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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그리워지는 것들


이기철


나는 이 세상을 스무 번 사랑하고
스무 번 미워했다
누군들 헌 옷이 된 생을
다림질하고 싶지 않은 사람 있으랴
유독 나한테만 칭얼대는 생
돌멩이는 더 작아지고 싶어서 몸을 구르고
새들은 나뭇잎의 건반을 두드리며
귀소한다

오늘도 나는 내가 데리고 가야 할 하루를 세수시키고
햇볕에 잘 말린 옷을 갈아입힌다
어둠이 나무 그림자를 끌고 산 뒤로 사라질 때
저녁 밥 짓는 사람의 맨발이 아름답다
개울물이 필통 여는 소리를 내면
갑자기 부엌들이 소란해진다
나는 저녁만큼 어두워져서는 안된다
남은 날 나는 또 한 번 세상을 미워할는지
아니면 어제보다 더 사랑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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넝마 같은 삶이다. 헌옷이 된 생을 다시 펴서 주름없이 다림질하고 싶어지는 삶이란...
"유독 나한테만 칭얼대는 생"
설마 그렇지야 않겠지만 타인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아니 타인의 삶을 깊이 들여다볼 마음의 여유가 생길 사이 없을 만큼 넝마가 된 일상의 순간에 생은 나에게만 칭얼대는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래도 어쩌겠니? 네가 아픈 것은 나도 알지만, 지금은 내가 더 아픈 것을...

시인은 지치고 쓰라린 마음을 끌고 집으로 돌아와 앉는다.
일순간 삶의 구체적인 얼굴들이 소란스럽게 달려든다.
시인은 그 순간 "나는 저녁만큼 어두워져서는 안된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왜냐하면 내일 나는 다시 이 세상을 스무 번 사랑하고, 또 다시 스물 한 번 미워해야 하니까...

슬프게도 혹은 기쁘게도 내일은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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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09-01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이 삶을 몇번을 사랑했고 몇번을 미워했는지....
유독 나한테만 칭얼대는 생....이라는 구절이 오래도록 떠나지 않는다...

겨울 2006-09-01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낡고 초라한 집을 쓸고 닦아 광을 내고
헌 옷도 빨아 탁탁 털어 햇볕에 널어놓고
하는 김에 생채기 투성이 생도 반듯하게 다림질 하기
뭐, 좋네요.

잉크냄새 2006-09-02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올과 몽상님 / 너덜너덜하고 쭈글쭈글한 생, 한번 다려볼까요...ㅎㅎ

마음을데려가는人 2006-10-28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림질하고 싶다는, 발상이라. 멋지네요.^^

잉크냄새 2006-11-03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님/ 그쵸? 시인의 발상이란 이토록 멋지고 신비스럽기까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