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쪽 최근에 레이몬드 카버라는 미국작가의 단편집 <대성당>(김연수 역)을 읽었다.(...) 직업이 있거나 없거나 먹고살 걱정은 없는 잘사는 나라에서 그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들여다 보면서 인간관계가 어쩌면 저렇게 끈적끈적하지 않고 맨송맨송한지, 요새 젊은이들은 지향하는 '쿨'하기가 혹시 저런 건지. 생각을 굴려보게 되었다. 헤어져도 관계가 잘 청산되지 않아, 낫또가 된 콩처럼 끈끈한 줄을 끌고 다녀야 하는 우리네 인간관계도 지겹지만, 저들도 참 재미없게 사는구나 싶은 게 그 소설을 읽는 재미였다. 153~156쪽 독자가 책에 밑줄을 긋는 것은 그게 명문이기 때문이 아니라 읽을 당시의 마음상태에 와 닿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밑줄 긋는 일을 기피했다면 그것도 일종의 허영심이었을 것이다. (...) 남의 밑줄을 보는 게 당시 건방기 많은 소녀에게는 은밀한 쾌감이 되지 않았나 싶다. 겨우 요 정도의 문장이 뭐가 좋다고 밑줄씩이나, 유치하긴, 하는 우월감까지 먼저 읽은 동무들에게 느꼈을 것 같다. 그런 나는 얼마나 겁쟁이인가. 남이 나를 그렇게 경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밑줄 같은 건 절대로 안 칠 것 따위나 신조로 삼았으니. (...) 앞으로 몇 년이나 더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작가로서의 나의 새로운 다짐이 있다면 남의 책에 밑줄을 절대로 안 치는 버릇부터 고쳐볼 생각이다. 내 정신상태 내지는 지적 수준을 남이 넘겨짚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도 일종의 잘난 척, 치사한 허영심,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폐증이라고 생각되자, 그런 내가 정떨어진다. 250~251쪽 어려서 집이 끼니 걱정할 정도로 어렵지는 않았는데도 우리 엄마는 약간 맛이 간 쉰밥도 버리지 못하고 물에 씻어서 당신 혼자서 드셨습니다. 제가 질색을 하고 말리면 "밥이 아까워서 못 버리냐? 하늘이 무서워서 못 버리지"하시던 엄마 생각이 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