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날 오후 1시 기차로 친정에 갔다가, 금요일 오후 3시 20분 도착 기차로 집으로 올라왔다.

원래는 토요일까지 띵가당거릴 계획이었으나, 마침 가지고 내려간 책도 다 읽어서 똑 떨어지고, 비오고 흐린 날이 하루이틀 이어지니, 외출도 어려워서, 이제는 제법 뻗대고 드센 아들녀석과 씨름을 하거나,  해주시는 밥먹고, 침대에 껌딱지처럼 붙어서 게임이나 하는 것에 멀미가 난 거다. 예약한 기차표를 취소하고, 환불받고, 다시 예약하고...

서울 집에 도착, 현관문을 열었는데, 사나흘 비워 두었던 집안 공기가 심상치 않은거다.  매캐하면서도 좀 이상 야릇한....(3박 4일 동안 이 빈 집에서 뭔일이 있었던 걸까???) 

신발을 벗고, 들어선 거실 바닥에  갈색 젤리 같기도 하고, 묽은 피????처럼도 보이는 뭔가가 고여 있었다. 뭐야..!끔찍하군.

아이가 그 위로 철푸덕 앉아서 첨벙첨벙 하기 전에 냉큼 걸레를 집어들고 , 정체불명의 액체를 닦아보려고 애를 썼으나, 이미 굳어서 지워지지 않는거다. 걸레를 집어던지고, 갈색 물줄기의 진원지를 쭈욱 따라가 보았다. 냉동실 문짝이 약간 열려 있었고, 사각의 생크림 케익 포장박스가 비죽이 튀어 나왔다.

아.씨.

3박 4일 동안 냉동실 문짝이 열려진 상태로 있었던 거고...

거실 바닥까지 주욱 흐른 것은 얼려둔 마늘과 생크림 케잌에서 녹은 초콜렛과 냉동칸에 들어 있던  고기들이 삼박사일을 천천히 녹고 녹아 만들어낸 혼합즙이었던 것...!

나는 누가(누구긴 나 아니면, 남편이지.) 냉장고 문짝이 열려진 걸 확인도 안 하고 나왔는가를 추궁했다. (나는 아니니까.) 

사건 당일, 시댁에서 차례를 지내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내려갈 준비를 하면서, 찬이 아빠는 아들과 점심 대신으로 생크림케잌(23일이 내 생일이었다.) 조각을 먹고, 냉동실에 상자째 넣었다고 한다. 물론 한번에 꽉 닫히지가 않아서 다시 한번 밀어넣고 밀패된 걸 확인했다고 한다. (근데 다시 열릴 수 있는건가???) 평소 침착하고 살림에도 소질이 약간 있는 남편이라 믿었는데...

우리집 냉동실에 잔뜩 쟁여져 있던 고기는 ...일이 이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그렇다. 나는 집에서 하는 고기 요리를 그닥 즐기는 편이 아니다. 고기 상태가 아주 좋지 않고서야, 내가 요리를 하면 맛과 향취를 살리기가 어렵다 보니, 우리 가족은 정 고기가 먹고 싶으면, 밖에서 해결한다.

그런데, 아이가 생긴 후부터는 쇠고기를 정기적으로 사둔다. 이유식할 만한 약간의 분량만!

 이유식 관련 육아 책마다 어찌나 쇠고기 안심 섭취의 중요성을 강조들 하시는지, 안 멕이면, 아이 발육에 큰 지장이 생길 것 같은 경각심이 불끈 들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밖에 데리고 나가면, 개월 수에 비해 아이가 작네, 팔다기가 짧네.. 뭘 먹이네?? 어쩌네저쩌네... 말 많은 입들도 신경 쓰이고.

추석 바로 전주(금요일) 저녁에 모처럼 큰맘먹고 동네의 재래시장에 가서 아이 이유식으로 먹일 쇠고기 안심을 샀다. 매번 두 세번 먹을 정도로 손바닥의 반 만큼만 샀었는데, 그날은 일이 이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명절 전날 기분 내려고 그랬는지,(명절 때면 선물 챙기고, 선물 받고 하는 문화를 보면서...유독 명절에만 먹고 죽자 하는 근성들이 있는거 같다고 쯧쯧대던 난데....) 두 손바닥 펼친 두께만큼 사서 다져달라고 했다. 집으로 가지고 와서 한번 해 먹일 분량만큼 등분을 해서 따로따로 얼려두었다. 

