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는 작은오빠의 머리를 잘라주었다. 이번이 세 번째다. 오빠는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도, 예민하게 구는 타입도 아니어서, 처음에는 벌벌 떨며 조심스레 잘라내던 내가, 어제는 정말 과감하게 쓱싹쓱싹 잘라버렸다. 언제나 그렇듯 얼핏 보면 봐줄 만한 머리가 완성되었다. 손으로 머리를 잘라주는 일은, 번거롭고, 서툴고, 엉성하다. 하지만 서로 간에 바빠서 대화가 없는 우리 남매는 머리를 자르는 동안 티격태격하며 그동안만이라도 남매 간의 정을 쌓아간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오빠의 머리 스타일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오빠의 동생인 내가, 자른 머리이니까, 조금 비뚤어졌어도, 괜찮은 거다.

 

#2 핸드드립 커피는, 아무나 못 만드는 건 줄 알았다. 어느 날 아는 동생네 커피 가게에서 (그 녀석은 아직 스물여섯밖에 안 됐는데, 자기 가게도 있고, 노트북도 있고, 귀여운 스쿠터도 있고, 일렉 기타도 가지고 있어서. 나는 맨날맨날 부러워한다.) 커피를 내리는 녀석에게, "근데, 너 하는 거 보니까, 이거 나도 내려서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라고 했더니, 그 녀석은 너무도 당연한 듯한 목소리로, "네. 누나도 할 수 있어요. 이거 그냥 몇 가지 규칙만 지켜주면 쉬워요." 띠잉~ 진작에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줄 알았으면 진작에 해 보는 거였는데. 핸드드립 커피는 몇 년 전만 해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적어도 내 생각엔) 모든 수제가 그렇듯 비쌌기 때문에, 그리고 커피를 손으로 내리는 사람들이 너무도 그 작업에 진지하게 임했기 때문에, 나는 그게 엄청나게 대단한 기술을 요하는 것이라 오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1~2인 용 핸드드리퍼를 사게 된 것이다. 오늘 이것을 받아들고 집으로 온 나는, 좋거나 기대가 되는 것은 잘 못 참는 급한 성미 때문에 좋아하는 드라마 <완벽한...>을 틀어놓고, 그 앞에서 커피를 내려보았다. 코가 길고 늘씬한 주전자는 비싸서 안 샀는데, 역시 집에 있는 평범한 주전자로는 이게 잘 안돼서, 나는 어찌어찌 맹숭맹숭한 첫 번째 핸드 드립 커피를 만들게 되었다. 맹맹하고 멀갰지만, 한 번 두 번 하다 보면 뭐, 잘하게 되겠지. 중요한 건, 커피숍에 가서 비싼 돈을 주지 않아도, 나는 내 손으로, 커피를, 내려마실 수 있다는 것. 잘하게 되면, 내 취향에 맞게 그것을 조정할 수 있을 것이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커피맛을 보여주게 될지도 모른다. 두근두근. 그래서 언젠가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제가 커피 하나는 끝내주게 만들 거든요? 한번 드셔보실래요??" 호호호호.

 

#3 나는 궁극적으로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을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뭔가 일을 하고도 실물을 볼 수 없는, 현대사회의 이상한 일들 말고, 내 손으로 직접 뚝딱거리고 쪼물딱거리면, 그것이 잘났듯 못났듯 무언가 하나 완성되는 일. 그러니 나는,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다. 머릿속의 온갖 것들이, 머릿속에서 착착 정리되고 이미지화되는 것 말고, 그것들이 실제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서, 아, 내가 저런 것들을 느끼고 생각했구나, 하고, 실물로 확인할 수 있는 작업들을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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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1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음을데려가는人 2007-09-21 15:26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오빠가 여동생 머리 잘라주는 일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인데,
대단하신 오빠네요.ㅎㅎㅎ.
커피 좋아하시면 핸드드립 한번 드셔보세요(마치 판매원 같네요-ㅋ)
별다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역시 뭐든 정성스럽게 한 것이 좋은 듯.:)

