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아침에 청소를 했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청소기를 왱-한번 돌린 후,

물걸레로 바닥을 박박 닦아냈다.

흐미, 맨날 닦아도 시커먼 때가 묻어나오는 걸 보면 이상하다 못해 신기하다.

한 차례 빨래를 넌 후,

아직도 덮고 있는 겨울 이불을 세탁기에 넣고 돌린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우렁차다.

 

잠깐 차 마시고 인터넷하는 사이,

띠디디 띠디디~

빨래완료를 알리는 신호음이 경쾌하게 울린다.

후다닥 베란다로 뛰어가서는 이불을 껴안고 빨래집게를 입에 문 채 옥상에 오른다.

볕이 따갑다. 강풍이 분다.

있는 힘껏 이불을 펼쳐 올린 후 한쪽을 빨래집게로 고정한다.

탁탁탁 소리를 내며 균형을 맞춘다.

바짝바짝 잘 마를 것 같은 날씨다.

 

청소에 묵은 이불까지 걷어내고 나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

이렇게 되기까지,

즐겁게 청소하고 빨래하기까지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왠지 하찮고 별 볼 일 없는 일로 치부되는 가사일에 시간을 쓰는 게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사일에도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다.

사람들은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한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명상을 하는데,

나는 그것보다 단순노동으로 이뤄진 가사일을 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내가 왜 이런 하찮을 일을 해야 돼?

금방 더러워질 거, 뭣 하러 청소하는 데 시간을 써?

등등 처음엔 온갖 잡념이 올라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걸레질을 반복하거나, 더러운 그릇을 닦아내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머릿속이 개운해지곤 한다.

 

단순노동이 주는 선물이다.

 

 

***

아이가 생기면 집안일은 즐거운 것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다.

어차피 평생 해야 될 일이라면

하찮은 일/중요한 일 편가르기 하지 말고

그 자체로서 즐길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주고 싶다.

 

먹는 것만 즐거운 것이 아니고,

더러워진 그릇을 깨끗하게 닦아내는 것도 즐거움이고,

깨끗하게 잘 말려진 옷을 입는 것만이 즐거움이 아니고,

군데군데 얼룩진 셔츠를 손으로 비벼 빨아 깨끗하게 만드는 것도 즐거움이라는 걸 안다면,

삶을 사는 게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나는 가끔 지혜로운 아줌마들을 보면,

저 분들의 저 내공은 집안일이 만들어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일에 열중하고 몰두하면서,

또 금세 더러워지고 흐트러지는 일을 매만지면서,

그분들 나름대로 자신을 닦아나가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하지만 난 뭐 아직 멀었다.

난 만져보고 찔러보고도 모르는데

엄마는 멀리서 한번 보고도

저게 좋은 오이인지 아닌지 척척 알아본다.

어쩔 땐 도사님 같다.

그리고 나라면 하루죙일 흐느적거리면서 해야 될 일을

엄마는 한두 시간 안에 뚝딱뚝딱 해내는 걸 보면,

우리의 엄마들, 주부들을 모두

생활의 달인에 출연시키고 싶어진다.

 

엄마의 사랑이란,

엄마가 해준 음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먹은 것을 치우고, 쓸고, 닦아냈던 기나긴 가사노동에도 녹아 있다는 걸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내가 네 똥기저귀까지 빨아줬는데, 란 말은

그만큼 날 사랑했다는 얘기겠지? 후훗.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랑을,

멋진 선물이나 잘 차려진 식탁만이 아닌,

안 보이는 곳에서도 녹여낼 수 있는 멋진 아줌마, 아내, 엄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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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2-05-11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 전 여자는 아니지만 가장 좋아하는 풍경중의 하나가 빨래가 바람에 펄럭이며 만드는 그림자의 일렁임이랍니다.

그 빨래 풍경속에 녹아든 저런 마음이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글을 읽다 보니 드네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5-12 14:32   좋아요 0 | URL
이상하게 빨래가 바람에 펄럭이는 광경은 아름답죠.
오래 입은 런닝구가 널려 있어도 말이지요!
웬만한 건 베란다에 널어버리니 그런 광경을 음미할 여유가 점점 없어지는 게 아쉬워요.

이진 2012-05-11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엄마들은 다 달인이에요.
삶의 달인이요 ㅎㅎㅎ 이 나이도 어린게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단말이니까요 ㅎㅎㅎㅎ

그래도 저는 아직 가사노동에 시간을 쏟는 게 정말 싫어요. 빨래를 한 번 널라치자면 거기에 투자되는 30분가량이 아까워서 몸서리쳐진달까요... 하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5-12 14:36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삶의 달인!
모든 엄마들에게 상을 준다면 '삶의 달인'상을 주고 싶어요.

