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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에게
마루야마 겐지 지음, 강소영 옮김 / 바다출판사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신간인줄 알고 덥석 샀는데 2001년 출간된 <산자의 길>의 개정판이란다. 출판사와 번역자가 바뀌어 2017년 12월에 새로 나온 것. 뭐, 어떠랴. 안 읽은 책이라면.
1943년생이니까 올해 저자 나이 75세. 이 책은 그가 56세때 쓴 자전적 에세이이다. 거의 20년이 지났으니 그동안 가치관이나 생각에 충분히 변화가 있을수도 있는 기간이겠지만 그런 변화도 이 시기의 생각을 거쳐서 일어난 일이니 마루야마 겐지에게 관심이 있는 나로서는 여전히 읽을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 에세이를 쓰게 된 동기를 책의 뒷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최근에 와서 문득 이런 생각이 마음 속을 스치기도 한다. 과연 나는 가진 능력을 마음껏 다 쓸수 있는 인생을 선택한 것일까. 사실은 가장 편한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닐까.
혹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낼지도 몰라서 다음 소설에 돌입하기 전에, 자전적이면서 제대로 된 자서전과는 다른, 더구나 실수로라도 고백을 지향하거나 하지 않는 이 에세이를 쓰기로 했던 것이다. (273, 274)
그는 과연 이 에세이를 쓰면서 그 답을 찾아냈을까?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 <달에 울다>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그 이전의 어떤 소설을 읽을 때와도 같지 않았다. 비슷하지도 않았다. 눈은 글자를 읽고 있지만 머리 속에서는 늘 그림이 한장씩 펼쳐져 있었다. 일체의 군더더기를 배제하고, 직접적인 감정 묘사를 절제한 문장들. 그럼에도 읽는 사람의 마음에 이는 파문은 넓고 깊었다. 평소 소설을 나만큼 즐겨 읽지 않는 사람인줄 알면서도 남편에게도 읽어보기를 권한 소설이 지금까지 딱 2권 있는데 이 책이 그중 한권이 되었다.
그 다음으로 읽은 것이 <여름의 흐름>.
무선회사를 다니던 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쓴 소설이자 문학계 신인상과 아쿠타가와상을 안겨주어 그로 하여금 곧 문을 닫을 위기에 있던 회사를 그만 두고 나와 소설가로 전향하게 만든 책이다. 첫 소설임에도 먼저 읽은 <달에 울다>에서 느꼈던 그의 문체 스타일이 이미 살아 있었고 내용도 그에 못지 않았다. 두권을 읽고 나니 작가에 대한 관심이 증폭, 그의 에세이 세권을 내리 읽었다.
그래서 자전적 에세이임을 표방하고 있는 이 책 <산 자에게>는 자연스럽게 중복되는 내용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동안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쩌다가 소설을 쓰게 되었고 어떤 생각으로 쓰고 있는지에 대하여.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구체적이고 시간순서에 따라 기술하고 있는 것 같다.
쉽게 읽는 사람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글을 지양하고 지극히 냉정한 방식으로 쓰고자하는 그의 문학관은 아이러니하게도 평생 문학에 빠져 살았던 아버지에 대한 '반감'에 서 비롯되었고 이런 그의 생각은 아버지의 임종의 순간에도,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변함이 없다고 했다. '문학의 핵, 슬픔·기쁨·분노' (256-261)에서 그는 문학의 핵을 이루는 가장 큰 요인으로 분노, 슬픔, 기쁨을 들었고 이중 하나만 빠져도 문학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춘기에 싹튼 유치한 감수성에만 기대어 그 유일한 무기가 황산에 잠긴 못처럼 금세 녹아버리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나잇살이나 먹은 어른이 언제까지나 계속 글을 쓰는 것은 정말이지 꼴사납다. '소년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는 어른'이라는 형용을 찬사라고 믿는 자가 많은 것 같은데 그것은 당치도 않은 착각이다. 실은 최대의 모욕적인 말이다.
감상이라는 것은 자립의 길을 지향해 누구에게서도 엉덩이를 까이지 않는, 어머니를 대신할 강한 여자에게 기대지 않는, 어떤 권위에도 박해에도 굴하지 않는 어른의 길을 지향했을 때에 비로서 길러지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예술에 한정되지 않는다. 어떤 세계에서도 마지막에 그 인간의 진위를 가르는 유일무이한 절대적 척도이다. (258, 259)
이 책이 제목이 <산 자에게>인것과 관련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지극히 마루야마 겐지 다운 생각이다.
물에 빠지지도 않았는데 그런 척을 해서 타인의 애정을 확인하는짓을 되풀이하는 것은 산 자가 아니다. 죽은 자 이하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하려고 하는 자야말로 참된 산 자이다. (261)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하려고 하는자. 그래도 안될 때가 있지 않을까? 그럴 땐 어떻게 해야하나.
본문에서 이렇게 강하게 주장하던 그이지만 이 책의 마지막 마치는 글에서는 다소 누그러진 경향을 나타내기도 한다. 아니, 누그러짐이라기 보다 생각의 전환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시골에서 정원 가꾸기, 초목 기르기를 시작하면서 (그의 에세이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리 없다>에 잘 나타나있다) 오랜 기간 그를 칭칭 얽어매왔던 과격한 생각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단지 살아만 있는 듯이 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야말로,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산 자가 아닐까 하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아찔할 만큼 큰 목표를 정해 그것을 위해 온갖것을 희생하고, 일사불란하게 돌진해가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죽은 자에 가까운 산 자가 아닐까 하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280)
산다는 것에 대한 생각은 이처럼 계속 바뀌는 것. 살아있는 한. 살아있으니까.
현재의 내 생각이 절대적이라고 과신하면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에세이를 쓰게 된 동기라고 했던 문제의 그 답을 그는 과연 이 책을 쓰면서 찾아내었을까?
이 책을 쓰면서 찾아냈다기 보다는, 살아있는 다른 것들 즉 초목과 정원 일을 해보면서 오히려 더 산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어 가는 걸 느낀 것은 아닐까 짐작해본다.
소설가는 꿈도 꾸지 않던 시절부터 그를 그토록 열광시킨 소설이며 이 책에서 가장 여러번 언급되는 소설이 있었으니 바로 <백경>이다. 나에게 넘사벽인 책 <백경>. 부끄럽게도 축약본으로만 읽고는 축약본도 너무 좋더라고 리뷰에 쓴 책.
언젠가 꼭 제대로 다시 읽어야 할 이유가 마루야마 겐지 덕분에 또 보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