳까지는 닿지 못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혹시 죽은 엄마와 무선으로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증명된 바가 없으므로 아직까지는 “없다.”고 대답해야만 한다. 달, 목성, 혹은 토성의 누군가와 통신을 할 수 있다는 상상과 죽은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상상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후자의 것은 철학과 종교의 영역이다.


  과학은 ‘죽은 엄마와의 대화’를 위한 어떤 논리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간혹 과학의 무능력함을 논하곤 한다. 무엇의 무능력함일까? 과학에게는 억울한 일이겠지만, 인류가 지금껏 추구해왔던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답변을 과학은 내놓지 못한다. 대신 과학은 “우주에는 공짜가 없다.”, “자연은 우리에게 의미를 주지 않는다.”, 혹은 “우리는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다.” 등 생소한 결론을 잇달아 발표했는데, 사람들은 이런 답변들의 차가운 온도에 화들짝 놀라 뒷걸음치곤 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과학의 전부일까? 물론 아니다. 과학도 철학적인 질문들에 답하는데 성공했다. 과학의 방식대로 달성한 성공이었다. 과학의 성공적인 답변들은 세계의 인식을 바꿔놓기에 충분했고, 앞으로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다.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시작은 가장 궁극적인 탐구대상 중 하나이다. 과학은 이 질문에 답한다. 그리고 이것은 크리스 임피가 쓴 『How It Began』의 한국어 번역본 제목이기도 하다. 임피는 이 책에서 과학이 궁극의 답을 찾기 위해 어떤 힘겨운 과정을 밟아왔는가를 소개한다. 그는 복잡하고 수많은 과학적 정보들을 다루면서도 대중들이 숨 쉴 수 있는 고도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노련한 조종사이다.


  이 책은 분명 흥미롭다. 그러나 지구에서 다중우주에 이르는 긴 여정을 감행하면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질문은 만만치 않다. ‘세상의 시작’은 아직도 우리가 분명하게 밝혀내지 못한 문제이다. 천재적이고 헌신적인 수많은 과학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는데도 대중들은 아직도 이 문제를 종교와 철학으로 다루는 것에 익숙하다. 복잡한 데이터들과 씨름하느니, 차라리 그 편이 쉬운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스티븐 호킹, 칼 세이건, 미치오 카쿠, 빌 브라이슨(엄밀히 말해 빌은 과학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비전공인 과학을 책으로 다루기 위해 그가 한 엄청난 양의 공부는 세인들의 혀를 내두르게 하기 충분하다. 그의 책을 국내에 소개한 이덕환 교수에게 들은 건데, 빌은 과학책 한 권을 쓰기 위해 시중에 나온 과학책을 무려 3백여 권이나 섭렵했다고 한다. 빌을 소개하는 강의에서 이 교수는 우리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주기도 했다. 대학생이란, 조금씩 맛보기로 공부하고 나서 뭔가 아는 척 하기 좋아하는 부류이니까.), 그리고 임피와 같은 대중적인 저자들의 노력은 전 세계에서 큰 환영을 받아왔다.


  임피는 어려운 과학을 대중의 곁으로 잡아당겨 내렸다. 독자들은 역으로 그 긴 실타래를 잡고 높은 곳까지 놀라가게 된다. 독자마다 ‘과학의 고산증’을 느끼기 시작하는 고도는 다를 것이나, 장담하건대 나처럼 교양으로, 혹은 초보적인 호기심으로 과학책을 들춰보는 독자들이라면 한 번 쯤 고산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임피는 과학의 위대함이 아니라 과학의 겸손함을 소개하는데 더 주력한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며 우주과학에 대해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알아가게 되면서 독자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들은 우주과학이 비춰주는 놀라운 세계로부터 생경함, 두려움, 경외감 등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그건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세기동안 우주과학은 많은 것들을 밝혀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훨씬 많은 것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물리학과 수학이 우주의 공통분모임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우주는 지극히 낯설다. 우리가 시를 쓰기 위해 올려다보는 밤하늘은 과학자들에게 낯섦 그 자체이다. 그들은 매일 익숙한 성운과 별자리를 반복적으로 관측하지만 늘 새로운 데이터들과 마주한다.


  “자연은 우리를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현상으로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데이터를 수집하게 되었을 때, 과학자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므로 상당히 당혹스러워한다. 그 중에는 애써 부인하려고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과학의 힘은 데이터가 정직하고 정확하게 수집된 것이라면 반드시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결론을 뽑아내는 것에 있다. 낯선 것에 대한 도전적인 접근이다. 이러한 과학의 성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 과학자들은 냉혈안일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데이터들과 엉켜 살면서 이런 말을 한다. 베라 루빈의 술회이다.


  “우리는 유치원을 졸업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 수준일 뿐이다.”


