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떠, 작은 아이가 머리 맡에 놓아둔 색종이 카네이션을 보고 오늘이 어버이날이구나 생각했다. 날짜 감각도 없이 살고 있구나. 하루가 어찌 가는지, 일주일이 어찌 가는지, 한 달이 어찌 가는지 모르고 살고 있구나 싶었다. 숙취로 멍한 머리를 억지로 굴리며 오늘의 스케줄을 떠올려본다. 문득 어린이날은 휴일인데, 어버이날은 왜 휴일이 아니지 생각해본다. 그럼 스승의날도 휴일로 해야하나? 차라리 무슨날 무슨날을 다 휴일로 만들면 어떨까? 적게 일하고, 적게 쓰고, 많이 쉬고, 많이 놀고, 많이 사색하는 삶을 살고 싶다. 바람은 이렇지만 현실은 그나마 적게 쓰는 것 외에는 실현가능성이 없다. 그것도 적게 버니까 적게 쓸 수 밖에 없어서 그런거지 적정하게 버는데 적게 쓰는 건 아디다. 요즘은 적게 벌면서도 자꾸 많이 쓰게 되어 위기감을 느낀다.


씻고 나와 책상 위에서 큰아이의 입체엽서를 발견했다. 빨간 카네이션을 만들어 붙여놓고 짧은 글을 적어놓았다. 나도 모르게 입가가 올라간다. 요즘 유일하게 웃는 시간은 아이들을 생각할 때와 아이들과 함께 지낼 때 뿐이다. 외출복을 입고, 시계를 차다가 노란 리본을 발견했다. 세월호 유가족과 어버이날이라는 두 단어가 겹쳐지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숨이 나왔다. 이런 게 삶인가? 이런 게 삶이어야 하나? 이런 세상을 살아야 하나? 시계를 차다말고 털썩 의자에 주저않는다.


일주일 전, 그러니까 노동절 밤 안국역 근처에서 경찰에게 맞았던 기억이 난다. 캡사이신을 눈에 정통으로 맞기를 여러번, 최루액을 섞은 물대포를 맞았고, 비닐 우비가 너덜너덜 찢어지도록 경찰과 몸싸움을 했고, 그 와중에 한 경찰이 유가족을 붙잡고 흔드는 걸 막다가 얼굴을 한대 맞았다. 정확히 말하면 스쳐맞았다고 해야하나. 안경이 벗겨져 땅에 떨어질 뻔 했으나 다행히 가방끈에 안경테가 걸려 대롱거리다가 떨어지는 걸 붙잡았다. 맞아서 아프지는 않았으나 화가 났다. 감히 경찰이 시민에게 주먹을 휘둘러? 그것도 얼굴에? 지금도 그 경찰의 이죽거리는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헬멧 속에서 나를 노려보며 비웃던 그 표정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새벽에 경찰이 밀고 들어와 차도에서 인도로 밀렸을 때, 함께 있던 친구가 앞으로 나가려던 나를 붙잡았다. "내일 아이 생일이라며? 아빠가 생일은 챙겨줘야지. 연행되면 어쩌려구?" 평소라면 절대 연행 걱정 말라고, 20년 넘게 운동하면서 집회에서 연행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큰소리 쳤겠지만, 그 순간만은 나도 모르게 순순히 친구 말을 듣고 뒤로 빠졌다. 그래 아이 생일을 유치장에 갇혀서 보낼 순 없지.


4월 18일 밤, 나는 운 좋게 광화문 여러개의 차벽을 통과하여 광화문 앞 유가족이 농성하던 곳까지 넘어왔다. 광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들 중에 거기까지 온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백여명? 많이 잡아도 이백명 가량 될 듯했다. 내가 넘어오고 나서 대략 30분 후에 경찰은 병력을 밀어붙여 시위대를 저쪽 차벽 안쪽으로 몰아냈고, 사람들이 간신히 넘어오던 통로는 막혔다. 유가족과 거기까지 넘어왔던 인원들은 청와대로 행진을 시도했는데, 경복궁 담벼락 모퉁이 쪽에서 경찰 병력에 가로막혀 더이상 나가아지 못했다. 얼마동안 경찰들과 대치해 앉아 계시던 유가족들 옆에 함께 앉아 있었다. 그 분들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걸 들으며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 분들이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 이런 말도 안되는 뭐같은 상황에 처해있지만, 이 사람들도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면 되었을, 우리 주변을 스쳐갔을 그런 사람들이었다.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고, 실종자를 건져내고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오늘 어버이날이자 자신의 생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세월호 유가족 뉴스가 나왔다. 아침의 그 무거운 마음이 다시 몇 백배 더 무거워졌다. 그저 참담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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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은 사람


어제 은행에 갔다가 창구 담당자가 한 마디 한다. "혹시 이사장님 동생분이세요? 분위기가 닮았어요." 동네에서 이런 저런 사람들과 닮았다는 말을 종종 들었지만, 이사장님과 닮았다는 말은 처음이다. 이사장님께 전하면 과연 뭐라고 하실지 궁금하다. 암튼 그 덕분인지 어떤지 몰라도 필요한 서류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는데도, 일단 문서를 발급받는데 성공했다. 빠진 서류는 나중에 제출하기로 했다.


