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아침에 청소를 했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청소기를 왱-한번 돌린 후,

물걸레로 바닥을 박박 닦아냈다.

흐미, 맨날 닦아도 시커먼 때가 묻어나오는 걸 보면 이상하다 못해 신기하다.

한 차례 빨래를 넌 후,

아직도 덮고 있는 겨울 이불을 세탁기에 넣고 돌린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우렁차다.

 

잠깐 차 마시고 인터넷하는 사이,

띠디디 띠디디~

빨래완료를 알리는 신호음이 경쾌하게 울린다.

후다닥 베란다로 뛰어가서는 이불을 껴안고 빨래집게를 입에 문 채 옥상에 오른다.

볕이 따갑다. 강풍이 분다.

있는 힘껏 이불을 펼쳐 올린 후 한쪽을 빨래집게로 고정한다.

탁탁탁 소리를 내며 균형을 맞춘다.

바짝바짝 잘 마를 것 같은 날씨다.

 

청소에 묵은 이불까지 걷어내고 나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

이렇게 되기까지,

즐겁게 청소하고 빨래하기까지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왠지 하찮고 별 볼 일 없는 일로 치부되는 가사일에 시간을 쓰는 게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사일에도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다.

사람들은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한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명상을 하는데,

나는 그것보다 단순노동으로 이뤄진 가사일을 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내가 왜 이런 하찮을 일을 해야 돼?

금방 더러워질 거, 뭣 하러 청소하는 데 시간을 써?

등등 처음엔 온갖 잡념이 올라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걸레질을 반복하거나, 더러운 그릇을 닦아내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머릿속이 개운해지곤 한다.

 

단순노동이 주는 선물이다.

 

 

***

아이가 생기면 집안일은 즐거운 것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다.

어차피 평생 해야 될 일이라면

하찮은 일/중요한 일 편가르기 하지 말고

그 자체로서 즐길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주고 싶다.

 

먹는 것만 즐거운 것이 아니고,

더러워진 그릇을 깨끗하게 닦아내는 것도 즐거움이고,

깨끗하게 잘 말려진 옷을 입는 것만이 즐거움이 아니고,

군데군데 얼룩진 셔츠를 손으로 비벼 빨아 깨끗하게 만드는 것도 즐거움이라는 걸 안다면,

삶을 사는 게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나는 가끔 지혜로운 아줌마들을 보면,

저 분들의 저 내공은 집안일이 만들어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일에 열중하고 몰두하면서,

또 금세 더러워지고 흐트러지는 일을 매만지면서,

그분들 나름대로 자신을 닦아나가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하지만 난 뭐 아직 멀었다.

난 만져보고 찔러보고도 모르는데

엄마는 멀리서 한번 보고도

저게 좋은 오이인지 아닌지 척척 알아본다.

어쩔 땐 도사님 같다.

그리고 나라면 하루죙일 흐느적거리면서 해야 될 일을

엄마는 한두 시간 안에 뚝딱뚝딱 해내는 걸 보면,

우리의 엄마들, 주부들을 모두

생활의 달인에 출연시키고 싶어진다.

 

엄마의 사랑이란,

엄마가 해준 음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먹은 것을 치우고, 쓸고, 닦아냈던 기나긴 가사노동에도 녹아 있다는 걸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내가 네 똥기저귀까지 빨아줬는데, 란 말은

그만큼 날 사랑했다는 얘기겠지? 후훗.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랑을,

멋진 선물이나 잘 차려진 식탁만이 아닌,

안 보이는 곳에서도 녹여낼 수 있는 멋진 아줌마, 아내, 엄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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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2-05-11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 전 여자는 아니지만 가장 좋아하는 풍경중의 하나가 빨래가 바람에 펄럭이며 만드는 그림자의 일렁임이랍니다.

그 빨래 풍경속에 녹아든 저런 마음이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글을 읽다 보니 드네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5-12 14:32   좋아요 0 | URL
이상하게 빨래가 바람에 펄럭이는 광경은 아름답죠.
오래 입은 런닝구가 널려 있어도 말이지요!
웬만한 건 베란다에 널어버리니 그런 광경을 음미할 여유가 점점 없어지는 게 아쉬워요.

이진 2012-05-11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엄마들은 다 달인이에요.
삶의 달인이요 ㅎㅎㅎ 이 나이도 어린게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단말이니까요 ㅎㅎㅎㅎ

그래도 저는 아직 가사노동에 시간을 쏟는 게 정말 싫어요. 빨래를 한 번 널라치자면 거기에 투자되는 30분가량이 아까워서 몸서리쳐진달까요... 하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5-12 14:36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삶의 달인!
모든 엄마들에게 상을 준다면 '삶의 달인'상을 주고 싶어요.

저도 저의 그런 마음에 문득문득 놀라곤 했어요.
텔레비전을 보거나 멍때리거나
허비하는 시간은 너무도 많은데
유독 집안일에 쓰는 시간을 아까워했던 것 같아요.
사실 집중해서 해버리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안 걸린다는 것에도 놀랐죠. :)

비로그인 2012-05-11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사진도 정말 아름답네요. 조용히 추천 누르고 갑니다~ :)
저도 방청소 하기 귀찮다 생각하지 말고 룰루랄라 해봐야겠어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5-12 14:37   좋아요 0 | URL
수다쟁이님 반가워요. :)
사진은 몰래 주워온 건데, 볼수록 이쁘네요.
요새는 빨래가 펄럭이는 광경을 자주 못 봐서 더 그런 건지도 모르겠어요.

차트랑 2012-05-12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페이퍼를 읽어주셨으니 아시겠지만
말씀해주신대로
'더러워진 그릇을 닦아내는 것'이 바로 수도와 같은 것이어서
본래의 정갈함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닦는다'는 의미의 수(修)는 결국 빨래를 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라고 하니
그 얼마나 기분이 좋은 일이겠어요^^

어제 아침의 청소를 통해 수도하는 이의 마음을
느끼신 것 같습니다 마음을 데려가는 人님~^^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5-12 14:40   좋아요 0 | URL
왜 도를 닦으려는 제자에게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허드렛일을 시키는 건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의외로 깨달음이란 가까운 곳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집안 구석구석 닦으며 제 맘도 닦아볼랍니다. :)

차트랑 2012-05-12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이런...
제가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입문자의 빨래와 허드렛일을 까맣게 잊고있었답니다.

정말 가까운 곳에 있다는 ㅠ.ㅠ
집안을 잘 닦아 놓으면
온 집안 식구들의 기분도 매우 좋아질겁니다.
물론 청소를 열심히 한 사람이 단연코 가장 뿌듯하지요.
저도 이참에 집안 처소를 좀 해야 할듯^^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5-14 00:45   좋아요 0 | URL
ㅎㅎㅎ 가족들이 좋아하겠어요.
맘 먹으면 여자보다 청솔 잘하는 게 남자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