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즐겨찾는 서재에 등록된 페이퍼를 보고, 나도 똑같은 글 써보자는 생각을 했다. 하루키하면 4천만 국민의 필독서이고, 일본보다 더, 어쩌면 세계에서 최고로 하루키를 사랑하는(그러니까 길거리에서 만나면 그토록 아는 척을 하지) 대한한국의 시민 아니던가. (뭐,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작가라고 대놓고 아는 척은 못해도 가슴으로부터 많이 빚지고 있는 작가라고는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거야.^ ^)

나는 아주 늦게 하루키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첫번째 책은 <상실의 시대>, <슬픈 외국어>였고 이어서 <노르웨이의 숲>(김난주 번역, 한양출판), <먼 북소리> 그리고 그 즈음에 <태엽감는 새>를 읽었다. 그 뒤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두 번씩 읽었고(이 때 다시 한 번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다), 그 전인가 그 뒤인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을 대충 읽었다.

물론, 그 후로도 독서는 계속되어 <빵가게 재습격>, <무라카미 라디오>, <또하나의 재즈에세이>, <하루키가 내 부엌으로 걸어들어왔다>(이건 동호모임에서 펴낸 책이지만), <해변의 카프카>를 출간과 동시에 실시간으로 독파해갔다.

하루키는 단편과 장편이 굉장히 다른 작가다. 보통 단편을 잘 쓰면 장편을 못 쓴다든지(성석제 케이스), 장편을 잘 쓰면 단편을 못쓴다(황석영 케이스). 그런데, 하루키는 단편에서는 재기발랄하며 깜찍한 모습을 맘껏 과시하고-정말 나이를 모르겠다-, 장편에서는 말할 수 없이 외롭고, 그러면서도 따듯하고, 관계를 갈구하는 고독함과 알듯 모르듯 기묘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기묘함이 끝내 마음을 다 잠식하고야 만다.

내 생각에 그가 제일 못쓰는 글은 '기행문'이 아닐까 한다. 본인은 여행을 매우 즐기는 편이지만, 산문의 형식이 아닌 '순수한' 여행기의 경우 거품없는 맥주처럼 허탈해지곤 하니까. 그건, 하루키의 글이면 쓰는 족족 출판하려 드는 출판사 탓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어쨌거나, 늦게 배운 도둑질 밤새는 지도 모르고 시간날 때마다 틈틈이 하루키를 탐식해왔다. 그리고, 나는 하루키에게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 선사했던 것과 같은 고독과 처절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정언명령,  그 명제에 충실하기 위해서 최선을 대해서 자신을 돌보는 따듯함 같은 걸 느꼈다.

이런 느낌을 <20세기 소년>에서도 받았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켄지 무리. 이들은 혼자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고독하긴 마찬가지고 우물에 빠진 것같은 난감한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버림(죽임)으로서 새 것을 얻는다(죽어서 산다). 하루키나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나, 우라사와 나오키는 나에게는 모두 같은 과(科)다. 죽어서 산다.... 그들이 주는 느낌은 이 비슷하다.

그러나 하루키가 유달리 내 마음에 남는 것은, 그가 마지막 순간에 소설을 쓰기 시작해 지금까지도 쓰고 있다는 사실, 이것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는 소설을 쓴다'는 사실이 너무나 다행스럽다. 하루키는 많은 일을 겪었고 그래서 죽었지만, 지금은 살아서 글을 쓰고 있다. 하루키의 글(장편)은 먼 과거로부터 나에게 보내는 송출 신호인 것이다. 저 우물 속에서 그는 나에게 '나는 오늘도 살아있어'라고 메세지를 보낸다. 나에게 하루키 책은 그런 것이다. 그가 살아있다는 메시지, 정성을 다해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메시지, 그것은 참으로 고맙고 든든하다.

장편이 이러하다면, 하루키의 단편(그리고 산문)은... 그의 현재다. 현재 그는 재기발랄하고 귀엽다. 가끔 패스트푸드점을 습격하고, 쇼핑을 하고, 버섯 오믈라이스를 해먹고, 위스키를 찾아 여행을 떠나며 명랑한 토끼처럼 산다. 현재란 시간에 정박해 있는 하루키는 충분히 행복하다. 그러니, 나 또한 행복하다.

하루키의 과거가 현재와 만날 때는 <슬픈 외국어>처럼 좀 똑똑한 산문집일 때. 그다지 감상적이지 않을 때다. 그럴 때 그는 무척 명석해진다. 과거에 그러했듯이.

