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이명원 지음 / 새움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4-09-15 13:54



 

 

 

그의 글을 편히 읽지 못한다. 문학 평론을 하는 그가 쉽게 글을 써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몇 줄만 읽어도 알 수 있기에, 나도 편안하게 그의 글을 읽어내지 못하는가 보다.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라는 이명원의 이 책.

마음이 소금밭인 것은 어떤 것일까. 대충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이 소금밭일 때, 이명원은 책을 읽고, 글을 썼지만 나는 어떻게 대처했던가 생각해본다. 나는 그저 조용히 무덤 속 같은 몇일 보내고는 서서히 나를 괴롭힌 심각한 사안에 대해 잊어버리는 방식을 택하며 살았던 거 같다.


지금의 내 마음도 전전긍긍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책은 내 이해의 맥락에 닿는 부분에 한해서는 아픈 곳을 위무해주고 또한 깊은 울림까지 주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직함은 문학비평가이지만, 이 책은 그가 문학을 포함 여러 분야의 책들을 읽고, 영화를 보고, 여러 매체를 접하면서 품은 여러 단상이랄까 생각들을 엮은 책이라서, (소금밭 같은 마음으로 도서관에 가, 책을 읽고 쓴 이 글들일지라도) 사실은 허리끈 조금 풀고, 편안한 자세로 읽어도 된다.

 

 

그의 지적에 크게 공감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던 부분은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다.


문학계에서의 통칭 ‘후일담 문학’이라는 용어에 대한 그의 말. 이 용어는 80년대에 정력적으로 진행되었던 진보적 실천행위를 냉소적으로 부정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90년대 이후의 현실을 환멸적으로 추수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끄덕끄덕...)

 

영어를 공용화해야 한다는 복거일의 주장과 유사한 것이 수백년전 박제가에게서 있었다. (그의 책 <북학의>를 읽고) 복거일의 주장과는 또 조금 다른 뉘앙스지만, 시대적인 맥락은 이랬다. 당대 조선사회의 위기를 청나라 문명의 적극적인 수용을 통해 돌파하고자 했던 박제가의 의욕에서 나온 주장이라고. 박제가는 중국어가 문자의 근본이며, 문명어이며, 언문의 일치가 중요함을 강조, 조선이 청나라와 같은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언문으로 표상되는 조선어를 버리고, 중국어를 국어로 활용할 필요하기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리고  인재 등용의 루트를 다변화할 것을 주장했다. 

박제가의 이 글을 통해 한 사회의 타락과 몰락을 제어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은, 사회적 모순이 심각하게 돌출되고 있는 그 순간에 이미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고, 이 등잔 밑의 정책 대안을 지배층이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민중의 고난은 감당할 수 없이 심화되곤 했다는 사실이다.

박제가가 고뇌 속에서 정책적 대안을 구상하고 있던 때나,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지금의 현실이나 민중들의 고통은 여전하지만 지배층들의 한심하기 짝이 없는 권력 투쟁은 그 끝을 모르고 전개되고 있다. (끄덕끄덕...)


이 책이 흥미를 발하는 결정체를 사실 나는 다음과 같은 장에서 꼽고 싶다. 무언고 하면, 비평을 하는 비평가 자신(이명원)이 도데체 독자들이 비평을 읽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스스로하고, 답한  것.  이것은 어쩜 비평가 스스로에게 거는 가혹한 질문일 수도 있다. 그는 스스로의 질문에 대한 답을 다음과 같이 한다.


첫째, 인식의 새로움에 기여하는 비평을 발견하기 힘들다.

지적 쾌락을 선사하는 좋은 비평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관습적이고 상투적인 사유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둘째, 육성이 담겨 있는 비평을 찾기가 힘들다.

깊은 감동을 주는 비평은 싸늘한 분석적 논리에 기반을 한 것들이 아니라, 비평에서 비평가 자신의 고통스런, ‘육성’을 발견하고 자신의 체취를 내뿜는 것이었다. 비평에서 육성이 사라질 때, 한편의 평론은 수학능력시험 대비용의 문학 자습서와 비슷한 운명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셋째, ‘지식 잡화상’과 같은 비평가의 태도도 문제다.