  겸손함의 대명사인, 이와 비슷한 뉴턴의 명언(“나는 진리의 큰 바다를 앞에 둔 바닷가에서 한 개의 조개를 주운 것에 불과하다.”)을 떠올린 이도 있을 것이다. 루빈은 “초등학교 3학년 수준”이라 했지만 사실 인류의 우주과학기술과 그간의 연구 성과는 그야말로 ‘초고속 압축 성장’을 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 성장속도는 훨씬 빠를 수 있었으나, 늘 예산이 문제였다.


  사람들은 이 성장을 보고 또 한 번 오해를 하게 된다. 지구를 세상의 중심이라 굳게 믿었던 시대의 사람들처럼 그들은 혹시 우리가 우주의 모든 비밀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요컨대 ‘주인’이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러나 임피는 우리가 ‘우주의 주인’은 아니라고 못 박는다. 그저 ‘충분히 똑똑한 존재’이면 족하다는 것이다. (보이저1호에 있는 금속판에는 임피가 말한 겸손함이 인사말로 새겨져 있다. 금속판의 함의는 우리 이외의 지적문명에 대한 존경이다.)


  많은 독자들과 마찬가지도 나 역시 어떤 낯선 책을 접하게 되면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고 해야 옳다. 책이 낯설다는 것은 평소 생각하지 않는 주제가 실려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너무 많은 정보들이 실려 있어 일반적인 의미를 도출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과학책은 두 경우 모두에 해당할 수 있다. 이는 과학책의 저자라면 반드시 생각해봐야 하는 위험이다.


  다행히도 노련한 임피는 위험을 현명하게 피해갔다. 낯섦의 충격을 익숙한 비유들로 상쇄시켰고, 독자들이 의미를 도출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아예 의미심장한 문장들을 여기저기에 배치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중 하나의 의미에 집중하게 되었다. 조금 에둘러본다.


  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여러 의미들 중에 가장 비근하게 논의되는 건 아무래도 종교와의 관계일 것이다. 나는 진화론을 읽었다. 다윈의 원서를 읽진 못했으나 최재천과 리처드 도킨스라는 훌륭한 저자들의 도움을 받아 “진화론에 발은 담가봤다.”는 - 말 그대로 - ‘거드름’ 피울 정도는 된다. 매트 리들리도 읽었는데 그는 DNA에 관한 세계적인 저자이다. 결국 나는 영아 때부터 가톨릭 신자였던 나의 과거와 단절된 채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러나 무신론은 과학의 영향과는 무관한 또 하나의 ‘믿음’인 경우가 있다. 과학에 대한 맹신을 ‘과학(지상)주의’라고 부르는데, ‘주의(ism)’라는 단어만 봐도 알겠지만 이건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공정함을 추구하는 독자라면 본인이 과학과 종교가 앉은 거대한 시소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두 세계가 지닌 가치를 한 번씩 곱씹어봐야 한다. 진화론과 우주과학을 읽고, 그와 동시에 성경, 쿠란, 우피나샤드, 불경 등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 모두에서 가치를 찾는 작업을 하다보면 궁극에 대한 인간의 지고지순한 탐구 욕망, 그것 하나를 공통적으로 도출하게 된다.


  이 확실한 욕망은 인간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인간이 던진 질문은 우주의 끝, 혹은 신의 근처까지 먼 여행을 하고 휘어져 인간에게 돌아온다. 인류의 역사는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매번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피드백을 받는, 의외로 단순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패턴이 바로 과학과 종교이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돌아오는 답은 다를 수 있지만 그 답이 의미하는 욕망은 여전히 하나이다. 이 패턴들에서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다. 패턴을 유지하도록 하는 ‘욕망’이 중요한 것이다.


  과학책과 종교 경전을 나란히 놓고 그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는 임피가 이 책의 마지막에 남겨둔 멋진 메시지를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우주가 영원하다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보잘것없는 자신에 대해서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우리는 고대의 진리를 상기해야 한다. (중략) 부처님은 모든 것이 변화한다고도 말했다. 오늘 진리인 것이 내일은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과학자들이 우주에 대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임피는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답을 쫓는 과학의 놀라운 역사를 소개하면서도 그 마지막에 가서는 불가피한 불확실성을 토로한다. 겸손은 이렇듯 ‘역전’을 동반한다. 한껏 흥겹게 그간의 지식들을 풀어놓고 난 독자가 “우리의 여행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라고 했을 때 독자들이 느끼는 순간적인 감정. 그것은 종교를 대할 때, 우리가 신의 앞에 자신을 세웠을 때에 느끼는 무한한 겸손과 결코 다르지 않다.


  과학책과 종교 경전은 읽는 이의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고개 숙인 순간부터 우리는 욕망을 직시한다. 우주의 끝으로, 혹은 신에게로. 임피가 책의 말미에 불교와의 에피소드를 실은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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