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씨에게
박경리 / 솔출판사 / 1993년 11월
평점 :
절판


13쪽

이 세상에서 제일 나를 노엽게 하는 것은 어머니의 눈물, 어머니의 푸념이었으니까요. 왜냐구요? 모르겠어요. 굳이 이유를 찾아본다면 아마도 내 가까운 사람의 설움을 보는 것이 두렵기 때문일 거예요. 하기는 내 딸이 아팠을 때 나는 줄곧 화만 낸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58쪽

나의 모든 인간관계는 이런 식이죠. 마음 깊이 후회와 인간의 정을 간직하면서도 흔적을 내보이지 않고 인사치레를 못하는 내 게으름은 얼마나 많은 내 다정한 벗을 잃는 결과를 가져왔는지. 그래서 외롭지 않다면 그것만으로 나는 내 신념에 사는 자부라도 가지려 했지만 나는 이렇게 작은 봉우리 위에 혼자 앉아 그 숱한 오해와 가버린 시간들과 잘나지도 않은 내 작품을 생각하며 나는 이제 내 그림자조차 없는 외로운 인간이라는 것을 쓰디쓰게 씹어보는 것입니다.


77~78쪽

남에 비해 죽고 싶은 충동은 별로 느끼지 않는 편이며 술을 마시고 괴로움을 잊고자 하는 일이라든가 신바람 나게 놀아봄으로써, 혹은 화투나 그런 도박적인 것의 묘미에 끌려 현실을 잠깐 잊고자 하는 일이 없는 나는, 어떻게 보면 감정을 막다른 골목에까지 몰고 가지 않는 소심한 혹은 약삭빠른 일면이 있어 뭣으로든 자신을 마비시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피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53쪽

육신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어느 것이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올 때 침묵해버리는 것은 내 오랜 습성이었습니다. 가파른 고개를 아무도 모르게 기어올라 가는 것처럼, 그것은 고통의 내 치유법이며, 함께 견디는 것보다는 혼자인 편이 덜 고통스러웠으니까요. 고개를 넘어서 내리막길에 접어들면은 비로소 침묵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270쪽

죽음 그 자체인 것만 같은 헐벗은 나무들, 하얀 눈이 날아 내리는 도시의 지붕, 대지가 함몰된 듯이 냉엄하게 번들거리는 빙판, 우중충한 잿빛에 갇혀버린 동천, 모두가 비애의 빛깔이요 폐쇄인데 영혼만은 치열하게 타는 글너 계절이 겨울 아닌가 싶어요. 따뜻한 모닥불 따뜻한 온돌 따뜻한 인간의 살갗을 그리며, 나무야 너도 헐벗었구나, 새의 너의 깃털은 추위를 견딜 만하니? 우리는 가장 고독했을 때 자비로워지고 사랑을 갈구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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