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안에서
자자의 노래 [버스 안에서] 라는 곡을 좋아한다. 신나는 음악이기도 하고, 가사를 보면 내 학창시절 경험이 떠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창시절 경험은 특히 그것이 이성과 관련된 경험은 시간이 오래 지나도 잘 잊혀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전이었다. 외부 회의에 참여해야 해서 한 낮에 버스를 탔다. 최근에는 외부 일정도 멀리서 잡히는 경우가 많지 않고 대부분 동네 안에서 이동하다보니 낮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은 드물다. 어지간한 거리는 그냥 걸어다닌다. 이번엔 걸어갈만한 거리를 조금 넘어섰고 회의 시간에 맞추려다보니 버스를 탔다. 버스는 대낮이었지만, 좌석이 꽉 차 있었고, 나는 양쪽으로 하나씩 좌석이 있는 앞쪽 구역과 양쪽으로 두 개씩 좌석이 있는 경계 지역, 그러니까 뒷문 근처에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버스가 운행하는 중에 오르막과 내리막 길이 번갈아 나왔고, 그 와중에 내 바로 옆에 서 있던 여성 한 분이 몸이 기울어지며 내가 손잡이를 잡고 선 팔에 기댔다. 버스가 흔들리니까 당연히 기댈수 있는 일이니 그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 분이 다음 순간 몸을 일으켜 바로 설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 분은 바로 일어서지 않고 계속 내 팔에 기대어 계셨다. 그런데 그 기댄 부위가 그 사람의 겨드랑이 부분이었다. 내 팔에 그것도 여름이라 당연히 반 팔을 입었으니 내 맨 살에 여성이 겨드랑이를 끼고 기댄 모양새였다. 그 와중에도 가끔 버스는 흔들렸고, 그 때마다 여성의 가슴 부위 살이 내 팔에 닿았다. 분명 이 상황을 본인이 모르지 않을텐데. 만약 그 분이 가만히 있었는데, 내가 그 쪽으로 손을 뻗어서 이렇게 된 상황이었다면 분명 성추행이 될 상황인데, 그 분은 계속 내게 몸을 기댄 채로 가고 있었다.
한 낮이라 엄청 더웠고, 버스 에어컨은 그 더위를 식힐 정도가 되지 못해서 나는 버스 안에서 땀을 흘리며 서 있었다. 그 여성 분이 내게 몸을 기대고 있었기 때문에 더 더웠고, 나는 내 팔로 그 분의 몸무게 일부를 지탱하고 있었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냥 팔을 확 빼버릴까? 그럼 이 분이 기우뚱 넘어질 뻔하다가 중심을 잡겠지? 그러고 나를 보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면 어떻게 눈치를 줘야하나? 정중히 이야기를 하기엔 이 분이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얼마나 더 그렇게 갔을까? 몇 정거장을 지날동안 계속 그 분은 내게 기대어 있었고, 나는 무거웠고, 땀이 차서 불쾌지수가 더욱 올라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혹시 주위에서 누가 유심히 보면 오히려 내가 파렴치범으로 몰릴 수도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이젠 팔을 빼야지 하고 생각할 때쯤에 갑자기 여성이 몸을 세우더니 하차 벨을 눌렀다. 그리고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뒷문으로 향했다.
90년대 초반이었고,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아침 일찍 버스정류장에 가면 여러 학교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서 있었다. 그 버스는 인문계 고등학교와 상업고등학교를 다 합쳐서 5개쯤의 여고와 그 이상의 남고를 지나는 노선이었다. 아침에 내가 기다리는 정류장 정도 오면 버스는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는 만원 버스였다. 그럼에도 그 버스를 놓치면 지각이 될 확률이 높으니 학생들은 어떻게든 몸을 밀어 넣어야 했다. 매 정거장 마다 여학생들의 비명소리와 남학생들의 신음소리와 함께 밀고 밀리는 힘싸움이 벌어졌다. 그렇게 20여 분을 달려서 학교들이 모여있는 구역의 첫 번째 정류장에 도착한 후에, 학생들이 대거 내리면 그제서야 조금 숨통이 트인곤 했다.
