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더워
요 며칠은 정말 숨막힐 정도로 덥다는 표현이 딱 맞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이렇게 덥지? 이 여름을 과연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절망감이 든다.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이 아닌데도 이렇게 느끼는데, 나보다 더위를 더 못 견디는 분들은 어떻게 살고 계신 걸까?
물론 에어컨이라는 문명의 이기이자 이 기후위기 시대의 필수품이 되어버린 물건의 존재가 변수가 될 것이다. 내가 이토록 더위를 못 견디고 힘들어 하는 것은 아직 에어컨이 없기 때문이고, 나보다 더 더위를 못 견디는 편이지만 에어컨이 있는 분들은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것이겠지. 2018년을 기점으로 이런저런 이유로 에어컨을 구매하지 않았던 많은 지인들 대부분이 에어컨을 새로 장만했다. 현재 가장 친한 사람들 대부분은 최근에 에어컨을 구매했다. 30년 환경운동을 한 선배 활동가도 아마 3~4년 전에 못 견디고 에어컨을 장만했었다. 나 역시도 2018년 이후로 고민을 많이 했다. 매년 여름마다 이번 여름만 버티고 나면 내년 봄에는 꼭 사야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에어컨이 없는 건 또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일단 20년 넘게 환경운동을 해온 입장에서 특히 에너지 문제를 주로 다루는 활동가로서 에어컨을 구매한다는 것이 스스로 설득이 안 되는 것이 제일 큰 이유다. 아무리 덥다고 활동가가 에어컨을 통해 전기를 더 쓰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안된다는 지극히 답답하고 어리석은 고집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이혼하고 혼자 살기 전에, 그러니까 가족들과 함께 지낼 때는 에어컨이 있었다. 나는 거의 가동하지 않았지만, 다른 식구들은 자주 사용했다. 그러다 혼자 살게되면서 에어컨 없이 살게 되었고, 이것도 환경운동가로서 일종의 숙명 같은 거라고 고지식하게 받아들인 측면이 있다.
두번째 이유는 이렇게 가장 심한 폭염이 이어지는 날엔 괴로워하지만, 이 고비 이전과 이후는 또 그럭저럭 견딜만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년, 20년, 21년 여름은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18년과 작년 22년 여름이었다. 그 여름 날들도 대체로는 견딜만 했다. 아주 극심한 폭염이 이어지던 며칠 동안이 힘들었을 뿐이다. 지금도 그런 시기라고 생각하고 요 며칠만 참자고 생각하면 또 견뎌질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지인들의 집을 돌아가면서 지내는 선택도 있다. 작년과 올해 친한 후배 한 명은 내게 힘들면 언제든지 와서 자고 가라고 말했다.
세번째 이유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구조가 실외기를 놓을 장소가 마땅치 않고, 벽을 뚫을 위치가 애매하다는 점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 집에 처음 들어올 때, 집 주인 본인이 에어컨을 설치하려고 설치 기사를 불렀는데, 여러가지 이유로 설치를 못 했다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설치를 문의한 적은 없으니까. 어쩌면 방법은 찾으면 찾아지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몇 년 사이에 집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이제는 이 폭염을 견딜 필수품이라고 불릴만한 에어컨 설치를 막는 집 주인은 없겠지.
이 세 가지 이유로 여름마다 더위에 괴로워하면서도 에어컨 없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아마 정말로 절실하게 괴롭고 힘들었다면 다른 어떤 이유에도 관계없이 그냥 에어컨을 설치했을 것이다. 1번의 명분과 2번의 인내가 그래도 버티게 만들어 준 원인일 것이고, 3번은 그냥 덧붙이는 이유 밖에 안 될 것이다.
암튼 지난 며칠 내내 이어지는 열대야 때문에 새벽에 깰 때마다 찬 물로 샤워를 하고 물기를 닦지 않은 채로 선풍기 바람으로 말려 몸을 식혔다. 이대로 얼마나 더 폭염과 열대야가 이어질 지 모르지만, 더 못견디겠다 싶을 때에는 지인 찬스를 쓰던지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 도저히 혼자서 그냥 버티고 참기에는 한계에 이르렀다.
과감한 옷차림
얼마 전에 매장에 여성 한 분이 들어왔는데, 옷차림이 무척 독특했다. 등이 아주 깊게 파였고, 가슴 쪽도 좀 아슬아슬하게 보일 정도로 노출이 심한 옷이었다. 양쪽 팔에 이런저런 문신들이 눈에 띄었다. 영화나 매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눈으로 이렇게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어서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반응하면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곧 평정심을 되찾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했다. 아니 대하려 했다. 그럼에도 그 분이 여러 제품들에 대해 질문을 해서, 내가 설명을 드리려고 가까이 다가간 순간, 일부러 태운 듯 살짝 까무잡잡한 맨 살이 자꾸만 시야에 들어와서 다시 평정심을 잃을 뻔 했다. 일부러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설명을 해야 했다.
자신의 개성을 나타내는 방법 중 하나로 과감한 옷차림을 선택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도 한때 몸매에 자신이 있을 무렵에는 몸에 딱 달라붙는 꽤나 과감한 옷을 입고 여름을 지내는 걸 즐겼다. 속이 다 비치는 민소매 셔츠를 입고 다닌 적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내 몸을 쳐다보는 시선을 오히려 즐겼다. 왜냐하면 그때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요즘 인스타그램을 포함해 SNS에서 레깅스와 크롭톱 같은 과감한 패션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보면, 그래. 나도 한때는 저럴 때가 있었지 하면서 부러움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제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좀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는 경우는 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본인이 가장 잘 느낄텐데 말이다. 그런 시선들이 결코 기분이 좋지만은 않을텐데. 라고 생각하는 건 오히려 편견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 한 가지만 더 언급하자면 휴가지 그러니까 관광지였다면 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곳은 일상의 공간이 아닌 일탈의 공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 혼자 해외여행을 가서 브라를 착용하지 않고 과감하게 돌아다녔다는 글들을 읽은 기억이 나기도 한다. 나 역시도 여러 해 전에 아이들과 휴가를 갔다가 돌아오자 마자 어떤 모임에 참석했었는데, 그때 입고 있던 옷이 몸에 꽉 붙는 새빨간 민소매 셔츠였다. 몸매가 완전히 드러나는 옷이라 아마 보고 있던 여성들은 민망함을 느꼈나보다. 그때 한 여성 분이 내게 휴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바로 오시느라 옷도 못 갈아입고 오셨겠어요? 라고 물었다. 나는 못 갈아입은 것이 아니라 그냥 안 갈아입은 거였다. 그날 아침에 입은 옷이라 굳이 갈아입을 필요를 못 느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말을 듣고 보니 이 일상의 공간에서 이런 옷을 입는 건 다들 어색하게 느끼는 구나 하고 깨달았던 것이다.
뭐 어떤 옷을 입던 그건 옷 입는 사람의 자유다. 남이 뭐라 할 영역은 절대 아니다. 그저 그 정도에 조금 당황했던 내가 반성해야 할 일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