동네에서 자주 만나는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형이 한 명 있다. 그 형도 나를 무척 아끼는 편이라 둘이 만나면 별 말 없이 그저 술잔만 기울여도 마음이 편안한 그런 사람이다.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둘이 닮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한 술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닮았다는 얘기를 여러번 들었고, 또 어떤 선배님은 그 형을 나로 착각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적도 있다.(그 전에 그 선배님께 책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그 형은 나보다 본인이 훨씬 더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나와 닮았다는 얘길 들으면 꽤 기분이 나쁜가보다. 한번은 그 형의 딸과 우리집 딸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누가 더 잘 생겼는지를 묻더라. 우선 우리 딸들에게 물었다. "잘봐. 너네 아빠하고 삼촌 중에 누가 더 잘 생겼어?" 큰아이는 조금 생각해보더니 "아빠!"라고 답했고, 작은아이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아빠!"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 형은 "아니, 아빠라고 편들지 말고, 객관적으로 잘 생각해보라~"고 기대했던 답이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큰아이는 "그래도 아빠."라고 했고, 작은아이는 "객관적으로가 뭐야?" 라고 물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 그 형은 이제 자신의 딸에게 물었다. "아빠랑 여기 감은빛이랑 둘 중에 누가 더 잘 생겼어?" 그 아이는 장난기 머금은 웃음을 지으며 한참을 생각하더니 "감은빛!" 이라고 답하고 도망갔다. 부모에게 '객관적으로' 라는 요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늘 우리 엄마, 아빠가 제일 멋지다고 생각하며 자랐으니까. 그 집 아이는 아마 아빠랑 장난치려고 그런 답을 했을 것이다. 


녹색당이 창당하던 해에 청소년 당원으로 가입한 동생이 하나 있다. 동생이라고 표현하지만 나와 나이차이가 스무살 가까이나는 친구라서 본인은 나를 '쌤'이란 호칭으로 부른다. 아무리 '형'이라고 부르라고 해도 듣지 않는다. 이 친구와도 닮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괜히 미안한 기분이 든다. 싱싱하고 파릇파릇한 젊은 친구가 늙은 사람과 비교 당하고, 닮았다는 말을 들으니 말이다. 한번은 앞서 얘기한 형과 나와 이 친구까지 셋이 한 자리에서 술을 마시는데, 누군가 "셋이 너무 닮았다!" 고 말했다. 제일 기분나빠 한 것은 그 형이었다. 정장 가장 기분나빠해야 할 녀석은 (속으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그저 가만히 웃고만 있었다.


작년 지방선거 때, 우리 동네에서 기초의원 후보로 나온 후배 선거운동을 함께 할 당시에는, 후보와 닮았다는 소리도 들었다. 또 후보 없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선거운동을 할 때, "혹시 후보 본인이시냐?" 는 질문도 가끔 들었다. 재밌는 건 선거운동을 위해 찍은 프로필 사진이 너무 잘 나와서 대부분 후보를 한번 보고 사진을 한번 보고 고개를 갸웃 했다는 거. 후보가 늘 "사진이 저랑 많이 다르죠."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잘 생각해보면 나와 닮았다고 거론된 사람들 대부분 안경을 꼈다는 것 외에는 닮은 점이 그닥 없다. 분위기가 조금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 수는 있겠다. 그건 아마 우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느끼기에 그럴 수 있는데, 우리를 잘 아는 사람들도 닮았다고 하는 건 좀 이해가 안되는 대목이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의 필독서






 










오래 기다렸던 책이 나왔다. 사실 책이 나오자마자 멋지게 소개해야지 맘먹고 있었는데, 정작 기다렸던 책이 나왔을 때 한창 바빠서 알라딘에 들어올 짬이 없었다. 멋진 서평을 써야지 생각했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으니 더 늦기 전에 소개라도 해야겠다.