지식 잡화상인 비평가는 기이한 열정으로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잡다한 지식을 동원하여, 지랄탄을 쏘아 댄다고. 독자들은 이러한 비평에서 자신의 무식이 추궁당하는 느낌에 빠졌다가, 시간이 지나 그것이 한갓 언어의 사기술에 불과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비평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거두어 들인다. 무관심이 복수라고.


넷째, “주례사” 비평의 토양에서 자라난 비평 전반에 대한 독자들의 불신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밖에 끄덕여지는 구절들이 많았다. 모방송사의 <느낌표!>라는 프로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는 생각들. 아, 그리고 언론상에서 ‘사회지도층’이라는 표현을 접할 때마다 한국사회가 언어 생활의 측면에서 보자면 중세적 신분사회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이야기도. ('지도층'이라니, 누가 누구를 지배한다는 것인지.)


‘사회지도층’과 같은 시대착오적인 표현이 이 뿐일까. '경쟁력, 퇴출, 왕따, 조폭, 홍위병'과 같은 유쾌하지 않은 단어가 세상에 버글버글하다.

언어를 순화한다는 것. 글쎄.....

언어가 바뀐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상이 더욱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또 그러한 세상을 열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이 제대로 존중받는 사회가 온다면, 우리들의 국어사전도 풍요로워질 것이다. 왜냐 하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니까.


밑줄 친 문장

 

 

"그들(김현과 김윤식)이 패배자인 것은 그들의 문학과 삶의 실천이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라, 승리를 불가능하게 하는 놀라운 것은 그들이 패배자임을 인정하는 순간, 그들은 오만한 승리의 잔을 들게 된다는 사실에 있다. 스스로 패배를 자인하는 것은 운명을 거역하는 자의 오만함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오만함은 인상을 찡그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패배에 우리가 마음 깊이 공감하게 만든다. 비평에 깃들인 이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가장 예민하게 사유한 비평가는 김현이다."


 

 

"멋부린 문체라는 것이 뻔히 보이는 글을 읽기에 내 인내심은 걸맞지 않다.

기형도의 어조를 흉내내, 잘 있거라, 짧았던 읽기여! 이렇게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느낌표가 따발총으로 이어지는 문자들을 발견하면, 숨가쁘기보다는 안쓰러워진다. 전혜린이 살던 시대나 어울릴 법한 새벽의 감상은, 역시 완연한 올드 패션이다. 소설가 김훈의 문체를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은 많으나, 그 아득한 뱀을 연상하게 만드는 문장들은, 언어적 페티시즘이다. 적어도 소설은 문체의 충만을 넘어서는 곳에 존재한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태일 평전 - 신판
조영래 지음 /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2004-05-27 16:31

 


 

 나의 친한 벗이 말하기를, 자신이 살아온 나날 중에서 들었던 가장 상처가 되는 말은 고등 학교 다닐 적 어느 선생님의 우연한 다음과 같은 한마디였다고 한다.

 

“너희들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공사장에서 일하는 인부가 되거나 그런 인부의 아내가 될 것이다.”


친구의 아버지는 건축업을 하시는 인부였다. 친구의 아버지는 우직한 농사꾼이셨지만 자식들의 학업을 위해 시골에서 농사를 접고 서울로 상경하시었었다. 배움이 없고, 가진 기술이 없어 공사장 막일로 아내와 자식들을 건사하셨지만, 부지런하시고 정직한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를 사회에서 패배한 낙오자 정도로 일갈하는 선생님에게 친구는 뭔가를 보여 주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고, 기분이 퍽 가라앉음을 느꼈다. 이 글은 전태일 자신인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에 대해 고(告)함이다. 전태일은 독자인 나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사람이기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전태일에게, 그리고 이 평전을 기술하기 위해 혼신을 다한 조영래의 사랑과 투쟁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느낀다.