2007-09-21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22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7-09-21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마 바리깡으로 밀어버린건 아니겠지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07-09-21 15:21   좋아요 0 | URL
바리깡이 있었으면 편했을 텐데 말이지요.
'직접 머리 자르기' 같은 UCC가 있으면
퍼다가 연습이라도 해볼 텐데,
도무지 따라할 모델이 없어요.
여자 머리도 아니고 남자 머리인지라.^^

2007-09-21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22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누에 2007-09-30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내리고 머리카락 자르는 일, 저도 좋아한답니다. 자르다보면 맨날 뒷머리가 이상해지지만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07-10-01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저도요, 쉽지 않은 거 있죠. 커피는 왜 이리 맛이 별로고, 손은 왜 마음을 안 따르는 걸까요? 그래도 좋아요, 손을 꼼지락 꼼지락 움직이는 일.:)
 

 

한동안 책을 멀리 해온 탓에, 관심 가는 책도, 읽고 싶은 책도 없다며 투덜투덜.

박식해지고 싶긴 한데 머리 아프게 하는 책은 읽기 싫고

문학은 땡기는 게 없다고 또 투덜투덜.

언제나 나의 마음상태와 상황에 적절히 들어맞는 책만 골라내서 읽는다고

짐짓 자부하던 '책에 대한 감각'은 시들시들해지다, 사라져버린 줄만 알았다.

아, 근데. 오오오오, 신난다.

아침 출근 길 책 광고를 보고 회사에 오자마자 주문하여

어제 오후에 받은 이 책.

아, 내가 지금 필요로하는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기분이 너무 좋아서 팔딱팔딱 뛸 지경이다.

사실, 교보에서 지나가다 쓰윽 만져보긴 했으나,

너무도 화려한 표지가 불만스러워서 지나치고 말았는데.

역시나 괜히 내 눈길을 끈 게 아니었어. 오호호호.

간만에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니 이리 기분이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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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7-10-28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렇게 기분좋게 만든 그 책은 무엇일까요? 갸웃갸웃 :)
 

 

요새 마음속에 불덩어리 하나가 활활 타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조금만 자극이 들어오면 그 불덩이는 금세 치솟아 몸 밖으로까지 그 열기를 뻐친다.

젠장, 한 친구와는 전화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웠고, 한 친구에게는 빈정이 상했으며, 누가 하기 싫은 일을 시킬까봐 전전긍긍댄다. 온몸과 마음이 데모를 한다. 나 손해보는 거 하기 싫어. 이거 내가 왜 해야 되는 건데. 넌 왜 날 못살게 구는 거야. 왜왜애 내가 다 받아주고 다 챙겨야 하는 건데!!!!!!!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급하강.

나는 원래 화를 잘 내는 성격이었다. 나는 마치 동물같아서 좋거나 싫다는 반응이 아무 가감 없이 튀어나오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것이, 점점 식물을 닮아갔다. 화내는 건 열등한 나를 방어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는 걸 알고, 내가 불쌍해서 나를 조금씩 조금씩 성장시켜나갔다. 아, 정말이지 나는 하루하루 쑥쑥 커가는 내 영혼을 보고 혼자서 으스댔다. 야, 너 정말 많이 컸다. 그러면서 나를 칭찬하고 대견스러워했다.

하지만 요새는 성장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전부 분노로 차곡차곡 쌓여 왔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안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려서 자꾸 밖으로 나오려 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좀,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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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더웠다는 올해의 여름 날씨가 추석 전까지는 간간히 드러나리라 믿었던 나의 기대를 여지 없이 짓밟고, 요즘의 날씨는 이 모양이다. 낮에 걸어다니면 조금 더운 듯하긴 하나, 아침저녁은 내내 선선하다 못해 쌀쌀하다.

치, 여름은 너무 짧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데.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나뭇잎, 풀잎들의 선명한 빛깔이나, 가끔 무지막지 하게 내려주는 비와, 한여름 밤의 시원한 캔 맥주, 나른한 여름 날의 낮잠 같은 것들을 또 일년이나 기다려야 하는 거야.체.

