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회의를 마쳤을 때가 대략 9시 40분쯤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회의실 정리를 마친 후 사무실로 돌아가 남은 일을 마무리 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바로 모니터에 집중하기에는 눈과 머리가 너무 피곤했다. 잠시 옥상에 올라가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며 회의 시간의 긴장감을 날려버리고, 차가운 물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킨 후에야 비로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문서를 작성하다가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다시 문서를 타이핑하는데 문득 책상 위에 어지럽게 흩어진 서류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던 일을 중단하고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중요도와 얼마나 자주 살펴보는지를 기준으로 여기저기 분류헤서 꽂았다. 어떤 문서를 손에 쥐고는 한참 고민을 하기도 했다. 얘는 어디로 분류해야 하는 걸까? 금방 답이 떠오르지 않아, 일단 보류해두기로 하고, 그대로 책상 위에 던져 놓았다. 언젠가는 적절한 답이 생각나겠지. 서류를 대충 치우고나니 이젠 책상 아래에 쌓아놓은 쓰레기들이 눈에 띄었다. 재활용을 종류별로 나누고, 일반쓰레기까지 싹 치웠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돌아와 다시 모니터를 보는데, 아까 집중해서 쓰던 문서가 낯설다.


다시 일에 집중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한참 일을 하는데, 이번에는 손목시계 알람이 울렸다. 평소 새벽까지 야근도 잦고, 새벽까지 술자리도 잦은 편이라, 늘 피곤하고 힘들었는데,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해도, 오랫동안 굳어진 일하는 습관과 술마시는 습관이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어느날 술자리에서 12시를 넘기면서, 앞으로 12시가 넘으면 집에 들어가자는 마음에 손목시계 알람을 12시로 맞췄다. 신기한 게 이 시계는 알람을 맞추거나 취소하기가 쉽지 않은 편인데, 그 술기운에도 알람을 성공적으로 맞췄다는 거다. 그리고 지금은 그 알람을 취소하고 싶어도 방법을 모르겠어서 못하는 중이다. 몇 번이나 만지다가 잘 안되어 포기하고 말았다. 물론 집안 어딘가에 설명서가 처박혀 있을테고, 웹에서 검색을 해볼 수도 있을텐데, 귀찮아서 아직 거기까지는 시도해보지 않았다. 어이없는 건 12시엔 집에 가야겠다는 마음에 알람을 맞춘 그날도 새벽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는 거다. 대체 알람은 왜 맞춘거냐?


암튼 12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리자 퍼뜩 든 생각은 버스 막차 시간이었다. 아직 막차 시간을 찾아보지 않아 정확한 시간은 알지 못하지만 12시 반 정도까지는 있으리라 여겼다. 일은 아직 남았지만 눈이 피곤했고, 어영부영하다가 택시를 타느니, 지금 버스를 타자 싶어서 스마트폰 앱으로 근처 버스 정류장 도착 시간을 찾아봤다. 어! 정확한 시간은 보지 못했지만 집으로 가는 버스가 2분 몇십초 안에 도착한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손이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쓰던 문서를 저장하고, 열린 웹브라우저와 탐색기와 프로그램들을 닫고, 컴퓨터를 끄고, 보던 자료와 서류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겉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 들고 혹시 빠뜨린 것이 없는지 빠르게 살폈다. 대충 살피는 시선에 괜찮아 보이길래, 불을 끄고 문을 잠그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아직 2분이 지나지는 않았겠지. 버스 정류장까지 걸으면 3~4분이 걸리지만, 뛰면 1분이 채 안 걸린다. 혹시 간발의 차로 버스를 놓칠까봐 뜀박질은 점점 더 빨라진다.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타야할 버스가 도착했다. 12시가 넘었음에도 버스에는 사람이 많았다. 앞쪽엔 자리가 없고, 뒤쪽 2명씩 앉는 자리들에는 죄다 여성들이 한 명씩만 앉아 있었다. 남성인 내가 선뜻 가서 앉기가 조금 망설여졌는데, 버스를 타자마자 아침부터 일에 매달렸던 피로와 길었던 회의의 피로 그리고 방금 전력질주한 후유증이 밀려와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밤에는 버스가 속력을 더 내는 편이고, 난폭운전을 하는 경향이 더 짙어서 몸이 더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여기까지 빠르게 생각하고 내린 결론은 비교적 나이가 있는 여성 옆자리에 앉아야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나이를 가늠하고자 승객들을 빤히 살펴볼 용기는 또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대충 복도쪽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아니나다를까 옆자리 여성이 흘깃 나를 보는 듯한 몸짓과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하고 폰을 꺼내 밀린 까똑과 텔레그램과 밴드와 페이스북 등등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려 골목길을 걸어올라가면서 크게 한숨을 내쉰다. 나 왜 이러고 사는거니라는 질문이 떠올랐지만 머리를 흔들어 떨쳐내고, 씩씩하게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를 산다. 이런 기분으로는 쉽게 잠들지 못한다. 씻고 맥주라도 한 잔 해야 그나마 기분이 좀 풀릴거다. 아마도.