책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최초의 책에서부터 고대, 중세,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책도 좋아하고, 역사도 좋아하는데 무려 책의 역사를 다룬 책이라니! 이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고, 널리 소개해야 할 책이다!


개인적으로 중세 시대 이야기들이 참 재미있었다. 중세 수도원의 필사실 풍경과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이 퍼지는 과정, 르네상스 시대 필사본과 활판인쇄본이 서로 공존하다가 마침내 활판인쇄본이 대세로 굳어지고, 필사본이 쇠락의 길을 걷는 과정 등이 흥미로웠다.


책을 좋아하는 알라디너들에게 무조건 권하고 싶은 책이다! 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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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3


이미 퇴근시간이 지났으나 회의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을 돌보는 날이라 방과후협동조합에서 기다리고 있을 큰아이와 어린이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작은아이가 자꾸 눈에 아른거리는데, 마음은 벌써 아이들에게 달려가고 있는데, 몸은 여기 회의실에 붙잡혀 있다. 게다가 내일 아침 사무실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공증변호사 사무실로 가야 하는데, 아직 필요한 서류들을 다 챙기지도 못했다. 


시간을 두 시간 전으로 돌리면, 나는 내일 공증받으러 가는데 필요한 수십가지 서류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미 회의 시작 시간은 지나있었다. 연대단위 회의라 어쩔수 없이 빠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장 내일 공증을 받지 못하면 큰일이었다. 그런데 몇 통의 전화와 문자가 왔다. 해당 연대단위 회의에 내가 여러차례 빠졌고, 다음부터는 열심히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몇 번이나 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담당자의 연락이었다. 그러고보니 그 연대단위 회의는 항상 바쁜날 잡혀서 늘 회의 도중에 참석하거나, 아예 빠졌던 기억이 났다. 마지막 문자는 회의 정족수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정도까지 연락을 받고도 안 가면 다시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부랴부랴 하던 일을 멈추고 회의실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한창 바쁜 와중에 억지로 회의에 참석한 내 기준에는 회의가 비효율적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들 각 단체를 대표하는 바쁜 사람들일텐데, 빨리 결정사항들을 정하고, 필요한 일은 역할분담을 하고 논의를 끝내면 좋으련만, 이야기는 자꾸만 산으로 갔다가, 바다로 갔다가, 갈피를 못 잡고 헤메었다. 시계를 보았다. 벌써 6시 20분, 담당자의 수 차례 연락과 무언의 압박으로 억지로 참석한 회의라 웬만하면 도중에 나가지 않고 끝을 보려고 했으나 이젠 물리적으로 너무 늦은 시간이 되어버렸다. 지금 아이들을 데리러 출발해도 늦을텐데, 사무실에는 챙겨야할, 그러나 정리되지 않은 서류뭉치가 잔뜩 있었다.


조용히 회의실을 빠져나와 사무실에 들어왔다. 서류뭉치들을 보다가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빠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다. 물 한 컵을 마시면서 마음을 달랬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우연히 일이 몰렸을 뿐이고, 회의 시간과 바쁜 일정이 겹쳤을 뿐이다. 회의 참석하라고 몇 번이나 연락했던 담당자의 잘못은 절대 아니며, 회의를 효율적으로 진행 못한 진행자의 잘못도 절대 아니다.


서류뭉치를 정리하다가 시계를 보니 6시 40분, 도무지 이 일을 끝낼 수 없을 것 같아, 전화를 걸어 내일 아침 일찍 방문하려했던 약속을 1시간 반 뒤로 미뤘다. 출근해서 준비를 마치고 가면 그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결국 7시가 다 되어서야 사무실을 박차고 나서 버스 정류장으로 뛰었다. 벌써 큰아이는 몇 번이나 전화를 해왔다. 작은아이 어린이집으로 가 있으라고, 아빠가 곧 간다고 말한지 15분이 넘게 지났다. 버스가 아무리 빨리 가도 어린이집에 가면 7시 반은 될 터, 아이들은 분명 배가 고프다고 한 마디씩 할 것이다.


뛰면서 생각했다. 이건 아마도 내 탓일 거라고. 처음부터 이런 일이 생길줄 예상하고, 아이들 돌보는 날을 바꿨어야 하지 않을까? 처음부터 오늘 서류작업을 다 끝내지 못할걸 예상하고, 약속을 뒤로 잡았어야 하지 않을까? 처음부터 회의가 길어질 거라 예상하고, 일찍 참석했다가 비교적 눈치를 덜 보고 도중에 나왔어야 하지 않을까? 무수한 가정으로 머리는 복잡하고, 도로는 차들로 복잡하다. 아마도 이건 악몽일거라고 생각해본다. 아니 이 삶 자체가 악몽이 아닐까?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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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03-31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가 아니라 그 심정에 대한 공감입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에 너무 마음쓰지마시고 힘내세요.^^

감은빛 2015-04-01 11:25   좋아요 0 | URL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이 아니라 제 잘못이죠.
일정 조정을 잘못했으니까요.
그렇게 되리라 예상못했기에 억울하지만, 그래도 제 잘못이긴 하죠.