나에게 하루키는 이렇게 비동시적이다. 나는 하루키를 읽으며 3개의 시간대를 통과한다. 어느 날은 과거로, 오늘은 현재로, 내일은 과거가 현재와 만나는 시간 속으로... 그래서 하루키에게서 나를 떼어놓지 못하겠고, 여러 모로 배울 점이 많아 두고 두고 참고가 된다. 하루키라는 사람이, 때론 괴물처럼 여겨지는 이유기도 하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박예진 2004-01-28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겨찾는 서재에 등록된 페이퍼라고 하셨는데.^^
그 서재란 어디일까요.
멋지네요.^ -^ 페이퍼 제목이 감명깊어서 눌렀는데. 제 서재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자주 들러볼게요.

요다 2004-01-28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이 다른 사람 페이퍼란 소린 아니고, ;;
다른 이의 페이퍼 제목을 빌려서 제 생각을 써 본 건데요. 그 사람의 글이 있는 곳은 '나름대로 서재 꾸미기'라고 주소는 www.aladdin.co.kr/yerin이랍니다.
방문해주셔서 감사해요. :)

플라시보 2004-01-29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하루키의 책 중에서 저는 님이 재미없어 하신 기행문인 위스키 성지 여행과 우천 염천도 재미나게 보았던것 같습니다. 뭐 다소 하루키니깐 하는 부분이 작용했음을 부정하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참. 그리고 언더그라운드도 재미나게 읽었습니다.(절대 재미날 내용은 아니지만) 님의 말처럼 하루키는 장편과 단편이 정말 다르면서도 각각의 색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단편중에서는 치즈케잌모양을 한 가난과 세라복을 입은 연필은 머리속에서 사라지질 않습니다.^^

요다 2004-01-30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아요. <빵가게 재습격>에는 빗방울이 튀는 듯한 청아하고 예쁜 표현이 많아서 밑줄을 좍좍 그어가며 읽었더랬죠. '세라복을 입은 연필'.. 얼마나 감탄했었는지. ^ ^ 이런 느낌을 함께 받는다니 재밌고 기뻐요.
 

나에게는 나쁜 습성이 있는데, 남에게서 빌린 책을 거진 3~4개월씩 묵혔다가 좀 죄스런 마음이 들면 꺼내 읽는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천재 유교수의 생활>을 한 5개월 묵혔다가(처음 2개월은 회사 컴퓨터 위에서, 다음 1개월은 책 박스에 담겨서, 마지막으로 집으로 옮겨와 2개월을 폭 삭혔다) 새해도 되었는데 그만 읽고 돌려주자는 심산으로 제10권을 짚어들게 되었다.

변명이 아니라, 진짜로(오오.. 나는 자기합리화에 강한 '염소자리'가 아니어요. ㅠ.ㅠ) <천재 유교수의 생활>을 한 권 읽으면 말 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와 다음 호를 이어서 읽을 수가 없다. 일종의 경건한 의식을 행하는 것처럼, 천재 유교수가 더 생각나지 않을 때까지 마음을 식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음을 식히지 않고서는 천재 유교수를 볼 수 없다는, 이 괴변으로 나는 1권부터 10권까지 읽는데 거의 4개월을 보냈다. 그동안 만화책 주인에게는 단 9권만 돌려준 채. 아직 7권의 책을 돌려주지 못했다. 그러나 고맙게도 천재 유교수를 빌려준 이는 나에게 책을 가져오라는 독촉을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이가 얼마나 천재 유교수를 아끼고 사랑하는지. 낱권마다 빳빳한 투명포장지로 정성스럽게 포장한 것이 그 증거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런데도, 가슴에 철갑을 두른 것인지 나는 여태 만화책을 돌려주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해가 바뀌었고, 그이는 아직까지도 책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 

나는 그이가 언제 '책 좀 줘요' 할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견딘다. 이럴 거면, 첨부터 유교수를 사서 보는 것이었는데 어쩌다가 빚진 채무자 심정으로 천재 유교수와 이 책을 빌려준 그이를 대해야만 하는 것인지. 그러면서도, 유교수에 대한 예의를 차리느라 감격 먹은 심장을 달래야 하는 이 '천연덕스러움'은 어찌하면 좋을지.

연휴기간에 분발하여 남은 7권 중에서 다섯 권을 읽었으니... 조금만 가슴을 식혔다가... 얼른 마저 읽어야겠다. 지금 책을 빌려준 이에게 어떤 보상을 해야할까 생각하는 중이다. 나의 이 '만만디' 체질은 어쩔 수 없으니... 간식거리라도 안기며 애교를 떠는 수밖에. (시간이 지날수록 새 만화책을 사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든다. 아... 양심의 소리에 따르자니, 지갑이 우는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노희경의 드라마, '거짓말'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매니아적 명성만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새 드라마가 시작된다곤 했지만, 애써 챙겨볼 생각도 기대도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어제 저녁 6회를 시작으로 나는 '노희경'과 접속했다.