날이 차가워지면 잠이 쏟아진다. 몸은 굼뜨고, 자꾸 따듯한 품을 찾는다. 차가운 공기와 대비되는 이불 속의 따듯함이 너무도 유혹적이라 그곳을 벗어나기 힘들다. 원체 게으른 인간이지만 겨울은 게으름을 조장한다. 겨울밤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사람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어둠의 시간이 길어지고 온갖 추운 것들과 대항하다보면 나는 또 자고 있는걸.

그래서 여름이 좋은 거다. 해는 길고, 만물에 생기가 돌고, 움직이기가 좋으니까. 게으른 나도 조금은 더 깨어있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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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9-07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날의 담벼락 봄햇살, 여름날의 소나기, 가을날의 낙엽, 겨울날의 이불속 아늑함...

비로그인 2007-09-07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여름은 비가 많이 와서 ㅎㅎ
가을을 즐기자구요~
전 가을, 겨울이 너무 좋거든요 :)

마음을데려가는人 2007-09-07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 님-다른 건 알겠는데 '봄날의 담벼락'은 모예요? 담벼락 위로 살짝 보이는 꽃망울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체셔고양이 님-네, 가을도 좋긴 한데. 왠지 쓸쓸한 느낌이 들어서요. 제가 허한 느낌을 잘 못 참나봐요.:)

잉크냄새 2007-09-07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날은 유독 담벼락 아래 쪼그리고 얼굴 가득히 맞는 봄햇살이 따스하지 않나요. 전 그 봄햇살이 제일 좋거든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07-09-07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천팔년도 봄에는 담벼락 아래 앉아서 햇살 한번 맞아봐야겠어요. ^^
 
브레인맨, 천국을 만나다
다니엘 타멧 지음, 배도희 옮김 / 북하우스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나는 기억력이 좋지 못하다. 나는 내 경험과 닿아 있지 못한 지식과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내가 기억하는 건 언제나 전체가 아닌 단편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에게, 내 심장에, 깊은 울림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면, 내 피부로 느껴지는 무엇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심코 흘러가버릴 뿐 저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온몸과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그것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종류의 사람들을 내심 질투하기도, 부러워하기도, 미워하기도 한다. 적당한 때에 적당한 정보와 지식을 늘어놓는 그들의 능력이 갖고 싶어서, 안달이 날 때도 있다. 지적 처리 능력은 부족하나 지적 호기심만은 왕성하기에.

그런데 브레인맨은 나와 다르다. 그는 서번트 증후군을 갖고 있는 천재다. 나는 숫자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지만 그는 숫자의 세계에 매혹된다. 나는 암기라면 질색이지만 그는 모든 정보를 그냥 빨아들인다. 언뜻보면 매우매우 부러운 그 사람.

하지만 우리가 지식을 학습하듯, 그는 생활을 학습해야 한다. 버스를 타는 것도, 이빨을 닦는 것도,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그에겐 생경하고 두려운 일일 뿐이다. 그러니 그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여러 번에 걸쳐 좌절하며 공부에 도전하듯, 그는 지식 습득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 계속 좌절하고 실패하며 겨우 그것을 해낸다. 그러니 그나 나나 쌤쌤인 셈이다.

이쪽 세계에 있는 나는, 저쪽 세계에 있는 그가  조금 안쓰러웠다. 그에겐 지적 즐거움의 세계가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감정적이거나 감성적인 감각들을 더 깊이 느끼지 못하기에,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아주아주 미세한 인간의 감정이 주는 놀라운 세계를 그도 경험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각자에겐 각자의 그 세계가 좋은 것이다. 남의 떡이 커보인다고, 가끔 남의 세계가 부럽고 탐날 수 있겠지만, 자기 세계에서 경험한 최고의 환희를 남의 세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에겐 그의 삶이, 나에겐 나의 삶이 있고, 우리는 조금 다를 뿐. 이 세계에 공존하고 있다.

우리는 같은 지구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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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8-30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범함을 느끼고 즐길수 있다는 것이 감사한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