양철나무꾼 2015-03-31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바쁘고 씩씩하게 사시네요. 님의 오늘이 4월1일 맞이 행사 였음 좋겠어여~--;

감은빛 2015-04-01 11:30   좋아요 0 | URL
바쁘긴 하지만 씩씩한지는 잘 모르겠네요.
올해들어 체력도 확 떨어지고, 일의 능률도 안 오르는 것이 느껴져요.
흑흑~

그리고 이 이야기는 어제껀 아니고, 한 열흘쯤 전에 있었던 일이예요.
요샌 바빠서 바로바로 글을 쓸 여유도 없네요.

양철님, 말씀 고맙습니다! ^^

cyrus 2015-03-3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지 않은 일에 너무 자책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히려 스트레스만 더 쌓일 겁니다.

감은빛 2015-04-01 11:32   좋아요 0 | URL
자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투정이나 신세한탄 같은 느낌으로 적었어요.
시루스님, 말씀 고맙습니다! ^^

해피북 2015-04-01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맥거핀님 말씀처럼 심정에 대한 공감으로 꾸욱 누르구 갑니다...어줍짢은 위안일테지만 힘.....힘내셔요^~^

감은빛 2015-04-01 11:34   좋아요 0 | URL
어줍잖은 위안이라니요?
이런 말씀 한 마디가 아주 큰 힘이 되는걸요!
덕분에 조금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해피북님, 말씀 고맙습니다! ^^
 


아마도 2


하필 바쁜 날에 컴퓨터가 말썽이었다. 그것도 새로 구매한 컴퓨터가 말이다. 일터에서 컴퓨터를 새로 사야해서 아는 사람을 통해 SSD를 달아 성능을 높인 컴퓨터를 구매했다. SSD를 한번도 써본 적이 없고, 심지어 비교적 괜찮은 성능의 컴퓨터도 별로 써본 적이 없다. 집에서도, 그간 거쳐왔던 다양한 일터들에서도 내가 만져온 컴퓨터는 대개 저사양의 컴퓨터로 웹서핑과 문서 작업은 문제없지만, 가끔 이미지 작업을 하려면 느려터지고, 방대한 데이터를 담은 엑셀이나 엑세스를 돌리면 느려지는 그런 컴퓨터였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 받을 컴퓨터에 대한 기대가 살짝 컸다. 게다가 컴퓨터를 조립해서 설치해주기로 한 사람도 SSD를 처음 써보는 거라면 아마 분명 놀랄거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오지 않고, 다른 사람이 왔다. 갑자기 바쁘다며 지금 보내는 사람이 알아서 잘 해줄거라고 했다. 난 데이터 백업도 받아야 하고, 기본 문서 프로그램 외에 추가로 몇몇 프로그램을 깔아달라고 부탁까지 해놓은 상황이었는데, 그 외에도 이것저것 부탁해놓은 것이 많았는데, 컴퓨터를 갖고 온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데이터 백업도 알아서 받아 주시기로 했다고 말하니, 한숨부터 내쉰다. 바쁜데 데이터 백업 받으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얘기다. 뭔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하필 그날은 급한 문서 작업이 있었고, 외부 회의가 하나, 외부 미팅이 하나 있었다. 데이터 백업을 다 받고 설치를 마칠때까지 옆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알아서 해놓고 갈테니 볼일 보시라는 사람의 말을 신뢰하지는 못해 외부 약속을 다 제끼고 옆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나 생각했지만, 그 일들도 중요한 일이라 일단 사무실을 나서야 했다. 미팅이 살짝 길어졌고, 회의 시간에는 이미 늦어서 외부 회의는 미안하지만 못 가겠다고 전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도중에 컴퓨터 설치를 마친 그 사람이 다 끝내놓고 간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도착해보니 새 컴퓨터가 옛 컴퓨터 자리에 놓여 있었다.