내가 저 자자의 [버스 안에서]라는 노래를 듣거나 떠올리면 늘 생각나는 기억은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위해 학교에 갈 때 일어났다. 보충수업이라서 지각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때는 학기 중에 비해 조금 늦게 집에서 나왔다. 당연히 버스 정류장에도 평소 보다는 학생들 수가 적었다. 그때 매일 마주치는 여학생이 하나 있었다. 매일 마주쳤기 때문에 당연히 내리는 곳도 알고 있었다. 우리 학교에서 직선거리로는 그리 멀지 않은 여고였다. 학기 중에 비해서는 완전 여유가 있는 버스였지만, 그렇다고 앉아 갈 수 있을 정도는 아니어서 조금 널널하게 서서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버스의 운행 경로엔 급경사가 많았다. 급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번갈아 나타나고 급 커브도 많았다. 하루는 버스를 타서 서 있는데, 그 여학생이 내 바로 옆에 섰고, 한참 가다가 그 급경사가 반복되는 구역으로 접어들었다. 여학생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나를 향해 몸이 기울었고 당연히 내게 기대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세워 서 있다가 또 내게 몸을 기대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급경사 내리막길에서 버스가 급커브를 돌았다. 서 있던 모든 승객들이 비명을 질렀고, 나도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팔에 힘을 주면서 '아!' 하고 소리를 냈다. 내 바로 옆에 있던 여학생은 '어머!'하고 소리를 내며 몸의 균형을 잃고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넘어졌다. 나는 몸을 살짝 틀어서 몸으로 그를 받아줬다. 그는 내 품에 푹 안긴 자세로 한동안 머물렀다. 마침내 버스가 급경사, 급커브를 벗어났고,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나를 보지도 않고 나를 향해 고개만 숙였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한참을 가다가 또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고 그는 또 내게 안겼다. 이번에는 그가 몸을 일으키기까지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이번에 몸을 일으킨 그는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봤다. 나는 아마도 멍한 표정으로 그를 봤던 것 같다. 짧은 순간 눈이 마주쳤고, 그는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처음은 우연이었지만, 그 다음은 우연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그 후로 그 여학생은 자주 내 바로 옆에 섰고, 그날처럼 극적으로 넘어지면서 내게 안기지는 않았지만, 내 팔이나 몸에 기대었다가 다시 일어나는 일이 잦았다. 얼마 후 나는 용기를 내어 버스정류장에서 그에게 말을 걸었고, 그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조금 더 시간이 지나 그에게 만나자고 제안을 했고 짧은 기간 데이트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여름방학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린 다시 아무 사이도 아닌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서로가 불편해서 등교 시간, 그러니까 버스 정류장에 나가는 시간대를 바꿨다.
앞서 얘기한 며칠 전 버스에서 내게 몸을 기대고 있었던 그 여성 덕분에 잊고 있던 오래전 학창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그 시절 그 날들도 참 더운 날들이었다. 그 더위에 에어컨도 제대로 나오지 않던 버스를 타고 그렇게 인파에 시달리며 학교를 다녔었지. 하고 잠시 추억에 잠겼다.
아침 달리기
내가 일하는 협동조합에서 조합원들과 함께 1박2일 프로그램으로 탐방을 갔다. 나는 조합원들을 이끌고 행사를 진행하는 입장이라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사람들을 살피고, 인원 수를 체크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느라 바쁘고 힘든 날이었다. 저녁 때가 되어서 내가 맡은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팀 대항 놀이를 진행했다. 준비하면서 과연 참가자들이 재미있어 할까? 걱정을 많이 했고, 그래서 더더욱 재미있게 해보려고 고민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참가자들이 정말 즐겁게 참여했고, 올해 가장 많이 웃은 날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다른 참가자들도 모두 만족스러워했고, 참가자 중 한 분은 내가 만든 놀이를 본인이 다른 교육 프로그램에 접목해서 이용하겠다고 했다. 뭐 나 역시도 흔히 하는 놀이를 조금 바꿨을 뿐이니 딱히 권리를 주장할 처지는 아니라 당연히 좋다고 했다. 암튼 그렇게 공식 프로그램을 마치고 이후로는 열심히 먹고 마시는 시간이었다. 나는 오랜 활동가의 경험 상 늦게까지 이어지는 뒤풀이에서도 무슨 사고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어지간하면 모든 참가자들이 다 주무실 때까지 남아서 뒷정리를 하는 편이다. 그날도 당연히 마지막까지 남아서 다들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도 구석 자리를 찾아 잠을 청했다.
누군가 코 고는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의 잠꼬대 소리도 작게 들렸다. 무엇보다 근처 계곡의 개구리 소리가 크게 들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늘 그랬다. 잠자리에 조금 예민한 편이라 쉽게 잠들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뒷정리를 마친 후에야 억지로 잠을 청하곤 했다. 그래도 엄청 피곤했기 때문에 어느 순간 기절하듯 잠이 들긴 했다.