저도 저의 그런 마음에 문득문득 놀라곤 했어요.
텔레비전을 보거나 멍때리거나
허비하는 시간은 너무도 많은데
유독 집안일에 쓰는 시간을 아까워했던 것 같아요.
사실 집중해서 해버리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안 걸린다는 것에도 놀랐죠. :)

비로그인 2012-05-11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사진도 정말 아름답네요. 조용히 추천 누르고 갑니다~ :)
저도 방청소 하기 귀찮다 생각하지 말고 룰루랄라 해봐야겠어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5-12 14:37   좋아요 0 | URL
수다쟁이님 반가워요. :)
사진은 몰래 주워온 건데, 볼수록 이쁘네요.
요새는 빨래가 펄럭이는 광경을 자주 못 봐서 더 그런 건지도 모르겠어요.

차트랑 2012-05-12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페이퍼를 읽어주셨으니 아시겠지만
말씀해주신대로
'더러워진 그릇을 닦아내는 것'이 바로 수도와 같은 것이어서
본래의 정갈함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닦는다'는 의미의 수(修)는 결국 빨래를 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라고 하니
그 얼마나 기분이 좋은 일이겠어요^^

어제 아침의 청소를 통해 수도하는 이의 마음을
느끼신 것 같습니다 마음을 데려가는 人님~^^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5-12 14:40   좋아요 0 | URL
왜 도를 닦으려는 제자에게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허드렛일을 시키는 건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의외로 깨달음이란 가까운 곳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집안 구석구석 닦으며 제 맘도 닦아볼랍니다. :)

차트랑 2012-05-12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이런...
제가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입문자의 빨래와 허드렛일을 까맣게 잊고있었답니다.

정말 가까운 곳에 있다는 ㅠ.ㅠ
집안을 잘 닦아 놓으면
온 집안 식구들의 기분도 매우 좋아질겁니다.
물론 청소를 열심히 한 사람이 단연코 가장 뿌듯하지요.
저도 이참에 집안 처소를 좀 해야 할듯^^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5-14 00:45   좋아요 0 | URL
ㅎㅎㅎ 가족들이 좋아하겠어요.
맘 먹으면 여자보다 청솔 잘하는 게 남자들이죠!!!
 

*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동아리 친구가 있었다. 나는 첫눈에 거의 동물적으로 저 사람과 잘지낼 수 있을지 없을지를 아는 편인데, 이 친구는 그런 느낌의 친구는 아니었다. 그냥 **야 이거 하자, 저거 하자 하면서 살갑게 구니까 친구가 된 거라고 할까. 워낙 과선배, 과동기들과 친했기 때문에 동아리는 늘 내 맘속의 2위였고, 그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난 뭔갈 혼자 하길 좋아하는데 이 아이는 내가 학원을 등록한다고 하면 자기도 같이 하자고 하고, 뭘 해도 같이 하고 싶어 해서 은근슬쩍 떼어내느라 골머리를 썩기도 했다. 그래도 동아리 내에서 우린 '절친'으로 통했다. 그 시절엔 통신사 카드로 매주 금요일마다 공짜로 영화를 볼 수 있는 극장이 있었는데 우린 같이 영화를 보는 사이였다.

 

유럽여행을 먼저 간 건 그 친구였다. 같이 가자고 했지만 난 자금을 모아야 하니 조금 더 있다가 가겠다고 했다. (솔직히 말하면 같이 가고 싶지 않았다.) 그 친구는 친구의 친구와 같이 갔다가 마음이 많이 상해서 돌아왔다. 친구가 여행에서 돌아온 5~6개월 후 난 혼자서 유럽여행을 갔다.

 

그것이 시발점이었을까.

 

그 친구에게 나는 '혼자서 하고 싶은 것은 뭐든 할 수 있는 멋진 아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용기 없는 못난 자신'과 나를 비교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얼마나 떨리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는지, 버벅거리는 영어로 의사전달을 할 때 얼마나 긴장했는지 따윈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자긴 맘이 안 맞는 사람이랑 가서 힘들었는데 넌 좋았겠다는 식의 부러움, 그래도 자긴 혼자서는 못 간다는 식의 어리광 섞인 말들을 많이 하곤 했었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이 친구가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 시절 나는 돈 때문에 매우 괴로운 상황이었다. 친구들은 점점 자리를 잡아가면서 위치도 단단하고, 돈도 웬만큼 받는 것 같은데, 나는 말로는 '좋아하는 일을 하니 만족한다'고 말하면서도 늘 내가 받은 박봉이 상처였더랬다. 집안의 경제사정도 좋지 않았고.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친구는 계산대에 서면 은근슬쩍 행동이 굼뜨기 시작했고, 그때만 해도 '돈이 없다'는 말은 입에도 대지 못하던 나는 그 어색함이 싫어서 그냥 돈을 내버리곤 했다. 정말 기가 막혔던 건 그 친구가 내 예상보다 돈을 훨씬 잘 번다는 걸 알고 나서였다. 잘 버는데 왜 저리 궁상일까. 그렇게 아껴서 뭐 할라고. 