노예로서의 고통과 굴욕으로 가득 찬 지루한 나날을, 아무런 의의도 보람도 기쁨도 없는 껍데기의 삶을 애걸하며 또 애걸하며 비루하게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이 절대로 변화될 수 없는 영구불변한 현실이라는 미신에 쉽게 사로잡혀 있는 약한 자인 나에게 “인간의 존엄을 버리지 않고 인간다운 대접을 요구하며 싸우는 것은 바보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었다. 

 

왜 밑바닥 인생들은 항상 밑바닥 생활을 하게 되는가? 왜 눌린자는 계속 눌리어 살아가는가?

 

 

여기 고통 받는 한 사람의 의식을 살펴보자. 그가 태어났을 때 고통에 찬 현실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 현실 속에서 자라나면서 그는 그 현실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하여 자신에게 강요된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사실은 바로 ‘인간’이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을 똑똑히 보지 못하게 된다. 이 거대한 힘에 비하여 볼 때, 자기 자신은 너무나도 약하고 초라하고 무력한 존재로 느껴진다. 조만간에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현실의 사회 구조와 질서 앞에 무조건 머리를 수그리고 거기에 순응해야만 생존이 보장된다고 느끼게 되며, 따라서 현실 앞에서 위축되고 기가 죽어서 비굴해진다. 현실에 대한 모든 비판은 그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무모한 짓으로 되며, 자신에 대해서는 불성실하게 되고 나중에는 부도덕으로까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비판 정신의 싹은 자신의 의식 속에 싹트기도 전에 잘라버리고, 사회가 강요하는 모든 명령, 모든 가치관, 모든 선전을 받아들여 순한 양이 된다.

 

전태일이 위대한 것은 순한 양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든 가정에서 자랐으면서도, 스스로 “불행한 과거를 원망한다면 그 과거는 너의 영역에서 영원한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정도로 불우한 환경 때문에 좌절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오히려 불우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그들의 처지를 개선해주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장기표 씨의 후기에서 “인간이 명석하다는 것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 부분과 맥락을 같이 한다.   

 

전태일을 보면서 민주화를 생각한다. 민주화란 무엇일까? 이 글에서 조영래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흔히 수없이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 줌도 못되는 소수의 억압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고 말하며 또 그러한 사례를 수없이 본다. 영화 같은 데서 수많은 노예들이 채찍에 시달리며 묵묵히 중노동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볼 때 어째서 저 많은 노예들이 불과 몇몇의 감독자들에게 굴종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어 본다. 인간 사회가 형성된 이래 이러한 실태는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러한 요소들이 사회적 민주화의 장애가 되고 있는 나라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원인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특히 들어볼 만한 설명은 억눌리는 사람들이 수적으로는 아무리 많아도 조직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조직된 소수’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이야기해야 할 것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노예 의식인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노예 의식을 벗어던지고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정당한 권익을 위하여 주장하고 투쟁할 결의에 차 있다면 그들의 조직화는 시간 문제일 것이며 조만간에 그들은 ‘조직화된 다수’로서 ‘조직된 소수’인 억압자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것이 바로 민중 운동의 전진이며, 이것이 바로 민주화이며, 어떻게 보면 이것이 바로 진보인 것이다.

 

 

밑줄 그은 문장

 

 

사실 그 사람이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세.

그 때에 절은 모자가 하고 있는 것일세.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얼마나 불쌍한 현실의 패자냐!

얼마나 몸서리치는 사회의 한 색깔이냐!


