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Lemon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조금 진부했다. 용두사미가 된 거 같다고 해야 하나.
사모했던 여자의 흡사 분신과도 같은 딸을 두고 느끼는 아빠의 고뇌라던지 하는 진지하게 천착할 수 있는 감정선들은 뭉텅뭉텅 잘라냈다. 두 주인공의 출생의 비밀을 알기 위한 여정이 주요 스토리인데, 마치 영화를 위한 스토리보드처럼 조력자인지 적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의 도움으로 추격자들을 피하고 자신의 실체(클론이라는 것)를 알아가는 과정이 너무나 뻔해 보여 별반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역자는 후기에서 레몬이라는 제목 자체가 스포일러라고 하는데, 동의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레몬의 속뜻으로 가짜, 시시한 것, 불량품 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은 또 처음 알았다.

89쪽

앤은 자기 출생에 의문을 품은 적이 없을까? 레몬을 먹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엄마를, 그리고 그 나흘 뒤에 아빠를 열병으로 잃은 그녀지만,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부모를 더할나위 없이 사랑했다. 부모의 이름을 멋지다고 생각하며, 두 사람에 사람들이 이야기해 준 추억들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다. 고아가 되고 나서는 토머스 부인이나 해몬드 부인이 보살피게 되고, 나중에는 초록색 지붕집의 늙은 남매와 살게 되지만 자기 부모에 대해 알고 있는 약간의 지식이 공상을좋아하는 앤을 계속 격려해 주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나도 앤처럼 아예고아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렇다면 엄마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죽음에 대해 고미할 일도 없고, 내가 부모와 전혀 닮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앓이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331쪽
내가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은 단순한 분신 제조 장치에 불과했다. 적어도 아빠는 그녀를 그렇게 취급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빠는 아마 나를 전에 사랑했던 여자의 복제품으로밖에 보지 않았을 것이다. 틀림없이 나는 아빠에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마음 속에서 아빠에 대한 미움이 커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엄마의 몸을 이용하고, 함부로 인간의 삶을 조작한 것은 무거운 죄일 것이다. 그러나 아빠가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경우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혼란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그랬다는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아도 좋았겠느냐고 물으면 울고 싶을 정도로 난처한 심정이 된다.


424쪽
나는 눈을 감고 내가 죽었을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태어난 것이 잘못이라면, 내가 죽어 털어버리면 되는 걸까? 마치 비디오 게임의 리셋 버튼을 잘못 눌렀을 때처럼.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다 정리될까?
그렇지만 자신의 삶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동시에 이런 생각도 했다. 자신이 누군가의 분신이 아니라고 잣니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걸까, 하는 오히려 누구나 자기 분신을 원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걸 발견하지 못해 사람들은 고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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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7 13: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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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0 15: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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