아침에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소리 때문에 깼다. 늦게 잠들었다는 핑계로 조금 더 눈을 붙이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 몸이 너무 피곤했다. 그런데 다시 잠들려고 할 수록 더 정신이 또렸해졌다. 누군가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씻고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일어나서 움직였다. 화장실을 막 다녀와서 아침을 준비하는 걸 도우려고 하는데, 친한 형이 아침 달리기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았다. 그 형이 나를 보더니 마침 잘 됐다며 따라 나서라고 하더라. 그런데 그 형은 간밤에 술을 많이 드시고 쓰러져 잠든 분이시라 아침에 이래저래 많이 불편하시리라고 예상했건만, 너무나도 멀쩡한 모습으로 달리기를 하겠다고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음에도 아침 달리기를 하기엔 너무나도 몸이 피곤했다. 그때부터 잠시 실강이가 있었다. 그 형은 내가 달리기 모임을 이끌 정도로 잘 달리는 지 봐야겠다며 따라 나서라고 했고, 나는 우리 달리기 모임은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 걱정 마시라고. 나는 다음에 컨디션이 좋을 때 형이랑 같이 달리겠다고 했다.
사실 그 형은 거의 준 프로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마라톤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100일 동안 매일 6킬로미터 달리기를 하고 있다. 첫날 그러니까 탐방을 위해 아침 7시 반에 모였을 때에도 그 전에 6킬로미터 달리기를 마치고 시간 맞춰 집결지로 왔었다는 얘길 들었었다. 그리고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고 뻗어서 주무신 다음 날에도 깨자마자 6킬로미터 달리기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전날 징검다리를 건너다 미끄러져서 물에 빠진 여성 선배를 구하려고 물에 뛰어든 바람에 휴대전화가 젖어서 작동이 되지 않으니 내 폰의 달리기 앱을 통해 달린 거리와 시간을 인증하겠다는 이유를 댔다. 거기까지 듣고 나니 더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따라 나섰다. 한 편으로는 그 형과 같이 한번 달려 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만, 나는 장거리 달리기가 내 목표가 절대 아니기 때문에 그 형처럼 마라톤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기 때문에 한 번에 쉬지 않고 그렇게 긴 거리를 달리지 않아서, 과연 그 형을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둘이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 형은 일부러 내 속도에 맞추겠다는 생각인 것인지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무릎이 조금 아프기도 했고, 어깨와 뒷목 쪽이 뭉친 느낌이 들기도 해서 무거운 몸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묵었던 펜션을 나와서 한적한 시골 도로에 접어들어 그 형이 길을 선택하라고 했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위쪽 길을 택해 달렸는데, 가다보니 끝없이 굽이 굽이 오르막길이 나왔다. 와! 이건 군대에서 주로 했던 산악구보 수준이라 도저히 이 늙은 몸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형은 아주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인생이나 달리기나 다 똑같다며, 오르막이 있으면 언젠가는 내리막이 나타난다는 가르침을 베풀었다. 나는 오르막길을 뛰느라 얼마 뛰지도 않았음에도 이미 숨이 차서 더는 이 길로는 못 가겠다고 다시 내려가겠다고 했다.
내려가다가 옆으로 빠지는 평탄한 길이 나와서 그 쪽으로 길을 정해 달렸다. 오르막이 아닌 평지는 확실히 달릴 만했다. 몸에 열이 나니 조금씩 컨디션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도 달리기를 시작하면 조금씩 여기저기 아프거나 피로를 느끼지만, 조금 달려서 몸에 열이 나면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달릴 준비가 되곤 했다. 그래서 워밍업이란 것이 필요한 법이다. 암튼 평지를 뛰면서 생각보다는 수월하게 달렸다. 물론 이 형의 평소 속도에는 한참 미치지 못 했겠지. 어느 순간부터 이 형이 나를 제치고 앞으로 나서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어쨌거나 지기 싫은 마음에 따라 잡으려고 애를 썼다. 뭐, 그렇다고 아주 많이 빨리 달린 것도 아니어서 조금 숨이 차긴 했지만 따라갈 만하다 싶었다. 한참 달리다가 그 평탄한 길 끝에 다시 산 길이 나타났다. 길이 그 길 밖에 없었다. 아, 다시 산악구보가 되는 구나. 이번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산길을 따라 뛰었다.
알고보니 이 형은 매일 6킬로미터를 달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30분을 달리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본인이 30분을 가볍게 달리면 딱 6킬로미터가 되니 딱 그 만큼만 달리는 거라고. 달린지 15분이 되자 이 형이 방향을 돌려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 6킬로미터를 다 뛰지 않아도 30분이 되면 끝나는구나 하고 조금은 안도했지만, 한 편으로는 이제 겨우 15분 지났을 뿐인데 나는 상당히 지쳐 있어서 남은 절반을 어떻게 달리나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우리 두 사람은 잠시도, 한 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긴 시간을 안 쉬고 달린 적은 없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중장거리 달리기가 목표가 아니라 단거리 달리기가 목표이기 때문에 내가 낼 수 있는 최도 속도로 짧은 거리를 달리고 좀 쉬다가 다시 달리기를 반복하길 좋아한다. 그래도 달리기 모임을 할 때에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최대 속도가 아닌 다른 참가자들과 적당히 보조를 맞춰 달리고 다들 힘들어하면 조금 쉬었다가 다시 달리길 반복했다. 주로는 1킬로미터씩 서너번을 뛰거나 2킬로미터씩 두세번을 뛰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중간에 휴식을 충분히 취해가며 5~6킬로미터를 달리기는 했지만, 전혀 발을 멈추지 않고 그 정도 거리를 달려본 적은 없었다.