   -재단사 일자리에서 쫓겨난 전태일이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가 어느 인부를 보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아의 좁은 환상에 집착하여, 그 속에 밀페되어 껍질을 쌓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아무 것도 참으로 사랑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참으로 소망할 수 없다. 일상 생활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희망하고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부와 권력과 명예와 미모의 이성과...... 그러나 그것들은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더욱 처절한 고통과 고독의 심연으로 몰아넣는 허구의 욕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탐욕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전태일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라고 썼던 것이다.       -26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 - 저자교열판
서준식 지음 / 노사과연(노동사회과학연구소)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2004-01-01 18:39



 

 

요며칠 일찌감치 아침을 챙겨먹고 남들이 출근하듯 나도 인근 구립도서관에 나가 이 책을 읽었다. 공무원 시험, 학교 시험, 각종 고시 준비에 기타 등등의 수험서를 펴놓고 공부하랴 여념없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책상 위에 딱 이 두꺼운 책만 펼쳐놓고, 두 손을 꼭 모으고(도서관 안이 조금 싸늘해서) 진종일 웅크리고 앉아서 읽었다. 딱히 정한 것도 아닌데 오전부터 시작해서 오후 다섯시까지 꼬박 있으면 하루에 60페이지 가량을 보게 된다. 이 책은 결코 속도를 내서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마 그럴수가 없는 책이었던 것이다.

형제들과 사촌들 그리고 이모, 고모의 전향 설득에도 비전향을 고집하는 서준식 그를, 그래서 결국엔 스물네살에 들어간 감옥을 사십이 넘어 17년이라는 세월 동안을 보내온 서준식을 보면, 마틴 루터 킹이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생각난다.

“나는 한 개인이 양심이 그에게 부당하다고 명한 법을 위반하고, 그리고 그 부당성에 대해 공동체 전체의 양심을 불러일으키고자 기꺼이 그 형벌을 받아들여 감옥에 머무는 일이야 말로 법에 대한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지 싶다”고 말했다던...

그가 감옥 생활의 고독함을 감수하며 온 힘을 다해 사명을 이루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내가 온전히 이해하리란 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서준식(참고로 그는 비기독교인이고, 단순이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함이 아닌)'약자를 위한 예수'를 발견하는 부분(동생 영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을 읽었을 때, 그가 17년간의 감옥 생활 가운데 편지 모음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가를 조금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내가 예수의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가 단순히 '약자의 편'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들이 그 어떠한 강자가 된다 하여도 영원히 약자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예수가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겠다. 예수는 모든 이념이 경직화되고 '자율적'인 것이 되어 버릴 때 그것이 인간을 얼마나 무자비하게 억압하는지를 나에게 가르쳐 준다. 우리들이 이념의 노예가 될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에 대한 개개의 구체적인 사랑'에 굳건히 발 디딜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것이 나 개인이 겪어야 했던 (그리고 어느 의미에서는 지금도 겪고 있는) 그 처참한 정신적 위기에 있어서 얼마나 절실하고도 귀한 가르침인가를 나 자신 이외의 아무도 알 수 없다. 이것은 '영원한 약자의 편'일 수 있는 한 가지 길이다.”

그리고 서준식은 옥중에서 ‘노예’의 결박을 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보안감호처분 무효확인소송’이었다. ‘보안감호처분 무효확인소송’이란, 다시 말하면 ‘노예’가 아닌 ‘인간’임을 인정해달라는 요구였다. 서준식의 요구는 절실했다. 그러나 연거푸 세 번을 거절당했다.

사람이라고 무조건 사람인가!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이다. 사람답게 살려면 착해야 한다. 그런데 각박한 이 세상에서의 착함이란 ‘약함’의 다름 아니다. 그러한 약함을 고수하며 살기란 그렇다 너무 어렵다.......‘어리석은 자가 끝까지 어리석음을 고수하면 현명한 자가 된다.(윌리엄 블레이크)’라고 내내 읊조리던 그는 부조리한 권력에도 빌붙지 않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에의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것을 끝까지 지키려했던 우직한 사람이다.

내가, 나같은, 인간으로써 짊어져야 할 고뇌랄까 절망 같은 것을 자주 팽개쳐버리고 싶어하는 이가, 이 옥중에서의 서간들의 아롱아롱 새겨진 따뜻한 글줄들을 정말이지 제대로 감상으로 풀어 낼 수나 있을까, 사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무척이나 부끄러울 따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하면서 쓰고, 쓰면서 여행하는 벅찬 즐거움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에 움베르트 에코의 <전날의 섬>을 집어 들어 읽다가, 에코가, 중세 이후의 프랑스 왕정에 대해 그야말로 해박한 썰을 푸는 부분에서 나의 짧은 지식이 글줄을 따라가질 못하여, 그만 앞부분에서 그대로 책을 덮었다. 나의 세계사적인 지식이 어느 순간 안개 걷히듯 환해지는 날이 오면 그때나 읽어 볼까 하고, (그런 날 안 올거다...아마..)