그런데 그 날 늦은 저녁 남동생이 회사에서 고기 선물 세트를 받았는데, 집에 내려갈 때 가지고 가야 겠지, 무겁겠지...하는 전화를 받노라니, 아차다 싶었다. 거기엔 양질의 안심과 갈비가 있다는 거다. 그 안심으로 찬이 먹거리를 해결하면 충분할텐데 생각이 들면서...

어차피 차례 지낼 떄 쓸 고기는 부모님 집에도 많다고 하고(그 와중에 전화로 고기 있냐고 여쭈는 나의 집요함) 있는데 또 가져 가는 거 보다는 무거울테니, 우리 집에 두고 내려 가라고 해서, 그 날 늦은 밤에 동생은 그 고기 세트를 들고 우리집으로 왔었다.  

속으로 좀 그런 생각도 했었다. (갈비는 몰라도 안심은 보내드려야 하는거 아닌가 몰라, 아니 안심은 찬이 먹이고, 갈비는 요리도 자신없으니, 그거야 말로 보내드려야 하는거 아닌가 몰라, 고기도 좋아하지 않으면서 뭔 욕심을 이리부리나 몰라......)

동생이 가져온 고기는 이 막눈이 보기에도 훈늉했다. 나는 어쩐지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갈비는 비닐로 진공포장이 되어 있었고, 안심은 그렇지 않은 비닐포장이었다. 냉동실에 두지 않고, 바로 구워먹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갈비는 냉동실로 직행하였고, 안심은 냉장실에 두었다. 그런데 어찌저찌하다보니, 못해먹고, 명절 전날과 당일날은 시댁에 있었고, 하여 안심은 다시 냉동실로 가게 되었다. 처음부터 냉동실에 둘껄 했지만, ,,,,  음냐...이래서 길에서 주운 돈과 쇠고기 안심은 그날 바로 처치하라는 옛말이 있나보다. (??)

내것은 아니었지만 내것이 된 추석 선물 고기를 두고, 그렇게 갖은 실랑이를 벌인 끝이었는데...

이미, 이유식으로 쓰려고 다진 고기를 넣어둔 팩은 검붉게 고기에서 배어나온 핏물이 절반이었다.... 저 지경이면 익혀서 지나가는 똥개에게 주어도 안 먹을 듯..

안심의 상태는 육안으로는 잘 모르겠다. 나는 냉동실 문단속 안 한 .. 남편에게 말없는 시위를 하면서...댓발나온 입을 해가지고, 그 고기를 몽땅 간장참기름마늘설탕양파로 양념을 만들어서, 재 가지고  팬 위에 올려 놓고, 구웠다.

갈비는 진공포장이니까. 일단 괜찮을거라 생각해두고.

참기름 냄새가 진동을 하니, 일단 먹음직스러운 향이 났다.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과일칸을 뒤져  배도 깎아 넣었다.

고기는 거의 익었는데 한 점 맛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남편이 와서 한 점 집어먹는다.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한마디를 더 하는데, "찬이에겐 주지 말자!" 

뭐시야- 애도 못 먹을 정도면 나도 못먹지...

냉큼 나도 한점을 입에 넣었다. 처음 씹을 땐 육질도 쫀쫀하고, 게다가 들치근한 양념 때문에 고기맛을 잘 모르겠다가...뒤에 느껴지는 맛이 참 이상했다. 또 한 점을 집어 먹는다. 그런데 이건 확실히 맛이 구렸다. 웩...

어떤 조각은 먹어줄만했고, 어떤 조각은 심각한 상태였고,

겉보기로는 모른다. 뭐가 멀쩡한 고기 조각인지...

남편은 먹어도 괜찮은 고기라고 한다. 물간 생선을 먹으면 바로 탈이 나지만, 고기는 다르다나... 썩은 걸 먹지 않는 한 인체에 해가 없다나...

걱정 말라고 자기가 다 먹어치우겠다고 한다.

자기가 어릴 적에 이런 경우가 많아서 잘 안다나.

냉장고가 작아서 고기 선물 들어오면 냉장고에 못 들어가는 고기는 베란다에 두었는데,,,

어떨땐 이런 맛을 내는 상태에 까지 이르기도 했다고.

흠... 실눈을 뜨고 남편을 가만히 바라보니, 어딘지 남편은 신나 하는 거 같다.