한 25분 정도 달렸을 때 우리가 출발했던 펜션을 지나쳤다. 처음에 선택하지 않았던 아래쪽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서 내 왼쪽 신발 끈이 풀렸다. 형에게 말하고 처음으로 발을 멈춰 신발 끈을 묶었다. 이 형은 그 사이에도 발을 멈추지 않고 내 주위를 계속 왔다갔다 하며 달렸다. 그리고 다시 남은 5분 정도를 채우기 위해 달렸다. 이 형이 또 갑자기 속력을 높였다. 나는 이제 완전히 지쳤고,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지만 억지로 쫓아갔다. 체감 상으로는 3분 이상 지난 것 같은데, 왜 펜션으로 돌아가지 않는 건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형에게 물었다. 이 형은 뛰느라 펜션을 지나쳤다는 걸 깨닫지 못했던 거였다. 나는 이제 돌아가야 한다고 원망 섞인 말투로 말했고, 이 형은 너무나도 천진난만한 표정과 말투로 아, 몰랐네. 그럼 돌아가자 이러고 다시 달렸다. 이 와중에도 당연히 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아직 펜션이 보이기도 전에 30분은 지났고, 우리는 여전히 펜션을 향해 달렸다. 나는 이제 30분이 지났으니 그만 달리고 걷고 싶었으나 이 양반이 멈추지 않으니 계속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5킬로미터 가량을 달렸다. 역시 초반 오르막길에서 내 속도에 맞추느라 그 형의 평소 기록보다 1킬로미터나 적게 달린 결과가 나왔다. 아니 초반 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나를 배려하느라 평소 보다는 천천히 달렸겠지. 이 형은 펜션에 도착한 후에도 쌩쌩한 모습으로 신나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고, 나는 거의 패잔병 모양으로 비틀거리며 간신히 계단을 한발씩 올랐다. 달리기를 멈추고 보니 내 옷은 이미 땀에 완전히 젖어 있었다. 속옷까지 모두. 그리고 쉼없이 땀이 흘러내렸다. 완전히 땀으로 목욕을 한 모양이었다.
런닝앱의 기록을 살펴보니 몇 가지 신기록을 한꺼번에 달성했다는 알림이 떴다. 가장 긴 시간 달리기 기록, 가장 먼 거리를 달린 기록 등 지금까지 이 앱을 3년 정도 쓰면서 한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기록들을 오늘 달리기 한 번으로 모두 달성했다. 약간 억지로 끌려가는 모양새이긴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한번은 같이 달리고 싶었던 사람과 달릴 수 있으니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있었다. 내 몸이 과연 버텨줄까? 내가 따라갈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던 건, 이 형이 일부러 맞춰준 덕분에 괜찮았고, 그럼에도 완전히 내 페이스로 맞추지 않고 중간부터 본인이 먼저 치고 나갔기 때문에
내게는 지금까지 못해봤던 한계에 도전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여러 모로 내 달리기 경험 중에 다시 없을 좋은 경험이었지만, 아침 달리기는 정말 너무 힘들기는 했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도 계속 땀이 났다. 땀에 젖은 옷은 한참이 지나도 마르지 않았다. 전날 밤에 샤워하고 하나 가져온 여벌 티셔츠를 갈아 입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입고 온 옷을 그대로 입었던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티셔츠는 갈아입었지만, 반 바지는 여벌로 더 챙기지 않아서 방법이 없었다. 젖은 옷을 그냥 입고 있을 수 밖에.
이 한 번의 힘든 달리기가 내게는 다시 전환점이 되어 주었다. 덥다고, 피곤하다고, 힘들다고 조금 덜 열심히 운동했던 최근의 상황들을 반성하며 다시 열심히 땀 흘려 운동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아울러 또 기회가 되어 이 형이랑 다시 달리면 그때는 지금보다 더 잘 달려서 일부러 배려해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는 체력을 올려놓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렇게 되더라도 이 형이 작정하고 제대로 달리면 역시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아, 그래서 프로와 아마추어는 완전 다른 차원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물론 이 양반이 완전 프로는 아니지만, 그래도 준 프로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프로는 또 얼마나 다른 차원에 있는 걸까 하고 깨닫게 된다.
저녁에 시작한 회의가 밤에 끝나고, 일을 조금 더 하려고 남았다가 이 글을 두드렸는데, 이제 자정이 가까워온다. 얼른 집에 가서 씻고 피곤한 몸을 침대에 던져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