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얻게 된 이틀의 휴가에 대해서 당시 내게 닥쳤다는 다소 격하게 운이 없었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그렇다.

당시 둘째 낳고, 6월에 복직해 신간 개발팀에 배속되어 유관 부서와 임원분들께 진행 상황을 주 3회 보고하라는 쪼임과, 간섭과 핍박을 당하고 어렵게 10월 초에 책을 마무리했다. 이제 한숨 돌리고 여유를 갖나 싶었던 찰나, 교과서 제출 한 달 임박 막바지 작업에 또 차출되어 12시 혹을 새벽에 콜택시를 타고 귀가하는 한 달을 보내고 난 시점이었다. 당시 신종플루가 기승을 부리기도 했었고, 사실 그것과는 무관한 듯한 열감기 증상으로 3일 아팠다가, 4일 괜찮았다가를 반복했다. 그것도 아이들도 함께.



그해 7월에 있어야 했던 연봉협상이 11월로 미뤄지면서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연봉은 동결이라는 고지를 받았다. 울적했다. 당근과 채찍이 있어야 수순인데, 복직하고 내내 채찍에만 시달린 꼴이지 뭔가. 시국이 어수선하고, 회사가 어렵다 하니, 참자! 할 수도 있다고도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상대적인 박탈감이 밀려와서 감정적으로 아주 힘들었다. 죽을 똥을 싸며 일은 똑같이 하는데, 작년에 진급 케이스는 무탈하게 돈도 올라, 진급도 해버려.... 나는....그들과 차이가 한참 나는 이유는 무엇이냐고...그래도 참았다. 조금 침체되어 있었지만... 그런데, 내게 더더욱 엄청난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울적한 마음을 안고, 퇴근.. 부랴부랴 아이의 이유식을 만들어 두기 위해 닭가슴살을 다지고, 호박 버섯 등속을 손질하는 와중에 남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날 어머니가 김장을 담그기로 하셨는데, 쌍둥이 조카들이 감기(신종플루)라서 일단 남편만 어머니 도우러 간 다음, 상황을 봐서 나도 가기로 했던 거다.

남편은 전화로 조카들도 이젠 거의 완쾌된 분위기고, 도움의 손길이 필요 나도 오면 좋겠다고 한다. 올 때 김치통 갖고 오라고. 김치통! 그렇잖아도 남편이 퇴근하고 시댁으로 직접 가겠노라 했을 때, 나는 신신당부했다. 직접 가지 말고, 집에 들러 김치통 챙겨 가라고!



그렇지만, 내 말은 들은 척 해 주시지 않았다. 나도 통 들고 다니는 거 좋아하지 않는다구요.



아무튼, 김치냉장고용 김치통 세 개를 겹쳐서 놓으니, 보자기로도 안 싸지고, 대형 쇼핑백 조차도 맞질 않았다. 하여, 툴툴거리며 일단 이유식을 다 끝내 놓고, 난장판이 된 집은 아이들 돌보느라 넉다운 되어 누워 계신 엄마에게 부탁하고... 김치통들을 두팔에 안고, 쌓아 올라온 통들에 시야가 가려 오른쪽 왼쪽 고개 빼고 길을 살피며, 마을버스 타고, 버스 안에서  쌓은 김치통이 무너지지 않게 곡예를 부리며 드디어 현관 앞에 갔으나, 비밀번호 네 자리가 생각이 안 난다. 대각선을 그리는 숫자들 조합이었다는 거밖엔. 그래서 혼자 버튼들 앞에서 기하학을 해가며 숫자 조합을 만들어봤으나, 도통 안 맞네. 남편에게 핸드폰으로 문열어 달라고 전화를 했지만.... 죽어라 전화 안 받아 주신다.








호출 버튼이 있어서 눌렀더니... 여전히 기척도 없고, 하여 창을 통해 문열어 달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형님이 왔다갔다(1층이므로) 하는 게 보여서 큰 소리로! 형님! 형님! 조금 있다가 문이 열렸다. 형님은 나를 보자마자 인사 생략하고 "김치통이 이것밖에 없어!"
순간 화도 나고 당황한 나는 " 있어도 들고 올 수 있어야 말이죠!"

그때부터 뭔가 어그러지기 제대로 어긋나기 시작한 것 같다.
들어가서는 바로, 내가 갖고 온 통들부터 씻어 놓고 나니,,,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이 가늠 되지 않는다. 배추는 절여져 있었고, 준비된 젓갈들과 고추가루 등속을 버무릴 차례인 거 같은데, 그건 어머니가 하셔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임에... 어머니는 깍두기 무를 써느라 일을 지시하거나 다른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보다못한 성질 급한 내가, "그 무는 제가 썰게요."

어머니는 그래라, 하셨다. 그 때는 몰랐다. 그저 빨리 빨리 도와드리고, 끝나고 집에가서 두 머슴아들 때문에 넉다운되신 친정 엄마를 도와드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이다. 