 

돈 내는 거야 그렇다고 쳐도 말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이상하게 내 아픈 곳을 건드리는 것 같아서 언젠가부터 그 아이를 만나고 나면 기분이 상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사람들이 다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번 해보라고 한 일에 그 친구는 딱 잘라서 말했다.

"아냐! 넌 아직 멀었어!"

(니가 뭔데??)

 

정말 하이라트는 결혼식에서였다. 안 그래도 생각보다 진한 화장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신부대기실에 들어온 그 친구가 내 얼굴에 자기의 얼굴을 바짝 갔다대더니 하는 말.

"야, 너 왜 이렇게 화장 진하게 했어?"

그날의 주인공인 신부에게 빈말이라도 이쁘다는 말은 못해줄망정, 내심 신경이 쓰였던 부분을 건드린 거다.

 

그날이야 여차여차 넘어갔지만, 그 말은 한동안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느꼈던 서운한 감정들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그때 그 한마디가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일본에서 귀국한 후 난 그 친구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고, 자연스레 동아리 사람들과도 연락이 끊겼다. 나 나름대로 무언의 절교를 한 셈이다.

 

요새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여기 보면 당신을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십중팔구 '순위 매기기'에 입각한 관계일 경우라는 말이 나온다. 친밀한 관계 맺기가 되어야 할 친구 사이가 니가 낫냐, 내가 낫냐는 경쟁구도나 순위 매기기에 의존될 때 기분 나쁜 관계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 친구에게 연락을 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너무도 뻔하다.

남편은 연봉이 얼마니?

애는 왜 없니? 못 갖는 거니? 안 갖는 거니?

집은 전세니, 자가니?

아마 직간접적으로 이런 걸 알고 싶어할 테고, 내 안의 '못난 나'는 아마 상처받게 되겠지.

 

 

나는 나를 보호할 권리가 있고, 때론 그 방법이 피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나긴 인생에서 굳이 나를 누르고 짓밟으려 하는 사람까지 만날 필요가 있을까. 적더라도 나를 존중해주고 인정해주는 사람들과 공감하며 살고 싶다.

 

사람이니까 때로는 내가 더 낫다고 은근슬쩍 흐믓해할 때도 있고, 누군가가 너무 뛰어나면 기가 죽기도 하고, 그러면서 사는 거다. 하지만 그 관계가 지속적인 상처가 된다면 과감히 그 끈을 놓는 것도 방법이다. 내안의 못난 내가 힘을 잃는다면 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겠지만, 뭐, 난 아직은 미숙한 인간에 불과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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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2-05-10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명의 친구를 갖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세월이 알려주는 것 같아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5-11 01:45   좋아요 0 | URL
나이들수록 가까워지는 친구에게 고마워해야겠어요. :)
 

시장에서 천 원 주고 부추 한 단을 샀다.

쭈꾸미샤브샤브에 듬뿍 넣어먹고도 2/3가 남았다.

부추는 금세 상하니깐 빨리 처리할 방법을 찾다가

부추로도 장아찌를 만들어 먹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담을 그릇이 작아서 장아찌를 하고도 한줌 정도가 남았다.

그걸로 또 계란부추죽을 끓여 먹었다. 두 번이나.

만 원 가지고 장을 어떻게 보냐는 세상에

천 원짜리 부추의 변신과 활용은 놀랍기만 하다.

함민복 시인의 <긍정적인 밥>이 생각난다.