이산화탄소에 대한 오해와 편견















어려서도 그랬고, 지금도 (비교적) 과학에는 관심이 없는 편이다. 사실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은 흥미를 느끼기 어려웠고, 과학에 흥미를 갖게 해줄 책은 만나보지 못했다. 아주 뒤늦게서야 그래도 과학을 좀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몇몇 책들을 통해 서서히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과학적 기초지식 없이, 다양한 지구 환경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 환경운동가로서 또 녹색당 당원으로서 생태주의와 다양한 환경 문제에 대한 실태와 해법은 평생 공부해야 할 숙제라고 여기고 있는데, 조금 깊게 들어가면 자주 막히곤 한다. 유난히 과학에 대한 기초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는 이산화탄소를 그저 기후변화의 주범으로만 여겼다. 없애야 하고, 없어져야 할 존재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부제가 '지질권과 생물권의 중계자'다. 이게 무슨 뜻이야? 책을 조금 살펴보니, 내가 얼마나 무지했던가를 새삼 깨닫는다. 이산화탄소는 생명의 근원이었다. 만약 이산화탄소가 없었다면 이 지구상에 생명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책의 맨 첫 장은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에서 '탄소'를 발췌해 실었다. 이산화탄소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로서 가장 적절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이후 이런저런 저자들이 각자의 전공분야에 따라 흥미로운 내용들을 설명한다. 이 책의 방대한 내용을 소개하기에는 지금 너무 피곤하고, 지친다. 게다가 어서 맥주도 마시고 자야지.


책의 맨 마지막 장은 흥미롭게도 화성을 여행하는 내용이다. 최근 읽었던 SF 단편 소설 중에 걸어서 달을 한 바퀴 도는 내용이 있었던 걸 떠올렸는데, 그 작품만큼 소설적 재미를 주지는 못하지만 지적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하는 글이었다. 화성을 배경으로 하는 유명한 SF 영화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다음에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결론은 이거다. 이산화탄소야, 오해해서 미안해! 널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편견에 사로잡혀 너를 원망한 나를 용서하지 말아줘! 흑흑!

(나 왜 이러니? 잠이 모자라서 그런가? 아무래도 빨리 자야할 것 같다. 구텐 나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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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싸리 2015-02-26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아직도 `금배`를 태우시다니 ㅎㅎ
저도 등산용 시곌 하나 가지고 있는데요 이게 설명서가 A4용지로 너댓장 됩니다. 알람 셋팅해 논걸 해제하기가 만만치 않아요. 그래서 대충 다닙니다. 저는 예전 직장다닐때 오후 네시에 알람을 맞춰놓았었어요. 그때쯤이면 이제 일 고만하자 라는 뜻으로다가..ㅎㅎ
C(탄소)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마 세상 모든 물질중 이 C가 안들어간 것은 없을거여요. ㅎㅎ

감은빛 2015-02-26 20:50   좋아요 0 | URL
쉽싸리님, 저는 담배를 많이 피우는 편은 아니라서요.
평소에는 아예 안 피는 날도 많고, 가끔 하루 한 두 개비 피우기도 합니다.
주로 스트레스 때문이구요.
술을 마시는 날에는 양이 좀 늘어나지만, 그래도 딱 술 마시는 동안만 피우니까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담배값이 너무 올라서 살때마다 한참을 고민하긴 해요.

오후 4시에 일을 고만하자는 생각을 하시다니!
진심 존경스럽습니다! 그 직장 어딘가요? ^^
저는 오늘도 야근 중입니다. 이게 벌써 며칠 연속인지도 기억나지 않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