분명 사무실을 나서기 전에 데이터 백업 받으면서 인증서를 꼭 옮겨 달라고 부탁했건만, 업무를 보다보니 인증서를 불러올 수 없었다. 인증서가 포함된 폴더만 (그러니까 데이터만) 옮겨놓은 것 같았다. 다시 옛 컴퓨터를 갖고와서 선들을 다 갈아 끼우고 시동을 걸어 인증서를 제대로 옮겼다. 일을 제대로 하려면 문서 프로그램 외에도 이런저런 프로그램들이 필요한데, 애초에 컴퓨터 구매를 결정할 당시에 부탁했던 것이 거의 깔려있지 않았다. 실망스러웠다. 이 바쁜 날에 프로그램을 하나하나 구해서 깔려니 머리가 아팠다.


문제가 생긴 건 거기서부터였다. 필요한 프로그램을 하나 웹에서 구해 깔았는데, 설치파일에 바이러스와 스파이웨어와 악성코드가 잔뜩 들어있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익스플로러 창이 수십개가 떳다! 부랴부랴 제어판에서 의심되는 놈들을 지우고, 백신 프로그램을 돌리고, 시스템 최적화를 시키고,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봤다. 간신히 몇 개는 지웠는데, 어딘가에 몇 놈들이 숨어 있는 모양이다. 인터넷을 하다보면 자꾸 광고창을 띄워댄다. 뭐 일단 거기까지는 참았다. 바쁜 날이니까 어서 할 일을 처리해야지 하고, 업무상 필요한 정부 사이트나 은행 사이트 등을 들어갈 때마다 보안 프로그램 더미(정말 더미라는 말이 어울릴정도로 한 사이트마다 대여섯개 이상이었다.)를 깔아야했다. 문제는 아까 실수로 깔아버린 바이러스가 영향을 미친 탓인지 보안프로그램이 설치되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오늘 업무를 끝내려면 이 사이트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건만 보안프로그램 설치에서 자꾸 멈추니 미칠 지경이었다. 이미 퇴근시간은 지났고, 컴퓨터와 씨름하느라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주위에서 일하던 분들도 모두 퇴근하고 사무실은 조용했다.


아무리 야근이 길어지더라도 해결해놓고 집에 가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오늘 이걸 해결해놓지 못하면 당장 내일 아침부터 일을 할 수 없었다. 안그래도 오늘 못 끝낸 일이 밀려 있는데, 내일 해야할 일도 산더미다. 하지만 의지와 달리 나는 컴퓨터를 그리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의심되는 녀석들을 검색해서 지우고 또 지우려고 애써봐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백신은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밤이 늦어서야 결국 포기하고, 낮에 끝내지 못한 문서작업을 하다가 새벽 3시 무렵 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


다음날 아침 거울을 보니, 입술이 부르텄다. 피곤해서 그런 것이다. 최근 일이 많기도 했고, 스트레스가 많아서 잠을 잘 자지 못한데다, 어제 컴퓨터와 씨름하고 새벽까지 일했으니 그럴만 했다. 출근하면서 처음 컴퓨터 구매를 의뢰했던 사람에게 연락했다. 문제가 생겼으니, 꼭 당신이 와서 해결해달라고 강조했다. 그는 어제 자신이 못와서 미안하다며 꼭 오겠다고 했다. 빨리 와서 해결해야 내가 일을 할 수 있으니, 빨리 오라고 했으나, 그는 오후 2시 반쯤 왔다. 확실히 전문가의 손은 다르긴 했다. 어제 밤 늦게까지 아무리 씨름해도 잡아내지 못했던 나쁜 놈들을 그는 하나씩 하나씩 잡아나갔다. 백신도 잘 듣는 외국 아이로 새로 깔아주고, 쓸모없는 국산 백신은 지웠다. 그리고 내가 필요하다고 부탁했던 몇 개의 프로그램을 깔았다. 이러는 동안 제법 시간이 걸렸고, 그가 컴퓨터를 고치는 동안 나는 계속 마음이 급했다. 저녁에는 이사회 회의가 있어서 안건 준비를 해야했고, 어제와 오늘 끝내야 할 일도 아직 손을 대지 못했다.