 

 

 

      긍정적인 밥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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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5-04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부추가 너무 좋아요.
싸기도 하고 맛있기도 하고.
비오는 날, 아니 학교에서 마치고 돌아온 후에 부쳐먹는 부추전은 저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하, 부추전 먹고싶네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5-04 01:31   좋아요 0 | URL
부추 맛있죠.
저는 시어머니가 여름에 삼계탕 하시면 그 국물에 부추를 살짝 익혀서 내어 주시는데 그게 그렇게 맛나더군요. 추흡;;;
부추전에는 막걸리가 제맛인데, 조금 지나면 소이진님도 그 맛을 아시게 되겠네요. :)

잉크냄새 2012-05-04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가슴을 두드리는 날이 있나 봅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이 시가 오늘 다시 읽으니 참 와닿네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5-04 20:35   좋아요 0 | URL
부추 한 단에 천 원이면 비싸지는 않아도...라는 생각을 하다가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이라는 저 시가 생각나더군요.
다시 읽어도 참 따뜻합니다 :)
 

 

*

각종 식물 키우기에 실패를 거듭하다가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바질을 키워서 바질 페스토를 만들어먹는 것'에 성공한 이래, 따뜻한 바람이 솔솔 불기 시작하는 이맘때쯤이면 무언가를 키워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댄다. 나는 관상용보다는 키워서 먹을 수 있는 식물에 집착하는데, 그건 아마도 내가 직접 키운 식물의 결과물을 섭취함으로써 얻는 '실감' 때문이리라.

 

때마침 자주 가는 다이소에서 각종 식물 씨앗을 구경하다가 '강낭콩'을 발견하게 되었다. 겉포장에는 검붉은 콩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걸 본 순간 저걸 키워서 콩을 따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어릴 적 강낭콩을 키우며 관찰일기를 작성하거나 하는 숙제를 해봤을 터인데, 그런 건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씨앗 세 개를 심고 발아를 기다린다... 일주일이면 싹이 튼다고 했는데 사실 난 그리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일주일 만에 싹이 트다니! 무슨 뚝딱하고 찍어나오는 공산품도 아니고, 하나의 생명이 그리 빨리 세상으로 나올까, 싶은 우려가 컸다.

 

그런데 이건 뭐...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콩나물처럼 생긴 한 아이가 흙을 밀어내며 나오더니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큰다. 떡잎은 어느새 여물고 본잎은 저러다가 호박잎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날이 갈수록 면적을 넓혀간다. 신기한 것이 본잎 두 장은 햇빛이 비치는 곳을 향해 선탠이라도 하듯 양잎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나머지 두 씨앗은 불량이었는지 환경이 맞질 않았는지 싹을 틔울 생각을 안 한다. 아마 세상 빛을 보긴 글러먹은 듯하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강낭콩을 보며, 저 아인 태생이 원래 그런가 보다 싶다. 아마 쟤는 도대체 크긴 크는 걸까 싶게 느리게 느리게 성장하는 아이도 있을 터인데... 자기가 갖고 태어난 성질을 거스르려 하면 얼마나 힘이 들까. 자기의 성질 안에서 자기 속도로,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이 평등하다는 환상을 가진 적이 있다. 어느 쪽이냐면 없는 쪽, 약한 쪽, 가난한 쪽인 내가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인정해버리면 그건 너무 괴로울 것 같아서 '신이 있다면 그분의 시선에서 실은 모든 사람은 공평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그 안에서 안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온갖 불합리한 일들이 판치는 인도에서 더 이상 눈 가리고 아웅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현실이 우리 삶은 불공평하다고 외치고 있었으니까. 뭄바이로 들어가는 길 한 시간여에 걸쳐 지나가는 길은 온통 노숙자들로 이어져 있는데, 막상 도심으로 들어섰을 때 보이는 화려하고 세련된 건물들.. 그 말도 안되는 조합에 입이 떡 벌어졌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인정하는 순간, 보이기 시작했다. 없는 쪽 약한 쪽이라고 해서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며, 가진 쪽 강한 쪽이라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라는 걸. 내가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 가지고 태어난 것이 다를지언정 내가 남기고 가는 것이 그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강낭콩은 성장이 빠른 아이다. 그래서 눈이 즐겁다. 하지만 그렇다고 강낭콩이 더 '나은 것'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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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30 1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30 2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1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12-05-04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브르 곤충기를 능가하는 마음 식물기에, 삶의 철학까지.
자양분이 풍부해 잭의 콩나무처럼 하늘로 찌를듯 클듯 싶네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5-04 20:37   좋아요 0 | URL
훗훗, 우리 강낭콩은 정말 하늘을 찌를지도 몰라요.
쑥쑥쑥 성장하는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맘이 이럴까요?
 

 

*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라고 믿고 싶기에 가끔 인터넷에서 하는 경품응모에 참가하곤 한다.

아직 큰 건 당첨돼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영화예매권이나 커피무료쿠폰, 베이커리교환권 등 사소하지만 받으면 기분 좋은 것들에 나는 잘 얻어걸리는(?) 편이다. 어디에 응모했다고 기록해둘 필요도 없는 게 당첨이 되면 문자나 메일이 오기에 크게 신경을 쓰고 있진 않다.