깍둑무 썰기를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아, 나는 속도를 좀 내봤다. 마치 어머니가 칼을 다루듯이... 그러다가 내 검지 손톱과 거기 붙은 살점까지 쓸어버렸던 거다.

피가 철철철..... 아파야 했지만, 일을 지체시키다 못해 분위기까지 망쳤다는 죄책감 때문에 하필 이럴 때 손가락을 다치다니..... 그런 당혹감 때문인지 아픈 줄도 모르겠더라.

검지 손톱의 삼분의 일만이 남아 있고, 손끝 살점이 붙어 있는 나머지3분의 2는 덜렁덜렁....형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서울대입구역 사랑의 병원 응급실을 찾아갔다.

손톱은 봉합이 어렵고, 살점또한 꿰매는 거 보다는 이 상태로 약바르고 소독하는 수밖에 없다고. 손톱은 자라니 다행이지만, 떨어진 살점은 어떤 모양으로 자랄지 알 수 없어, 변형이 올 수 있다고..했다.

파상풍 주사 한 방, 항생 주사 한 방을 맞을 때 , 주사 놓던 간호사님이 흑빛이 되어 말을 잃은 내게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내년에 좋은 일이 있을 모양이네요." 하며 위로말을 건내 준다. 앞으로 한달여 동안 병원에 날마다 와서 소독해서 한다고, 그리고 잘 때 많이 아플거라고.. 처방 받은 약을 지어, 돌아오는 차 안에서 형님은 '삼재'가 어떻고 하는 말씀을 하신다.

시댁으로 가야 할지, 집으로 가야 할지(응급실으로 가려고 현관에서 신발 신는 내 뒤통수에 대고, 남편님께서 '야 넌 집에나 가라.'했기에.... ㅠ.ㅠ) 그런데, 형님 생각엔 혼나더라도 난처하더라도 마무리 될 때까지 그 자리에 있는 게 나을거라 하시는데, 그냥 집으로 가면, 걱정하실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시댁으로 갔다.

시어머니는 기가 막혀 하셨다. 세상에 일을 못한다 해도 깍두기 무 써는 것쯤이야 할 줄 알았지! 하시는거다. 그밖에 어머님의 한숨어린 푸념.... 내가 뭔가 작은 일이라도 도우려고 몸짓을 할 때마다 아서라, 너 오늘 재수 옴 붙었으니 아무것도 만지지 마라! 하신다. 심지어 농담으로 남편이 초등2년생 남자 조카에게 '내년엔 너도 도와라' 하니, 어머님께서 " 여자 어른도 제대로 못하는 것을 애더러 하라고 하냐!"며... 역정  ㅠ.ㅜ

손가락이 욱씬거리고 사지가 바르르 떨리는 증상이 있었지만, 아픔을 마음껏 호소할 수 있는 개제는 아니었고, 나 스스로도 뭐 이런 재수없는 케이스 다 있담 하고 상심하는 마음이 통증보다 컸던 거다.

반쪽짜리이긴 하지만 난 손에 물 닿을 일이 많은 주부였다. 손가락 붕대를 하고 있는데, 심지어는 고무장갑마저도 들어가지 않아, 양손을 적시면서 해야 하는 일은 못한다.

떨어져 나간 손톱과 살점 사이로 기가 줄줄 새 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다음날 출근해서의 일이다. 아침 출근하자마자 느닷없이 상무님방에 불려가 호통을 들었다.



일정이 늦어지는 것 때문인데, 상무님도 그 저간의 사정은 다 아실거다. 1학기 끝나고 2학기 책에 바로 착수할 수 없었던 이유. 1학기 끝나자 마자, 교과서 지원 작업한다고 연일 야근, 그것 끝나니까 다른 바쁜 팀 도와서 그 팀이 작업할 책 시장 조사를 대신 나가라는 부장님 지시로 지지난주 내내 나를 제외한 팀원들은 경기도로 전라도로 출장을 다녔고, 지난주 초반에서야 비로소 팀원 모두 모여 체재 회의에 들어갈 수 있었던 저간의 사정은 들은 척도 안 하고, ....



상무님 방을 나와서 화장실로 갔다. 회사 다니면서 처음으로(정말? 기억이 없을 뿐이겠지) 온전히 나 자신의 일로, 내가 불쌍해서 울었다. 그리고 오후 반차를 냈다. 반항하는 마음으로? 그것도 이유가 있고, 하지만 순전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고,, 절단난 손가락의 아픔... 인후통... 오한...이 밀려와서...였다.



그 다음날 전화로 출근을 못할 정도로 아프다고만 전하며, 출근하지 않았다. 이 또한 첫 무단 결근이다. 그 다음날은 문자로 아프다고 전했다. 그 이틀 동안 그로테스크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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