바이러스를 잡았는데도, 어제 방문했던 사이트들에서는 여전히 같은 현상이 반복되었다. 업무상 자주 가는 사이트가 대략 10개 가량 되는데, 이들 대부분에 접속할 수가 없었다. 저주스러운 우리나라 웹사이트의 각종 보안 프로그램들! 왜 크롬에선 업무상 필요한 사이트에 접속할 수 없게 만들어놓은 거냐구! 그는 익스플로러 버전이 낮아서 그런 것일 수 있다고 업데이트를 시켰다. 그런데 이 업데이트가 또 시간을 엄청 잡아먹었다. 그는 더이상 머무를 수 없다고, 아마 업데이트가 끝나면 잘 될거라고 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익스플로러를 업데이트 하는 동안 부랴부랴 이사회 회의자료를 준비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익스플로러 업데이트를 마쳤고, 재부팅 후에 접속해보니 필요한 사이트마다 열심히 보안 프로그램을 깔아대고 나서 접속이 되었다. 어제와 오늘 해야할 업무를 하다보니 이미 퇴근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이 날은 내가 아이들을 돌보는 날로, 이사회 회의 장소로 아이들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애초 계획은 여유있게 퇴근해서 아이들 데리고 회의 장소 근처로 이동해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아직 일을 다 끝내지 못했는데, 큰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방과후 교실 마쳤다고, 집으로 가면 되는지를 물었다. 나는 집으로 가지말고 잠시 거기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어린이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작은 아이도 걱정이었다. 빨리 가서 데리고 나와야 할텐데, 내가 늦게 가면 방과후 교실 선생님과 어린이집 선생님 퇴근이 늦어질텐데.


얼른 일을 마무리하고, 거의 다 써놓았던 이사회 회의록을 마무리하고, 출력해서 스테이플러로 찍고, 서둘러 가방을 챙겨들고 뛰쳐 나왔다. 급한 마음에 택시를 잡아탔다. 아까 미리 큰 아이에게 작은 아이 어린이집으로 가 있으라고 했기 때문에 두 녀석은 어린이집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골목을 걸어나왔다. 회의 시간에 맞추려면 제대로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근처 국수집에 들어가 빨리 나오는 국수를 시켜 후루룩 먹었다. 자꾸만 딴짓하는 아이들에게 칭찬과 협박을 번갈아 해가며 간신히 그릇을 비우게 만들고 버스를 탔다. 계산상으로는 회의 시간에서 5~10분 정도 늦을 듯. 문자를 보내 아이들 밥 먹이고 데려가느라 조금 늦는다고 연락했다. 그제서야 조금 긴장이 풀렸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지나온 시간이 마치 악몽처럼 느껴졌다.


무사히 회의를 마쳤는데, 이사 중에 한 분이 내 입술을 가르키며 너무 일이 많아 피곤해서 그런 거냐고 물었다. 속으로는 어제와 오늘 있었던 이 사태를 자세히 설명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문제가 생겨 야근을 했다고만 답했다. 그런데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이사 한 분이 일터 일 때문에 피곤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일 때문에 잠을 못 잔거 아니냐고 한 마디 했다. 순간 억울한 감정이 확 솟구쳤다. 억울했지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고, 설명할 기운도 없었다. 다만 그렇지 않고, 일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갑자기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겨 이렇게 된 거라고 짧게 말하고 말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오니 시간이 많이 늦었다. 내일 학교도 가야하고, 어린이집도 가야하는데, 늦게까지 끌고 다녀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작은 녀석은 버스에서 잠들어 버려 안고 왔더니, 집에 와서는 잠이 깨버렸다고, 더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나는 어쨌거나 문제를 해결했다는 후련함과 긴장과 스트레스로 보낸 지난 시간에 대한 보상, 그리고 마지막에 들었던 한 마디 때문에 상한 기분을 달래려고 맥주를 한 잔 하고 아이들 곁에 누웠다.


아마도 내가 컴퓨터를 좀 더 잘 다룰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겠지, 아마도 내가 좀 더 일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면 좀 더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겠지, 아마도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면 그 분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겠지. 머리속에서 자꾸 떠오르는 아마도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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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싸리 2015-02-26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컴맹인 저 조차도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힘든일을 겪으신듯. 기운내십사. 일은 안하거나 적게 하는게 좋은데 요즘은 `단체`들도 만만치 않죠. 혼자하면 모를까요.

감은빛 2015-02-26 20:52   좋아요 0 | URL
요즘이라서가 아니라 예전부터 단체들은 일이 많았어요.
사람은 없는데 다들 일 욕심은 많은 곳이죠.
그냥 바쁜 것 자체는 상관없는데,
이게 참 어이없고 황당한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사람을 힘빠지게 만들어서 그게 더 힘들어요.

만병통치약 2015-02-26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에요. 저도 지금 컴퓨터가 점점 느려지고 있어 포맷하고 싶지만 ...그냥 느리게 살랍니다.

