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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앞으로 가야할 길이 아니라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때.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다가 아니라 남아 있는 날을 이제 어떻게 보내나 생각하게 되는때. 삶의 진실은 왜 이쯤 해서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는 것일까.
1956년 영국 옥스포드셔. 아버지대부터 내려온 집사 일을 평생 무슨 종교처럼 여기며 그것만 생각하며 살아온 집사 스티븐슨. 먼저 모시던 영국인 주인에 이어 달링턴 홀의 새주인으로 모시게 된 미국인 패러데이 어르신으로부터 자기가 미국에 가서 두달 지내고 오게 되었으니 그동안 자기 차를 타고 일주일 정도 영국 산천을 여행하며 기분 전환이라도 하라는 제안을 받는다. 주인의 멋진 포드 자동차를 타고, 엿새에 걸쳐 영국 주로 남부를 여행하며 과거의 일을 떠올리면서 자기 삶이 어떤 궤적을 그렸고 어디에 와있는지 돌아보는 여정의 기록이다.
집사로서 저택의 업무가 흐트러짐없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부터 주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며 불편함없도록 챙기는 것, 즉 주인의 삶이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스티븐슨이 추호도 의심해본 적 없는 그의 임무이다.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고 그것만 바라보며 살아왔다. 아버지의 임종도 그래서 지킬 수 없었고 아버지도 그걸 더 원하리라 믿었다. 주인의 일이 잘 해결되고 순탄하게 흘러갈때 사는 보람을 느꼈다. 주인이 하는 일은 그만한 이유가 있고 명분이 있음을 의심치 않았고 감히 판단하고 이의를 가져볼 생각 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자기 임무, 자기의 존재 이유에 대한 이의가 되는 것이니까.
그런 그의 삶이 그에게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일까?
이름을 보면 일본 이름이고 태어난 곳은 분명히 일본이지만, 여섯살때 영국으로 이주하여 영국에서 교육받고 자란 그의 이 소설은 영어로 쓰여졌고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영국 문화, 영국 국민성 등을 보여주는 영국 소설이라고 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은 57, 58쪽에 스티븐슨이 품위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을 보면서부터였다.
품위를 인간이 끝까지 지켜나가고 잃지 않아야할 최고 덕목으로 보는 것,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는 일보다 집사일을 우선 완수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 대답을 피하지 않으며서 구차한 설명을 피하는 응답 방식, 상대방의 반응이 예측된 농담 하기. 작가는 다양한 묘사를 통해 스티븐슨이라는 사람을 일관성 있는 모습으로 설명하고 있다.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달링턴 홀의 총무로 있던 켄턴양과의 관계에서이다. 사실 스티븐슨의 여행의 시작과 마지막이 이 켄턴양과의 만남과 관련있고, 마침내 그녀가 있는 곳을 찾아가 만나서 그동안 쌓인 얘기를 나누면서 스티븐슨은 자신의 그동안 삶이 어떠했는지 깨달아가게 된다.
마지막 여정이 된 웨이머스에서 우연히 만난 어떤 사람으로부터 하루중 가장 좋은 시간, 기다려지는 시간은 저녁이라는 말을 듣고 자기 인생의 저녁을 그렇게 볼수 있을까 생각하는 스티븐슨. 그리고 독자들.
바로 이어지는 작품 해설에서 김남주 번역가는 저녁은 하루의 끝이 아니라는 말로 스티븐슨의 달라질 삶을 기대한다고 했지만 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럴 것 같지 않은 것이, 이 소설의 마지막 두줄때문이었다.
그는 그 대단한 품위를 지켜내느라 무엇인가를 놓치고 살았다. 품위보다 더 중요할지 모를 무엇을.
품위란 어쩌면 소설 속 스티븐슨에게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문장들에서 어떤 격이 느껴진다. 그것이 작가가 한문장 한문장 공들여 쓴 결과인지, 그의 성품인지 모르겠는데 크게 사건을 벌이지 않으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할말을 분명히 전달하려면 중요한 얘기만 가려내야하고 군더더기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럴려면 깊게 생각하고 많이 걸러내고 고쳐야하지 않을까?
매력있는 작가, 매력있는 작품이다.