 

그젠 황당하고 웃긴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아들었더니, 상대방은

"어, 저기... 인터넷 뭐...하셨나봐요?"

누가 들어도 씩씩한 아줌마 목소리.

"네? 어디신데요?"

"***씨 전화 맞죠?"

"네..."

"야쿠르트가 세 개 당첨이 됐다고 해서 내가 가야 되는디.."

"........? 어디신데요?"

"나는 사당문화회관 앞에 있는 야쿠르트 아줌만디.."

결국 나는 어제 오후 세 시, 방문한 아줌마로부터 봉다리에 든 요쿠트르 세 개를 받았다. 허허허.

 

요새야 그렇게 간단한 거라면 기프티콘으로나 받아봤지,

직접 통화하고 게다가 배달까지 받아본 경험은 처음이었다.

아줌마도 뭐가 뭔지, 꽤 황당해하시며 너털웃음을 웃으셨고.

 

그런데 생각할수록 재밌는 거다.

모든 게 클릭 한 방이면 해결되는 세상에,

굳이 얼굴을 맞대지 않고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최첨단 시대에,

봉다리에 든 요쿠르트 세 개를 사람의 온기와 함께 받게 되다니!

 

 

**

간만에 손에 잡은 이상 멈출 수 없는 책을 만났다.

전부터 읽어보고 싶긴 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연이 닿질 않다가

어제 도서관에 꽂힌 걸 냉큼 집어왔다.

오호, 정말 물건이다.

수많은 사람과 사건이 연결돼 있는데 어쩜 그리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지, 그리고 그 안에 품은 상징성까지.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읽기를 멈출 수가 없다.

어떤 이에게 가족은 힘이자 원동력이고,

어떤 이에게 가족은 숨막히는 올가미이자 도망 치고 싶은 감옥이다.

어쩜 '나와 잘 맞는 타인과 가족인 척 살아가는 일'이 더 간단하고 편한지도 모르겠다. 모든 일이 일어난 배경에 버티고 있는 이유들...

그 중심엔 '가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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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4-28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야쿠르트 3개 당첨되보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야쿠르트를 3개나 당첨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제가 당첨되면
야쿠르트 아주머니께
야쿠르트 300개 사드리고
돌아가시는 차비도 드리고 싶어지네요

당첨 비결좀....ㅠ.ㅠ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4-29 20:50   좋아요 0 | URL
야쿠르트 삼백 개면 와우!
야쿠르트아줌마 횡재하시겠네 ㅋ
자주 응모하심 당첨됩니다
로또처럼!
:)

이진 2012-04-29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야베 미유키의 글 솜씨는 읽으면 읽을수록 감탄만 나지요 ㅎㅎㅎ
저도 <이유>는 당당히 책장에 꽂아두었는데 좀처럼 읽을 시간이 나질 않네요.
두꺼운 책이다보니 손이 가는게 꺼려지는 거 같아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4-29 20:53   좋아요 0 | URL
두꺼워도 야금야금 읽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라구요^_^
저기 잘생긴 분은 누구신가요?
순간적으로 두근, 했어요 ㅋ

이진 2012-04-30 22:31   좋아요 0 | URL
아우, 정말 잘생겼지요!
일본 배우인 '후쿠시 세이지'라는 분이십니다.
한국적으로 생기셔서 더욱 마음도 가고 연기도 잘하세요.
정말 잘생기셨다니까요... 노다메 칸타빌레 드라마를 보시게 된다면
오보에를 부는 이 남자를 발견하실 수 있으실 거여요!

잉크냄새 2012-05-04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런 운이 별로 없어요.
알라딘에서만 몇번 당첨된 운이 있군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5-04 20:42   좋아요 0 | URL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러 번 시도하니 확률이 높아지고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애초부터 시도하지 않으니 확률이 낮아지는 게 아닐까 하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

최현호 2013-04-21 0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야쿠르트 아주머니들이 야쿠르트 배달 하시면서 투잡으로 같이 할수있는일을 권해드리고
있습니다. 혹시 전국에 야쿠르트 아주머니께서 이글을 보신다면 투잡에 도전해보세요.
현재 야쿠르트 아주머니께서 이일을 자연스럽게 잘 하고 계셔서 드리는 투잡입니다.
홈페이지 www.minkoilnc5.net 또는 카카오톡 아이디: minkoilnc5 로 들어오셔서
검토해보시고 하세요. 즐거움과자부심이 생기는 일입니다. 일반인분들도 가능하니 많이 참여하세요. 2013년 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