잡동사니를 버리고 물건들을 정리(정리가 아니라 처분...)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경향이 있는 남편은 어느새 노란 음식물 종량 봉투를 들고와 냉동실에 있던, 남은 생크림 생일 케잌, 둔 떡들(받은 떡* 돌잔치할때 돌상위에 있던 거 챙겨온 것),얼렸다가 해동되면서 이제는 물렁물렁해져 썩을 일만 남은 인삼뿌리들과 얼려둔 콩비지,각종 먹거리들을 싹 주워 담아 넣어버린다. 마치 이런 날이 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뭐냐...

복잡한 심사를 눅일만큼 도수 높고 달치근한 술생각이 간절했다.

수유다 뭐다 해서 맥주도 500cc 두어잔 정도까지만, 소주도 2잔 이하 뭐 그랬는데,,, 이렇게 땡겨 보긴 정말 간만이었다.

마침 부모님댁에 선물로 들어온 6년근 홍삼주 한 병과 전봇대도 뚫어버린다는 복분자주 한병을 우리집으로 가져왔더랬다. (아버지는 술을 한 방울도 못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선물한 사람 센스도 없네. 술 못하는 아빠한테.. 이게 가당키나 하면서.." 포장 종이백채로 싸들고 왔다.

아이를 재우고, 고기와 그밖에 것들로 주안상을 폈다. 그리고 소주잔에 색깔도 고운 복분자주를 똘똘똘 소리나게 따랐다. 고기를 먹기 전에 한잔 원샷!

어머나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술이 쎄진거냐. 달착치근하고, 알코올기운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거다.

병을 다시한번 살펴보다. 복분자....주가 아니라, 복분자 진액... (뒷병에는 마시기 전에 흔들어주시고, 1일 2~3회 1회 1~2잔을 드십시오. ) 약이었던 것이다.

다 먹겠다던 남편의 젓가락이 고기 접시에 가닿지 않는다. 나또한 어느것이 멀쩡한 고기일지 불확실함을 달게 감수하면서 고기를 먹을 용기가 쉽게 나질 않고...

운명은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거다. 음식물 쓰레기봉투 속으로 직행하도록....개네들의 운명의 화살을 바꿔보고저,,,간장참기름마늘설탕양파 그리고 배.... 가스불...설거지만 만들어놓은 팬..

 

고향으로 내려갈 고기를 중간에서 삥 뜯었다가 이런 화를 당하고...

아버지 앞으로 온 약 선물을 술 선물로 착각하고 중간에서 착복했는데...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결국, 복분자 진액에 보드카(몽골 울란바토르에 다녀온 지인이 준)를 섞어 마시다, 안되겠어서...남편에게 편의점에서 매취순 두 병과 포 안주를 사오라고 시켜 병을 비웠다.

기분이 그래선지... 술도 금방 확 깼다. 지금은 너무 멀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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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9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7-10-02 09:04   좋아요 0 | URL
소설가 선생님께 소설 한 단락 운운은 굉장한 칭찬인거예요~ 그죠??
축하 고마심다~ 가족에게마저도...은근 챙김받기 애매한 날짜에 태어났지 뭐랍니까.
제가 주부가 맞나봐요. 이런 살림 손해 막심에 마음이 한없이 쓰이니까는 ^^

마냐 2007-09-29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파란만장한 추석후일담. 왜 이렇게 남일 같지 않고 생생한지. 그리고 일이 터질라믄 꼭 평소 안하던 짓까지 더해 대박으로 터지는 건지..모쪼록 보드카에 매취순이 님의 마음을 달래주고, 인생과 세상만사에 대한 깨달음이나 더해줬길 바람다. 뭐, 냉동고 청소 오랜만에 제대로 한 것에 위안 삼으시길.

icaru 2007-10-02 09:08   좋아요 0 | URL
마냐 님의 따끈따끈한 근황 글도 읽고 왔어요^^ 에고 독한 것-보드카,넘 쓰더라고요. 마냐 님의 이 길이 내 길인가, 라는 주제 의식의 글을 읽으면서 저또한 생각한답니다. 집어치우자! 하는 마음 다독다독 --

2007-09-30 2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02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humpty 2007-10-02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캬, 파란만장 연휴였구만요.
근데 난 저 상황이 눈에 그려지니 왜이리 웃기냐? ㅋㅋ

icaru 2007-10-02 13:40   좋아요 0 | URL
그지? 우리 신랑이 은근 신나 하는 모습이 보이지??
정말 탈많은 추석이었어. -- 찬이가 감기 때문에 열이 펄펄 끓어서-- 한바탕 정신 없었고-- 에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