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3
이미 퇴근시간이 지났으나 회의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을 돌보는 날이라 방과후협동조합에서 기다리고 있을 큰아이와 어린이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작은아이가 자꾸 눈에 아른거리는데, 마음은 벌써 아이들에게 달려가고 있는데, 몸은 여기 회의실에 붙잡혀 있다. 게다가 내일 아침 사무실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공증변호사 사무실로 가야 하는데, 아직 필요한 서류들을 다 챙기지도 못했다.
시간을 두 시간 전으로 돌리면, 나는 내일 공증받으러 가는데 필요한 수십가지 서류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미 회의 시작 시간은 지나있었다. 연대단위 회의라 어쩔수 없이 빠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장 내일 공증을 받지 못하면 큰일이었다. 그런데 몇 통의 전화와 문자가 왔다. 해당 연대단위 회의에 내가 여러차례 빠졌고, 다음부터는 열심히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몇 번이나 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담당자의 연락이었다. 그러고보니 그 연대단위 회의는 항상 바쁜날 잡혀서 늘 회의 도중에 참석하거나, 아예 빠졌던 기억이 났다. 마지막 문자는 회의 정족수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정도까지 연락을 받고도 안 가면 다시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부랴부랴 하던 일을 멈추고 회의실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한창 바쁜 와중에 억지로 회의에 참석한 내 기준에는 회의가 비효율적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들 각 단체를 대표하는 바쁜 사람들일텐데, 빨리 결정사항들을 정하고, 필요한 일은 역할분담을 하고 논의를 끝내면 좋으련만, 이야기는 자꾸만 산으로 갔다가, 바다로 갔다가, 갈피를 못 잡고 헤메었다. 시계를 보았다. 벌써 6시 20분, 담당자의 수 차례 연락과 무언의 압박으로 억지로 참석한 회의라 웬만하면 도중에 나가지 않고 끝을 보려고 했으나 이젠 물리적으로 너무 늦은 시간이 되어버렸다. 지금 아이들을 데리러 출발해도 늦을텐데, 사무실에는 챙겨야할, 그러나 정리되지 않은 서류뭉치가 잔뜩 있었다.
조용히 회의실을 빠져나와 사무실에 들어왔다. 서류뭉치들을 보다가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빠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다. 물 한 컵을 마시면서 마음을 달랬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우연히 일이 몰렸을 뿐이고, 회의 시간과 바쁜 일정이 겹쳤을 뿐이다. 회의 참석하라고 몇 번이나 연락했던 담당자의 잘못은 절대 아니며, 회의를 효율적으로 진행 못한 진행자의 잘못도 절대 아니다.
서류뭉치를 정리하다가 시계를 보니 6시 40분, 도무지 이 일을 끝낼 수 없을 것 같아, 전화를 걸어 내일 아침 일찍 방문하려했던 약속을 1시간 반 뒤로 미뤘다. 출근해서 준비를 마치고 가면 그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결국 7시가 다 되어서야 사무실을 박차고 나서 버스 정류장으로 뛰었다. 벌써 큰아이는 몇 번이나 전화를 해왔다. 작은아이 어린이집으로 가 있으라고, 아빠가 곧 간다고 말한지 15분이 넘게 지났다. 버스가 아무리 빨리 가도 어린이집에 가면 7시 반은 될 터, 아이들은 분명 배가 고프다고 한 마디씩 할 것이다.
뛰면서 생각했다. 이건 아마도 내 탓일 거라고. 처음부터 이런 일이 생길줄 예상하고, 아이들 돌보는 날을 바꿨어야 하지 않을까? 처음부터 오늘 서류작업을 다 끝내지 못할걸 예상하고, 약속을 뒤로 잡았어야 하지 않을까? 처음부터 회의가 길어질 거라 예상하고, 일찍 참석했다가 비교적 눈치를 덜 보고 도중에 나왔어야 하지 않을까? 무수한 가정으로 머리는 복잡하고, 도로는 차들로 복잡하다. 아마도 이건 악몽일거라고 생각해본다. 아니 이 삶 자체가 악몽이 아닐까?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