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image.aladin.co.kr/product/52/61/coveroff/8931004826_1.jpg)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고궁. 그 고궁의 벽에서는 흙덩이가 떨어지고 창문의 삭은 나무 위에는 "아이세여, 네 너를 사랑하노라......" 라는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글귀가 씌어 있음을 볼 때.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가는 한 마리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의 향기. 이 향기는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 노목이 섰던 나의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동 묘지를 지나갈 때. 그리하여 문득 " 여기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 잠들다" 라는 묘비명을 읽을 때. 아, 그녀는 어린 시절 나의 단짝 친구였지.
------------------------------------------------------------------------------------
이 구절을 아직도 어느 정도 기억함은 국민학교 시절 학교 대표로 펜글씨 대회에 출전하면서 수도 없이 써내려간 구절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문학 작품의 구절들을 써내려갔지만 국민학교 4,5 학년의 나에게 가장 인상깊게 남은 구절은 안톤 슈낙의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이 구절들이었다. 아쉽게도 지금 거의 완벽히 기억하는 것은 "국민 교육 헌장"이다. 대회 주제는 언제나 "국민 교육 헌장"이었으니까 아마도 가장 많이 썼기에 머리보다 손이 기억하는 모양이다.
이 구절을 오랫만에 다시 만났다. 중국 운남성 샹그릴라(香格里拉,中甸)의 어느 게스트 하우스의 대부분이 중국어 책인 책장 속에 부끄러운듯 꽂혀있는 책을 집어 들어 첫장을 펼친 순간 기억은 그렇게 다가왔다. 세번째로 떠난 배낭 여행 마지막 여행지에서 만난 글귀가 그 시절의 모습과 감성을 아스란히 떠올린다. 고도 3400미터라고 느끼기 어렵게 따스한 햇살이 설산을 등지고 쏟아지는 테라스에서 반복해서 읽고 있다. 아마 시간이 흘러서 기억하는 구절은 오늘 읽은 구절이 아닌 그 시절 손이 기억해버린 저 문구들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