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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 쉬나크)

울음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한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래서, 가을날 비는 처량히 내리고, 그리운 이의 인적은 끊어져 거의 일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옛 궁성, 그래서, 벽은 헐어서 흙이 떨어지고, 어느 문설주의 삭은 나무 위에 거의 판독하기 어려운 문자를 볼 때.

몇 해고 몇 해고 지난 후에,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가 발견될 때.
그 곳에 씌었으되,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여, 너의 소행이 내게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가져오게 했는가..."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혹은 하나의 허언(虛言), 혹은 하나의 치희(稚戱), 이제는 벌써 그 많은 죄상을 기억 속에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때문에 애를 태우신 것이다.

동물원에 잡힌 범의 불안, 초조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철책가를 그는 언제 보아도 왔다갔다 한다.
그의 빛나는 눈, 그의 무서운 분노, 그의 괴로운 울부짖음, 그이 앞발의 한없는 절망, 그이 미친 듯한 순환, 이것이 우리를 말할 수 없이 슬프게 한다.

횔테를린의 시장(詩章), 아이헨도르프의 가곡. 고구(故舊)를 만날 때, 학창 시대의 동무 집을 심방하였을 때, 그리하여 그가 이제는 우러러볼 만한 사람의 고관 대작이요, 혹은 돈이 많은 공장주의 몸으로서, 우리가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 시인밖에 못되었다는 이유에서, 우리에게 손을 주기는 하나, 그러나 벌써 우리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같이 보일 때.

포수의 총부리 앞에 죽어 가는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의 향기, 이것은 항상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의 늙은 나무가 선 내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흘러오는 고요한 음악.

그것은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 밤에, 모래 자갈을 고요히 밟고 지나가는 사람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한 곡절의 쾌활한 소성(笑聲)은 귀를 간질이는데, 그러나 당신은 벌써 근 열흘이나 침울한 병실에 누어 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아나는 기차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것은 황혼의 밤이 되려 하는 즈음에, 불을 밝힌 창들이 유령의 무리같이 시끄럽게 지나가고, 어떤 예쁜 여자의 얼굴이 창가에서 은은히 웃고 있을 때.

찬란하고도 은성(殷盛)한 가면 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대의원 제씨(諸氏)의 강연집을 읽을 때.
부드러운 아침 공기가 가늘고 소리 없는 비를 희롱할 때.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그리하여 문득 "여기 열 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는 누워 있음."이라 쓴 묘지명을 읽을 때,
아, 그는 어렸을 적의 단짝 동무의 한 사람.

날이면 날마다 언제나 도회의 집과 집의 흥미 없는 등걸만 보고 사는 시꺼먼 냇물.
첫길인 어느 촌 주막에서의 외로운 하룻밤.
시냇물의 졸졸 거리는 소리.

곁방 문이 열리고 속살거리는 음성이 들리며,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칠 때, 그 때 당신은 난데없은 애수를 느낄 것이다.

날아가는 한 마리의 창로(蒼鷺). 추수 후의 텅 빈 밭과 밭.
어렸을 적에 산 일이 있던 조그만 지방에, 많은 세월을 경과한 후에 다시 들렀을 때.

아무도 이제는 당신을 아는 이 없고, 일찍이 놀던 자리에는 붉고 거만한 옥사들이 늘어 있으며, 당신의 본가이던 집 속에는 알 수 없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데, 왕자같이 놀랍던 아카시아 수풀은 베어지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그러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뿐이랴?

오뉴월의 장의 행렬.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보랏빛과 흑색과 회색의 빛깔들.
둔한 종 소리.

바이올린의 G현.
가을 밭에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진 비둘기의 털.
자동차에 앉은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흘러 다니는 가극단의 여배우들.
줄에서 세 번째 떨어진 광대.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처녀의 가는 손가락이 때 묻은 서류 속에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될 때.
만월의 밤 개 짖는 소리.
크누트 함순의 이삼절.
어린아이의 배고픈 모양.
철창 안에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무 위에 떨어지는 백설.

이 모든 것이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초추의 양광이 감잎에 떨어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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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5-09-08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수의 총부리 앞에 죽어 가는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의 향기, 이것은 항상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의 늙은 나무가 선 내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흘러오는 고요한 음악."
이 구절을 아직도 조금 외우는 것은 국민학교 시절 펜글씨 교본에서 가장 많이 연습하던 문구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무엇을 느껴서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 이후 연습장에 아무 생각없이 꽤나 적곤 했다.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와 서정윤의 "홀로서기"와 더불어 무의식적으로 끄적이던 구절이다.

2005-09-08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9-09 0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5-09-09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 저 뜸하지 않았다고요....글을 올리지 못해서 그렇지 여기저기 파닥파닥 날라다녔답니다...
속삭님 / ..........................

2005-09-09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5-09-09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산을 잘 못해서 그러는데요, 이 숫자에 몇 명이 더 와야 만명이 되는건가요?

109990


플레져 2005-09-10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잉크냄새님.

910000


2005-09-11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9-12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이올린의 G현.
이 소리가 슬픈가 보군요...


잉크냄새 2005-09-12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 음...그럼 오늘부터 대청소 시작이군요. 슬퍼지려 하기 전에 끝내세요.^^
플레져님 / 영광의 숫자를 두번이나....감사해요...
속삭님 / 그래야죠...노력해보겠습니다....
이카루님 / 바이올린의 G현보다 더 슬픈 것이 우리나라의 퉁소가락이 아닌가 싶네요. 하도 전설의 고향을 봐나서...ㅎ

icaru 2005-09-16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하하하하하...전설의 고향을 봐놔서...역시 잉크냄새 님 정서랑...여그짝이랑 찌찌뽕이여...

잉크냄새 2005-09-16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 그죠...전설의 고향 세대만이 누릴수 있는 찌찌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