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
조은 지음, 최민식 사진 / 샘터사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사진작가 최민식의 사진을 처음 접한 것은 나태와 태만이 춘곤증처럼 엄습해오던 올해 어느 봄날 오후였다. 한팔과 한쪽 다리 대신 빈 옷자락을 펄럭이며 정면을 향해, 세상을 향해 외발로 힘차게 뛰어나오는 청년의 모습은 졸음을 한방에 날려버릴만큼 강렬한 느낌이었다. 절망이나 체념의 잔상들이 조금이라도 꼼지락거리면 남극의 차가운 얼음물을 정수리에 사정없이 쏟아부은듯 앳된 청년의 표정과 왼편에서 펄럭이던 빈 옷자락이 눈앞에 떠오르곤 했다. 의식적으로 그 사진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그가 다루는 사진 소재의 대부분은 소외되고 서글픈 일상의 모습이었다. 6.25 직후 사진을 찍기 위해 거리로 나선 그가 마주친 장면은 우리 민족의 참혹함, 비참함 그 자체였다. < 이들의 슬픈 모습이 카메라 앵글을 통해 나의 머리에 읽혀지고 또 가슴을 두드리는 멍으로 전해져 왔다 >는 그의 말처럼 그의 카메라 앵글을 통해 그의 망막에 읽혀지는 인물들은 단순한 피사체가 아닌 하나하나의 처절한 삶이었다. 비참하고 서글퍼도 차마 얼굴을 돌리지 못하는, 아니 돌려서는 안되는, 정면으로 응시하고 보듬어야할 우리 자신의 자화상과도 같은 모습들이었다. 사진을 찍는 작업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그의 말은 가진자의 배부른 소리가 아닌 진정한 울림이 있는 말이었다.

그의 사진은 유독 먹는 사람들의 사진이 많다. 양재기에 머리를 깊숙이 숙이고 국수를 먹는 소녀의 모습, 뒤에 들쳐업은 아이를 옆구리로 끌어당겨 국수를 먹이는 어머니, 가슴을 드러낸 어머니의 앞에 길게 목을 빼고 젖을 빠는 동생을 업은 누나의 모습. 인간의 가장 기본 욕구인 식욕마저 채우기 힘든 그들에게 판도라 상자속의 희망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설픈 희망이 도리어 더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인간을 나아가게 하는 것은 희망만이 아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만큼 어둡고 불확실한 희망일망정 그 희망함에 대하여 나아가도록 만드는 것은 인간의 의지이다. 그는 그런 인간의 삶에 대한 의지를 담아내고자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을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사진에 설명을 덧붙인 조은 시인의 글이다. 글의 완성도에 대하여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몇몇 구절에서 사진 테두리를 둘러싼 굵은 검은선처럼 왠지 어색하게 다가왔다. 위대한 작가의 작품속에 담겨진 메세지를 전하려는 시인의 노고에 머리숙여 찬사를 보내면서도 삶은 때론 여백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수 있다는 말은 하고 싶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여우 2004-11-09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적립금 모아서 이 책 살 겁니다.^^

sweetmagic 2004-11-09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죠 ? 그 선 거슬리죠 ?? 여우님 이 책 아직 안 사셨어요 ??

어머머 웬일이야 웬일 ! ㅎㅎ

로드무비 2004-11-09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추천이오!

서글프고 누추한 일상......가슴이 에입니다요.

sweetmagic 2004-11-10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책은 빌려 드릴수 있어요 ~ ㅎㅎ

잉크냄새 2004-11-10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일이니, 웬일...제 서재는 현금대출 및 물물교환은 금지입니다요.^^

로드무비님. 가슴이 에이는 사진이지만 왠지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지는 사진이죠.추천 감사합니다.

icaru 2004-11-10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최민식....일전에 간첩 신고가 들어와서...경찰서 출입을 자주해야 했다던...일화가 기억나네요~

미네르바 2004-11-10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메라 앵글에 잡히는 피사체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냐, 누가 바라보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최민식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진지한 삶이 되고, 예술이 되나 봅니다. 실은 저도 저 책 안 읽었는데... 님이 쓰신 글을 보니 보고 싶어지네요.

잉크냄새 2004-11-11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사진이나 그림을 보는 눈이 없는데 유독 최민식의 사진에는 애착이 가는 끈끈한 그 무엇인가가 느껴지더군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의 인연에 감사하고 있다는 늙은 노작가의 말이 참 따뜻하다고 생각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