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서판 -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
스티븐 핀커 지음, 김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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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쪽 


 단순한 논리로 말하자면, 학습을 위한 선천적 메커니즘 없이 학습은 존재할 수 없다. 그 메커니즘은 인간이 성취하는 모든 종류의 학습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력하다.

431쪽 


족벌주의는 인간의 보편적인 성향이자 대규모 조직의 보편적인 재앙이다. 그것은 세습 왕조가 지배하는 나라들을 도탄에 빠트리고 제3세계 정부와 기업들을 수렁에 빠뜨리는 대표적인 악습이다. 이에 대해 역사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해결책은 가족적 연고가 없는 사람들, 가령 환관, 독신자, 노예, 집이 먼 사람 등에게 해당 지역의 권력을 주는 것이었다.

548쪽

흰개미들이 집의 대들보를 갉아먹거나 모기가 사람을 물어서 말라리아를 전염시킬 때 그 놈들은 비정상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녀석들은 진화적으로 설계된 행동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것뿐이다.


661쪽

외모가 성격에 미치는 영향은 작고 제한적이다. 금발은 빗댄 농담이 유행하지만, 매력적인 모든 여성이 무식하고 허영에 들떠 있는 것은 아니다.

698쪽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에 대해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이처럼 단순한 사실들을 종종 망각한다는 것은 현대의 교의들이 사람들을 얼마나 깊이 사로잡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아이가 특별한 인간관계의 당사자란 사실을 쉽게 잊고 말랑말랑한 공작용 재료쯤 된다고 생각한다.





733쪽 ~735쪽

a.s 바이어트는 <뉴욕타임스 매거진>의 편집자들이 지난 1000년 동안 최고의 이야기가 무엇이었냐고 묻자 세헤라자데 이야기를 꼽았다.

<천일야화> 속의 이야기들은 사랑과 삶과 죽음과 돈과 음식과 그밖의 다른 필수품들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하는 이야기들이다. 인간에게 있어 이야기하기는 숨쉬기나 혈액 순환만큼이나 중요한 본성이다. 모더니즘 문학은 이야기를 제거하려 했다. 이야기를 저속하게 생각했고, 플래시백, 직관, 의식의 흐름 등으로 대체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생물학적 시간의 본질이어서 우리는 그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 파스칼이 말했듯이, 인생은 동료 죄수들이 매일 처형당하기 위해 끌려 나가는 감옥에서 사는 것과 같다. 세헤라자데처럼 우리도 누구나 사형 선고를 받은 존재여서, 자신의 삶을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는 이야기로 생각한다.

존 업다이크 역시 지난 1000년을 회고해 달라는 질문에 자신이 속한 문학의 미래로 그 답을 대신했다. “거짓말의 전문가인 소설가는 역설적으로 무엇이 진실인가에 집착한다.” 그리고 “진실의 단위는 최소한 소설가에게는 지난 10만 년 동안 변하지 않는 호모사피엔스라는 종에 속한 인간이라는 동물이다.”

진화는 역사보다 느리고 최근 몇 세기 동안의 과학 기술보다는 훨씬 느리다. 사회 생물학은 놀랍게도 학계 일각에서 악의적인 공격에 시달리고는 있지만, 어떤 특성이 선천적이고 어떤특성이 후천적인가를 밝히는데 유용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진화를 통해 정착한 인간의 하드웨어는 어떤 종류의 소프트웨어를 지원하는가? 소설은 암중모색을 통해, 개인이 공급할 수 있거나 공급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사회가 요구할 때 우리를 엄습하는 불안의 순간들을 포착한다.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는 갈등이 소설을 쓰는 우리의 손과 심장을 뜨겁게 달군다.

인간은 팽팽한 긴장속에서 죽음을 예견하고 리비도를 의식하는 동물이다. 지상의 어떤 다른 존재도 그렇게 뛰어난 사고 능력을, 가능성을 상상하고 좌절하는 복잡한 능력을, 종족과 생물학의 명령을 의심하는 골치 아픈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렇게 많은 갈등과 영리함을 지닌 존재로서 인간은 허구적인 생각에 초점을 맞추며 끝없이 즐거워한다. 아마도 호모 사피엔스는 아무리 아름다운 유토피아에 도달해도 자신의 모든 갈등을 풀거나 온갖 심술의 원천인 궁핍함을 제거할 만큼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운명이나, 유전자, 또래 집단 등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한 어머니는 <시카고 트리뷴>에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하느님께 기도한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의 소망과 무관하고 때로는 그 소망에 의지하도록 우리의 등을 떠밀기도 한다.

사실 아이가 행복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알고리듬이 없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자녀들의 특성을 미리 지정하기를 원하는가? 그래서 모든 아이가 예기치 않은 재능과 성공으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기를 바라지 않는가? 사람들은 인간 복제를 두려워하고 부모가 유전 공학을 통해 자식을 설계할 수 있다는 미심쩍은 약속을 끔찍하게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부모가 양육을 통해 자식을 설계할 수 있다는 환상과 얼마나 다른가? 현실적인 부모라면 오히려 시름을 덜 수 있다. 아이를 자극하고 사회화하고 아이의 성격을 향상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대신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동화 책을 읽어 줄 때도 그것이 뉴런에 유익한 영향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라는 사실에 마음이 넉넉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내가 우리 아이를 어떻게 대하든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라는 질문을 생각해 보자. 이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물론 부모의 양육은 매우 중요하다. 해리스는 독자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한다.

첫째, 부모는 자식에게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이고, 부모의 행동은 아이들의 행복에 대단히 중요하다. 양육은 무엇보다 윤리적인 책임이다. 부모가 자식을 때리거나 무시하거나 학대하거나 방치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크고 강한 사람이 작고 힘없는 존재를 그렇게 다루는 것은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해리스의 말대로, “우리는 아이들의 미래를 쥐고 있지는 않지만 아이들의 현재를 쥐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아이들의 현재를 아주 비참하게 만들 힘도 쥐고 있다.”

둘째, 부모와 자식은 인간적인 관계로 맺어져 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보살피는 것은 상대방의 인성을 원하는 대로 변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깊고 만족스런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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