그리고는 언제나 그렇듯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찾았다. <하루키의 여행법>이 눈에 콕 박힌다. 이 책의 표지는 노몬한 전쟁의 전장터였던 어느 몽고의 내륙에서 찍은 사진이라는데, 녹슨 탱크 위에 서서 찍은 것이 아주 가관이다. 양손을 허리에 놓고, 엉거주춤하게 잡은 포즈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그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 듯 뵈는 썬글라스하며, 약간 심술스럽게 쳐진 볼의 사진 속 하루키는, <아기공룡 둘리>의 고길동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나오는 기타 등등의 사진들은 이 모든 여행(고베 도보 여행제외)을 하루키와 함께한 사진사 마스무라 에이조가 찍었다는데, 이 사람은 하루키의 편안한 여행 동반자처럼 보인다. 복받았네 하루키)

이 책은 차례부터가 참 두서없다. 뉴욕의 이스트햄프턴으로의 여행이 처음 장에 나오다가 그게 끝나고, 일본의 어느 무인도 체류기 다음은 멕시코 여행기가 나왔다가 또 느닷없이 일본의 우동 맛 기행을 했다가 다음 편에 몽고 여행, 그 다음에 또 아메리카 대륙 횡단 등이다. 여정 순서가 아니라, 잡지에 기고한 연대 순서에 따른 차례라서 이런가 하고 살펴봤더니 그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편이 엮인 것이 특별히 읽는 데 지장을 주진 않는 것 같다. 워낙 전체적으로 널널하고 편안하게 투덜 댄 그야말로 에세이(잡글)이라 그런가보다.

그 일곱 편의 여행기 중에서도, 아메리카 대륙 횡단기가 제일 싱거웠고(읽는 사람은 싱거운 재미로 읽었지만, 글을 쓰는 하루키는 퍽이나 지루하기 짝이 없어 하고 있었다.), 맛있는 우동집을 찾아 다닌 기행들과 고베까지의 도보 여행 기록이 읽는 맛이 있었다.

왜 재밌다고 생각됐을까? 먼저 우동집 순례는 그 내용을 보조하는, 코믹하고 자세한 삽화가 곁들여져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던 거 같고, 고베 여행은 그야말로 자신의 유년의 기억을 찾아 떠난 도보 여행이라, 마치 맑은 우물에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담담한 필치의 문장이기에 그랬던 것 같다.

하루키는 물건들을 수시로 도난당하고, 연거푸 식중독에 걸려 혼쭐이났던 멕시코 여행을 기록하면서 '여행의 본질'이라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행 중의 물건 분실과 구토와 설사 등 인간을 피곤하게 하는 온갖 것들을 자연스럽고 묵묵히 받아들여 가는 단계가 바로 여행의 본질'이라고. 그런데 이 말은 너무 극단적이다. 왜냐 하면 이런 종류의 피곤은 구태여 멕시코까지 오지 않더라도 어디서든 얻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멕시코까지 왔던가. 그 물음에 하루키는 또 다음과 같은 명쾌한 답을 내린다. '왜냐 하면 그런 피곤은 멕시코에서 밖에 얻어낼 수 없는 종류의 피곤이기 때문에'라고

생각해 보면 여행은 환상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환상을 좇아 어딘가로 가서 그 환상을 손에 넣는다. 그들은 그 환상을 좇기 위해 적잖은 돈을 쓰기도 하고 시간을 들이기도 한다. 환상을 좇아 다니는 그 사람들. 잘못 되었나? 아니지. 사람들에겐 물거품 같은 그 환상을 누릴 권리가 있다. 있고말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02-04-29 17:28

 

어제 일요일 저녁, 마지막 장을 덮은 책은 아마존의 밀림을 배경으로 하는 이 책, '연애 소설을 읽는 노인'이고, 어제 오후에 본 비디오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부제 : 부에노스아이레스)'이며, 어그제 본 텔레비젼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파라과이에서 있었던 한인 남매 살인 사건(파라과이의 졸속 형사 사법 처리 제도에 관한 고발이랄까)에 관한 것을 다루었다.

