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문학선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
김동인 외 지음, 이남호 엮음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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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수업이나 시험과 상관없이, 순수한 동기에서 꺼내 들어 읽는 우리 문학이 얼마나 좋았는지. 우리 나라 대표적인 작품들이니 내용은 대부분 알고 읽는데도, 시대가 좀 변해서 그런지 지금은 안쓰는 생소한 단어나 표현들이 군데 군데 섞여 나오는데도, 짜증이 아니라 오히려 구수하고 새로운 느낌이 드는 건 왜인가. 아마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이겠지. 한국인 DNA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겠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한국단편문학선1, 2 란 제목으로 두권이 포함되어 있다. 1권에는 김동인, 현진건, 이광수, 나도향, 최서해, 김유정, 채만식, 이상, 이효석, 이태준, 정비석, 염상섭의 단편이 1~2편씩 수록되어 있다.

순서 상관없이 제일 먼저 읽은 것은 이상의 <날개>였다. 1910년 서울생 이상은 건축과를 졸업하였고 건축으로 공모전에 당선되는 것이 먼저였으나 건축 잡지에 시를 발표하고, 서양화를 선전에 출품하여 입선하기도 하였으니 예술적 재능이 넘치는 사람이었나보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가 무절제하고 빈곤한 생활로 이어진 끝에 2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날개>의 첫문장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내가 읽으며 밑줄친 문장은 뒤에 나오는, 보다 평범한 문장이었다.

 

나는 목적을 잃어버리기 위하여 얼마든지 거리를 쏘다녔다. 돈은 물론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돈을 쓸 아무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나는 벌써 돈을 쓰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았다.

 

목적을 잃어버려야만 버틸 수 있는 나날들.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아내라는 창을 통해 내다보는 세상. 자기와 완전히 격리되어 버린 세상에서 존재하는 방식은 목적을 잃어버려야 하고, 날개가 없어 혼자 날수 없는 상태여야 했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득였다.

 

죽음과 다를 바 있냐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보고 싶은 이유는, 마지막 문장 때문이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특히,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라고 행을 바꾸어 반복함으로써 간절함과 동시에 자기의 무능력에 대한 자책을 표현하기도 했다.

잃어버린 ego, 약한 자의 슬픔을 주제로 하는 작품은 시대적 배경 때문인지 다른 작가들에서도 거의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었는데 김동인의 <감자> <발가락이 닮았다>의 경우, 새로운 문물과 사상에 밀려 전통의 가치가 무너짐을 겪었던 시기, 도덕과 양심보다 물질의 가치에 마음을 잃었던 시기에 개인의 삶의 참담한 결말과 허무함을 보여준다.

이광수의 <무명>은 한국문학에서 이광수의 독보적인 위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확인시켜주는 또 하나의 예라고 본다. 환자들만 수감되어 있는 감옥 병동에서의 이야기인데, 한 공간에 수감되어 있는 각 인물들의 행동이나 성격 묘사도 매우 사실적이고, 그들의 행동과 말로 대변되는 그당시 사회상 표현도 뛰어나다.

김유정의 <동백꽃>은 그나마 희극적인 결말로 맺는데 특히 더 짧은 분량때문인가, 현진건의 <빈처><운수 좋은 날>, 최서해의 <홍염>에서처럼 비극적인 여성상이 아니어서 잠시나마 위안이 되었고, 덤으로 알게 된 것은 지금까진 동백은 붉은 동백만 알고 있었는데 이 작품 속 동백은 노란 동백이라는 것.

수록된 단편중 최고를 꼽으라면 나는 이효석의 <산>을 꼽을 것이다. 김영감 집에서 머슴살이 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자 뛰쳐나와 산에서 홀로 살아가기로 작정한 중실이라는 사내의 이야기이다. 중실의 독백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엔 그래서 다른 등장 인물도 없다. 그런데도 자연의 묘사, 사람 마음 속내 묘사가 어찌나 섬세하고 사실적인지, 단어 선택의 풍부함, 문장의 감칠 맛 등, 읽다보면 중실의 마음 속으로 내가 들어가있는 느낌을 받는다. 여기엔 아마도 사람들 모여사는 세상에 질리고 정 떨어진 주인공이 외롭지만 거짓없는 산 속으로 들어와 하나 되고 싶어하는 그 마음에 공감이 가서였는지도 모른다. 한번 읽고 지나가기 아쉬워 한줄 한줄 노트에 베껴써보기도 했다.

 

 

 

 

 

 

 

 

 

 

연달아 나오는 이효석의 <모밀꽃 필 무렵>도 못지 않다. 중학교때 국어 시간. 국어 선생님께서 이효석의 모밀꽃 필 무렵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되 작품 속에 나오는 허생원과 동이가 어떤 관계인지를 독후감 속에 써오라고 하셨다. 책 안읽고 참고서 베껴서 독후감 쓰는 것을 방지하는 목적으로 내주신 문제같은데, 정작 이 순진한 중학교1학년생은 작품을 끝까지 다 읽고도 허생원과 동이가 과연 무슨 관계인지 확실히 모르겠는 것이다. 지금 다시 읽으니 그 당시 중학생 나로서는 읽고도 못찾을수 있었겠다 싶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내주신 국어 선생님의 마음이 헤아려지기도 한다. 이 작품 어디에도 허생원과 동이가 어떤 사이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다. 작품 속 허생원이 동이가 자기의 아들임을 발견하는 장면처럼 작가는 독자들도 읽다가 어느 순간 어렴풋이 알게 되는 쪽을 택했다. 이런 묘미를 어디서 또 찾을 수 있을까.