감은빛 2015-02-26 20:53   좋아요 0 | URL
귀찮죠. 그 맘 백번 이해합니다.
급할 때 컴이 말을 안들으면 도무지 방법이 없더라구요. ㅠㅠ

마녀고양이 2015-02-27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휴, 너무 고생하셨네요...
평소에는 중요함을 모르지만, 컴퓨터와 우리의 생활에 워낙 깊숙히 들어와 있어서
안 그래도 바쁜 일정에 컴퓨터가 바이러스까지 걸리는 등의 고생을 시키면 정말 짜증날 법해요.

일을 조금만 더 꼼꼼히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사도 그렇고, 집 수리도 그렇고, 물건 하나 살 때조차도. ㅠㅠ
 

아마도


회의를 마쳤을 때가 대략 9시 40분쯤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회의실 정리를 마친 후 사무실로 돌아가 남은 일을 마무리 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바로 모니터에 집중하기에는 눈과 머리가 너무 피곤했다. 잠시 옥상에 올라가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며 회의 시간의 긴장감을 날려버리고, 차가운 물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킨 후에야 비로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문서를 작성하다가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다시 문서를 타이핑하는데 문득 책상 위에 어지럽게 흩어진 서류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던 일을 중단하고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중요도와 얼마나 자주 살펴보는지를 기준으로 여기저기 분류헤서 꽂았다. 어떤 문서를 손에 쥐고는 한참 고민을 하기도 했다. 얘는 어디로 분류해야 하는 걸까? 금방 답이 떠오르지 않아, 일단 보류해두기로 하고, 그대로 책상 위에 던져 놓았다. 언젠가는 적절한 답이 생각나겠지. 서류를 대충 치우고나니 이젠 책상 아래에 쌓아놓은 쓰레기들이 눈에 띄었다. 재활용을 종류별로 나누고, 일반쓰레기까지 싹 치웠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돌아와 다시 모니터를 보는데, 아까 집중해서 쓰던 문서가 낯설다.


다시 일에 집중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한참 일을 하는데, 이번에는 손목시계 알람이 울렸다. 평소 새벽까지 야근도 잦고, 새벽까지 술자리도 잦은 편이라, 늘 피곤하고 힘들었는데,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해도, 오랫동안 굳어진 일하는 습관과 술마시는 습관이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어느날 술자리에서 12시를 넘기면서, 앞으로 12시가 넘으면 집에 들어가자는 마음에 손목시계 알람을 12시로 맞췄다. 신기한 게 이 시계는 알람을 맞추거나 취소하기가 쉽지 않은 편인데, 그 술기운에도 알람을 성공적으로 맞췄다는 거다. 그리고 지금은 그 알람을 취소하고 싶어도 방법을 모르겠어서 못하는 중이다. 몇 번이나 만지다가 잘 안되어 포기하고 말았다. 물론 집안 어딘가에 설명서가 처박혀 있을테고, 웹에서 검색을 해볼 수도 있을텐데, 귀찮아서 아직 거기까지는 시도해보지 않았다. 어이없는 건 12시엔 집에 가야겠다는 마음에 알람을 맞춘 그날도 새벽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는 거다. 대체 알람은 왜 맞춘거냐?


암튼 12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리자 퍼뜩 든 생각은 버스 막차 시간이었다. 아직 막차 시간을 찾아보지 않아 정확한 시간은 알지 못하지만 12시 반 정도까지는 있으리라 여겼다. 일은 아직 남았지만 눈이 피곤했고, 어영부영하다가 택시를 타느니, 지금 버스를 타자 싶어서 스마트폰 앱으로 근처 버스 정류장 도착 시간을 찾아봤다. 어! 정확한 시간은 보지 못했지만 집으로 가는 버스가 2분 몇십초 안에 도착한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손이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쓰던 문서를 저장하고, 열린 웹브라우저와 탐색기와 프로그램들을 닫고, 컴퓨터를 끄고, 보던 자료와 서류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겉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 들고 혹시 빠뜨린 것이 없는지 빠르게 살폈다. 대충 살피는 시선에 괜찮아 보이길래, 불을 끄고 문을 잠그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아직 2분이 지나지는 않았겠지. 버스 정류장까지 걸으면 3~4분이 걸리지만, 뛰면 1분이 채 안 걸린다. 혹시 간발의 차로 버스를 놓칠까봐 뜀박질은 점점 더 빨라진다.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타야할 버스가 도착했다. 12시가 넘었음에도 버스에는 사람이 많았다. 앞쪽엔 자리가 없고, 뒤쪽 2명씩 앉는 자리들에는 죄다 여성들이 한 명씩만 앉아 있었다. 남성인 내가 선뜻 가서 앉기가 조금 망설여졌는데, 버스를 타자마자 아침부터 일에 매달렸던 피로와 길었던 회의의 피로 그리고 방금 전력질주한 후유증이 밀려와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밤에는 버스가 속력을 더 내는 편이고, 난폭운전을 하는 경향이 더 짙어서 몸이 더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여기까지 빠르게 생각하고 내린 결론은 비교적 나이가 있는 여성 옆자리에 앉아야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나이를 가늠하고자 승객들을 빤히 살펴볼 용기는 또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대충 복도쪽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아니나다를까 옆자리 여성이 흘깃 나를 보는 듯한 몸짓과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하고 폰을 꺼내 밀린 까똑과 텔레그램과 밴드와 페이스북 등등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려 골목길을 걸어올라가면서 크게 한숨을 내쉰다. 나 왜 이러고 사는거니라는 질문이 떠올랐지만 머리를 흔들어 떨쳐내고, 씩씩하게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를 산다. 이런 기분으로는 쉽게 잠들지 못한다. 씻고 맥주라도 한 잔 해야 그나마 기분이 좀 풀릴거다. 아마도.