지리적으로, 우리 나라와 가장 반대편에 있는 남미는, 인천에서 출발하는 비행길 직항 노선으로 그 거리감을 따지자면 대략 서른두 시간이라는 간격을 두고 있다. 이런 남미는 당연히 나에게는 신비로운 미지의 영역이다.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이 책의 작가 루이스 세풀바다에게 붙는 수식어는 무척 많다. 작가이자, 반체제 운동가, 망명길에 올랐다가, 연극단도 꾸린 적이 있으며, 기자로도 활동했고, 왕성한 여행가에다가 환경 운동가이기까지 하다니. 작가가 무척 바쁘고, 고단하며 험난하고 모험적인 인생을 살아왔으리란 건 눈감고도 알 거 같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의 문체는 약동적이며, 플롯은 분명하고 선이 굵다. 한마디로 읽는 재미가 나는 소설이랄까. 게다가 마지막 부분의 노인과 살쾡이의 대결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이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아마도 두 등장 인물(?)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으로 대변되는 참으로 매력적인 한 사람(노인)과 동물(살쾡이)이 나온다. 노인은 그림 속에나 남겨진 다정했던 몇십년 전에 죽은 마누라를 가슴 속에 간직하며 살아가는 순애보이자,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읽을 수는 있으며 단어 하나하나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전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내는 방식의 연애 소설 읽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는 아내가 죽자, 이후 수십년을 인디오들과 함께 자연과 어울려 살아온 탓에 밀림과 자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이 소설에 언급된 것 중, 인상적인 것 중에 하나는, 소리에 민감한 박쥐들이 위험을 느끼면 재빨리 몸을 가볍게 하고 날기 위해 뱃속에 있는 걸 몽땅 쏟아낸다는 거였다. 즉, 박쥐들을 놀래키면 여지없이 배설물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매력적인 두 번째 주인공(?)은 읍장 뚱보나 밀렵군 양키들 같은 시종잡배, 여타의 인간들보다 훨씬 위풍당당한 살쾡이이다. 물론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살쾡이가 노인과 생사를 가름하는 사투를 벌여야 했고, 결국엔 살쾡이의 죽음으로 이 대결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이 싸움은 지구상에 잡다구리하게 존재하는 오만한 인간들의 치졸한 대결들과는 비할 수가 없다. 이 싸움의 발단은 무엇이었나? 싸움을 먼저 걸어온 쪽은 암살쾡이의 어린 자식들과 수컷살쾡이 마저도 무심코 쏘아 죽게 만든 개발업자이자 밀렵꾼들인 양키들이다. 이 동물은 인간들이 걸어 온 싸움에 맞서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인 후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 하고 있다. 이 싸움에서 살쾡이는 짐승들 또한 헤아리기 어려운 지혜를 소유하고 있음을 몸소 보여 주고 있다. ('양키들 대 살쾡이'의 대결이면 대결이지, 왜 우리의 다크 호스인 '노인'과 위풍당당 '살쾡이'의 대결이 되어야 하는지 이 역설적인 모순은 이 책을 읽고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다.)

이 책을 번역한 정창이라는 역자는 꽤 실력있는 번역가인 것 같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 취향의 견해이다. 그럼에도 내가 실력있는 번역가라고 단언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의 번역서 바르가스 요사의 <궁둥이>와 로사 몬테의 <시대를 앞서 간 여자들의 거짓과 비극의 역사>를 그의 무난한 번역 덕분으로 꽤 수월하고도 쉽게 읽어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