내가 직접 살았던 시대의 이야기가 아님에도 읽는 동안 주인공과 함께 가슴 아프고, 마음 졸이고, 허무해지고, 악 바치기도 하며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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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8-03-23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2 여름방학때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비슷한(?) 독후감을 써 오라는 숙제를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답니다.
김동인의 <감자>, <발가락이 닮았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등등이 ‘숙제 범위‘였지요.
제 집에는 그런 책들이 없어서 제 짝궁이 사는 ‘주실마을‘(조지훈 시인의 고향)까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자갈투성이 신작로를 하루 종일 걸어서 다녀 왔던 기억도 생생하고요. http://blog.aladin.co.kr/oren/8179370

나중에 고1에 진학해서 <한국 근대 단편문학 전집(전5권)>을 책장사한테 속아서 샀는데, 그 책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맨날 저녁밥 지어먹고 나면 그 책부터 펼쳐 읽던 기억이 아련하네요. 메밀꽃 흐드러지게 핀 무렵, 허생원과 동이가 달빛 아래에서 강을 건너갈 때의 풍경도 그림처럼 떠오르고요.

hnine 2018-03-24 07:38   좋아요 0 | URL
적어주신 예전 포스팅 찾아가서 잘 읽었습니다. 예전 일이지만 생생히 기억하시네요. 지금이야 읽을 거리가 여기 저기 넘쳐나서 잘 골라 읽어야 할 정도이지만 예전에만 해도 읽을 책을 찾아다녀야 했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당시 중학생들에게는 감자, 발가락이 닮았다, 메밀꽃 필 무렵 (제가 이번에 읽은 민음사 책에는 제목이 모밀꽃 필 무렵으로 되어 있네요. 저도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제목이 더 익숙한데 말이죠) 같은 작품들에 담긴 뜻을 제대로 잘 파악하며 읽기란 좀 무리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해요. 저한테는 그랬지요 ^^
실제로 메밀꽃은 화분에 핀 것만 봤지, 밭을 이룰 만큼 피어있는 풍경은 본 적이 없어서, 저는 실감있게 상상이 잘 안되어요 더구나 달빛 아래 메밀꽃밭을 걸어가는 풍경은 더 상상이 잘 안되어서 아쉽답니다. 달빛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메밀꽃 핀 봉평에 가보고 싶어요.

oren 2018-03-24 16:57   좋아요 0 | URL
hnine 님은 메밀밭을 여태 못 보셨군요. 저는 어릴 때부터 메밀밭, 메밀꽃, 메밀묵 등과는 아주 친숙했는데 말이지요.. 어른이 되어서 메밀과는 한참 동떨어져 지내다가 다시 메밀과 가까원진 건 봉평에 자주 드나들면서부터였습니나. 겨울철마다 스키 타러 보광피닉스파크를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그때마다 봉평 읍내에 있는 단골 메밀국수집을 꼬박꼬박 찾았으니까요. 봉평뿐만 아니라 대화까지 가서도 메밀국수를 두어번 맛 본 듯한데, 그 동네를 다닐 때면 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함께 떠올리곤 했지요. 어릴 때 가끔씩 보았던 ‘눈이 내린 듯한 메밀밭 풍경‘과 함께 말이지요...

hnine 2018-03-25 10:10   좋아요 0 | URL
저 그래서 검색해봤더니 메밀꽃 축제가 가을에 있네요 (그것도 이제 알았습니다). 꼭 한번 가보고 싶어요.
책으로 읽으며 상상하던 것과 비교가 안되는 경험을 하게 되겠지요. oren님은 눈이 내린 듯하다고 하셨고, 이효석은 소금을 뿌려놓은 듯 하다고 했고, 저는 뭐라고 할까요? ^^

세실 2018-03-24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생원과 동이의 관계.. 막연한 짐작으로...그쵸?ㅎㅎ
이효석의 <산> 궁금하네요.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니 절대 읽을 일 없겠다 생각했는데....국어 공부의 폐단이죠.

hnine 2018-03-25 10:13   좋아요 0 | URL
세실님도 막연한 짐작으로? ^^ 저는 중학생때는 막연한 짐작도 안가더라고요. 지금 읽으니 확연히 알겠던데 말이지요. 그래도 나이는 그냥 먹은게 아니었나봐요.
이효석의 <산>은 대단한 스토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문장이 너무 좋고, 산을 소재로 하면서 일인 주인공의 심경을 기가 막히게 이입하여 표현한데 감동받아서, 제가 친구에게 이 작품 읽어보라고 하면서 얘기하기를 ˝버릴 문장이 없어˝라고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