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우치다 다쓰루의 혼을 담는 글쓰기 강의
우치다 다쓰루 지음, 김경원 옮김 / 원더박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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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전혀 몰랐던 사람이다.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라니, 만약 제목대로라면 에두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를 해 주려나 하는 호기심 정도가 일어났다. 책날개를 보니, 일본의 저명한 학자라고 하네.

우연히 들춰본 문구 속에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세계의 어린이들이 볼 것으로 의식하고 애니메이션을 만든 게 아니라 일본 어린이들만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세계적으로 통했다. 라는 것. 아울러 재밌는 구절이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내게는 실패작이 몇 개 있습니다.” <붉은 돼지>라는 작품을 두고 실패작이라고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했을 뿐, 관객인 어린이가 아니라 자신의 미의식이나 기호에 맞추어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참 흥미로운 구절구절을 발견한 것이다.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다가 서점 안을 걷고 있었더니, 책과 눈이 맞았다 라고나 할까. 어쩌다 집어든 이 책에는 마침 내가 읽어야 할 것이 쓰여 있었던 것.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한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의 ‘바보의 벽’, 우리 내면의 ‘평범함의 경계선’을 뚫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글을 쓰는 일은 고역일 따름입니다.

 

언어에도 ‘생명이 있는 언어’와 생명이 없는 언어가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에게 ‘살아가는 지혜와 힘’을 높여주는 언어가 있는가 하면, 살아가는 힘을 잃게 하는 언어가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내면을 향해 잠수해가는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어디까지든 한없이 들어갑니다. 그러나보면 자신의 개별성이나 개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이상까지 뚫고 나가버립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꿈을 꾸기 위해 매일 아침 나는 눈을 뜹니다.>에서 그는 소설 쓰는 행위를 가리켜 ‘지면에 구멍을 파서 수맥을 찾아내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구멍을 파다가 무언가 솟구쳐오르면 그것을 길어올리는 것이다.

 

 

다른 글에서 그는 “양을 쫒는 모험‘을 쓸 때 전문작가로 살아갈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71쪽

무슨 일이 있어도 책과는 우연히 만나야 합니다. 친구가 “이것 좀 읽어봐, 정말 마음에 들 거야.”하고 추천해서 책을 읽으면, 재미는 확실히 있을지 모르지만 ‘숙명의 책’이 되지는 못합니다. 여름방학 과제로 읽어야 해서 읽은 책도, 찬사 가득한 서평을 받은 책도 안 됩니다. 타인의 평가가 끼어들었으니까요. 그런 것은 우연한 만남이 아닙니다. ‘내가 어쩌다가 이 책을 집어든 것은 이 책이 내비치는 아우라에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야.’ 이런 서사가 성립해야 합니다.

 

이상하게도 몹시 기분이 좋을 때는 글을 쓰고 있을 때 ‘끝까지 다 글을 쓴 자신’의 성취감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몇 주 동안이나 연속적으로 하나의 글을 쓰기 위해 몰두하고 있으면 뜻밖에도 ‘아카데믹 하이’ 상태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전부 다 글을 쓴 자신의 이미지를 선취합니다. 글을 다 쓰고 난 다음 되돌아보듯이 결론에 이르는 논의의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보입니다. 어디에서 어떤 논증을 대고, 어떤 인용을 통해 어떤 결론으로 흘러가야 하는지 죄다 보입니다. 순간적인 ‘비전’이기 때문에 곧장 사라져버리지만, 그 후에는 충만한 행복감에 휩싸입니다. ‘이 논문은 반드시 완성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 논문ㅇ르 다 쓰고 난 다음의 자신과 만났기 때문에! 모든 물음에 대답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다 보았단 말이다!’

이런 선구적인 비전은 긴 글을 쓸 경우 필수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한 비전을 가져다주는 것은(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수동적인 전지전능의 느낌’입니다. 자신이 혼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아끌어 공중 높이 들어 올린 다음, 유체이탈을 한 상태로 자기 자신이 하는 일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까지 글을 다 쓰고 난 이후 깊은 만족감을 맛보는 자신이 보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수동적인 전지전능의 느낌에 강렬하게 열광합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는 뇌 속에 엔도르핀이 대량으로 나올테니까요. 오싹하는 쾌감입니다.

 

 

 

 

251~252쪽

 

나는 20대 청년 시절에 난해한 책으로 잘 알려진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무슨 말을 썼는지 하나도 알지 못했지만, 이 책을 읽지 않으면 그 당시 연구를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3주에 걸쳐 젖 먹던 힘까지 내어 통독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처음에는 의미를 알 수 없었는데 3주일 동안 줄기차게 읽었더니 어렴풋이 감이 잡혔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모르는 사람들이 오고가며 외국어로 떠드는 연극을 3주일 동안 매일 본 느낌입니다. 그만큼 오랫동안 붙들고 늘어지면 어느새 감정이입할 수 있는 등장인물도 나오고, 편들어주고 싶은 배우도 생기고, 귀에 익숙한 반주 음악이나 익숙한 무대 장치도 식별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떤 이야기인지,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문제가 무엇인지 점차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일 정보의 입력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면 인간의 뇌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재조직화됩니다. 진짜 그렇습니다.

 

 

그럴 경우 경험적으로 확실한 점은 신체를 매개로 삼으면 효율적이라는 점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성은 오랫동안 내 연구 주제였습니다. 왜 그는 온 세계의 수억명의 독자를 얻고 있을까? 자신이 직접 트라우마를 경험한 작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경험에 대한 기억의 결여,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물려받은 작가, '거짓 경험'을 자신의 근거로 받아들인 작가는 어쩌면 별로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성에 근거를 이루지 않았을까 합니다.

 

 

 

작가의 후기

 

(...) 통독하는 동안 반복적인 이야기가 잦아서 스스로도 싫증이 났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는 반드시 '반복'이 있는 법입니다. 미묘하게 음조가 다른 반복이 이어지다가 이야기의 수준이 겨우 한 눈큼 만큼 깊어집니다. 산을 오를 때 빙글빙글 산 주위를 도는 길을 헤맬 때와 마찬가지로 몇 번이나 똑같은 경치와 마주칩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때마다 조금씩 등고선이 더 높은 곳에서 본 경치입니다. 따라서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경치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바다가 보이기도 하고, 먼 산이 보이기도 하면 경치의 '문맥'이 변합니다. 그래서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곳은 '고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니까 눈감아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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