이산화탄소에 대한 오해와 편견















어려서도 그랬고, 지금도 (비교적) 과학에는 관심이 없는 편이다. 사실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은 흥미를 느끼기 어려웠고, 과학에 흥미를 갖게 해줄 책은 만나보지 못했다. 아주 뒤늦게서야 그래도 과학을 좀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몇몇 책들을 통해 서서히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과학적 기초지식 없이, 다양한 지구 환경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 환경운동가로서 또 녹색당 당원으로서 생태주의와 다양한 환경 문제에 대한 실태와 해법은 평생 공부해야 할 숙제라고 여기고 있는데, 조금 깊게 들어가면 자주 막히곤 한다. 유난히 과학에 대한 기초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는 이산화탄소를 그저 기후변화의 주범으로만 여겼다. 없애야 하고, 없어져야 할 존재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부제가 '지질권과 생물권의 중계자'다. 이게 무슨 뜻이야? 책을 조금 살펴보니, 내가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새삼 깨닫는다. 이산화탄소는 생명의 근원이었다. 만약 이산화탄소가 없었다면 이 지구상에 생명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책의 맨 첫 장은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에서 '탄소'를 발췌해 실었다. 이산화탄소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로서 가장 적절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이후 이런저런 저자들이 각자의 전공분야에 따라 흥미로운 내용들을 설명한다. 이 책의 방대한 내용을 소개하기에는 지금 너무 피곤하고, 지친다. 게다가 어서 맥주도 마시고 자야지.


책의 맨 마지막 장은 흥미롭게도 화성을 여행하는 내용이다. 최근 읽었던 SF 단편 소설 중에 걸어서 달을 한 바퀴 도는 내용이 있었던 걸 떠올렸는데, 그 작품만큼 소설적 재미를 주지는 못하지만 지적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하는 글이었다. 화성을 배경으로 하는 유명한 SF 영화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다음에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결론은 이거다. 이산화탄소야, 오해해서 미안해! 널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편견에 사로잡혀 너를 원망한 나를 용서하지 말아줘! 흑흑!

(나 왜 이러니? 잠이 모자라서 그런가? 아무래도 빨리 자야할 것 같다. 구텐 나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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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싸리 2015-02-26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아직도 `금배`를 태우시다니 ㅎㅎ
저도 등산용 시곌 하나 가지고 있는데요 이게 설명서가 A4용지로 너댓장 됩니다. 알람 셋팅해 논걸 해제하기가 만만치 않아요. 그래서 대충 다닙니다. 저는 예전 직장다닐때 오후 네시에 알람을 맞춰놓았었어요. 그때쯤이면 이제 일 고만하자 라는 뜻으로다가..ㅎㅎ
C(탄소)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마 세상 모든 물질중 이 C가 안들어간 것은 없을거여요. ㅎㅎ

감은빛 2015-02-26 20:50   좋아요 0 | URL
쉽싸리님, 저는 담배를 많이 피우는 편은 아니라서요.
평소에는 아예 안 피는 날도 많고, 가끔 하루 한 두 개비 피우기도 합니다.
주로 스트레스 때문이구요.
술을 마시는 날에는 양이 좀 늘어나지만, 그래도 딱 술 마시는 동안만 피우니까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담배값이 너무 올라서 살때마다 한참을 고민하긴 해요.

오후 4시에 일을 고만하자는 생각을 하시다니!
진심 존경스럽습니다! 그 직장 어딘가요? ^^
저는 오늘도 야근 중입니다. 이게 벌써 며칠 연속인지도 기억나지 않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