지금까지 본 드라마 중에서 베스트셀러 극장이나, 특집극을 빼고 가장 기억에 남는 TV 극본은 '네 멋대로 해라'이다. 청춘의 나날을 스피드하고 감각적으로 표현하기도 했지만 삶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그 모든 것을 돋보이게 했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너무나 잘 줄타기했기 때문에 좋아한다.

어제 '꽃보다 아름다워' 6회를 보면서 두 번 울뻔 했다. 2번 시도에 성공은 마지막 한 번뿐이었지만, 이런 드라마가 있다는 게 무척 흥분됐고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방으로 이동해 인터넷으로 1,2회를 연달아 시청했다.

다소 '노희경스러운' 멘트가 반복되긴 했지만 그래도 참 쫀득쫀득한 극본이다. 대사가 힘이 있어서 삶의 무게를 잘 버틴다. 고두심의 그 순진한 연기하며, 배종옥의 악악대는 목소리 연기, 한고은의 쿨한 커리어 우먼 연기는, 금방 마음을 꾀어가게 돼 있다.

나는 사랑이 참으로 하기 어려운 것임을 '연애'를 통해서 알게 됐다. 아무리 이해하고, 더 많이 사랑하려고 해도 내 마음을 어쩌지 못해서 또는 '이거 바보짓 아니야?' 하는 스스로에 대한 검열로 부대끼고 나풀거린다. 그런데 온갖 드라마에서 사랑은 서로 확인만 되면, 그보다 더 행복한 게 없고 그보다 더 짜릿한 게 없다는 듯 그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랑받는 게 아니야' 같은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하게 되거나 또는 '아니, 이게 무슨 사랑이야?' 하고 되묻는 초등학교 수준의 사랑학 개론을 품게 되었다(아직도 내 안에는 이런 환상이 많다).

최소한 노희경의 드라마는 그런 여지가 없다. 가족은 말할 수 없이 까다로운 파트너고, 따뜻할 때보다 괴로울 때가 더 많고, 피붙이보다 생판 남이 더 내 맘을 잘 알아줄 수도 있다는 걸 분연히 떠들어댄다. '아, XX 가족이 별 거냐? 응, 별 거야?' 이러면서도 '그래도 마음이 쓰여.' 같은 이중적인 사랑을, 그 정신나간 사랑을 점묘해낸다.

그녀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뚫는 힘이 강한' 작가다. 작년에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을 보면서 '이렇게 대사를 잘 치다니 예술이야!' 했는데.... 이 장편 드라마 한 회에서 두 번씩 마음을 울리다니, 노희경은 진짜 예술이다.

이 작가가 지상에서의 하루하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드라마를 보고 알겠다. 얼마나 솔직하고 용감한지도, 얼마나 화가 난 사람인지도, 왜 귀여운지도. 그녀가 이뻐 죽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tarla 2004-01-16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나도 올인 중인데 못 봤어요 ㅠ.ㅠ 그나저나 배종옥도 정말 빼어나죠?

요다 2004-01-1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그럼요..
배종옥, 어떨 때 참 이쁘고 어떨 때 정말 이혼한 아줌마 같고.
악 쓰느라 목 상할까 걱정이에요.

땡구 2004-01-16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그게 그렇게 재밌어? 그럼... 월, 화...는 대장금 보고, 수, 목은 그거 보면 되겠군. 어디 정리해보자. 수, 목은... 프렌즈 보고 돌려서 MBC에서 일일연속극 보고, 9시 뉴스 보다 말다 하고, 돌려서 '꽃보다 아름다워' 보고, 한 30분 쉬었다가 프렌즈 또 보고, 섹스 앤 더 시티.. 보고 자면 되겠군. -_-;; 에이 정말..이러면 안되는데.. 한창 일할 30대 사내의 일상이 이래서는 안되는데.. 에이 정말 한창 일할 30대 사내가... 요즘..새벽녘 5시 즈음 되면 KBS 드라마넷에서 [거짓말] 틀어주고 있다는거..그런거까지 알고 있으면 안되는데. 이힝...~

요다 2004-01-16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뭐야! 나보고 새벽 5시쯤 하는 '거짓말'을 보라고?
아.. 아침형 인간은 이럴 때도 쓸모가 있겠지만.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저녁형을 확인한 지금, 거의 쓸데없는 정보라오.. ㅠ.ㅠ 정말 한창 일할 30대 사내가.. 부럽소!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