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홍은택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효율성과 생산성 그리고 속도에 미쳐 날뛰지 않고, 건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바퀴를 굴리면서 자신의 몸의 가능성이 쉬지 않고 이뤄지고 펼쳐지고 있는 것을 느끼는 필자를 대하노라니.

 

또한, 잘 노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어차피 이 일로는 대가가 되기도 어렵고, 그럴 생각도 없고, 일이 그저 즐겁기나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지시하고 참견하는 사람도 많으니, 글쎄다 싶고. 

시켜서 하는 일만 잘 하고, 그 비위만 맞추는 건 사양하고 싶다. 그런 식으로 살면 인생이 얼마나 뻔해질까 한다. 개성을 상실한 채 사회적 기능과 의무를 다하는, 전체의 일부로 살아간다. 그러기 싫어서 책을 읽는다. 적어도 책은 시키는 일만 잘 하라고 훈계하지는 않으니까.

 

p.15
몸무게 70킬로그램 한 사람을 나르기 위해 300마력을 내는 2000킬로그램 괴물을 움직이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인가. 자전거 사색가인 리처드 밸런타인이 말했듯이, 카나리아 한 마리를 죽이기 위해 원자탄을 투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p.46
서울도 그랬듯이 미국의 도심에는 전차가 다녔다. 안전하면서 편리했다. 그런데 이 전차가 자연스런 도태과정을 밟아 사라진 것이 아니다. 1940년대 말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 제너럴 모터스는 다른 자동차 회사들과 담합하여, 전차 회사들을 몰래 매입한 뒤 전차의 궤도를 걷어내고 버스 회사로 바꿔버렸다. 버스를 더 많이 팔기 위해서였다.

p.143

나는 그 동안 항상 뭘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다. 목표를 이루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잠시고, 곧바로 더 어려운 목표를 설정해 스스로 채찍질했다. 그래서 현재는 미래로 가는 하나의 디딤돌에 지나지 않았다. 그 무수한 디딤돌을 밟고 미래는 항상 저 멀리 달아난다.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다. 현재가 내 삶에서 소외돼 있는 것이다. 직선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내게는 두 점, 다시 말해 과거와 미래밖에 없었다. 그 두 점을 잇는 선분인 현재는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지 못했다.

 

p.183

나는 레이서들을 부러워하고 존경한다 촌각을 다투는 승부사들의 세계가 멋있어 보인다. 그는 "머리가 너무 좋으면 위험을 너무 따지기 때문에, 그리고 담력이 너무 세면 너무 덤벼들기 때문에 좋은 선수가 될 수 없다"며 담력과 지력을 적당히 겸비하는 게 우승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p. 240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텐트의 아래쪽, 그러니까 발바닥 쪽을 놓는다. 바람이 발가락 사이를 시치듯 올라와 목을 간질이고 얼굴을 쓰다듬는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머리부터 놓으면 머리가 높고 커서 바람의 길을 막아버린다. 굳이 바람이 없어도 좋다. 공기가 흐르는 것을 몸으로 느낀다. 기온 차가 심해서 새벽에는 침낭 안으로 기어들어가지만, 대기와 체온의 변화가 동조하는 게 좋다. 그래서 웬만하면 텐트 위에 플라이를 치지 않는다. (중략)

짙은 풀밭에 누우면 마치 마루에 융단을 깔고 누운 것 같다. 이 마루는 아침이면 촉촉이 젖는다. 그 과정이 서서히 일어나기 때문에 등이 축축해져도 불쾌하지 않다.

만약 기라는 게 있다면, 그리고 그걸 체득할 줄 안다면 우주의 기운을 빨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 순간 우주의 질서를 훼방하지 않는 돌이나 나무 같은 존재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야영을 하면 잠도 일찍 깨고 몸도 찌뿌드드하지 않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원뿔형 천막인 티피에서 자면 이런 기분이 들 것 같다. 

 p.288

놀이는 일상적이고 지루하고 관습적이고 당위적인세계에서 벗어나, 즉흥적이고 자발적이며 사소하며 창의적인 세계로 가는 몸짓이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는 것이다. 백수들이 추구하는 세계이다.

p.399

그가 건네준 보드카를 마시면서 나는 미국 횡단 자전거 여행의 마지막 밤을 마비시켰다.

이제 딱 달라붙어 있어서 떨어지지 않는 누룽지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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