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멀지 않다
나희덕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못 위의 잠

                                                                              - 나희덕 -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 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나희덕은 대학 시절 혹은 사회 초년 시절 좋아했던 시인이다. 시인이 나이를 먹는건가, 내가 나이를 먹는 건가, 요즘엔 위의 <못 위의 잠>과 같은 후기에 나온 시들이 좋다. 모성 혹은 부성애 적인 시선... 그렇지만, <그곳이 멀지 않다>는 초기 시집으로, 독자 또한 스무살 즈음의 청춘이라면, 울림이 크다.

 

안치환의 노래 중에 <귀뚜라미>라는 노래가 있다.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아직 내 울음소리는 노래가 아니요,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토하는 울음,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소.'라는.

대학 2학년 때 이 노래를 첨 듣고, 이 노래는 나를 위한 송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 노래를 달리 옮기면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으니. 조용히 때를 기다려라 라고 옮겨야 할까나. 밟히고 짖눌려 버리기 쉬운 사소한 존재에게 견고하고 단단한 의지를 불어넣는 마력을 나희덕은 갖고 있다.

4년 남짓한 사회 생활은 나에게 여운을 두지 말고, 복종하지도 말며, 곁을 터 주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그 단단한 틈을 밀고 들어오는 시심(詩心)이 있다. 그건 바로 나희덕의 시이다. 그의 이 시집 중, <속리산에서>라는 시는 이 시집 전체의 경향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는 듯하다.

'가파른 비탈만이 /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산다는 일은 /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평평한 길은 가도가도 제자리 같았다./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이 남아 있는 나에게 /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 산을 오르고 있지만 / 네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 산 속에 갇힌 시간일거라고,'

삶은 그런 것이다.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고,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천장호에서-
던지는 돌멩이에도 제 속을 보이지 않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열정을 갖고 대들기를 반복해 보지만, 얼음장처럼 닫힌 마음이 그러하듯 돌을 아무리 던져도 호수는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시인이 아니, 내(우리)가 삶을 지속시키는 방식은 그렇게 열정과 냉정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희덕은 시에서 노래한다. 냉정을 열정으로 무화시키는 힘을, 과거의 썩은 물웅덩이처럼 남아 있는 상처는 정리되어 이제 현재의 삶을 파헤쳐 놓지는 않는 것이다. 과거를 단정하게 정리하는 기억, 이것은 바로 열정 속에서도 냉정을 찾는 것이며, 냉정 속에서 열정을 찾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또 말한다.
'사는 건 쐐기풀로 열두 벌의 수의를 짜는 일이라고, 그때까지는 침묵해야 한다고, 마술에 걸린 듯 수의를 위해 실을 짜깁는다.-고통에게1-' 이렇게 조용히 시인은 나에게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처럼, 복종함으로 반항에 이르는 길을 풀어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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